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18일 철원 지포리 사격장에서 우리는 총 여섯 발의 탄을 쏘는 K-9 자주포 사격 훈련 중이었다. 32도가 넘는 무더위에 점심으로는 돌 같은 전투 식량을 먹고 다른 부대의 사격을 지켜보면서 차례를 기다렸다. 매번 하던 훈련이라 긴장감 없이 로봇처럼 첫 번째, 두 번째 탄까지는 아무런 문제 없이 진행했다. 문제의 세 번째 탄에서, 기계적 결함으로 K-9 자주포 내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 연기와 스파크가 미친 듯이 들어왔다. 1평도 안 되는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불꽃이 튀어 남은 세 개의 화약이 폭발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문이 잠겨 있어 어떠한 대처도 못 한 채 온몸이 타들어 갔다. 그 당시 멀리서 훈련 상황을 지켜보던 후임의 말로는 “핵폭탄이 터진 것처럼 솟아오르는 불줄기와 연기가 안전지대까지 느껴졌다”고 한다. 40톤급 방탄 철갑으로 둔갑한 자주포는 산산이 부서졌고 그 덕분에 잠겨 있던 철문이 열려 우리는 초인적인 힘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온몸에는 전투복이 눌어붙어 있었고 폭발할 때의 강한 섬광 때문에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밖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응급 처치 같은 건 없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당황한 나머지 땡볕에 방치됐다. 급한 대로 차를 타고 근처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했으나 화상 전문 병원이 없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나중이 돼서야 헬기가 뜨고 국군 수도 병원까지 날아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도 화상 전문의는 한 명뿐이라 부대원 몇 명은 다른 화상 전문 병원으로 이송돼 위탁 치료를 받았다. 그렇게 총 세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네 명의 생존자 중 나는 사망자 명단 후보에도 올라가 있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시력 저하와 분쇄 골절에 신체의 총 면적 중 55퍼센트가 화상을 입었고 45퍼센트가 3도 화상인 중환자로 분리됐다. 의사 선생님께서 말하길 죽을 확률이 높다고, 만약 살아도 평생 치료와 수술을 병행해야 한다고 하셨다.
치료 과정은 사고 당시 고통의 배는 넘을 것이다. 매일 밤 악몽과 고통에 시달렸고 마약성 진통제 없이는 잠을 못 이뤘다. 소리와 냄새에 민감해졌고 스트레스와 트라우마가 뇌리에 박혀 있어 불안한 상태였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총 12번의 수술과 재활 치료를 하며 지옥을 맛보았다. 피부가 정상적이지 않아 체온 조절도, 땀 배출도 어려웠다. 감각이 없어지는 건 물론, 털도 자라지 않고 손가락은 피부가 서로 눌어붙어 주먹을 쥐지도 펴지도 못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보고에 의하면 화상 환자는 한 해에 50만 명이 넘는다. 그런데도 화상 전문 병원은 전국에 네 개뿐이다. 내가 입원할 때도 나 한 명 들어갈 자리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화상이 요리할 때나 불을 다룰 때 생기는 가벼운 상처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화염, 폭발, 뜨거운 물, 마찰, 전기, 번개, 각종 화학 물질로 화상 입은 환자들을 나는 병원에서 수없이 마주쳤다.
병실 옆자리엔 내 또래의 딸이 두 명이나 있는 남성 환자분이 있었다. 2만 2900볼트 특고압 전기 작업을 하다 전기 화상으로 손가락 한 개를 절단한 분이었다. 전기 화상은 피부만 상하는 것이 아니라 근육과 뼈까지 다친다. 대부분 손을 통해 체내로 들어온 전기는 어디로 나가느냐가 관건인데 심장을 지나게 되면 사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팔, 다리를 절단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분은 손가락 한 개만 절단해서 불행 중 다행이라며 긍정적으로 병원 생활을 하셨다. 면회 온 가족들을 만날 때면 누가 환자인지 모를 정도로 유쾌하시고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아픔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셨다. 가장이라는 위치에서 돈을 벌기 위해 매일같이 전기선에서 외줄 타기를 하고 계셨던 것이었으리라.
