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엔 배급도 국유화도 없다
기본소득 얘기를 꺼내면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이 있다. “그거 사회주의 아닌가요?” 사회주의에는 정말 다양한 조류가 있다. 의문을 던지는 사람마다 머리에 있는 사회주의의 모습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통념상 시장 경제 부정, 사유재산 부정, 국유화, 계획 경제, 독재, 배급 등의 이미지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보통 기본소득을 사회주의라고 비판할 때 그 근거가 되는 것은 국가가 국민에게 돈을 직접 준다는 것에 있다. 사회주의는 국가가 돈을 주는 정치 체제일까? 1991년에 지구상에서 소멸한 소련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가 기본소득을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대신 그 나라들에는 배급 제도가 있었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도 국가의 특수 목적, 예컨대 전시의 군사력 강화를 위해, 저개발국의 경우엔 경제 성장의 촉진을 위해, 혹은 특정 물품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때 배급이 시행되는 일이 있었다. 다시 말해 통상적인 시장 기구를 통해 물품의 합리적인 유통이 불가능할 때 국가가 개입하여 물품을 강제 조달한 것이다.
구(舊)사회주의 국가에서의 배급 제도는 이보다 규모가 훨씬 크고 전일적인 것이었다. 구사회주의 체제에서의 경제는 생산과 소비를 비롯한 모든 경제 행위가 중앙의 총괄적이고 전체적인 계획에 따라 통제되고 운영됐다. 따라서 이러한 체제에서 배급 제도는 중앙의 계획 경제에 있어 원천적이고 필수적인 제도였다. 그렇다고 구사회주의 체제나 지금의 북한 같은 나라에서 모든 물품이 배급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크고 작은 시장 제도가 늘 함께 존재했다. 다만 배급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자본주의보다 높고 주민의 욕구와 생활을 통제하는 기본적인 수단으로 작동했다는 것이다.
만약 물품을 배급하는 것 대신 현금을 주면 어떻게 될까? 쌀은 필수품이지만 쌀 한 가마니를 주는 것과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는 현금을 주는 것은 다르다. 전자로 할 수 있는 것은 밥을 짓는 것뿐이다. 쌀을 내고 책을 사거나 영화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현금을 받는다면 필수품과 기호품 사이에서 스스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쌀을 현금으로 바꿀 수는 있겠지만, 애초에 현금을 준다면 그런 수고는 필요 없다.
서비스도 비슷하다. 전기는 필수품이다. 만약에 모든 가구에 매월 300킬로와트시kWh의 전기를 무상 사용할 수 있는 바우처(voucher)를 지급한다고 해 보자. 이것은 모든 가구에게 그만큼의 전기를 쓰도록 독려하는 것과 같다. 남겨 봤자 현금으로 환급해 주는 것도 아니고 다음 달로 이월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후 위기 시대에 에너지 낭비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그럼 무상 바우처의 전기량을 적절한 수준으로 조절하는 것은 어떨까? 그런데 과연 그 ‘적절함’은 누가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국가가 현명한 결정을 할 수 있을까?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국가가 가부장처럼 이런 결정을 대신 해 주기를 원치 않는다. 기본소득은 시민의 자유로운 선택의 범위를 넓히는 데 관심이 있다.
위와 같이 기본소득은 배급과 전혀 다르다. 배급은 물품을 주는 것이고 기본소득은 현금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급은 당국이 국민의 욕구를 통제하는 수단이고 기본소득은 그것을 어떤 욕구에 쓸 것인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욕구 충족을 위해 현금을 사용하는 장소는 바로 시장이다. 기본소득은 충분히 발전한 시장 경제를 기초로 작동한다. 우리는 앞서 기본소득의 5대 특징 중 하나가 ‘현금 지급’임을 확인했다. 그것은 시민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한다는 의미다.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을 침해하는 당국의 지나친 개입, 사회적 통제를 우려한다. 기본소득은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
기본소득은 생산 수단의 국유화와도 아무 관련이 없다. 물론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철도나 항공, 발전, 금융 등의 산업은 필요에 따라 국・공유화 할 수 있다. 최근 코로나 사태 이후 줄도산 위기에 빠진 항공사의 국유화가 자유주의 진영의 대표 격인 미국에서 논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간산업이 아닌 보통의 기업들을 국・공유화해야 한다는 생각은 기본소득의 생각과 한참 거리가 멀다.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공유지분권’이라는 전혀 다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뒤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2018년 핀란드에서 제 18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한국의 학자들이 진행하는 세션이었는데 플로어에서 한 중국 참가자가 발언권을 얻었다. 그는 중국은 국영 기업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기본소득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웅변을 토했다. 그때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공동 창립자 중의 하나인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이 일어나서 (이 분은 ‘일어나서’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 중국인에게 날카롭게 반문했다. “당신들 중국인은 그 중국 국영 기업에 대해서 거버넌스(governance)를 가지고 있느냐?” 그 중국인은 답을 하지 못했다.
