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만이 답인가
좋은 곡식을 얻기 위해서는 단지 좋은 토지와 종자만 필요한 게 아니다. 급격한 기후 변화와 병충해로부터 작물을 보호해 주는 관리가 필요하다. 그래야 일정 시간이 지났을 때 풍요로운 수확물을 얻을 수 있다. 타투도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시술자라도 불법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는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렵다. 시술자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투명한 환경을 만들어 줄 때야 비로소 더 섬세하고 안전한 결과물이 나온다.
지난 20년을 돌이켜 보자. 많은 관계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회 입법 과정에서 유의미한 진전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매번 타투 시술자와 소비자들을 좌절시켜 왔을 뿐이다. 최근 몇몇 국회의원들이 의욕적으로 타투 관련 입법 활동을 추진해도 상당수 시술자들이 냉소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입법 활동이 정치적인 쇼라고 폄하하는 극단적인 시각도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답보 상태의 국회 입법 과정을 거치지 않고 타투 시술 자격을 확대할 수 있는 행정부의 조치는 없는 것일까? 현재 의사에게만 독점적으로 권한이 주어지는 체제를 개선할 방법은 없을까?
의료는 최상의 서비스가 아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과 경험을 갖춘 사람이 제공하는 용역이다. 현행법상 타투는 의료 행위이기에 의사만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병원에서 일어나는 많은 의료 행위들을 의사를 대신해 간호사 혹은 간호조무사가 수행하는 경우가 흔하다. 동네 의원에서 엉덩이에 근육 주사를 맞을 때 의사가 직접 주사하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 또한 영양제를 혈관으로 주사하는 업무도 간호사들이 주로 한다. 의료 행위는 반드시 의사만 해야 한다는 논리는 법률적 구호이지 현실과 다르다. 수많은 의료 행위를 의사가 아닌 의료인 혹은 준의료인이 행하는 게 관례로 굳어 왔다. 그렇다면 타투도 반드시 의사가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다른 의료 행위와 마찬가지로 의사가 아닌 간호사 혹은 간호조무사가 타투 시술을 대행할 수 있도록 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한 방법일 수 있다.
대한간호협회와 대한간호조무사협회에 따르면 국내에는 간호사 35만 명, 간호조무사 70만 명이 등록돼 있다. 100만 명이 넘는 의료 자원이 모두 병원에서 근무하는 것은 아니다. 상당수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도 종사한다. 타투 시술의 자격 요건을 완화해 그 범위를 간호사와 간호조무사까지 확장하면 어떨까. 행정 당국은 별도의 입법 절차 없이 100만 명에 달하는 시술자를 확보할 수 있고, 시술자 입장에서도 타투나 반영구 화장 시술 자격의 장벽은 낮아질 것이다. 게다가 일정 수준의 의학적 지식과 임상 경험을 겸비한 시술자들이라는 점에서, 의사 단체의 우려도 줄고 국민도 안전상의 문제에 있어 더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자격을 갖춘 반영구 화장 시술자들을 오래전부터 주변에서 봐왔다. 의학 지식이 전혀 없는 시술자에 비해 인체를 이해하는 폭과 깊이가 다르며 자신의 분야에서 의료인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고자 소속 단체를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또 누구나 의과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훨씬 짧고 효율적인 교육 과정을 거쳐 합법적으로 시술할 수 있게 된다. 1년간 간호조무사 자격 양성 학원에서 소정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다. 미국에선 간호사들이 퇴직 혹은 이직 등으로 병원을 떠나면서 메디컬 타투 시술자로 변신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유방암 수술 이후 유륜과 유두의 결손이 있는 경우 메디컬 타투는 수술 집도의에게도 좋은 선택지가 된다. 메디컬 타투를 통해 유두와 유륜을 자연색에 가깝도록 해당 부분에만 타투 잉크를 주입함으로써 수술 자국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은 일반 수술로는 불가능한 영역이다. 심지어 미국 정부는 보험 정책을 통해 메디컬 타투 피술자에게도 일반 질환과 동등한 의료 보험을 적용해 주고 있다. 의료인을 통한 타투, 의료 보험이 적용되는 타투는 허무맹랑한 얘기가 아니라 지구 반대편에선 이미 보편화된 현상이다.
