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의 기술
완결

우리가 간과한 회복의 기술에 대하여

코로나19 상황에서 공중보건의 3년 차를 맞는 저자는 질병마다 환자마다 회복의 과정이 다르다는 사실을 어느 때보다 확실히 깨닫고 있다.

©Getty Images/Science Photo Library RF
지난 2년 동안 나는 공중보건의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생긴 두려움, 발열, 호흡곤란을 진단하고 치료하면서 보냈다. 또한, 회복과 그 과정에 대해서도 어느 때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 사람들과 얘기했다. 바이러스 감염뿐 아니라 반복되는 봉쇄령이 불러온 피해에도 해당하는 얘기였다. 나는 에딘버러 도심에서 근무하는 공중보건의다. 세 명의 동료 의사, 두 명의 간호사와 함께 4000여 명의 환자에게 의료를 제공하고 있다.

‘회복’과 ‘회복의 과정’은 의대 6년과 전문의 수련 과정 7년 동안 거의 들은 적이 없는 단어이다. 지도교수 대부분은 질병이 위험한 단계를 일단 넘어서면 몸과 마음이 알아서 치유의 길을 찾아간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진실은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20년 가까이 공중보건의로 생활하며 거듭 확인했다. 회복의 과정에서 지도와 격려는 반드시 필요하다.

내가 받은 수련 과정에서는 신체에 대한 서구식 의료 접근법을 당연시했다. 하지만 질병은 단순히 생물학의 문제만이 아니라 신념, 심리학, 그리고 사회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병에 걸리는 방식은 질병 자체만큼이나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몸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기대는 우리가 병에 걸리는 방식, 그리고 회복하는 방식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나는 환자들한테 가장 큰 도움을 준 간호사,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 등 임상의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으며, 아직도 배울 것이 얼마나 많은지 끊임없이 상기하고 있다.

21세기 유럽 공중보건의라는 내가 속한 특정한 의료 전통 속에서 회복과 그 과정에 대해 논의를 할 때가 되었다. 신체와 질병에 대한 대안적 접근법의 가치와 장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논의는 대안적 치료법을 훈련받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2019년 12월 31일, 중국 정부는 우한 지역 주민을 감염시킨 새로운 유형의 위험한 변종 코로나바이러스를 세계보건기구에 보고했다. 그 후 2년 동안 인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생긴 폐렴을 치료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고,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 효과가 입증된 백신을 어떻게 조합할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 팬데믹이 진작에 끝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새해를 맞이하는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분투하고 있다. 전염력은 더 강하고 더 위험한 변이종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이로인해 우리의 회복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따라서 회복의 과정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1. 회복의 형태는 다양하다


여덟 살이던 어느 가을날 아침 나는 망치로 두들겨 맞는 듯한 두통과 함께 속이 뒤틀리는 고통을 느끼면서 깼다. 내 담당 공중보건의가 불려왔다. 그는 고리타분하지만 친절한 의사였는데, 나를 한 번 보더니 뇌수막염이 의심된다고 하며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감염병 전문병원으로 급히 이송시켰다. 나는 그 병원에서 뇌수막염 확진을 받았다. 커다란 창문으로 나무와 밝은 오후의 햇살이 비치는 병실에서 8일이 지났다.

당시의 의사들은 떠오르지 않는데 하늘색 튜닉을 입은 간호사 한 사람만은 기억 한편에 남아있다. 쪽진 검은 머리와 미소 지을 때 주름이 생기던 다정한 얼굴. 철제 침대 프레임, 눈부시게 하얀 침대보, 그리고 바닥에서 올라오던 소독약 냄새도 기억한다. 병실 내벽의 창문이 간호사실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눈길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부모님이 번갈아 내 곁을 지키긴 했지만, 당시엔 돌봐야 할 동생도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조용히 부모님을 기다리며, 집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혼자 지내는 시간도 많았다.