옆 병실에는 이제 막 말을 하기 시작한 귀여운 아기가 입원해 있었다. 두피에 화상이 심해 머리카락이 뜨문뜨문 자라고 있는 아기에게 장난감이나 놀이공원은 사치였다. 고통이 없는 게 가장 큰 축복이었다. 사탕이나 초콜릿으로 견딜 수 있는 아픔이 아닐뿐더러, 커서 학교를 가거나 사회생활을 하며 그 아이가 겪을 어려움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영유아화상은 성인과 달리 성장할 때마다, 피부가 늘어날 때마다 매번 수술해야 하기 때문이다.
큰 폭발 사고가 아니라 약한 불이라도 오래 노출되면 깊게 화상을 입는다. 한 환자분은 폐쇄된 곳에서 연기를 장시간 흡입해 식도 전체가 심하게 손상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보다 큰 비보가 환자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화상을 입은 남편분은 사망하셨던 것이다. 환자분이 정신적 쇼크로 건강이 더 나빠질까 봐 아무도 그걸 말해 주지 않았다. 나중에 남편 소식을 듣고 얼마나 우시던지 그때의 울음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가장 행복할 나이에 과부가 되는 것,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상처를 안고 살아갈 날이 더 많은 것보다 큰 비극은 없을 것이다. 그들 사연을 아무리 이해하고 가늠한다 해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중 10퍼센트, 아니 1퍼센트도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흉한 피부로 보일지라도 모든 흉터엔 남이 모르는 사연이 있다.
피사체의 자격
퇴원 후 나는 180도 다른 사람이 됐다. 자존감이 낮아져 거울을 보기 힘들었고 옷을 사고 머리를 하고 꾸미는 것에 흥미를 잃고 필요성도 못 느꼈다. 하루아침에 사고로 달라진 모습을 인정하기 싫었다. 나 자신도 나를 인정하지 못하는데 남들이 나를 보는 시선은 어떨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특히 여름이 문제였다. 긴팔 긴바지를 입고 중무장을 해서 나가도, 더워도 덥다고 말을 못하고 흉터를 숨기기 바빴다. 손가락의 흉터가 보일세라 큰 옷을 입고 소매에 손을 감췄다.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부터 나는 매일같이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우스갯소리로 여기에 모자까지 쓰면 연예인 패션이었다. 튀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남보다 더 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시선도 시선이지만, 주변 사람을 의식하고 눈치보는 내 문제도 컸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경계하고, 피해망상도 생겨 상대방의 반응을 왜곡해서 보는 악순환이 생겼다. 공공장소나 사람 많은 곳에서는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렇게 사회공포증, 대인 기피증, 폐쇄 공포증 등 온갖 증이란 증이 자격증처럼 쌓여만 갔다. 사고 전까진 말수도 많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했던 내가, 가까운 외출에도 위축됐다. 사람은 절대 안 변한다고, 변하면 죽는다고 하던데 정말 죽을 것 같은 절망에 빠졌다.
사고 전 나는 예술 고등학교를 나와 예술 대학에 입학해, 연기를 전공하는 배우 지망생이었다. 아무리 배우의 본업인 연기를 잘해도 직업 특성상 외모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미지로 벌어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흉터는 내게 너무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TV에 나오는 배우들은 몸에 흉터 하나 없고 손에 있는 작은 큐티클조차도 관리한다. 익스트림 클로즈업 샷에도 그들의 피부는 모공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갓 빚은 도자기처럼 예쁘고 멋있다. 기술까지 좋아져 요샌 4K UHD, 더 나가아 8K까지 선명한 화질을 구현한다. 나중에 내가 티비에 나오면 카메라인지, 돋보기인지 모를 것들이 나의 흉터를 낱낱이 파고들 것만 같았다. 그걸 본 시청자들의 반응을 떠올릴 때마다 내 피부에 대한 악플이나 피드백을 견디지 못해 비극적인 드라마가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았다.
