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극장 가는 것을 좋아했다.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았으나 극장이란 공간 자체가 내게는 편안하고 신비로운 예배당 같았다.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두 시간 정도 가만히 앉아 눈앞 스크린에 상영되는 영화를 봐야 한다. 감독의 주제 의식을 꼼짝없이 보고 들어야 한다. 어찌 보면 다소 폭력적인 공간이고, 이런 극장이란 공간을 매우 답답해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나는 정반대였다. 극장은 내게 두 시간의 마법이 이뤄지는 공간이었다. 한없는 어둠이 내려앉고 온갖 영화적 상상이 펼쳐진 뒤, 극장을 나오면 세상은 마치 이전에 볼 수 없던 밝은 세계로 바뀌어 있을 것 같았다. 휴대폰을 켜면 화면이 밝아지면서 한꺼번에 울리는 알람 중 좋은 소식이 한두 개는 있을 것 같았다. 고작 두 시간, 달라진 것이 없고 아무도 변화를 못 느낀다고 하더라도 나만이 느끼는 세상의 변화가 있었다.
최근엔 이런 상상도 했다. 코로나19 백신을 맞고 부작용으로 나의 뇌병변 장애가 없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생각해도 엉뚱하지만 내겐 영화도, 극장도 이런 마법의 공간이었다. 열심히 살면 세상은 내 편이고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랑은 변치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 바로 그 공간. 영화와 극장을 사랑할 수밖에 없던 이유다.
영화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고향 서울에서 아시안 게임이 열린 1986년으로 돌아간다. 초능력을 가진 에스퍼맨(심형래 분)이 주인공인 〈우뢰매〉 시리즈가 처음 나왔을 때였다. 당시 어머니 친구분의 남동생이 신촌 신영극장에서 일하셨다. 어머니 손을 잡고 〈우뢰매〉 시리즈를 보러 간 날 그분이 〈우뢰매〉 캐릭터들이 그려진 책받침을 무려 50장이나 선물해 주셔서 너무 행복했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집에 오는 2호선 전철 안 머리 위 선반에 책받침을 올려 두었다가 두고 내린 것이다. 그걸 알고선 버스 안에서 내내 눈물을 주룩주룩 흘린 것도 기억난다.
그즈음엔 토요 명화나 주말의 명화 같은 영화 프로그램들을 TV에서 방영했다. 큰형은 그 프로그램들을 매우 좋아했지만 나는 이상하게 재미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나이에 편집이 많이 되고 성우가 더빙한 외국 영화에 이질감을 느꼈고 이해하기도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러다 88올림픽이 끝난 뒤 1989년, 영화와의 운명적 만남이 시작됐다. 어느 날 아버지가 ‘Gold Star’ 금성, 현 LG전자의 VHS 비디오 데크를 사오신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친한 친구 다섯 명 중 집에 비디오 데크가 있던 친구는 한 명뿐이었다. 그날 아버지가 비디오 데크를 설치하는 동안 나는 동네 ‘영비디오’ 가게로 뛰어갔다. 최신 프로그램 2박 3일 대여에 자그마치 천 원! 큰맘 먹고 빌렸다. 화려한 액션과 남자들의 의리, 거기에 일명 ‘국뽕’이라고 하는 애국심까지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땐 오후 다섯 시쯤 동네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우리 같은 아이들도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 전부 멈춰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고 애국가를 제창하던 시대였다.