2년 후에는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여름 방학과 가을 학기 내내 깁스를 한 채 지내야 했다. 깁스를 한 다리는 점점 말라갔다. 깁스를 벗긴 날 성장을 멈추고 약해진 너무나 창백한 다리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나를 치료해주던 의사는 기억에 없다. 활기차고 유쾌한 물리치료사 두 명이 나의 회복을 이끌어주었다.

다리를 다쳤을 때는 다친 부위를 객관화하는 게 가능한 것 같았다. 다리를 내려다보면서 “바로 저기가 문제인 거지”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치료 과정이 힘들기는 했지만 최소한 내 허벅지 두께나 피부의 색깔을 보면서 진행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뇌수막염에서 회복할 때는 파악하기가 훨씬 힘들었다. 회복이란 것이 어디까지를 뜻하는지 모호했다. 나른하면서도 멍한 탈진 상태가 여러 날 지속되면서 꿈 혹은 환각이 주는 몽롱함으로 세상이 눈부시게 번들거리는 것 같았다. 나의 몸은 회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회복의 과정 자체는 육체와 분리된 듯, 딴 세상의 일인 듯, 육체적이면서도 정신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이제 와서 당시를 돌이켜보니, 분명 회복의 과정이 지닌 복합성을 그때 처음으로 경험했다. 또, 질병이 다르고 환자가 다르면 회복의 과정도 매우 다를 수 있으며, 달라야 한다는 점도 느꼈다.
 
다리를 다쳤을 때는 다친 부위를 객관화하는 게 가능한 것 같았다. ©Getty Images/iStockphoto
 

2. 각자의 고통, 각자의 회복


‘재활(rehabilitat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habilis’에서 왔는데 여러 뜻 중에서도 ‘적절한’ 혹은 ‘탄탄한’을 의미하며 복구의 어감을 지니고 있다. 즉, ‘다시 꿋꿋이 서거나, 다시 단단해지게 하거나, 단단해지는 것.’ 그렇다면 재활의 목적은 누군가를 가능한 한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할 수 있다면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는 것, 그게 아니라면 운동성과 독립성을 최대한 회복하는 것, 그것이 재활의 목적이어야 한다. 과거 나는 뇌 손상 재활 전문병원에서 수련의로 일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회복의 과정은 결코 수동적인 과정이 아니라고 배웠다. 대체로 리듬과 속도가 느리고 조심스럽긴 하지만, 회복의 과정은 행위이며, 행위를 하려면 참여하고, 몰두하고, 우리를 아낌없이 바쳐야만 하는 것이다. 치료할 부위가 무릎이든 두개골이든, 혹은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폐든, 혹은 뇌진탕이 일어난 뇌든, 혹은 우울증과 불안으로 위험에 빠진 정신이든, 치유의 과정은 적절한 시간과 에너지를 들일만 한 가치가 있으며, 그 과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환자들에게 자주 환기시킨다.

고통에는 위계가 없다. 상태에 따라 어떤 그룹은 동정심이 느껴지고 어떤 그룹은 무시할 만하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실패한 연애 때문에 고통에 사로잡혀 수년간 헤어나지 못하는 환자를 경험한 적이 있다. 반면 심각한 장애를 초래하는 부상, 통증, 존엄의 상실, 그리고 보조기구 없이 걷지 못하는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환자도 있었다. 나보다 병이 가벼워 보이는 사람을 보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수도 있고, 남들은 더 힘든 상황에도 잘 대처하는 것 같은 생각에 자신을 혹독하게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회복을 위해 엄격한 계획을 세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성취할 수 있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때로는 어떻게든 호전될 가능성이 있다며 환자를 안심시키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가 있다. 회복이라는 말로 환자들을 안심시키지만 사실 그것은 환자의 신체적 문제가 해결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가 수 주 혹은 수개월에 걸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료 현장에서 가끔 목격한다. 드물게는 여러 해 지속되기도 한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지 밝혀진 것은 거의 없다. 마치 병과 싸우려면 신체 내부에 비축된 힘에 의지해야 하니 몸이 스스로 에너지를 간직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신체 활동 인지를 조작하는 단계까지 가기 때문에 잠깐의 산책이나 계단 몇 개를 오르는 정도의 활동으로 탈진 상태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2020년과 2021년 계속해서 몰아친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이런 식으로 지속적인 피로감을 느끼는 여러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3월 발간된 학술지 《네이처메디슨》에 실린 표본집단 연구에 따르면, 코로나19 환자 8명 중 1명이 4주 이상 지속되는 증상을 겪었고, 22명 중 1명은 8주 이상, 44명 중의 1명은 12주 이상 증상이 지속되었다고 한다. 호흡 곤란, 후각 상실, 두통, 피로 등이 대표적인 증상이었다.

