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곧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될 것이니 주의하라!’고 미리 알림을 받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누가 어떻게 갖게 될지 모르지만, 누구에게나 함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그것이 장애라고 생각한다.
사고 전 누구보다 건강했다. 웬만한 잔병치레도 없었고, 스피닝이나 줌바 댄스 같이 격한 운동도 나름 즐겨 했다. 그래서였을까? 사고로 갈비뼈, 흉골, 척추, 골반이 골절되고 척수 손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돼 스스로 움직일 수도, 뒤척일 수도 없는 경험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 결과로 1년 넘게 병원 생활을 할 것이라곤 더더욱 상상하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중환자실이었고, 먹고 씻고 싸는 모든 행위가 간호사분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물을 마시고 밥을 먹는 행위가 타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며칠 동안 씻지 못해 몸이 찝찝했고 힘겨워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옆에서 계속 들려 무서웠다. 무엇보다 통증이 엄청났다. 가만히 있으면 괜찮지만, 욕창을 방지하기 위해서 30분마다 자세를 변경해야 했다. 베개를 몸 사이사이에 끼워 넣고, 억지로 몸이 굴려질 때마다 몸 전체가 아릿아릿했다. 코에는 산소가 계속 뿜어져 나오는 산소 줄을 매달고 있었다. 부모님께는 먼저 전달했을지 모르지만 의료진은 내 하반신이 마비된 걸 당장 말해 주진 않았다. 나도 몸 전체가 아픈 느낌이라 마비된 걸 몰랐다. 내 몸이 마비됐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을 때, 이 상황이 절망스러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다.
그래도 시간은 흐른다. 2주간의 중환자실 생활을 마치고 일반 병실로 내려가자 아프고 힘들어하는 소리가 옆에서 들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이 상황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상태였다. 엄마도 2주 만에 만났다. 그 사이 많이 수척해진 엄마를 보는 게 힘들었다. 딸의 이야기를 소식으로만 듣고 속을 끓였을 엄마의 마음이 편했을 리 없다. 서로 많이 의지하지만 따듯한 말을 주고받기보단 장난을 많이 치고 투닥거리던 엄마였기에, 오랜만에 만나서도 장난부터 쳤다. 사고 후 달라진 게 있다면 내 몸뿐이었다.
병실에서 가장 중한 환자는 나였지만 가장 젊은 환자도 나였다. 젊음이 원동력이었는지 나는 회복 속도가 남달랐다. 예정대로면 몇 달은 기다렸다가 진행하는 2차 수술을 앞당기고 무사히 마친 뒤 일반 병실로 내려왔다. 통증을 잘 참는 편인데도 진통제를 매일 맞았다. 진통제가 워낙 강력해서인지 한동안은 입에서 진통제 맛이 날 정도였다. 수술은 잘 됐는지, 골절된 부위가 붙었는지 보기 위해 거의 매일 엑스레이를 찍어야 했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침대째로 이동했다. 워낙 자주 이동하니 대형 병원인데도 침대를 옮기는 이동사원분들과 친해질 정도였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도, 내가 보기에도, 의사 선생님이 보시기에도 내 몸은 많이 좋아졌다. 곧 재활 병원으로의 전원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종합 병원에도 재활의학과가 있지만 대부분 2주 정도만 재활 환자를 받고, 그 이후엔 재활 병원으로 전원하도록 권하기 때문이다. 재활 병원의 운동은 종합 병원에서 받던 치료와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는 주의를 들으며, 나는 상황이 조금 더 나아진다는 기대감을 안고 재활 병원으로 이동했다.
괜찮다 싶으면 터지는 문제들
재활 병원에 도착한 첫날, 또 다른 새로운 세상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우선 시설 면에서 종합 병원에 비해 정말 열악했다. 한 방에 있는 인원은 환자 여섯 명에 간병인 여섯 명으로 총 12명이나 됐고, 병원 규모도 작았다. 첫날부터 시작한 치료들도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환자들의 하루는 학교처럼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40분까지 몇 번의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치료 일정으로 차 있었다.
모든 행동은 간병인과의 관계를 통해 이뤄졌다. 머리를 한 번 더 감기 위해, 조금 더 쾌적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부탁과 돈이 필요했다. 생활의 모든 부분이 경제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간병인을 잘못 만나면 더 그렇다. 한 간병인은 우리 집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음을 소문내고, 다른 환자들과 내가 소통하는 것을 막았다. 같은 방 환자분들이 내게 정보를 주려 말을 걸었을 때, 그 말을 듣지 말라며 방 사람들과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다행히 금방 소문이 퍼져 간병인이 교체됐지만 나의 모든 일상을 부탁하던 사람과 껄끄러웠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좋은 간병인도 여럿 만났다. 요새는 인력난이 심해 간병인분들이 중국에서 오시는 경우가 많다. 처음 중국인 간병인을 만났을 땐 소통이 걱정됐는데, 막상 함께한 생활은 재밌고 신선했다. 그분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옥수수 면으로 요리한 국수나 양배추로 담근 김치, 수박의 흰 부분으로 담근 수박 김치 같은 건 평생 먹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생활 중국어도 가르쳐 주시고, 내 몸이 좋아지는 과정을 볼 땐 나와 함께 기뻐해 주셨다. 어떻게 보면 불편할 수 있는, 하루 종일 계속되는 인간관계가 갈수록 편해지고 정드는 것이 낯설었다.
