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트롤킹
완결

중국의 트롤킹

전 세계를 향한 막말의 대가 혹은 가장 뛰어난 선동가. 중국 민족주의의 대변인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1월 2일, 중국의 테니스 스타 펑솨이가 소셜 미디어 웨이보에 긴 글을 올렸다. 중국의 전 국무원 부총리 장가오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즉시 중국 내 최고위급 인사가 연루된 미투 사례가 되었고, 중국 공산당 홍보에 있어 근래 역사상 최대 위기로 인식되었다. 20분도 안 돼 글은 삭제되었다. 해당 게시물을 언급한 글 역시 중국 인터넷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중국 매체 어디에서도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펑솨이는 추가 발언을 내놓지 않았고 공개석상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해외에서 여러 테니스 스타들이 그녀의 안전에 관한 우려를 공개적으로 표명함에 따라 펑솨이 실종설은 국제적으로 큰 이슈로 떠올랐다.

곧바로 후시진이 등장했다. 후시진은 강성 민족주의 성향 때문에 중국판 폭스 뉴스(Fox News)로 불리는 타블로이드 일간지 《환구시보》의 총편집인이다. 최근 몇 년 사이 그는 서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중국인 선전 선동가가 되었다. 주제를 가리지 않고 트위터와 세계 언론에 어김없이 등장해 중국 공산당을 방어해왔다. 45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그는 펑솨이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정보원으로부터 확인했다고 11월 19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전했다. 정보원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 후 펑솨이가 베이징의 한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과 테니스공에 사인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이틀에 걸쳐 게재했다.

이 동영상들은 중국 관영 매체를 통해 유포되었지만, 사람들은 조작의 가능성을 의심했다. 11월 21일,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는 펑솨이와 영상 통화를 하고 나서 그녀가 “잘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IOC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펑솨이의 안전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데 실패하자, 후시진은 이를 30년 언론인 경력 내내 자신의 중심 주제였던 것을 강조하는 기회로 삼았다. 즉, 중국에 관해서라면, 서구 언론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것이다. “그들은 중국에 관해서는 자신들이 상상하는 이야기만 믿는다.” 트위터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최근 이틀에 걸쳐 등장한 여성이 펑솨이를 닮은 가짜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사람들이 펑솨이의 안전을 계속 의심하는 이유는 “중국의 체제를 악마화”하려는 것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성적 학대와 검열의 이야기를 정치적 이념의 충돌이나 반중 정서에 기댄 편견의 이야기로 프레임 전환하려는 후시진의 열망은 중국이 국제 사회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에 중대한 변화가 있음을 보여준다. 1970년대 후반 이후로 문을 활짝 열기는 했지만, 아직 국제 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떠맡지는 않은 상황에서 외부 세계가 던지는 비판을 처리하느라 중국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공식적인 대응은 분개한 심정을 담은 부정이거나, 중국 문제에 외국은 관여하지 말라는 식의 경직된 요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시진핑 주석은 중국이 보다 자신 있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후시진은 어느 중국 언론인보다도 더 호전적인 민족주의의 대변인이 되었다. 《환구시보》는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인 위챗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매체라고 한다.

“나는 독학으로 영어를 배웠다.” 웨이보에 올린 동영상에서 후시진은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영어로 싸움 거는 것을 제일 잘한다.” 그는 대만을 두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 군사적 대립이 일어날 가능성을 과대 선전했다. 만약 영국이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침해한다면 “매 맞기를 애걸하는 창녀”로 대우해 주겠다고 경고했다. 인도는 중국 기업을 야만적으로 강탈한 강도나 다름없다고 했다. 호주를 “중국의 신발 바닥에 붙은 껌”에 불과하다고 칭하기도 했다. 최근에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기사를 마무리했다. “저렇게 비이성적인 호주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필요하다면 강철 주먹으로 내리쳐 철저한 교훈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트위터에서 외국 관리들에게 싸움을 걸 때면, 후시진은 화면을 캡처해서 웨이보에 올린다. 자신이 중국의 명예를 지키려고 그처럼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240만 팔로워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만리방화벽에 막혀 트위터에 접근할 수 없다. “후시진에 관해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권위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수사법을 온전히 구축했다는 것이다.” 버클리정보학교의 중국 매체 전문가인 샤오창은 말했다. “그의 독자들은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면서 동일한 정서를 확산시킨다.” 후시진의 호전적인 접근법을 다수의 중국 외교관과 대변인이 이어받았다. 이들은 중국의 애국주의 액션 영화 제목을 따라 흔히 ‘늑대전사’라고 불리는데, 중국 우선주의(China first) 사상을 홍보하는 한편, 소셜 미디어를 이용해 중국의 국익에 반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을 비방하기도 한다. “늑대전사 외교관은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지만, 후시진 같은 사람들은 이미 10년 동안 이러한 생각을 전파해 왔다”고 제네바 국제개발대학원의 국제정치학 교수인 샹란신은 말한다.