10년 넘게 공부하고 꿈꾼 것들이 1초 만에 펑 터졌다. 누군가는 “너무 오바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지만, 여드름 하나만 생겨도 각종 좋은 약과 팩을 쓰고 성형외과에서 피부 성형까지 알아보는 게 한국 사람이다. 우리나라는 나 같은 피사체를 받아들일 문화나 정서가 자리 잡혀 있지도 않다. 용기 내려 해도 다른 배우들에 비하면 내 피부는 마치 벌레 먹은 사과처럼 보였다. 화상을 입고 제일 먼저 포기한 게 배우의 꿈이었다. 대학도 자퇴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사색하고 답을 찾으려 해도 무기력을 벗어날 수 없었다.
3대 400에서 4킬로그램으로
어느 날 피부가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도 특이한 모델을 인터넷에서 발견했다. 백반증 환자 위니 할로우(Winnie Harlow)였다. 백반증은 멜라닌 색소 파괴로 피부에 흰색 반점이 생기는 병이다. 할로우는 흑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지만 마치 하얀색 물감을 칠한 듯 온몸에 흰 반점이 있어 어릴 때부터 젖소, 얼룩말 같은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자살 시도도 했던 그가 모델로서 주목받은 계기는 미국 모델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도전! 수퍼모델(America’s Next Top Model)〉에서였다. 우승하진 못했으나 그는 이후 백반증을 극복한 세계적인 모델로 유명해졌다.
무언가 머릿속을 찌릿하며 지나갔다. 내 몸의 울긋불긋한 화상 무늬가 언뜻 멋있어 보였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외국에서는 이미 위니 할로우 외에도 장애인 모델이 많고 인정도 받는 분위기였다. 두 다리 대신 의족을 낀 에이미 멀린스(Aimee Mullins)는 패럴림픽 육상 선수였으며 지금은 모델과 연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다운 증후군을 앓고 있는 엘리 골드스테인(Ellie Goldstein)은 18살에 구찌 모델이었다. 〈도전! 수퍼모델〉 시즌 22 우승자는 청각 장애인 나일 디마코(Nyle DiMarco)였다. 내 눈엔 일반 모델보다 의수를 찬 모델, 휠체어를 탄 모델이 훨씬 멋있어 보였다. 혼자만의 착각일지라도 내 화상은 나라를 지키다 다친 상처라는 점에서 자부심도 있었다. 흉터를 예술로 승화할 수도 있는데 모델의 꿈을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복귀의 첫 단계로 헬스장부터 끊었다. 일반 사무직도 아니고 몸을 움직이는 모델을 목표로 하려니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다. 일단 걷지를 못했다. 처음 걸을 때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나는데, 영화의 한 장면에서 피가 쭉 튀어나오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온몸을 감싼 붕대에서 피가 튀어나왔다. 계속 누워 있어 근육이 하나도 없었고 일어서기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다치기 전 몸무게가 85킬로그램이었는데 사고 이후 62킬로그램밖에 안 나갔다. 수술과 재활을 병행하면서 조금씩 좋아졌다. 걷기 시작했고 근육이 붙으면서 무거운 것도 들기 시작했다. 옛날엔 흔히 헬스장 3대 운동이라 불리는 벤치 프레스, 스쿼트, 데드 리프트를 합쳐서 400킬로그램 정도 들었으나 이땐 4킬로그램짜리 아령 드는 것도 힘들었다. 온갖 장비를 착용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운동했다. 스키 장갑을 끼거나 스트랩을 이용하거나 보호대에 의지했다. 구체적인 목표 없이 죽어라 운동만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만난 지금의 파라스타엔터테인먼트 대표님이, 장애인 전문 소속사에서 같이 일하지 않겠냐 하셨다.