물리치료사들은 바이러스 감염 후 피로 증상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한계에 이를 때까지 조심스럽게 신체 활동을 하라고 권장한다. 한계를 시험하지 않으면 가능 영역이 좁아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들고, 근육은 약해지며, 환자들은 활동 후 탈진하여 드러눕는 반복적인 사이클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탈진할 만큼 활동하는 일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다.

회복의 과정은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다. 따라서 전략도 달라야 한다. 과정이 더딘 것도 정상이고, 장기적인 질병에서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증상이 발현되는 것도 정상이다. 바이러스 감염 후 지속해서 나타나는 증상은 개인별로 매우 다를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호흡 곤란, 집중력 저하, 기억력 감퇴, 감정의 기복, 불면증, 체중 감소, 체중 증가, 극심한 피로, 근육 약화, 관절 경직, 플래시백이 주요 증상이다. 이러한 문제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내가 강조하는 것이 있다.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고 해서 회복이 멈추었다거나, 악화하고 있다는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증상은 몸과 마음이 병에 대응해서 반응하고 변화하는 증거이다. 변화가 있는 곳에 희망도 있는 법이다. 코로나19의 증상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건네는 작은 책자가 있다. 지역 물리치료사가 쓴 것인데, 회복을 위해서는 ‘적절한 속도’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나 역시 도움을 받은 태도이다.

 

3. 식물의 생명력을 닮은 치유 과정


공중보건의 수련 1년 차에 나는 병이 났다. 이미 수년간 병원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고, 응급의학 수련의 자격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공동체 의사라는 새로운 역할을 위해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문제의 폭과 깊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과거 나를 괴롭히던 부비강 문제가 재발해, 눈 위쪽으로 날카로운 두통이 지속되었고, 그 때문에 기력이 완전히 떨어져 버렸다. 기진맥진해서 집중할 수가 없었고 만성적인 통증에 시달렸다. MRI 검사 결과 수술이 필요한 상태였는데, 수술 일정을 잡는 데만 수개월이 걸릴 것 같았다. 그사이에 나는 공중보건의 수련 과정을 마쳐야 했다.

나로서는 수술 날이 어서 오게 할 수는 없어도, 극도의 피로감과 스트레스에 대해서만큼은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일을 완전히 멈추기보다는 주 3일 근무로 시간을 줄였다. 하루 근무하면 하루는 회복을 위해 쉬었다. 두통은 언제나 지독했지만, 근무 사이사이에 휴식하면서 원기를 회복할 시간이 많아져서 통증도 줄어들었다. 집에서 하루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근무하는 동안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수련 과정은 지연될 터였다. 과정을 모두 마치고 공중보건의 자격을 따는 데 1년 이상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남이 만들어 놓은 일정표를 지키느라 내가 소진될 위험을 무릅쓰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스스로 설득했다.