후시진이 줄줄이 쏟아 내는 인신공격성 발언과 독설은 단조로운 공식 발언의 홍수 속에서, 그리고 “정당 담론을 펼치기 위해 새로운 플랫폼을 차지해야한다”는 요구가 빗발치는 상황에서 단연 눈길을 끈다. 그의 이름을 일단 접하고 나면, 그의 발언이 BBC, NPR, 《파이낸셜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모든 매체에서 인용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지난 2년 동안 《뉴욕타임스》는 46차례나 그를 언급했다. “시진핑 정부 아래에서, 진보적 평론가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외국 언론과 보도를 전제로 접촉하는 것을 꺼리지만, 후시진은 자신의 발언이 인용되는 것을 환영한다.” 2008년부터 《뉴요커》에 중국 관련 기고를 하고 있는 에반 오스노스의 말이다. 후시진은 이제 본인의 이름만으로도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인물이 되었다. “일상처럼 호주를 조롱하는 중국 관영 신문의 편집장이 호주 대사관에서 오찬을 즐겼다.” 《데일리 메일 호주》의 작년 보도이다.

그가 도처에 등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정치 문제에 대해 직설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유례없는 권리가 그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있다. 중국 내 후시진 비판 세력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언론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라고 그를 표현한다. 그가 누리는 자유는 중국 공산당 노선에 충실한 그의 노력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이기는 하다. 모든 일과성 논란에 고집스럽게 얼굴을 내민 덕분에 그는 ‘프리스비 캐처’라는 별명을 얻었다. 충성스러운 애완견처럼 모든 논란을 자신이 봉사하는 정부 편에서 전달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수년에 걸쳐 후시진은 공산당 지도부와의 관계를 둘러싸고 무언가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해 왔다. “솔직히, 정부의 목소리를 어느 선까지 반영할 것인지 나 스스로도 확신이 없다.” 작년 말 통화에서 후시진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환구시보》의 성공이 시장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환구시보》가 정부로부터 독립된 재정을 운영하는지 묻자 실랑이 끝에 결국 해외 선전 역할을 하는 영어판 제작에 대해서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과거에는 후시진이 공산당 내 강경 비주류를 대변했지만, 지금은 《환구시보》의 공격적인 중국 우선주의가 우세하다. 2011년 《환구시보》에 글쓰기를 그만둔 한 미국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늑대전사로 나선 외교관들을 보니, 중국 정부가 《환구시보》화한 것 같다.”