그날 비디오 가게에서 처음 대여한 영화는 바로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이었다. 사흘 동안 다섯 번을 돌려 보고 반납했다. 이틀 뒤 두 번째로 빌려온 비디오는 장철 감독의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였다. 이 영화를 고른 이유는 한 손만 사용하는 주인공의 상황이 나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홍콩 영화에 빠진 계기이기도 하다. 나도 장애가 있지만 이런 영화 속 주인공들과 같이 멋진 삶을 살고 싶었고, 그렇게 되리라 다짐했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시간만 나면 당시 강동구 최고의 극장 천호동 한일시네마로 향했다. 이때 본 영화들은 〈천장지구〉, 〈영웅본색〉, 〈우견아랑〉, 〈첩혈쌍웅〉 등 역시 주로 홍콩 영화였다. 주인공들은 친구와의 순수한 의리와 오직 한 여자만을 위한 사랑을 빼면 시체 같은 느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사랑과 의리라고 정해 둔 것 같았고, 그것을 감독은 영상으로 너무 잘 녹여 냈다고 느꼈다. 내가 지금도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선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생각하는 것엔 분명 이런 영화들이 어느 정도 일조했을 것이다.
그러다 스무 살이 되는 해, 아는 누나의 소개로 서울 강서구에 있었던 ‘화면 속으로…’ 라는 비디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해는 내가 살면서 가장 영화를 많이 본 해였다. 1년간 800여 편의 영화를 봤으니 말이다. 그중 극장에서 본 150편을 제외하면 나머지 650편은 전부 비디오테이프로 봤다.
시작은 이렇다.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다 보면 “이 영화 어떠냐?”, “이 영화 재미있냐?”고 묻는 손님들이 많았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고 인터넷도 보편적으로 사용하지 않던 시절이라 손님들 또한 정보가 많이 없었다. 《프리미어》나 《씨네21》 같은 영화 잡지가 있었지만, 나조차 잘 모르는 잡지들을 일반 손님들이 알 리 없었다. 아무튼 손님들이 자꾸 비디오 가게에 찾아와 내게 영화에 대한 감상을 묻자, 아르바이트생으로서 이상한 프로 의식이 생겼던 것 같다. 난 손님들에게 멋지게 리뷰를 해드리기 위해 영화를 많이 보기 시작했다. 그분들은 우리 가게 사장님께 내 칭찬을 하기 시작하고, 우리 가게에 나를 찾는 단골이 생기자 신나서 더 많은 영화를 보고 그 매력에 풍덩 빠졌다.
예술 영화를 많이 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작품성이 좋은 영화는 무조건 비디오 데크에 넣어서 재생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영화감독은 바로 안드레이 타르콥스키(Andrei Tarkovsky)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영화를 잘 만드는 유명한 러시아인 감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틀어서 본 영화는 너무 졸렸다. 전개가 너무 느리고 영화적인 이야기가 없었다.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늘 30분을 못 넘기고 잠이 들거나 딴짓을 하는 나를 발견했다. 영화의 제목은 〈희생〉이었다. ‘관객의 희생이 필요한 영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몇몇 장면들은 아름다웠던 기억이 난다. 한밤에 물이 다 빠진 수영장 안에 어떤 남자가, 초에 불을 켜고 수영장 끝에서 끝으로 천천히 걸어가다 다시 돌아오고 다시 걸어가는 장면이 특히 그랬다. 기억에 남는 대사도 있었다. “끝없이 노력하면 결실을 얻는 법이지.”
남자 주인공이 한 말이었다. 멋있는 대사였으나 역시나 끝까지 보지는 못했다. 이후 나의 시간을 더 이상 희생하고 싶지 않아서 타르콥스키 감독의 영화는 시도를 안 했다. 안녕, 타르콥스키.
충무로에 발을 들이다
영화과를 나오진 않았다. 다만 영화에 진심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를 봤고 재미있게 본 영화는 여러 번 봤다. 허진호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열 번 이상 본 것 같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오아시스〉, 〈러스트 앤 본〉처럼 장애인이 주인공인 영화도 여러 번 봤다. 영화를 처음 이론으로 배운 건 세기말 1999년 한겨레 교육문화센터가 진행한 영화 연출 아카데미에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를 배우고 싶단 막연한 동경이 있을 뿐 정말 영화판에 들어갈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러다 20대 초반, 여의도 소재의 한 회사에서 첫 일자리를 구했을 때였다. 처음 몇 개월은 열심히 일했으나 문득 ‘서른이 넘어서 영화가 하고 싶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난 내가 서른 살이 넘으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을 줄 알았다. 지금까지 결혼을 안 하고, 아니 못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무튼 꿈을 펼치지 못한 걸 나중에 후회하거나 한 가정의 가장이 된 후 내 꿈을 위해 갑자기 영화를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 같아 보였다. 그래서 ‘무조건 지금 영화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03년, 스물네 살이 되던 해 봄이었다.