두어 달 늦어지긴 했지만, 나는 공중보건의 자격을 획득했다. 날짜가 되어 성공적으로 수술을 받았고, 두통은 사라졌으며, 나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우리에겐 병과 더불어 살아갈 힘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업무량을 줄인 덕분에 나는 수술 날까지 만성적인 통증을 견디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후 회복의 길을 천천히 밟아나가는 데 필요한 여분의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회복을 위한 모든 의미 있는 활동은 자연스러운 치유과정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서로 맞물려 이루어져야 한다. 다양한 항생제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세균을 ‘죽인다’라고 할 수 없다. 단지 세균 군집의 성장을 억제할 뿐, 나머지는 우리의 몸이 알아서 처리하게 두는 것이다. ‘치유’를 맡은 의사는 실은 ‘성장’을 책임진 정원사에 가깝다. 실제로는 자연이 거의 모든 일을 한다. 내가 환자의 상처를 꿰맬 때도 봉합사 자체가 세포를 결합시키지는 않는다. 수술용 실은 우리 몸이 고유의 치유 작업을 하는 데 길잡이가 되어줄 격자 울타리의 역할을 할 뿐이다.

내가 수련하고 근무했던 진료소나 병동에서는 사람의 신체도 녹색의 유기적 세계의 일부라는 생각을 대개 무시하고 넘어간다. 그래서 어떤 내과 의사가 이 생각을 본인의 병원 경영의 핵심으로 삼았다는 얘기를 읽고 놀라웠다. 빅토리아 스위트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의과 부교수이다. 그녀는 미국에 있는 마지막 빈민구호소 중 한 곳에서 수년간 일했다. 그곳은 갈 곳 없는 빈민을 위한 병원이다.

자신의 저서인 《신의 호텔: 의사, 병원, 그리고 의료의 심장부 순례》에서 스위트는 중세의 치유사 빙엔의 힐데가르트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후, 회복의 목적을 보다 잘 설명하려면 힐데가르트의 개념인 ‘viriditas’, 즉 ‘녹색화’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사연을 밝힌다. 치유된다는 것은 나무에 생명을 주는, 바로 그 힘으로 활기를 되찾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내과 의사가 하는 일이 정비사보다는 정원사 쪽에 훨씬 가깝다고도 했다.

이것은 직관적으로 타당한 이야기이다. 아주 최근까지도 내과 의사는 식물학을 공부해야 했다. 수많은 의약품이 식물에서 유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식물을 연구하는 것이 생명을 이해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뇌수막염에 걸린 나를 병원으로 응급 이송시켰던 공중보건의가 나중에 말해준 것이 있다. 1950년대에는 식물학 수업이 의대 학사과정에 들어있었다고 한다. 20세기 후반 제약 혁명이 이루어지면서, 회복에 대한 보다 폭넓은 접근법 같은 중요한 문제를 우리는 잊어버린 듯하다. 병상에서 회복 중인 환자들이 녹색으로 자라는 살아 있는 무언가를 내다볼 수 있는 경우 진통제 복용이 줄어든다는 점은 이미 증명되었다. 아주 오래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인지했던 사실을 현대의 병원 설계자들은 잊고 있는 것 같다.
 
코로나바이러스에서 회복 중인 환자들이 물리치료사와 함께 호흡 훈련을 하고 있다. ©Dimitar Dilkoff/AFP/Getty Images
 

4. 공감과 이해를 품은 치료


‘내과 의사(physician)’라는 단어는 ‘자연’을 뜻하는 그리스어 ‘physis’, ‘자라다’는 의미의 ‘phuo’가 어원이다. 식물처럼, 완전체로 다시 성장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절한 영양소, 적절한 환경, 적절한 태도로 이루어진 ‘섭생(regime)’이다. 그리고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회복에 대한 이런 태도는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로 현대 의료에서 밀려났다. 스위트가 중세 시대의 의료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 손에 있는 혈액 검사와 스캔, 로봇 수술이나 항생제를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의료 행위에 시간의 가치가 복구되는 것을 보고 싶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의사와 간호사는 환자를 접하는 매 순간 자신들의 성격과 경험을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염려하는 부분에 대해 의사가 공감한다고 느끼면 더 빨리 건강을 회복한다는 사실을. ‘동정심 감퇴’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학생은 엄청난 동정심을 품고 임상 학습을 시작하지만 돌봄 영역에 오래 종사할수록 점점 그 마음을 잃어간다고 한다.