기본소득은 국유화를 원하지 않으며, 국유화를 한다고 기본소득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국영 기업의 수익이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기능하려면 앞서 가이 스탠딩이 지적한 것처럼 국민이 그 기업의 실질적 주인이어야 가능하다. 제주도민은 삼다수를 만드는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의 주인이 아니다. 공공(public)이라고 해서 공동(common)의 것은 아니다. 기본소득은 민영화냐 국유화냐, 사기업이냐 공기업이냐 같은 전통적인 좌・우파 대립의 한 편에 서 있지 않다. 기본소득은 이 대립을 초월한 완전히 색다른 사고다.
기본소득의 시장 친화적인 성격을 두고 이른바 좌파들은 기본소득이 자본주의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보통 사회당, 사회민주당, 노동당 등의 이름을 가진 유럽의 중도 좌파 사회 민주주의 정당들이 그렇다. 기본소득이 ‘노동 친화적’이지 않다는 이유에서 ‘자본 친화적’이라 비판하며 대체로 기본소득을 거부한다. 공산당 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201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사회당의 브누아 아몽(Benoît Hamon)은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했지만 결선 투표에 오르지도 못하고 5위로 낙선했다. 유럽 좌파에서 아몽 같이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기본소득은 노동 여부와 관계없이 소득을 지급하는, 따라서 노동과 소득 사이의 전통적인 연결 고리를 끊는 아이디어다. 그에 반해 사회당과 공산당 같은 전통적인 좌파는 여전히 ‘노동 윤리’에 기초하여 완전 고용을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유럽에서 보통 녹색당, 그리고 전통적인 좌파가 아닌 진보 정당들이 지지하고 있다.
억만장자들은 왜 기본소득을 지지할까
기본소득은 유명한 억만장자들의 입을 통해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린다.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테슬라의 창업자 일론 머스크와 페이스북(현 메타)의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다. 일론 머스크는 짧게 자주 기본소득에 대해 언급했다.
“자동화로 인하여 보편적 기본소득 혹은 그와 유사한 어떤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2017.2.
“로봇이 사람보다 일을 못하는 경우는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대량 실업을 어찌할 것인가? 거대한 사회적 도전이 있을 것이다. 나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보편적 기본소득과 같은 것을 가지게 되리라 생각한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2021.8.
“위험하고 반복적이며 지겨운 일은 로봇이 하게 될 것이다. 본질적으로 미래에는 물리적인 노동은 선택이 될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장기적으로 보편적 기본소득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2016.11.
프롤로그를 장식했던 인용문은 마크 저커버그가 페이스북 창업을 위해서 자퇴했던 하버드 대학의 2017년 졸업식 축사에서 했던 말이다. 그 연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나는 하버드를 떠나 10년 만에 수십억 달러를 벌고 있는데 수백만 명의 학생들이 창업은커녕 학자금 대출도 못 갚고 있는 우리 시스템은 뭔가 잘못되었다.”, “내가 코딩을 할 시간에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면 ...... 나는 오늘 여기에 서 있지 못할 것이다. 가장 위대한 성공은 실패할 자유로부터 나온다.”