시술 자격만 넓힌다고 끝이 아니다. 시술자 교육 체계 또한 함께 혹은 자격증 도입보다 먼저 마련돼야 한다. 우리 병원에도 최근 몇 년간 타투 교육 문의가 급증하고 있다. 의사가 아닌 일반인에게 타투를 교육하는 것 자체가 불법인 현실에서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어렵다. 타투를 교육만이라도 할 수 있도록 행정 당국에 여러 차례 질의와 청원을 했으나 돌아오는 답변은 “불법적 시술을 전제로 한 교육은 결국 불법 시술자를 양성하는 것이어서 허용할 수 없다”였다. 즉 국내에 1만 명의 타투이스트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타투를 배운다’는 것 또한 1만 가지의 의미로 그 과정과 방식이 제각기 달랐을 것이다.
타투 잉크와 안료 시장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쉽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세분화하고 있다. 주먹구구식의 도제식 교육에 머물러선 타투 머신의 구조와 기능, 인체 부위별 혹은 피부 두께에 따른 시술 술기, 잉크 사용 시 피부 알레르기 반응과 이에 대한 대처를 배울 수 없다. 통일된 교육 과정이 생기고, 이를 담당할 기관을 정부가 지정하고 관리하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을 거치며 수강생들은 타투이스트로서의 책임 있는 자세를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직업 교육 기관에서 기술만 배우지 않는다. 선생님 또 함께 공부하는 동료와 소통하며 직업의식도 갖추게 된다. 이처럼 어느 정도 균질화된 필수 교육 과정 속에서 기술을 습득하고 정직한 직업 윤리를 바탕으로 성장할 때 타투 산업은 기형적 문화 현상이 아닌, 안정된 직업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지난 20년간 국회의 입법 과정에선 타투와 반영구 화장을 동일시해 왔다. 많은 사람들이 시술 부위만 다를 뿐이지 시술 자체는 같은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 타투와 반영구 화장 시술자들은 각기 다른 사고 체계를 갖고 있다. 단지 ‘문신’이라는 키워드 아래 동일한 법률적 규제를 받고 있을 뿐이다. 타투이스트들에겐 스스로 예술가라는 자부심이 앞선다면 반영구 화장 종사자들은 미를 추구하는 미용사라는 인식이 강하다. 사용하는 도구와 시술 과정도 당연히 이런 관점에서 다르다. 좀 더 강력하고 단시간에 효율적으로 잉크를 주입할 수 있는 기계를 선호하는 타투이스트와 달리, 반영구 화장 시술자들은 작고 섬세한 기구를 우선적으로 사용한다. 사용하는 잉크도 타투는 영구적으로 남을 잉크를 사용한다면 반영구 화장은 그 명칭에 걸맞도록 시간의 경과에 따라 자연 소실되는 잉크를 쓴다. 마취제 또한 타투이스트의 경우엔 제한적으로 마취제를 사용한다. 반영구 화장에선 모든 시술에 예외 없이 마취 연고를 바른다. 이런 극명한 차이를 한 개의 법률로 규정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물과 기름과도 같은 두 업종은 각기 다른 입법 혹은 행정법으로 다루는 것이 현실적이다. 즉 타투이스트는 문신사법으로, 반영구 화장 시술자는 미용사법으로 접근해 각기 특화된 역할과 기능을 보장해 주어야 할 것이다.