2016년에 시 주석은 베이징에 있는 《인민일보》 본사를 방문했다. 《인민일보》는 공산당이 운영하는 중국 최대의 언론사로, 후시진이 소속된 《환구시보》를 발행하는 곳이다. 전시관을 지나던 시 주석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전시된 《환구시보》를 가리키며 자신도 독자라고 밝혔다. 시 주석이 취임 초반에 설계한 홍보 전략을 후시진이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21세기 중국의 언론 자유에 관한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는 왜 후시진이라는 인물이 부상하게 되었는지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21세기 초반 10년 동안에 수억 명의 중국인이 인터넷에 연결되면서 목소리가 커졌다. 2008년을 기점으로, 《인민일보》는 온라인 여론 감시팀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감시팀이 초기에 내놓은 연간 보고서를 보면, 새로운 디지털 플랫폼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중국 정부와 국민을 더욱 밀착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2010년의 보고서는 웨이보를 비롯한 온라인 커뮤니티가 “국민들이 참여해 정치를 논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라고 적었다. 이 기간에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간단하게나마 다룰 수 있는 정도의 자유가 언론인에게 있었다. 1989년의 천안문 사건이나 최고위층의 처세 같은 특정 주제는 여전히 불가침 영역으로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공공 담론에 대해 조금은 유연했던 태도가 2010년대 초반, 특히 2012년 시진핑의 등장과 함께 점차 후퇴하게 된다. “주석으로 취임했던 2013년, 시진핑은 인터넷에서 오가는 발언에 관심이 없었다.” 버클리대학의 교수인 샤오는 말했다. “오히려 그는 그런 목소리를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강력하게 단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웨이보 같은 소셜 미디어에 올라오는 게시물에 대해 감시와 검열이 강화되었다. 인터넷 사용자들이 ‘다과회 초대장’을 받는 일이 흔해졌다. 지역 파출소를 방문해 온라인 활동에 대한 질문에 답하라는 지시 전화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2013년부터는 온라인 플랫폼 이용을 중지 혹은 금지당하거나, 구금 혹은 수감되는 중국인 숫자가 늘어났다. 언론 보도와 재판 기록에 의하면, 온라인에서 행한 발언 때문에 처벌받거나 기소당한 사례가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에만 2013년 이후 2000건이 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실제 사례는 훨씬 많을 것이다.
2016년 베이징에 있는 《인민일보》 사무실을 방문한 시진핑 주석
2013년, 공산당이 공공 담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던 시점에 시 주석은 전국의 홍보 담당자 회의를 소집하고 그들에게 “중국의 이야기를 잘 전달하라”고 촉구했다. 긍정적이고 매력 넘치며 유용한 새로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중국을 알리라는 의미였다. 중국의 불완전성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성취를 당당하게 찬양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후시진은 당의 노선에 복종적이면서, 국제 사회를 향해 열려 있는 온라인 중심의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적응했다. 기사, 소셜 미디어 발언, 인터뷰 등을 통해 그는 두 가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나는 공산당 편에 서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피고 측 변호사 역할이다. 얼마나 설득력 없는 이야기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억울한 피고인의 친척 역할이다. 검찰과 재판부가 편견에 휘둘린다거나 부패했다거나 어리석다거나, 혹은 세 가지 다라고 법정에서 소리치는 역할 말이다. 그것은 중국 공산당의 새로운 자아상뿐만 아니라 중국의 소셜 미디어 성향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방식이었다. 다른 공산당 매체도 더 구어체에 가까운 기사를 작성하는 등 후시진의 방식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인민일보》조차 보다 재미있는 글을 쓰고,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을 개발하라고 평론가들에게 권장했다. 

시 주석은 2019년에 《인민일보》를 다시 방문했다. 언론 종사자들은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고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그리고 “당의 목소리를 다양한 앱을 통해 직접 전달하고 당의 담론을 펼칠 새로운 플랫폼을 점유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시 주석이 사무실을 둘러보는 동안 《인민일보》 편집부 직원들은 줄지어 서서 박수를 쳤다. 어두운 회색 재킷을 입은 후시진이 입이 귀에 걸리게 웃으며 그들 사이에 서 있었다.