한편 마크 저커버그는 알래스카를 방문하여 알래스카 영구기금 배당에 큰 감명을 받았다. 특히 알래스카 영구기금을 만든 제이 해먼드(Jay Hammond) 주지사가 공화당 소속이었음을 염두에 두며 같은 해 7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몇 가지 점에서 이것은 기본소득에 대한 참신한 접근법이다. 첫째, 증세를 하지 않고 천연자원으로부터 재원이 나온다. 둘째, 큰 사회 안전망이라는 진보적 원리가 아니라 작은 정부라는 보수적 원리로부터 생겨났다. 이것은 기본소득이 민주당과 공화당을 아우르는 아이디어라는 점을 보여준다.”
왜 이런 억만장자들은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것일까? 물론 초국적 기술 기업의 CEO로서 자동화가 실업을 낳고 실업은 시장 수요의 감소로 이어져 자신의 기업의 물품과 서비스를 구매할 소비자가 줄어들 것에 대한 우려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기본소득은 상품에 대한 수요를 유지해 주는 새로운 방법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다만 이는 다소 속류 유물론[1]적인 시각이다. 이들은 이미 가지고 있는 돈도 다 쓰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자다. 단순히 사업가적 동기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편협한 접근이다.
억만장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기본소득을 지지한다면 오히려 이런 설명이 타당할 것이다. 자동화 기술과 인공지능의 발전은 노동 소득의 몫을 급격히 줄일 것이기 때문에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와 빈곤 문제가 대두될 것이다. 이런 “사회적 도전”, 억만장자 입장에서 읽는다면 “사회적 불안”을 해결하고 파국을 막을 방법은 기본소득밖에 없다고 그들은 여기는 것이다. 즉, 기업 경영자가 아니라 사회사업가의 관점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초국적 기술 기업의 정점에서 사태를 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이 변화에 대한 체감이 빠른 것일 수도 있다.
이들의 시각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생산과 노동의 변화에 따른 사회의 대응 양식을 논의하는 것은 유익하다. 인공지능 등 기술 혁신으로 인한 자동화의 성과를 소수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회 혁신으로 이어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이 그 성과를 누릴 수 있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기술 혁신이 다수의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 밸리의 기업가 중에는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많다. 대표적인 사람이 실리콘 밸리의 스타트업 창업을 지원하는 기업 ‘와이 컴비네이터(Y Combinator)’의 샘 알트먼(Sam Altman)이다. 와이 컴비네이터는 ‘에어비앤비(AirBnB)’, ‘드롭박스(Dropbox)’와 같은 기업에 시드 펀딩(seed funding)을 한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accelerator)다. 와이 컴비네이터는 리서치 랩을 만들어 기본소득 실험에 착수했다. 그들은 실험 착수의 동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일의 속성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노동 시장의 불확실성이 증가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임금과 안정성 제공을 못 하고 있다는 인식이 동기 부여가 됐다. ‘새로운 기술은 굉장한 부를 창출하는데, 왜 이 기술은 미국의 빈곤을 해결하는 데 사용되지 않을까?’라는 윤리적 고민도 이 실험에 출발하는 데 기반이 됐다.”
미국의 혁신 기업가들 사이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지지가 커지는 가운데, 한 중국계 미국인은 202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하고 민주당 경선에 참여했다. 바로 앤드류 양(Andrew Yang)이다. 그의 핵심 공약은 ‘자유배당금(Freedom Dividend)’이라 명명된 보편적 기본소득이었다. 그는 18세 이상의 모든 미국 시민에게 월 1000달러(120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고 말했다. 일론 머스크와 할리우드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Nicolas Cage)도 앤드류 양을 지지했다. 아쉽게도 민주당 경선에서 중도 사퇴하여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 197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지 맥거번(George McGovern)의 선거 강령에 잠시 포함됐던 ‘시민보조금(demogrant)’ 이래 48년 만에 대선에서 기본소득 의제가 호명되는 일대 사건이 되었다.
최근의 기본소득 논의를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기본소득은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우파와 좌파, 부자와 빈자의 한 편에 서 있지 않고, 기존의 정치적 대립 구도를 교차하며 횡단하고 있다. 최소한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란 점은 분명하다.
기본소득을 주면 일하는 사람이 있을까
다들 기본소득을 주면 사람들이 게을러지고 일하는 사람이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한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럼 당신도 기본소득이 생기면 게으름을 피울 것이냐”고 물어보면 자신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 대답한다. 요컨대 남들이 게을러질까 봐 걱정이라는 것이다.