타투 및 반영구 시술 합법화의 새로운 돌파구로 이런 교육 과정을 제시하면 반영구 시술자들은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반응이다. 하지만 타투이스트들은 강한 거부감을 나타낸다. 지금도 시술을 잘 하고 있는데 간호 학원까지 다녀야 하는가에 대한 번거로움과 부담 때문이다. 충분히 이해되는 입장이다. 일반 의료인, 혹은 준의료인들이 타고나지 못한 예술가로서의 감각과 창의력은 분명 그들의 재능이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끌어온 기약 없는 합법화 논란을 1년의 정해진 교육 과정으로 종결할 수 있다면 이를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예술가로서의 위상이 낮아질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가장 빠르게 실현 가능한 합법화 방안이다. 그동안 입법 과정에 부정적 목소리를 낸 보수 시민 단체도 이를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 국민 건강에 대한 우려는 타투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타투 합법화를 반대하는 데 꽤 유용한 근거였다. 국내의 수많은 재능 있는 타투이스트들이 일정 수준의 의료 교육을 이수한다면, 그 근거를 불식하고 당당히 재능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상처를 병원에서 치료할 순 없다
얼마 전 몽골 출신의 한 여성분 손에 헤나 문양 타투를 시술해 드렸다. 손등과 손목을 모두 가릴 정도의 크기로, 누가 봐도 압도될 만한 멋진 타투였다. 40대 중년의 나이임에도 마냥 즐거워하던 모습을 보며 타투는 나이, 계층을 떠나 자기표현의 방식으로 자리잡은 시대임을 실감했다. 그러나 ‘남에게 멋지게 보이기 위해서’가 타투를 하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몸에 상처가 있는 경우 이를 가리기 위해서도 타투는 자주 이용된다. 우리 병원의 경우 열 명 중 여섯 명 정도가 상처를 가릴 목적으로 타투 시술을 의뢰한다. 이들에게 타투는 멋진 장식이 아니라 상처를 숨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얼마 전 내원한 한 중년 여성은 엉덩이에 화상 상처를 타투로 가리기를 원했다. 태어나 채 돌도 지나기 전에 어머님이 끓여 놓은 뜨거운 목욕물에 화상을 입어서 생긴 손바닥 크기의 상처였다. 중년이라는 나이와 엉덩이라는 부위의 특수성으로 타투를 결정하기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였다. 어떤 방법으로든 이 상처를 가리고 싶고, 타투에 관심은 없었으나 상처를 가릴 수만 있다면 타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남편과 딸의 적극적인 응원에 힘입어 내원했다는 그는, 커다란 나비를 그려 드리자 정작 나비보다는 가려진 상처에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한 남성은 가슴과 배에 15센티미터 길이의 수술 상처를 갖고 찾아왔다. 흉터 위에 대나무 가지를 그려 넣어 수술 자국을 완전히 가려 주길 바랐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식별이 어려울 정도의 실밥 자국까지 가리기를 원해서 시술은 예상보다 많은 횟수로 진행했다. 실밥 자국 한 땀까지 대나무 잎으로 덮는 총 네 차례의 시술을 거쳐 상처가 모두 가려졌다. 그제야 비로소 이 남성은 여름에 웃통을 벗어도 되겠다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색소성 질환에 타투를 적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피부의 색소가 빠져 하얗게 보이는 백반증이나 혈관 이상으로 피부가 붉게 보이는 혈관종 혹은 화염상모반을 타투 시술로 가리려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런 질환은 전염성이 없음에도 사회생활의 제약이 된다. 타인의 지나친 관심과 우려가 환자들에게는 부담이 되고 결국 이를 감추고자 노력하게 만든다. 최근 한 50대 남성이 허벅지 화염상모반이 있는 상태로 내원했다. 붉게 변한 피부를 완전히 가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에, 잉어 그림으로 타투 시술을 진행했다. 오직 질환이 있는 부분에만 시술해 달라는 요청은 시술자인 나로서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마무리될 무렵, 작고 붉은 점 한 개가 다른 붉은 점과 떨어져 있었는데 이 또한 가리길 원했다. 아주 작은 점이라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인데도 피술자는 무척 신경을 썼다. 결국 흩날리는 작은 꽃잎으로 가렸다. 이를 본 남성의 안도하는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 작은 점에도 노심초사하는 모습에 시술자로서 번거로움보다 안타까움이 앞섰다.
상처를 가린 타투를, 다시 한번 지우기 위해 병원에 오는 분들도 많다. 그중 자해 흔적을 가리기 위한 타투가 특히 눈에 띈다. 힘든 시절 남긴 몸 여기저기의 흔적들을 타투로 가린 경우다. 그들이 시간이 지나 어쩔 수 없이 타투를 제거하러 온 이유는 사회적 시선 때문이다. 우리 병원에도 일주일에 열 명 이상의 피술자가 같은 이유로 찾아온다. 그중 미성년자도 절반을 차지한다. 제거에 따른 통증도 상당한데, 다시 보게 되는 과거의 상처에 많은 피술자들이 힘들어한다. 삶의 고단함을 아픔으로 달래 보려 했던 것이 또 다른 아픔을 남기게 되는 모습에 나 또한 착잡해졌다.