후시진이 중국 언론에서 차지하는 놀라운 위상을 천안문 사건만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건 없다. 언론인이라면 무언가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자신이 현장에 있었노라고 독자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하기 마련이다. 후시진도 천안문 얘기가 나오면 똑같이 말한다. 단지 천안문 사건의 신빙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이 역사적 사건 속에 자신을 끼워 넣는다. 중국에서 천안문 사건을 언급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환구시보》가 아마도 유일한 예외일 것이다. 천안문을 소재로 글을 쓸 때 후시진은 그 사태를 아주 위험천만하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묘사한다. 올해 6월 그는 이렇게 썼다. “32년 전의 그 사건에서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효과를 찾자면, 중국인들이 정치적 백신을 맞은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이 심각하게 호도되는 일이 없도록 면역이 생기게 해주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시작되었을 당시 후시진은 29살이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인이라는 것만 빼면 전통적인 집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로켓을 제조하는 공장에서 회계사로 일했고, 문맹이었던 어머니는 얼마간의 가욋돈을 벌기 위해 재봉틀로 자수를 했다. 18살에 후시진은 인민 해방군이 되어 난징에 있는 인민 해방군 외국어학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했다. 아직 군인 신분이던 1986년, 그는 베이징외국어대학에서 러시아어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1989년 봄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졌을 때, 후시진은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있었다. “누구나처럼 나는 매일 구호를 외치며 천안문 광장으로 갔다.” 후시진이 2011년 기자에게 한 말이다. 버클리대학의 교수인 샤오는 1989년에 노트르담대학의 학생이었는데, 뉴스에서 천안문 사건을 접하고 즉시 베이징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후시진이 시위에 참여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에 웃음을 터뜨렸다. 후시진이 다녔던 군사 학교는 중국 스파이의 산실(China’s cradle of 007s)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정말로 시위에 참여했다면, 그의 역할이 무엇이었을지는 신께서 아실 것이다.”라고 샤오는 말했다.

천안문 사건이 폭력적으로 진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시진은 《인민일보》에 들어갔다. 조사원으로 2년을 보낸 후 다시 2년간 야간 편집자로 재직했다. 당시 중국은 덩샤오핑이 시장 경제로의 전환을 밀어붙인 지 10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인민일보》에서 몇몇 기자들이 《환구문췌》라는 주간지를 창간해 새로운 수입원을 창출하고자 했는데 후시진도 그중 한 명이었다.

1993년 1월 3일에 창간호 2만 부가 가판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창간호에는 다이애나 비와 찰스 왕세자의 별거 소식도 담겨 있었다. 1면에는 편집인들 명의로 거창한 성명이 실렸다. 서구에 500년이 뒤졌으나, 경제 개혁 이후 14년 만에 중국은 “날아오르는 거대한 용처럼 세상의 동쪽에 당당히 서서 고개를 높이 쳐든 채 가난과 후진성에 작별을 고하고 있다.” 이렇게 거만하게 미사여구를 늘어놓긴 했지만, 사실 초기에는 명확한 비전이 없었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즐겨 읽는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게재했다.” 그가 내게 했던 말이다.

주간지는 스파이, 왕족의 연애담, 역사상의 암살 사건, 그리고 야생 동물과 함께 키우는 아이들에 관한 색다른 이야기로 채워졌다. 당시 대부분의 주류 매체는 선전지의 성격이 강해서 공산당 특유의 용어와 당 지도부의 끊임없는 회의 소식으로 가득했다. 일상의 언어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루는 주간지의 등장은 마치 긴 설교 사이에 끼어든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1990년대부터 작성된 기사에는 〈러시아 마피아의 암흑세계〉, 〈여성 노예에서 패션모델로〉, 〈승려들의 돌연한 광기: 한국 승려들의 경쟁심이 사원을 피로 적시다〉 등이 포함되어 있다.
1999년 베이징에서 벌어진 반미 시위
《환구문췌》에서 일을 시작하고 몇 달 만에 보스니아 내전을 취재하는 《인민일보》 특파원으로 파견되면서 후시진의 경력은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는 1997년에 발간한 회고록에 당시의 경험을 담았다. 중국 언론인이 외국의 전쟁을 보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이 전송할 어떤 기사보다 뉴스 가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후시진은 보스니아 분쟁을 자신이 벌이는 사적인 전쟁의 배경으로 여겼다. 주변의 서구 언론인에 대해 존경과 원망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던 그는 그들과 견주며 자신의 가치를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현대의 뉴스 전쟁에 임하는 병사가 되고 보니, 내가 서구의 기자들을 이길 수는 없겠지만 그들과의 전쟁에 참전이라도 할 수 있음을 자축한다”라고 그는 회고록에 적었다. 거의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는 사라예보 거리의 연석에 앉아 메모하는 자신의 모습을 트위터 프로필 사진으로 쓰고 있다.