‘의사(doctor)’라는 단어는 ‘가르치다’ 혹은 ‘안내하다’라는 뜻의 ‘docere’에서 왔다. 선생님마다 가르치는 방식이 다르듯 의사도 마찬가지다. 모든 의사가 취해야 할 하나의 보편적인 접근법이 있다는 생각은 틀렸다. 그런 식으로 의료 행위를 하는 것은 끔찍할 것이다. 평소에 나는 하루에 30~40명 정도의 환자와 만나는데, 내가 어떤 의사이기를 바라는지 잘못 짐작하여 환자를 오해하는 경우가 몇 번씩 있다.

이런 종류의 직관이 가르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신념은 가르칠 수 있다. 어떨 때 관행을 벗어나는 것이 치료 관계에 이익이 될지를 알려주는 양심과 경험의 작은 목소리를 따라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다. 교과서적인 해법이라는 잘 다듬어진 길에서 벗어나 더 거칠고 즉흥적인, 아마도 그래서 더 효과적인 무언가를 향해 신념을 가지고 경로를 트는 것이다. 환자와의 대면은 측정할 수 있어야 하며 재현 가능하고 직업적 규범에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이 대면이 두 인간의 경험을 연금술처럼 결합시키고 변화시키는 다시 없을 순간이라는 생각. 현대의학에서 이 두 생각은 갈등을 일으킨다.

의사들은 의학 분야의 기초 훈련을 충분히 받아야 한다. 이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과학 지식이 의료 행위의 끝인지 아니면 시작인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대답은 상황에 따라 당연히 다를 수 있다. 환자 중에는 단지 전문의와의 만남을 이어주는 전달자로 나를 인식하는 사람도 있고, 의료기관의 대표로서 내가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 과학적 사실을 알려주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 반면, 어떤 환자들은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 그리고 치료할 수 없는 상태일지라도 회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의사에게서 얻고 싶어 한다. 병을 이기는 더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자신의 질병에 대해 구체적인 사실을 알고 싶어 하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질병을 행복한 결말로 가는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해야만 하는 환자도 있다. 나는 환자가 원한다면 어떤 접근법이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생물학적 접근이든 일대기적 접근이든. 둘 다 환자들에게는 똑같이 유효한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것을 치료로 간주할 것인지 그 개념을 확장시키는 것이 전문직 종사자인 의사로서 취해야 할 현명한 자세일 것이다.

 