우선 대표님도 장애인이셔서 누구보다 우리의 고충을 이해하실 것 같아 믿음이 갔다. 단순히 장애인을 고용하는 소속사가 아니라 그분의 가치관이 내 생각과 비슷했다. “언제까지 장애인이라고 무시 받고 눈치 보면서 살 거냐. 남들이 보지 못한 우리의 잠재력을 발휘하자. 나를 봐라, 다리가 없어도 25년 동안 운동하고 아이스하키로 메달도 땄다. 동정이 아닌 멋진 이미지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싶다.” 이런 대표님의 말을 듣고 어떻게 같이 일하지 않겠는가. 대표님과 함께 모델로서의 구체적인 목표를 다시 세운 뒤, 프로필 사진도 찍고 모델 수업을 받으며 첫 단추를 끼웠다.
일터라 쓰고 전쟁터라 부른다. 처음 투입된 촬영 현장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양해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 화상 경험자로서의 애로 사항을 말하는 순간 관계자분들의 선입견 때문에 일부러 캐스팅이 안 될 수도 있다. 나는 1분 정도 가만히 서 있으면 피부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이 생겨서 몸을 움직이거나 통증 부위를 때려야 한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에겐 정서 불안이나 건방진 사람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최근 아르미스 게임 광고 촬영에서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았는데 손을 펴는 장면에서 손가락 구축이 심해 다 펴지지가 않아 말도 못하고 혼자서 애먹었다. 그 장면에서만 유독 많은 NG가 발생했다. 그날은 여름 중에서도 몹시 더운 날이었는데 가죽옷을 입어야만 했다. 가뜩이나 땀 배출이 잘 안 돼 체온 조절도 힘든 데다 무거운 검을 들고 액션할 땐 피부가 찢어지고 상처가 생겼다. 화상 자국이 남은 피부가 약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번은 짧은 수영복 바지만 입고 촬영할 때였다. 수많은 카메라 스태프 앞에 섰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몸도 만들다 만 몸인데 보는 눈이 많아 더욱 부담스러웠다. 옷을 벗을 때도 두려움이 컸다. ‘이 사람들은 내 흉터를 알고 섭외한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됐건 나는 모델로서 주어진 일을 하면 되는 거니까, 일단 일부터 하자고 생각했다. 내 몸집만 한 풍선 안에 들어가는 장면인데 거대한 풍선을 손으로 들면서 무릎을 꿇고 움직여야 했다. 화상 입은 무릎 피부가 얇아 내 몸무게에 짓눌려 뼈와 피부가 갈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참았다. 무릎뿐 아니라 살이 거의 없는 팔꿈치도 예외는 아니었다. 촬영 이후 내 팔꿈치엔 항상 상처와 굳은살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모델 일을 하면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작업물을 생각하면 기대에 부풀지만 솔직히 그 작업 과정이 아파서 빨리 끝내고 싶기도 하다. 흉터 때문에 배역 선택의 폭도 좁아졌다. 표현할 수 있는 범위도 훨씬 제한적이다. 하지만 다시 카메라와 수많은 스태프 앞에 서면 그 자체만으로도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모델로서 촬영 일을 다시 시작한 것도 감사하지만, 언젠가는 내면을 표현하는 배우로서 진짜 연기를 보여 줄 날을 기다린다.
장애인과 눈이 마주친다면
전역 후 3개월까지는 군대에서 치료비가 나왔다. 그 이후엔 사비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국가 유공자가 된다면 보훈처에서 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지만 그러기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든다. 군대에서 일하다 다쳤다는 사실 관계와 건강 상태를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해야 하고, 서류 심사와 신체검사를 받아서 부적합이 나오면 또다시 변호사를 고용하든 추가 서류를 작성하든 최소 6개월은 더 준비해야 한다. 운좋게 국가 유공자가 되어 국비 지원으로 치료를 받는다 해도, 보훈 병원이나 지정된 병원에서만 가능하고 비급여 치료는 부분적으로만 지원된다.