처음 사고가 나고 6개월까지를 ‘급성기’라 한다. 이때 가장 많은 회복이 이루어진다는데 나 역시 그 시기 동안 많은 변화를 보였다. 들썩이는 것만 가능했던 무릎에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침대 난간에 앉아 발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정말 잠깐이긴 했지만 침대를 잡고 갑자기 서는 경험도 해서 깜짝 놀랐다. 그렇게 처음엔 워커
[1], 그다음엔 보행기 같은 기구를 타고, 그다음엔 네발 지팡이, 그다음엔 한발 지팡이를 잡고 걷는 연습을 했다. 하루하루를 보면 달라진 것이 없는 듯했지만, 크게 보면 조금씩 진전이 있었다.
갑작스레 신체적 불편함을 겪게 된 환자와 보호자들은 대부분 예민하고 까다롭다. 그런데도 치료사 선생님들은 매일 이들에게 “할 수 있다”, “잘하고 있다”고 응원해 주셨다. 더구나 내가 만난 치료사분들은 모두 내 나이 또래라서 친해지기 쉬웠고, 편해서 자주 만나게 되는 친구 같았다. 병원 내 사람들끼리 친해진다는 것은 사고 전까진 내가 전혀 몰랐던 세계였다. 매일 같은 시간에 웃는 얼굴로 맞아 주던 치료사분들이 아니었다면 이 기간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 겪었고 현재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가장 큰 불편함을 꼽으라면 배변 문제일 것이다. 하반신이 마비되면서 장기도 함께 마비되어 대소변을 스스로 볼 수 없었다. 소변의 경우 소변줄을 달았고, 대변은 좌약을 넣어서 빼야 했다. 그리고 기저귀를 해야 했다. 기저귀라니! 나이 서른이 다 돼서 기저귀를 차고 있는 것에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 자괴감은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재활 치료를 하며 조금이라도 몸에 힘을 주면 변이 나왔다. 나는 변이 나오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냄새로 그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처음에는 창피함에 방에 돌아와서 울었지만, 나중에는 그런 실수를 두고 치료사 선생님들과 농담까지 주고받았다. 시간이 지나며 실수 빈도도 낮아졌다. 이전엔 기구를 통해 배출하던 소변을, 힘을 주어 스스로 배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기저귀가 아니라 화장실에서 처음 대변을 봤을 때는 같은 방 간병인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똥 쌌다고 박수받은 사람은 갓난아기 아니면 나밖에 없을 것이다.
엄청난 발전과 느린 회복 속도, 괜찮다 싶으면 터지는 새로운 문제들 속에서 매일 희망과 절망을 오갔다. 나는 계속해서 어디까지 좋아질지, 지금은 좋아지고 있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고 스스로를 닦달했다. 게다가 장애를 갖게 된 것을 받아들여야 하면서도, 조금이라도 회복의 기미가 보일 때면 장애를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었다. 그랬던 내게 새로운 출발점이 된 것은 만화였다.
날갯짓이 몰고 온 토네이도
만화는 나에게 잊지 못할 경험들을 가져다줬다. 그림을 전공한 적도, 체계적으로 배운 적도 없는 내가 새로운 꿈을 갖게 됐다. 재활을 하며 내가 받는 운동 치료나 작업 치료, 병원에서 만난 환우들의 이야기를 일기로 쓰는 습관이 생겼다. 이걸 나처럼 예상치 못한 사고나 질병을 갑자기 겪는 사람들과 공유하면 어떨까? 비장애인일 땐 몰랐던 생소한 치료가 많다 보니 글보단 그림으로 그리면 이해도 쉬울 것 같았다. 처음엔 노트에 나를 닮은 캐릭터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앞머리가 있는 단발에 웃는 얼굴이었다. 내 상황이 좋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만화까지 우울하게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 연두 캐릭터가 사고 이후 감정 변화를 겪고 신기한 재활 치료를 받는 만화를 그릴 때면 자유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연두의 재활일기〉 연재의 시작은 우연히 내 노트를 본 치료사 선생님들께서 만화를 인스타그램에 올려 보라고 제안하면서부터였다. 업로드를 시작한 지 두 달쯤 지났을 때 주 2회 연재하는 패턴이 잡혔다. 다음 만화가 언제 올라오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생겼다. 갑작스럽게 진짜 웹툰 작가가 된 것 같아서 신기했고, 소재가 생길 때마다 메모해 두는 버릇이 생겼다. 안 하던 SNS를 하면서 나답지 않은 주책스러운 댓글을 달고 어색하기도 했다. ‘힘든 상황일 텐데 밝은 캐릭터로 그림을 그려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같은 댓글이 달리면 마음이 두둥실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