영화판이라는 곳에 아무 인맥도 없던 터라 막막했다. 열심히 수소문한 끝에 인터넷 커뮤니티 ‘필름 메이커스’를 알게 됐다. 그곳의 구인란 카테고리에서 평소 내가 좋아하던 〈선생 김봉두〉 장규성 감독님의 신작을 함께 촬영할 막내 스태프 구인 공고를 발견했다. 그땐 연출부, 제작부의 개념을 몰랐다. 그냥 영화감독이라면 무조건 막내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바로 지원했다. 자기소개서에 장애에 대해 모든 걸 솔직하게 적었다. 장애가 있어 한 손을 못 쓰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할 것이라고, 남들이 두 손으로 한 번 왔다 갔다 할 것을 나는 빠르게 두 번 왔다 갔다 해서라도 맡은 업무는 다 해낼 거라고. 영화에 대한 열정과 각오를 쏟아부어서 지원서를 적은 결과, 충무로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우리나라 영화 1번지, 바로 그 서울의 충무로! 면접 장소는 ‘시네마 서비스’ 빌딩 2층에 위치한 ‘좋은 영화사’였다. 좋은 영화사는 현 싸이더스FNH의 전신이자 당시 한국 최고의 영화사였기에 떨릴 수밖에 없었다. 뇌병변 장애 때문에 춥거나 긴장하면 마비가 오고 강직이 생기는 탓에 사무실이 가까워질수록 왼쪽 팔다리는 부자연스러워졌다. 건물 앞에서 기도하고 심호흡을 크게 하고 왼팔과 왼다리를 주무른 후 올라갔다.
면접관은 영화 제작팀 실장급에 해당하는 라인 프로듀서님이었다. 그런데 영화나 장애에 관한 질문은 전혀 하지 않고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질문하셨다. ‘좋아하는 영화나 내가 가진 장애에 관해 물어보실 줄 알고 많이 준비했는데…….’ 순간 멍했다. 당황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때 읽고 있던 책이 문익환 목사님 평전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인 중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순간 고민이 됐다. 그래도 답은 해야 하니 정신을 차리고 솔직하게 말했다. “얼마 전에 《문익환 평전》을 사서 읽고 있습니다.”
면접 이틀 후 라인 프로듀서님의 전화를 받았다. 합격이었다. 내가 막내로 함께할 영화는 바로 장규성 감독님의 차기작 〈여선생 VS 여제자〉였다. 며칠 뒤 바로 여수로 내려갈 수 있는지 물어보셨고, 나는 바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영화인으로서 나의 삶은 전라남도 여수에서 시작됐다.
그런데 내가 들어간 제작부는 영화감독이 되는 출발점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여수에 내려간 지 5일 만에 알았다. 감독이 꿈이면 연출부에 들어갔어야 한다는 제작부장님의 말에 처음에는 놀랐지만, 생각해 보니 크게 상관은 없었다. 일단 충무로 영화판에 들어왔지 않나! 난 같은 제작부 동료에게 질투를 받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당시 장애인이기 때문에 부담이 더했다. 내가 언뜻 보기에도, 영화 선배들의 말을 들어도 충무로 상업 영화 현장에 장애인은 내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내가 여기서 일을 잘 못하면 장애인들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인식이 안 좋아져 나중에 다시는 장애인을 안 뽑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잠도 안 자고 촬영 준비를 하고, 스태프들이 원하는 것을 잘 듣고 크게 대답하며 열심히 뛰어다녔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 물리적으로 잘 뛰는 모습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제작부 막내는 정말 온갖 것들을 한다. 작게는 촬영 현장의 담배꽁초를 줍는 일부터 크게는 촬영물이 담긴 소중한 필름을 전라남도 여수에서 서울역 뒤쪽의 ‘세방현상소’까지 기차를 타고 혼자 전달하는 일들이었다. 또 영화 제작을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 조명팀, 연출팀, 미술팀 가릴 것 없이 누구든 도와야 했다. 열심히 일한 덕에 많은 사람에게 인정도 받은 나는 다음 영화에선 연출부로 일하게 됐다.