후시진은 스스로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의 회고록에는 자부심과 정서적 취약성이 뒤섞인 채 흩뿌려져 있다. “왜 내가 돌풍의 주역이 되면 안 되는가? 왜 중국 기자는 각광을 받으면 안 되는가?” 어느 시점 그는 이렇게 묻는다. 보도에 집중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진짜 기자처럼 보일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시간을 보냈다고 그는 인정한다. “무시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도 그랬지만, 중국인으로서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이 나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압박으로 작용했다.” 이런 감정이 어디에서든 그의 태도에서 배어났다. 언젠가 그가 알바니아어로 진행된 뉴스 브리핑에 참석한 적이 있다.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영어로 질문을 했다. 대답을 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외치려는 것이었다.
 
1996년에 그는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곧이어 《환구문췌》의 부편집장이 되었다. “나는 전쟁 및 국제 문제 기자였다. 나의 개인적인 관심이 우리 신문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그가 말했다. 1997년, 《환구문췌》는 《환구시보》로 이름을 변경했다. 이후 2년 만에 판매 부수가 세 배로 늘었다. “중국은 세계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후시진은 말했다. “과거에는 국제 뉴스가 세상 어느 외딴곳에서 들려오는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에 불과했다. 국제 뉴스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늘어났고, 더불어 중국 독자들도 국외의 상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국제적인 사건 하나가 이 시기의 새로운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1999년 5월 7일, 나토군이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 대사관을 폭격해 세 명의 중국 언론인이 사망했다. 미국 당국자는 그것이 오폭 사고였으며 실제 목표는 수백 미터 떨어져 있는 유고슬라비아 방위군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많은 중국인은 그것이 계산된 공격이었다고 믿었고, 반미 시위가 전국적으로 터져 나왔다. 폭격 이틀 후에 《환구시보》는 특별 호를 제작하고, 폭격 몇 분 전에 그 건물에서 중국 대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환구시보》 기자의 보도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조지아대학의 국제 문제 교수인 한롱빈에 따르면, 대사관 폭격과 같은 사건이 국민 정서에 영향을 미쳐 억울한 피해자라는 인식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미국이라고 말하곤 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환구시보》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중국의 최고위 정치인들은 찬양하는 눈길로 지켜보았다. 2004년, ‘테러와의 전쟁’에 대해 미국 언론의 논조를 생각 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중국 언론인을 비판하는 칼럼이 《환구시보》에 실렸다. 그러자 리자오싱 외교부장은 오랫동안 그런 기사를 고대해왔다고 말했다. “언론에는 국경이 없을 수 있겠지만, 언론인에게는 당연히 모국이 있다.” 칼럼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자오싱은 《환구시보》에 이런 글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같은 해에, 《인민일보》의 왕천 사장은 이른바 ‘《환구시보》 현상’을 논하는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외교부장과 해외 선전 부서장이 《환구시보》를 너무나 사랑한다고 자신에게 거듭 강조했다고 전했다. 어떻게 하면 선전도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지를 《환구시보》가 잘 보여 주고 있다고도 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환구시보》는 광고주 대상 설명회를 하면서 고위 지도자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자랑스럽게 내세우곤 했다. “거의 200명에 가까운 중앙당, 국무원, 중앙 군사 위원회, 전국 인민 대표 대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독자라고 주장했다. 신문이 발행되면 곧바로 공산당 주요 인사들의 사무실과 집단 거주지가 있는 중난하이로 배달된다고 했다.

2005년 총편집인으로 취임한 이후 후시진은 《환구시보》를 중국어와 영어로 일주일에 6일 발행하는 직원 800명 규모의 일간지로 키웠다. “우리의 영향력을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영어를 쓰지 않고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2009년에 영문판을 창간하게 된 이유를 후시진은 이렇게 설명했다.

