이런 측면에서 보면, 미투 운동의 넓은 폭과 다양성은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점이다. 결국 삶의 유형이나 배경과 관계없이 수많은 여성이 남성들로부터 동일한 성차별적 행동을 경험했다면, 그 문제는 개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며, 오히려 더욱 넓은 문화적 조건들과 관계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성희롱이 만연하다는 것은 그 문제가 그저 한 명의 개인이 올바른 선택을 한다거나 확고한 의지로 자신을 단련한다고 해서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들에게 그런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불합리해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그것을 “개인주의적 페미니즘”과 “사회적 페미니즘” 사이의 갈등이라고 표현하겠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균열은 페미니즘 운동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힘을 키울 것인지, 아니면 집단적인 해방을 추구할 것인지에 대한 차이이다. 그러나 두 부류의 생각 사이에는 도덕적으로 훨씬 더 큰 차이가 있는데, 그 이유는 미투 운동 진영과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성적 학대의 책임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쪽은 사회에서 직면하는 여성 혐오를 견디고 극복하는 것이 여성 개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쪽은 성차별을 없애는 것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애초에 여성들이 그러한 상황을 마주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주의적 페미니즘과 사회적 페미니즘 사이의 긴장은, 20세기 중반 이후에 페미니즘이 부활한 이후로 여성주의 운동 진영을 계속해서 따라다닌 사안이다. 페미니즘의 개인주의적 모델에 의하면, 개인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심리적 적응(psychological adjustment)[2] 물리적인 여건과 사회적인 환경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조화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여성에게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남성들과 평등해질 수 있는 유의미한 경로를 제공한다. 서구의 가장 유명한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전통에서 흐름을 이어왔다.
예를 들어서, 1960년대에 출간되어 거대한 영향을 준 《여성성의 신화(The Feminine Mystique)》의 저자인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은 성차별적인 문화 코드가 여성들이 개인적인 행복을 성취하는 걸 방해한다고 주장했다. 심리학을 전공한 프리던은 20세기 중반 미국의 백인 중산층 여성들 내면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보다 최근으로 와서, 개인주의적인 페미니즘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COO)이며 2013년에 일종의 회고록이자 선언서이기도 한 《린 인(Lean In)》을 출간한 셰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가 있다. 샌드버그는 사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여성들이 없는 것을 한탄한다. 그녀의 책은 기업에서 높은 위치에 오르고자 하는 야망이 있는 여성들을 위한 일종의 안내서이기도 하다.
사회적 페미니즘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프리단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직후, 레오폴디나 포르투나티(Leopoldina Fortunati),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와 같은 이탈리아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마주하는 문제를 바라보는 다른 방식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그들은 계급으로서의 남성들이 계급으로서의 여성들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분석하고자 했다. 그들은 개인의 역량이나 자아실현이라는 아이디어보다는, 노동, 생활 조건, 돈의 관점에서 여성들을 파악하는데 더욱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바닥을 닦는 일에서부터 상처에 붕대를 감는 작업, 모유 수유, 요리, 성매매, 빨래, 노인 돌보기에 이르기까지, 소위 말하는 “여성들의 일”이 단지 하나의 일거리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임금-노동 체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만약 남성들이 가정에서 스스로 이러한 기능들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일터에 돌아가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터에서 남성들이 하는 일은 가정에서 여성들이 하는 일에 의존하고 있었다.
1972년에 페데리치가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Wages for Housework)’ 캠페인을 시작했을 때, 이는 대중적으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벌어졌고, 페데리치가 뉴욕으로 이주하여 브루클린에서 이 캠페인을 위한 사무실을 개소한 이후에는 미국에서도 논쟁이 일어났다. 주류 정치권은 페데리치의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정말로 여성들이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의 바닥을 닦는 것에 대해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런데 이 운동은 임금이라는 것이 노동을 노동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필수적인 요소라는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임금은 노동을 수행한 사람들이 존엄하며 그들이 보호받을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수단이었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요구라기보다는 좀 더 수사적인 장치에 가까웠다.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의 요구는 여성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노동자 계급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었다. 따라서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성들도 공통된 이해관계를 대변하여 조직적으로 행동에 나설 수 있는 집단이었다.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운동은 흐지부지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인종 평등, 동성애자 권리, 주거권, 성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캠페인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캠페인의 이면에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 만연하고, 심지어 그것이 서로 매우 다른 환경에서 생활하는 여성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며, 그래서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서는 정치적인 현상이라는 인식이 존재했다. 성차별은 수많은 사람을 쓰러뜨린다. 바로 그렇기에 서로를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여성들의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젠더에 의한 억압을 경험한 사람들도 그것을 끝내기 위해 서로 뭉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