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상을 많이 하는 편이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거나, 잠자리에 들 때면 특히 더 그렇다. 이를테면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비율이 뒤집힌다면 어떤 상황이 일어날까? 비장애인이 우월한 소수로 자리 잡는 세상이 될까? 아니면 장애인이 비장애인이 되고, 비장애인이 장애인이 될까?
상상과는 별개로 내가 봐온 장애인의 직업은 늘 정해져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들은 휠체어를 타고 단순 노동을 많이 한다. 주로 공공 기관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거나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일이다. 시각 장애인 중에는 안마사들이 많다. 어릴 때부터 인터넷에 ‘시각 장애인’을 검색하면 안마사라는 단어부터 먼저 나왔다. 괜찮은 기술을 배워도 넓은 사회로 나가기엔 장벽이 있다. 장애인은 한국장애인개발원의 지원으로 자기가 일하고 싶은 분야의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다. 나중에 찾아보니 국가에서 지정한 ‘발달 장애인을 위한 쉬운 바리스타 업무 매뉴얼’ 같은 것도 따로 있었다. 하지만 스타벅스나 동네 예쁜 카페에서 일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거다. 바리스타가 된 발달 장애인은 복지관 1층 커피숍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대학에 갈 때 사회복지과를 선택했다. 복지에 관심이 많았다기보단 어릴 때부터 집 근처 복지관에서 휠체어를 탄 복지사 선생님을 보며 자랐다. 고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직업 적성 검사를 했을 때도 추천 직업 목록 중 사회복지사가 있었다. 잘 알려진 장애인의 직업들 중에선 사회복지사가 나랑 제일 잘 맞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는 복지 프로그램도 부족하고 그에 대한 홍보는 더 부족하다. 나는 나라가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들을 모른 채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 보장구 수리나 학습용 전자기기 지원 등 유용한 지원책들을 주변에서 듣고 나도 신청해야겠다, 하고 찾아보면 이미 신청 기간이 지나 있을 때가 다반사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어머니 주변 장애인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 지원 프로그램이나 정책들을 모르고 지나친다. 내가 모르고 지나친 그 정보들을, 다른 사람들은 알고 또 유용하게 쓰면 얼마나 좋을까. 집 근처 대학 사회복지과에 지원한 나는, 면접 100퍼센트 전형으로 합격했다.
동기들이 본 내 첫인상은 ‘신기함’이라고 한다. 중고등학교 때 접했던 장애인 학생들과 달리 신입생 환영회나 MT 등 모든 행사에 당연히 참여하는 모습이 새로웠다고. 대학 생활은 나와 너무 잘 맞았다. 선배라는 호칭 없이 위계질서 없는 문화가 좋았고, 우리 과 연극 학술제에서 휠체어를 타고 연기도 했다. 당연한 것이라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건 친구들 덕인 것 같다. 동기들은 대부분 가족의 영향, 학생 때 봉사 활동을 했던 기억이 있어서 사회복지과를 선택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녀석들이 선입견이 없거나 있더라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학 생활은 재밌었지만 학과 수업을 떠올려 보면 사회 복지학은 정말 내가 좋아서 하는 공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당장의 시험을 위해서 공부하긴 했지만 그러고 나면 끝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흐르는 대로 하루하루 살았다. 모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공공 기관 사회복지과의 공무원으로 취직했을 것 같다.
휠체어로 하는 워킹 연습
나는 앉아 있는 시간이 많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움직임이 적어 살이 빠르게 붙는다. 스물한 살 때가 그랬다. 원래도 살집이 있는 상태였지만 성인이 되어 술자리도 늘고 배달 음식도 많이 먹으며 자연스레 몸무게가 불었다. 내가 살을 빼기 시작한 건 친구들에게 미안해서였다. 계단뿐인 술집을 출입할 때나 시설이 잘 안 갖춰진 곳으로 MT를 갈 땐 주로 친구 등에 업혀서 이동했는데, 나를 도와주던 친구들이 전보다 힘들어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이어트를 시작한 건 대학 2학년 여름 방학이었다. 요령을 모르니 다이어트 방법으로 극단적 단식을 택했다. 하루 세 번 먹던 밥은 하루 한 번, 반의 반 공기로 먹었고 끼니를 거를 때도 많았다.