돌이켜 보면, 영문판을 발행하고 초기 몇 년간은 《환구시보》의 역사에 있어 기이한 막간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문판 《환구시보》는 《인민일보》 사옥이 아닌 외부의 건물을 임대하여 사용했으며 중국어판과는 별도로 운영되었다. 강경한 국수주의 노선을 따르기보다는, 보다 민감한 주제를 다룰 수 있는 자유를 어느 정도 기자들에게 허용했다. 영문판 창간을 맞아 《환구시보》는 12명의 외국인 편집자를 고용했다. 그들의 임무는 영어로 작성된 기사가 부드럽게 읽히도록 만드는 것일 뿐 편집상의 발언권은 거의 없었다. 영문판 기사의 내용은 거의 중국인 기자가 작성했다. 《환구시보》 영문판인 《글로벌타임스》에서 7년간 근무했으며 현재는 미국의 격월간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의 부편집장으로 재직 중인 제임스 파머가 과거 내게 들려준 바에 따르면, 영어 기사의 60퍼센트는 “시시”했고, 20퍼센트는 “광적인 민족주의 내용”이었으며, 나머지 20퍼센트는 “순수하게 재미” 있었다는 것이다.

반체제 인사나 LGBTQ의 인권 문제를 다룸으로써 후시진은 자신의 신문을 중국에서 발행되는 또 하나의 영자 신문인 《차이나데일리》와 차별화했다. “《글로벌타임스》는 파란을 일으키고자 했다.” 전 편집자였던 영국인 저마이머 스타인펠트는 말했다. 이 시기에 일했던 기자들은 후시진이 진보를 이끄는 세력으로 스스로를 포장하고 싶어 했다고 기억했다. 모든 개혁은 규칙을 파괴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2013년 중국 잡지와 가진 한 인터뷰에서 후시진은 말했다. 그는 “나름의 방식으로 규칙을 파괴하는 것이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결국 정부는 그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중국의 진보가 작동하는 방식이다.”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 다음날인 2021년 1월 21일 베이징 거리에 보이는 《환구시보》
영문판 기자였던 웬타오에 따르면 후시진은 직원들에게 자기 검열을 피하고 뉴스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뭐든 밀고 나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2만 그루의 나무를 베려는 지방 정부를 비판하는 시인, 가짜 분유를 먹고 자녀들이 병에 걸린 후 식품 안전을 주장하다가 재판에 회부되고 만 아버지 등 웬타오의 기사에는 10년 전 베이징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일상의 분투가 담겨 있다. 2010년 2월, 웬타오는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를 비롯한 일군의 현지 예술가들이 주거용 건물 파괴에 항의하며 베이징 시내에서 벌인 시위에 대해 다루었다. 기사가 나간 후, 아이웨이웨이는 영문판 기자실을 방문했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환구시보》의 영문판과 중국어판은 눈에 띄게 분화되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중국을 묘사했다.”고 웬타오는 2016년 자신의 블로그에 적었다. 중국어판이 국제 사회의 목소리를 악마화했던 반면, 영문판은 중국도 언론의 자유를 누린다는 사실을 외부 세계에 과시하려는 의도로 ‘어느 정도의 현실’을 보도했다. 웬다오는 “필자 이름이나 신문 제호만 아니면 《월스트리트저널》 기사라고 생각할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그런 상황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아이웨이웨이 기사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웬타오는 사직서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신문사는 경계를 허물겠다고 했지만 아마도 내가 도를 넘었던 모양이다.” 웬타오는 내게 말했다. 그 무렵 엘리베이터에서 후시진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웬타오는 그 선배 기자가 불만을 표하던 모습을 기억했다. 기사를 쓸 때는 그런 기사가 더 많이 나오기를 바라면서 쓰지만, 결국 한 발짝 물러서라는 소리나 들을 뿐이라고. 《환구시보》에는 “6개월마다 한 번씩 ‘심각한 실수’를 부르는 문화가 있었다.”고 파머는 말했다. 그리고 후시진은 매우 정기적으로 선전부를 포함한 여러 기관에 불려가 야단을 맞았다.