게다가 화상 치료 대부분은 비급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보험 적용을 받기 힘들거나 아예 못 받는다. 남들은 미용 목적으로 레이저 치료를 받지만 우린 치료 목적으로 레이저 시술을 받아야 한다. 나는 얼굴 화상만 치료하는 데 한 회에 40만 원이 들었다. 전신 시술을 받았으면 회당 몇백만 원은 들었을 거다. 흉터는 치료 한 번으론 절대 안 없어진다. 적어도 열 번부터가 시작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원래대로 돌아갈 수도 없을뿐더러 효과가 드라마틱하게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돈 없는 사람은 화상 치료도 못 받는다는 말도 생겨났다. 현실이 그렇다. 비용에 부담을 느끼는 많은 화상 환자들이 치료받지 못하고 그냥 살아간다.
공공장소에서 내 흉터를 쳐다보던 사람과 눈이 마주칠 때면, 서로 어쩔 줄 모를 때가 많다. 별다른 감정 없이 흉터를 신기하듯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제삼자 입장에서 눈이 가는 게 이해된다. 나 또한 화상 전문 병원에서 나보다 화상 흉터가 많은 사람을 자꾸 쳐다보게 됐다. 하지만 이런 무심한 시선도 장애인들은 부담을 느낀다. 갈 곳을 잃은 시선이 어쩌다 내게 왔다고 해도 그 또한 좋게 받아들일 수 없다. 이미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 시선 그 자체를 의식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대놓고 피하는 사람도 있다. 화상 흉터뿐 아니라 큰 점, 붉은 반점 같은 것이 있으면 사람들이 피부병이 있는 줄 알고 자리를 피하거나 거리를 둔다. 전염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대중교통 이용 시 많은 자리 중 내 옆자리에만 아무도 앉지 않는 상황이 종종 생긴다. 내가 옆에 앉자마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는지 자리를 떠나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면 내 몸 냄새를 확인한다. ‘분명 씻고 향수도 뿌리고 나왔는데…….’ 사람들이 나를 피하는 줄 알고 내가 자리를 떠날 때도 있다. 치료를 받고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병원 근처 카페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데, 옆 테이블 사람들이 내 화상 흉터를 보고는 놀란 적도 있다. 혼자만의 망상인 건지 아니면 그들의 시선이 실제로 부정적인 건지 헷갈리는 것조차 스트레스다.
대견하게 봐주는 사람들도 있다. 내 흉터를 영광의 상처라고 많이들 존중해 준다. 대부분 작은 화상을 경험해 봐서인지 그 고통을 잘 알고 있어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말에선 존중보단 안타까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 “얼마나 아팠을까?”,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등의 공감을 해주시지만 이미 사고는 벌어졌고 내 몸은 망가졌다. 이렇게 평생을 살 내게 큰 위로가 되진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라봐 주길 원하는가. 그건 나 스스로도 답을 내리지 못한 질문이다. 나조차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볼지 모르는데 다른 사람에게 날 어떻게 봐달라 말하기 어렵다. 또 장애인마다 장애의 종류와 겪어 온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단언할 수 없다. 어떤 분은 장애에 많이 적응한 분도 있지만, 어떤 분은 장애 때문에 여전히 힘들어한다. 그렇기에 시선의 정답을 내리진 못하겠다. 그건 내 영원한 숙제일 것이며 모두의 숙제가 되었으면 한다.
뭘 해야 할지 막막할 땐 모든 게 뒤바뀐 사고 날을 떠올린다. 내가 준비해 온 삶이 단숨에 무너진 것처럼, 언젠간 내 삶이 좋은 쪽으로 펑 터지는 순간도 오지 않을까. 사고 이후 더 내려갈 곳이 없다는 생각에, 그리고 두 번 사는 인생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감사하다. 분장으로도 만들 수 없는 흉터가 경쟁력이 된 두 번째 삶이다. 이젠 ‘K-9 자주포 사고 생존자’라는 타이틀을 벗고 새 옷을 입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