주식이 아메리카노인데 살이 안 빠질 리 없다. 정확히 몇 킬로그램이 빠졌는지는 모른다. 몸무게를 재려면 누군가 나를 업고 함께 체중계에 올라가거나,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는 병원을 따로 찾아가야 하는데 매번 그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안으로만 봐도 볼이 엄청 홀쭉해졌다. 배달 음식에 쓰던 돈을 절약하니 30만 원이라는 목돈이 생겼다. 누군가에겐 적은 돈일 수 있지만 학생인 내겐 엄청난 돈이었다. 이 돈으로 뭘 할까 생각하다 주위에 옷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인터넷 쇼핑하는 걸 구경했다. 나도 직접 옷가게로 쇼핑을 다니긴 어려우니, 호기심으로 온라인 쇼핑 플랫폼에서 이 옷 저 옷을 사봤다. 이전까진 편한 옷, 펑퍼짐한 옷을 고집하던 내가 다이어트를 해서 딱 맞는 옷을 입으니 훨씬 옷 태가 살았다. 식비는 고스란히 쇼핑비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러다 어느 날 친한 동생이 함께 가자며 패션쇼 티켓을 구해 왔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에서 열리는 서울 패션 위크였다.
옷을 잘 입건 못 입건 나는 살면서 눈에 안 띈 적이 없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이왕 튈 거 멋있게 튀고 싶다. 그날 나는 패션 위크인 만큼 내가 꾸밀 수 있는 최대한으로 꾸미고 현장으로 향했다. 장르는 스트릿 패션이었다. 검은 바지, 목에 끈 장식이 달린 검은 티셔츠와 검은 벙거지 모자. 지금은 일상이 되었지만 그때 나에겐 패션 아이템이었던 마스크도 착용했다. DDP 도착 후 쇼가 열리는 시간까지 건물 밖에서 기다릴 때였다. 다른 모델들은 서서 포즈를 취하는데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 유니크함 때문이었을까, 그날 나를 촬영한 포토그래퍼가 열댓 명 이상은 될 것이다. 연이은 카메라 셔터음이 부담보단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1년 뒤 두 번째로 서울 패션 위크로 향했다. 이번엔 나 말고도 휠체어를 탄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사교성이 무척 좋은 미국인 패션 크리에이터였다. 이야기를 주고받다 그가 내게 제안을 하나 했다. 런웨이 모델에 도전해 보지 않겠냐고. 수동 휠체어로는 모델들의 속도를 맞추기 힘들 수 있는데 나는 전동 휠체어를 쓰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비장애인 모델들보다 빠를 것이라며 잘할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 그의 한 마디가 내 꿈의 씨앗이 되어 한 가지 궁금증을 가져왔다. 많은 쇼를 본 건 아니지만, 한국에서 휠체어를 탄 모델이 런웨이를 거닐었다는 뉴스는 보지 못 했고 그런 모델을 목격한 적도 없었다. 내가 그 첫 번째 사례가 되면 어떤 파장이 생길까? 이 궁금증은 꿈의 씨앗에 물과 태양이 되어 싹을 틔웠다.