첫 연출부 생활은 김성제 감독님의 데뷔작이 될 뻔한 〈일요일 아침엔 초능력〉에서였다. 재미있는 상상을 펼친 코미디 드라마였는데, 막내 조감독으로 참여했으나 결국 그 영화는 충무로에서 흔히 쓰는 말로 ‘엎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감독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연출부로 꾸준히 작업에 참여했다. 화면 밖의 모든 것을 담당하는 제작부와 달리, 연출부는 화면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과 관련된 일들을 한다. 특히 영화 제작 준비 단계에서는 시나리오를 정말 많이 읽고 또 직접 썼으며, 시나리오와 연출에 관한 세미나도 매주 1~2회 진행했다. 영화 〈마음이…〉에선 연출부 막내로, 〈기다리다 미쳐〉에선 공간 미술 담당 조감독으로,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선 사료 고증을 위한 취재와 시나리오 각색 작업을 맡았다. 예술 영화 〈블랙 스톤〉의 프로듀서를 마지막으로 일곱 편의 장편 영화 스태프로 일한 뒤, 이제 나의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나의 데뷔작은 청각 장애인 여성과 시각 장애인 남성이 주인공인 단편 독립 영화 〈다리 놓기〉다. 2000년대 초반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분들과 2년 동안 먹고 자고 함께 생활하며 느낀 것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청각 장애인 유진과 시각 장애인 윤환이 지하철에서 부딪쳐 서로를 오해하다 그 오해를 풀어가는 내용이었다. 영화 공모전 시나리오 부문에 당선돼 서울영상위원회에서 제작비 지원을 받고 다섯 개 영화제에 초청받아 상영하는 영광을 얻었다.
이후로도 내가 만든 열 편의 영화들은 주인공이 대부분 사회적 약자였다. 영화 〈중고 거래〉에선 비장애인 여성과 장애인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고, 이주민 여성과 장애인 남성이 주인공인 〈따뜻한 독종〉을 제작하는 중이다. 지난해엔 예술인 지원 사업에 선발되어 8월부터 상영 행사 준비를 했다. 장애인이 주인공인 영화를 제작하고, 이전에 만들었던 영화들도 함께 상영하는 행사였다. 장애인분들을 관객으로 모시고 화질과 음향이 한국에서 가장 좋은, 동시에 접근성도 좋은 서울의 한 극장에서 영화를 보여 드리고 싶었다. 지원 사업에 선발된 후 바로 그 극장에 문의했고 10월 중순에 대관하기로 구두로 협의했었다. 그러나 이후 일정 확정을 위해 다시 연락 드렸을 때 대관이 11월로 연기됐고, 대관 조건은 점점 까다로워졌다. 중간에 담당자가 바뀌었다며 여름에 문의했을 땐 말해 주지 않던 것들을 하나둘씩 말씀해 주셨다. 상영 행사를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함께 작업한 장애인 배우분들과 그 가족들을 모시고 작게라도 상영회를 하면 그분들께도 추억이 생기고 좋아하실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결국 대관 장소를 여의도 이룸센터로 변경하고 일정을 새로 기획했다. 이룸센터는 장애인 단체들이 모여 있는 건물로,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분들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드디어 2021년 연말, 행사에 찾아온 관객분들이 힘든 시기를 따뜻한 행사로 채워 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자 영화를 만들고 행사를 준비하며 쌓였던 모든 속상함이 녹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