5. 의료를 넘어선 회복의 비결


약물은 치유의 과정에서 극히 일부에 해당할 뿐이다. 삼키거나 바늘로 찌르는 것, 다시 말해 알약이나 물약 혹은 주사제를 투여하는 것만이 치료라고 하는 생각은 명백히 진실이 아니다. 나는 성가대, 걷기 모임, 정원 가꾸기 모임, 그리고 자원봉사 활동 등이 환자의 건강 상태를 완전히 바꾸어놓는 일을 목격하곤 한다. 비의료인들의 도움을 받아 환자 스스로 충분히 자신의 최고 주치의가 될 수 있는 수 있다. 우리가 아직 활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의학적 문제에 큰 도움이 되는 비의료적 해법도 있을 수 있다. 내가 아는 도박 중독자의 경우 채무 상담사에게 보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치료였다. 약물 의존증으로 고생하면서 식사 대신 약물만 복용하던 여성의 경우에는 푸드뱅크에 보내는 것이 효과를 보았다. 찬장에 음식을 채우자 그녀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 중독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아내를 잃고 은퇴를 맞은 건강한 남성에게는 자선 중고품 가게에서 봉사하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되었다. 세 자녀를 데리고 폭력적인 결혼 생활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에게는 여성의 전화 한 통이 도움이 되었다. 아이의 천식을 악화시키는 축축하고 비좁은 빈민가에 사는 이민자 가족에게는 주택공급부서로 편지 한 통을 쓰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등 임상의는 너무나 짧은 시간 환자에게 왔다가 가버리기 때문에 회복기 환자를 돌보는 일은 대체로 가족과 친구가 맡게 된다. 내가 담당했던 환자 중 몇몇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돌보면서 느꼈을 결핍과 좌절감을 수년이 지나도록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게 쉽지는 않다고 한다. 하지만 환자 주변인들이 치료에 이바지한 부분은 대체할 수 없으며, 그들의 활력(resilience, 힘든 상황을 딛고 일어서는 복원력)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해야 한다. 회복의 비결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적극성만 있으면 모든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횡포다. 질병을 일으키는 요소의 대부분은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재활전문의 크리스토퍼 워드는 저서 《질병과 건강 사이: 아픔과 건강함이 공존하는 풍경》에서 새 환자를 맞이하는 자신의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우선 그들의 고통을 인정하고 나서, 치료의 목표를 재정립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치료의 목표가 반드시 ‘재활’일 필요는 없다. ‘재활 가능성’일 수도 있다. 가능한 한 최선의 삶의 형태를 위해 노력할 기회면 되는 것이다.
 
의료진의 도움으로 회복 중인 스페인 코로나19 환자 ©Pierre-Philippe Marcou/AFP/Getty Images
 

6. 쉬운 탈출구는 없다


21세기 들어 의료 기술, 수술, DNA 자료수집, 유전자 치료 등이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치료가 가능한 질병의 목록은 놀라울 정도로 짧다. 약품 혹은 즉효성 치료제의 측면에서 볼 때, 코로나19 증상으로 오랫동안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제공할 약이 없다시피 한 암울한 상황이다. 하지만 신체와 질병을 대하는 서구식 의료가 실망을 안겨주는 일이 다반사인데도 그것은 여전히 매우 효과적인 접근법으로 남아 있으며, 따라서 세계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채택되고 있다. 질병을 정의하고 명명할 수 있는 능력으로 위안을 주기도 한다. 그런 명명 행위 덕분에 안심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자신들과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식하고 안심하는 것이다. 질병에 이름이 생기면 같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도 생긴다. 게다가 이름 그 자체가 희망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설적인 상황도 가능하다. 질병을 분류함으로써 개념 정의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어 우리를 어떤 기대 속에 가두게 되고, 그 기대가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다. 질병에 붙은 이름표를 안도감으로 받아들이는 환자도 있지만, 모든 이름표를 낙인으로 여겨 혐오하는 환자도 있다. 가능하다면, 그런 차이를 모두 고려하려고 나는 노력한다.

몸과 마음의 실체는 역동성과 변화 둘 중 하나다. 근본적으로 정지된 모든 인간상은 환상이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태도는 질병의 분류가 확고하고 바꿀 수 없는 운명이라 여기지 않고 몸과 마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 안에서 이야기는 다시 쓰면 되는 것이다.

점점 젊어지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건강이 결코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저마다 다른 양극단 사이의 균형, 그리고 그 균형을 이룰 수 있을지는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며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 해부학과 생리학에만 달린 것이 아니다. 모든 질병은 독특하다. 이는 회복도 어떤 의미에서 저마다 독특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다 맞는 회복법은 없다. 수년 동안 나와 나의 환자들의 여정에 길잡이가 되어준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싶었지만, 몇몇 경유지만을 언급하는 데 그치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쉬운 탈출구를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조만간 우리는 모두 질병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가끔은 회복의 과정을 밟는 기술을 배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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