여기저기 수소문했다. 모델과 포토그래퍼가 상호 무보수로 포트폴리오 작업을 많이 한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됐다. 첫 스냅 작업은 사진학과를 지망하는 한 고등학생 포토그래퍼와 함께였다. 인사동 거리에서 촬영한 스트릿 패션 후드티의 협찬 스냅이었다. 휠체어로 이동하는 내게 다행스럽게도 날씨가 화창했다. 작업했던 친구들과도 금방 친해졌고 화기애애하던 첫 작업은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 포토그래퍼 친구가 보내 준 사진들을 내 SNS에 올리자 첫 작업인데도 반응이 성공적이었다. 무엇보다 협찬해 주신 패션 브랜드 대표님이 사진을 너무 만족스러워하셨다. 그 뒤로 문래동 공장터에서 찍은 스냅,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작업한 의정부 거리 스냅, 인천의 앤티크한 카페에서 진행한 스냅 등 바쁘게 촬영을 다녔다. 휠체어 때문에 스튜디오 접근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주로 야외 촬영이었다. 작업 사진이 한 장 두 장 쌓이며 내 SNS는 ‘장애인 모델’의 포트폴리오가 됐다.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자 작업 제안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홍대 버스킹 존에서 모델 지망생들과 간이 패션쇼 무대를 꾸미기도 했다. 의상, 음악, 무대 동선까지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꾸린 무대였다. 그때 당시 모델들이 전부 시간을 맞춰 연습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고 연습 공간도 상당히 열악했다. 한두 번 모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각자 연습해 올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그 연습 장소가 되었던 곳은 지하철 승강장이다. 환승 경로나 지하철을 기다리는 곳은 기다란 런웨이 무대의 형태와 흡사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패션쇼에 쓰일 음악을 들으며 그 공간을 몇 번이고 왔다 갔다 이동했다. MBC 〈우리동네 피터팬〉에서 섭외 문의도 들어와 모델 오디션에 도전하는 내 모습을 6주간 촬영했다. 비록 오디션에 합격하진 못했지만 에이전시 측의 도움으로 난생 첫 모델 프로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배우 제의도 왔다. 장애를 다룬 옴니버스 영화 〈모두의 영화〉 중 한 에피소드 ‘씨네필Cinephile’의 주연이었다. 처음 받아 본 촬영 스케줄과 대본, 실시간으로 확인 가능한 모니터, 컷 편집을 잡아 주는 슬레이트 등 모든 것이 신기했다. 농아인과 지체 장애인인 영화광 두 명이 영화관 장애인석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이야기였다. 현실에선 겪어 본 적 없으나 충분히 있을 법한 시나리오였고, 배우라는 타이틀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첫 연기 도전이라 어색한 감이 많았지만 즐겁게 촬영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 스태프분들에게 감사했다.
최근 작업한 서울관광재단 유튜브 광고는 휠체어 접근성이 좋은 배리어 프리 서울 여행이 콘셉트였다. 예를 들어 내가 처음 꿈을 키운 DDP는 휠체어가 다니기 좋은 구조로 지어졌다. 계단 옆에 휠체어나 유모차가 이동할 수 있는 경사로가 항상 함께 있으며 장애인 화장실도 어느 건물에나 마련되어 있다. 모든 촬영 현장에 어머니께서 동행하셨다. 집과는 다른 환경이니 옷을 갈아입어야 할 때 도움을 주시기 위해 스태프로 오신 것이었지만 촬영을 계기로 어머니와 좋은 추억을 쌓을 수 있어 너무 감사한 시간이었다. 촬영 대기 시간에 주변을 산책하거나 한식당에서 외식을 하는 등의 시간이었다. 소소한 부분일 수 있겠지만 나에겐 소소하지 않았다. 나는 경제적인 이유나 시간 여유 등의 핑계로 여행을 다닌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혼자서는 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곳들을 가볼 수 있는 것, 게다가 그 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건 더욱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의 매력은 무엇일까? 장애에 대해서 상실감이나 부끄러움이 없는 점, 장애를 잊고 생활하는 평소 삶의 태도가 당당하고 밝은 에너지로 표출되는 점 같다. 희소성도 한몫한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처음 모델의 꿈을 꿀 당시 DDP에서 마주한 건 호기심으로 가득해 보이던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그걸 자극한 모델 김종욱은 다른 모델과는 아예 다른 의상, 아예 다른 콘셉트를 시도해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싶다. 처음 모델의 꿈을 꿨을 때 20대가 가기 전에 내가 해보고 싶은 걸 다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길이었지만 뒷일은 미래의 나에게 맡기고 무작정 여정을 시작했다. 내가 완벽히 자리를 잡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패션 업계에 장애인 모델로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조금이나마 알린 것만으로도 이 도박 아닌 도박은 내게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