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이 되기 전 나는 어른들의 삶이 너무 궁금했다. 어른이 된 농아인
[1]들은 어떤 일을 하고 살아갈까? 내게 이야기나 조언을 해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사회로 나왔을 땐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세 살일 때 인공 와우 수술을 시켰다. 인공 와우는 청각 신경을 전기로 자극해서 소리를 듣게 하는 수술이다. 말도 못 하는 세 살 어린아이에겐 잔인한 수술이지만, 나쁘게만 말하긴 어렵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찍 수술한 덕에 청력도 어느 정도 회복했고 듣는 훈련도 많이 했기 때문이다.
특수 학교에 가면서부터 부모님과 많이 싸웠다. 다들 농아인인데 나처럼 어릴 때 인공 와우 수술을 한 친구들이 별로 없었다. 내가 특이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고, 내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부모님 마음대로 수술해버린 것이 싫었다. 게다가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수어를 금하고 소리 내어 말하는 구화 연습을 엄격하게 시켰다. 편한 수어 대신 구화로만 감정을 정하다 보니 가족은 내게 늘 어려운 존재였다.
오히려 특수 학교를 다니는 게 특별한 경험이었다. 농아인 자식을 둔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일반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지만, 나는 서울애화학교에 다니며 농아인으로서 자신감을 키웠다. 학교에 가서 농인 친구들과 편하게 수어로 얘기하는 게 좋았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여자친구 여섯 명과 서로 의지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농아인이라는 이유로 일반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특수 학교에 가는 것도 좋은 경험일 수 있다. 내가 만약 일반 학교에 갔더라면 소통이 어려워 우울했을 거다. 국어, 영어 같은 과목을 내게 맞는 속도로 배우는 게 좋았다. 우리는 수영도 배우고 도예도 배우고 스케이트도 배웠다. 새로운 과목도 기회가 생기면 언제나 해보고 또 해볼 수 있어서 난 ‘뭐든 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나와 같은 농아인 친구들과 대화하며 다녔으니 사회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살아왔다.
스무 살이 되며 가장 먼저 실현해야 하는 것은 혼자 소통하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대화하며 비장애인의 존재를 알았지만 만날 기회는 없었다. 일반 사회에서 소통하는 방법이 너무 적었다. 그 방법을 내가 알아서 찾고 파악해야 했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행동을 보면 적어도 사악한 사람인지 배려 있는 사람인지 귀찮은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다. 분위기가 강한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압박이고, 낯선 사람에게 바로 적응해 대화하기 쉽지 않다. 통일된 성격이 아니라 다양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농아인은 쉽게 상처받을 수 있다. 소통하고 대화할 기회가 없으니 알아서 해결해야 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많이 조심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먹고살기 위해선 돈이 있어야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일자리의 폭이 넓지 않아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농아인에게 제일 어려운 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사실 원하는 일이 아니라 어떤 일이든 농아인은 쉽게 구하지 못한다. 장애인을 위한 일자리 박람회에서 농아인 직업 중 소리와 관련된 직업은 없었다. 몸 관련 직업만 많았다.
캐논코리아에 쉽게 합격할 수 있던 건 국가 지원 프로그램 덕이었다. 우리 학교와 장애인 직업 훈련 프로그램이 연결되어 있었다. 합격 후 3개월 교육을 받은 뒤 정직원이 됐다. 내가 맡은 일은 캐논 프린터 본체에 기스가 있는지 없는지, 하루에 300개가 넘는 제품을 검사하는 일이었다. 한 사무실에 농아인이 서른 명 이상 있고 농아인을 위한 통역사가 있어 대화도 편했다. 하지만 농아인들과만 수어로 대화하는 것이 농아인의 삶일까? 돈을 벌기 위해 할 수 없이 다녔지만 이 삶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원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게 무서웠다. 기계처럼 무던한 삶을 사는 것이 좋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하고 싶었던 모델을 다시 해볼까? 아직 늦지 않았으니 도전할까? 입사 3년 반쯤 되었을 때 그만뒀다.
표정으로 읽는 마음의 기술
고등학생 때 학교 강당에서 작은 패션쇼에 섰다. 주변에 농아인 디자이너 언니가 모델을 권유해서 무대에 서게 됐다. 처음엔 부담스러웠지만 하얗고 긴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걷는 연습이 재밌었다. 캐논코리아에서 반복적인 일만 하다가 무대 위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면 마음이 설레었다. 내가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촬영장에서 나오는 음악을 작게는 들을 수 있고, 코치님 말을 듣지 못해도 수어로 말하면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퇴사 후 유명한 모델 학원을 직접 찾아갔다. 학원에선 안 된다고 했다. 농아인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인가? 이유를 말해 주진 않았다. 현실이 마음 같진 않았다. 다른 학원도 몇 군데 돌아다녔는데 모두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에스팀 모델 아카데미였다. 하루만 모델 수업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고, 계속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학원 선생님들이 판단하겠다 했다. 일일 모델 수업을 체험하고 워킹했는데 결과는 1등이었다! 수강료도 50퍼센트를 할인해 주셨다. 학원에 등록하고, 3개월 동안 통역사 없이 모델 수업을 들었다. 춤, 패션 이미지, 워킹, 사진 표정 등을 처음으로 연습했다.
찾아보니 세계 농아인 모델 대회가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상을 탄다 해도 보람을 느끼지 못할 것 같았다. 비장애인과 겨루는 대회에 나가고 싶었다. 친한 통역사분과 함께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 4〉 오디션에 도전했다. 그분은 그분 나름의 통역 오디션, 나는 내 모델 오디션이었다. 서류를 쓸 때, 얼굴 정면 사진을 사용하는 게 너무 지겹게 느껴졌다. 그래서 누가 내 머리카락을 옆에서 잡아당기고 나는 아파하는 표정으로 찍었다. 오디션 때 다섯 시간이나 대기하다 들어갔는데, 심사장에 들어가니 너무 많은 참가자들을 대한 뒤 지친 심사 위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화를 할 수는 없으니 수어로 연기했다. 숫자 수어를 보여 주며 어떻게 하는 건지 가르쳐 드렸더니 다들 좋아하셨다. 며칠 뒤 합격 전화가 왔다.
첫날 촬영장 공기 냄새는 너무 차가웠다. 용기 있어야 버틸 수 있는 직업 같은데 ‘농아인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합숙하러 들어갈 때 제일 걱정했던 부분은 통역이었다. 처음 보는 통역사와 호흡하기 어려웠다. 낯선 포토그래퍼와 사진을 찍을 때마다 가장 어려운 것이 언어 전달이었다. 사진 작가마다 말하는 표현이 달라서 파악하기 어려웠다. 통역사의 눈치를 보고 분위기를 잡는 게 힘들었다. 내 의견을 빠르게 전달하는 것에 서툴렀다. 뭐가 맘에 들지 않을까? 포즈? 아니면 표현? 알 수 없는 분위기였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는지 알려 주지 않고 어떤 포즈가 어울리는지도 옷 디자이너분과 미리 얘기하거나 알아서 표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