후시진에게 언론인으로서의 이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이끈 영문판 《환구시보》에 그의 이상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 혹은 웬타오의 말처럼 기자들에게 자유를 허용한 것이 중국 언론이 누리는 자유를 실제보다 과장해 외국인에게 보여 주려는 일종의 선전 행위였는지, 더불어 후시진 본인이 진정한 기자라는 사실을 과시하려는 것이었는지 딱 잘라 얘기하기는 어렵다. 최소한 이 시기에 후시진은 영문판 《환구시보》를 통해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편집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머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후시진이 먼저 꺼냈던 말을 기억했다. 중국에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가 오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그러한 개혁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웬타오가 봤을 때 후시진은 심각한 갈등에 빠진 인물이었다. “한편으로는 전문 언론인이 되고자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열성 당원으로서의 입장을 버리지 못했다.”

2011년에 이르러 정부가 언론 자유에 대해 강경한 노선을 취하자 《환구시보》의 편집 노선도 그에 따라 강경해졌다. 그해에 당국은 아이웨이웨이를 81일간 구금했고, 《환구시보》는 영문판과 중국어판 사설을 통해 그를 비난했다. “아이웨이웨이 부류는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라고 헤드라인을 내걸기도 했다. 파머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논조의 변화였다”며 “이후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고 기억했다. 《환구시보》에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이 미국인 작가는 말했다. “순전히 자극적이고 사람들의 화를 돋우는 방향으로 사업 모델을 전환한 것 같다.” 전 편집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때때로 기사가 지나치게 선동적이고 충격적인 경우, “위험신호를 보냈지만 그들은 ‘바로 그것이 우리가 쓰려는 기사’라는 태도를 보이곤 했다.”

후시진은 여러 대의 본인 휴대 전화 소리를 배경 삼아 내게 말했다. 편집장이 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관리에 힘을 쏟는다. 하지만 나는 내용에 더 집중한다.” 통화할 때 후시진은 온라인에서 보여 주는 공격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예의 바르고 따뜻했다. 대부분 질문에 한참 뜸을 들인 후 대답하곤 했다. 마치 마음속에서 짧은 에세이를 작성하는 것 같았다. 후시진은 내게 다음과 같이 설명해 줬다. 매일 편집부원들이 인기 있는 주제를 찾아 인터넷을 ‘모니터’한다. 그러다가 감이 오면 사안을 요약해서 자신에게 보고한다. 그러면 자신은 보고 내용을 가지고 칼럼을 작성한다. 기자들은 기사 한 꼭지 당 두세 명의 전문가와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정부의 싱크탱크 연구원이나 명문대 교수가 대부분이다. 덕분에 칼럼에 “내 의견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회 구성원의 의견이 녹아든다. 우리는 중국 주류의 의견을 대변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대안적인 시각에 대한 허용치가 줄어들면서 14억 중국 인구 중 어느 정도가 《환구시보》의 세계관을 공유하는지 판단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학자, 언론인, 작가, 변호사, 그리고 활동가들의 소셜 미디어 계정이 플랫폼이 정한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중지되거나 삭제되었다. 어떤 규정을 어겼는지 명시하지도 않았다. 이런 경우는 흔하기도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기 때문에 국제 사회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일이 쌓이면 숨통을 조이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오늘날 중국 본토에서 검열과 자기 검열은 날씨 같은 것이 되었다. 투덜댈 수는 있지만 결국은 적응해야 한다. 저항하려면 삶이 망가질 가능성까지 감수해야 한다. 작년 초 36세의 여성 장잔은 시민 기자 자격으로 우한에서 보도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녀는 금방 체포되어 4년 형을 선고받았다. 수 개월간 단식 투쟁을 벌였던 그녀는 현재 위독한 상태다. 대부분 중국인들은 장잔에 대해 모르고 있으며, 안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주장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면 골치 아픈 문제에 말려들 뿐이니까.