지난 20년간 여러 시술 경험을 거치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몸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도 같이 갖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 눈에는 거의 띄지 않는 상처도 본인에게는 커다랗게 보인다. 많은 시술을 통해 그들과 같은 눈을 가지려 해도 상처를 가진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상처의 깊이는 오랜 기간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적응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긴 시간 타투는 부정적 시선의 표상이었다. 타투한 사람은 조폭, 가방끈이 짧은 사람으로 폄훼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내가 만난 타투 피술자들은 한 집단으로 묶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직업, 학력, 연령, 성별의 사람들이었다. 상처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 오늘 없다고 해도 내일 생길 수도 있다. 말과 행동에서 수많은 상처에 노출되는 게 일상인 현대 사회에선 더욱 그렇다. 그 상처를 모두 현대 의학으로 가릴 수는 없다. 타투를 바라보는 편견은, 이제 빛바랜 사진첩처럼 과거에 묻어 두었으면 한다.
정이 많은 민족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정이 많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보며 뚱뚱해졌다고 놀리는 것은 애교 수준이고, 모 연예인의 외모에 대해 집요하리만큼 성형 의혹을 제기하는 것으로 그 절정을 이룬다. 당사자가 시인하면 환호를 보내고, 부인하면 가혹하게 파헤친다. 과거 졸업 앨범 사진은 기본이고 친구들과 찍은 사진까지 샅샅이 뒤져서 진실 아닌 진실을 규명한다. 왜 우리는 이토록 타인의 몸에 집착할까?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모습이 있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자신의 몸은 본인 스스로 온전히 관리할 수 있을 때 아름답다. 본인의 신체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며 또 하나의 개인 정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선 나의 알 권리를 위해 누군가의 사생활이나 자유가 희생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다. 나 또한 이런 인식이 부족해 혼쭐난 경험이 있다. 사석에서 너무 젊어 보이는 한 여성에게 나도 모르게 나이를 질문한 것이다. 성형외과 의사라는 직업병 탓에, 동안이라는 것을 칭찬해 줄 의도였으나 받아들이는 측에서는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타투도 마찬가지다. 몸에 새긴 타투 그림이 ‘예쁘다’, ‘별로다’를 제삼자의 시선으로 먼저 논할 필요도 없다. 한국 사회가 조금은 더 타인의 신체에 무심했다면, 타투 합법화 논쟁은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몸 자체만큼이나 몸의 상처도 지극히 개인적이다. 상처에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상처가 형성될 당시의 특수한 사정들, 그와 연관된 사람들과의 관계가 한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중요한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이런 환자들을 대할 때면 다양한 사연들이 짧은 시간에 쏟아져 나온다. 대개 말보다 눈물이 먼저, 많이 터진다. 그래서 진료실에는 손 닿을 곳에 티슈를 꼭 준비해 둔다. 상담 중에 우는 사람이 많아서 꼭 필요한 아이템이 되어 버렸다.
눈물 없이 말할 수 없는 상처라면 이를 평생 갖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상처를 갖고 내원한 많은 환자들이 주변으로부터 “그 정도 상처를 가지고 뭐 그리 신경을 쓰냐!”는 말을 들을때 가장 가슴 아프다고 얘기한다. 물론 주변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한다. 상처 가진 사람을 위로하려는 의도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에서 공감해 줄 사람이 없다는 외로움에서일지,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인지, 환자들은 그 어떤 이유에서든 또 다른 상처를 받는다.
모든 타투가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진 않는다. 모두가 쉽게 타투를 결정하고 시술받길 원하는 것도 아니다. 타투는 영구적으로 몸에 남고 지우기도 어렵기에 늘 신중해야 한다. 다만 나는 사람들이 보다 관대해졌으면 좋겠다. 비의료인의 타투 시술 논란을 두고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누군가에게는 전혀 생소한 얘기겠지만 당사자들에겐 오랜 세월의 고통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불법의 굴레를 쓴 많은 젊은 예술가들과 편견 섞인 시선을 감수하는 다수의 타투 피술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국회 입법, 교육 기관 마련 같은 사회적 장치가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무관심이야말로, 타인에 대한 가장 깊은 존중이자 타투 합법화 논쟁을 종식할 강력한 열쇠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