그렇다고 후시진처럼 당이 인정하는 인물이라고 해서 중국 내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후시진을 비판하는 사람 중에는 이전에 《환구시보》에 협조하던 이들도 있다. 그들은 2010년 이후 후시진이 점점 더 터무니없고 위험한 인물로 스스로를 희화화했다고 생각한다. “눈치챘겠지만 이제 나는 《환구시보》에 거의 글을 쓰지 않는다. 《환구시보》가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푸단대학의 국제관계학 교수 션딩리는 내게 보낸 이메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환구시보》가 자문하는 전문가 중 한 명이다. 국외에 거주하는 샹란신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점점 거칠어지는 후시진의 정치에 염증을 느꼈다는 것이다. 과거 그는 《환구시보》에 빈번히 기고했지만, 2010년대 초반 후시진이 “의미 있는 토론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그만두었다고 한다. 

후시진 비판자들은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려는 그의 태도에서 위험을 감지했다. 최근 히말라야의 국경 지대에서 인도와 충돌이 있었을 때 후시진은 중국 군대가 “언제라도 전투에 나설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칼럼에서는 중국이 1000개의 핵탄두를 비축해야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9월에 《환구시보》는 “인민 해방군의 제트기가 결국에는 대만 상공을 날게 될 것이다”라는 표제 하에 사설을 게재했다. 전쟁을 도발한다는 비판에 대해 질문하자 후시진은 중국이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한 적 없다고 흥분해서 말했다. “내 말은 만약 대만이 선제공격할 경우, 그때는 우리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응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행동이 그의 관점에서 ‘공격’으로 간주되는지 궁금해한다.

샹이 생각하기에 후시진의 영향력은 1면을 장식하는 ‘늑대전사’ 외교관의 영향력보다 훨씬 중요하다. 외교관들은 상부의 지시 한마디면 침묵하게 할 수 있지만, 《환구시보》가 매일같이 부추기는 중국인의 우월감은 통제하기가 어렵다. “이 신문은 오랫동안 대중의 정서를 민족주의 방향으로 이끌어왔다. 그 결과는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다.” 작년에 가진 인터뷰에서 샹은 이렇게 말했다.

때때로 후시진은 자신이 일익을 담당해 건설한 영역에서 이방인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5월 중앙 정법 위원회의 웨이보 계정에 “중국식 점화 vs 인도식 점화”라는 문구와 함께 중국에서 로켓이 발사되는 장면과 인도에서 시신을 화장하는 장면을 비교하는 사진이 올라왔다. 코로나19로 사망자가 치솟는 인도 상황을 조롱한 것이었다. 후시진이 그 게시물을 비판하면서 인도의 곤경에 동정심을 표하자, 중국의 주요 경쟁국에 대해서 지나치게 유화적이라며 민족주의자들이 그를 공격했다. 10년 전 후시진은 소셜 미디어에서 중국 민족주의의 1등 기수로 여겨졌다. 이제 그의 지위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민족적 자긍심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후시진이 웨이보에서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을 때 《환구시보》의 기자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후시진이 변한 것인가? 아니면 시대가 변한 것인가?” 대답은 명백해 보인다.

후시진은 61세이다. 그의 은퇴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주기적으로 떠돈다. 하지만 그는 30년 전에 그랬듯이 여전히 열성적이고 투지가 넘친다. “그가 《환구시보》의 진정한 정신이다.” 웬타오가 말했다. “후시진의 영향을 지운 《환구시보》는 상상하기 어렵다.” 보스니아에 파견된 젊은 기자 시절, 그는 무비판적으로 서구 언론을 동경하는 게 아니라 모국인 중국의 언론을 응원하는 독자를 꿈꿨고, 그의 꿈은 실현되었다. 웨이보에 그가 게시물을 올릴 때마다 수천 개의 댓글과 수만 개의 ‘좋아요’가 달린다.

후시진은 자신을 수변자(戍邊者), 즉 국경에 배치되어 안전을 지키는 경비대라고 즐겨 칭한다. 대만 총통 차이잉원을 모독하고, 홍콩 활동가 네이선로를 1월 6일 의사당 난동자에 빗대고, 호주 총리를 조롱하고, 플로리다 상원의원과 언쟁을 벌이고, 미국의 위선을 강조하는 만화를 수없이 게재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끝없는 과제이다. 후시진의 싸움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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