독일의 기본소득 운동가 다니엘 해니(Daniel Häni)와 에노 슈미트(Enno Schmidt))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기본소득: 문화적 충동>에는 이 질문에 대한 독일인들의 답변 결과가 나온다. 응답자의 60퍼센트가 지금의 일을 계속할 것이라 대답했고 30퍼센트는 일을 좀 줄이고 다른 일을 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 같냐는 질문엔 80퍼센트가 일을 그만둘 것 같다고 답했다.
이 우려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실제로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있거나 지급했던 곳의 사례를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알래스카와 이란 어디에서도 기본소득 지급 이후 노동 공급이 줄었다는 증거는 제출된 바 없다. 2018년 2월에 독일 노동연구소(Institute for the Study of Labor・IZA)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1982년 알래스카 영구기금 배당이 시작된 이래 배당은 고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오히려 파트타임 일을 하는 사람이 1.8퍼센트 증가했다고 한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인디언 보호구역에 사는 체로키(Cherokee)족의 사례는 인상적이다. 체로키족은 1994년 카지노와 호텔을 세우기로 하고 1997년 11월에 마침내 ‘하라스 체로키 카지노(Harrah’s Cherokee Casino)’를 개장했다. 처음엔 많은 사람들이 카지노가 술과 범죄, 나태를 가져와 지역과 부족을 망칠 것이라 우려했다. 체로키 족은 카지노 건립과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결정을 했는데, 카지노 수익의 절반은 부족 의회 기금으로 적립‧사용하고 나머지 절반은 약 1만 5000명의 주민에게 연 2회 현금 지급을 하기로 한 것이다. 액수는 카지노 수익에 따라 변동했는데, 2006년에는 1인당 연간 9000달러, 2010년에는 7347달러에 달했다. 아동도 성인과 동일한 액수를 받았다. 양육자에게 지급하지 않고 성인이 될 때까지 적립했다가 성인이 되면 적립액을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아동의 행동 및 정서 장애가 무려 40퍼센트나 감소했고 고교 졸업률이 상승했다. 세대 간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부모의 주류 소비가 감소했으며, 아동이 성인이 되었을 때 약물에 중독되거나 정신 질환에 걸리는 경우가 33퍼센트나 감소했다. 카지노 배당금을 받은 사람의 노동 시간 감소는 없었으며 떨어진 것은 범죄율이었다. 기본소득이 개인의 소득을 증가시키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료비, 치안 및 교정 시설의 운영비 또한 줄여준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기본소득을 받게 되면 게을러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 건강이 개선되고 삶의 의욕이 높아진다는 사실은 캐나다, 나미비아, 케냐, 바르셀로나, 인도 등에서 일어난 수많은 기본소득 실험(pilot)에서도 반복적으로 입증된 바 있다. 2017~2018년에 진행된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은 북유럽 복지 국가를 대표하는 나라의 실험이라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주목받았다. 특히 핀란드 실험은 세계 최초로 중앙 정부 차원에서 전국 단위로 한 실험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또한 이 실험은 당시의 중도 우파 연립 정부가 ‘기본소득이 근로 의욕을 증진하는지’를 측정하는 것이 실험의 주요 목적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주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실험의 설계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실업부조의 일종인 ‘기초 실업 보장’을 받는 25~58세의 실업자 2000명을 무작위로 추출하여 의무적으로 실험에 참여하게 했다. 의회는 이를 위해 법안까지 통과시켰다. 기초 실업 보장의 세후 평균 수령액은 월 560유로(75만 원) 정도였는데, 이와 동일한 월 560유로를 기초 실업 보장이 아닌 기본소득으로 받게 하여 그 변화를 측정하는 실험이었다. 즉, 실험 참여자가 실험 전과 실험 후에 수령하는 금액의 변동은 발생하지 않고 그 금액의 ‘명목’만 달라지는 것이었다.
같은 금액을 명목만 달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실업부조는 실직 상태일 때 받는 것이므로 풀타임이건 파트타임이건 일을 하게 되면 수령이 불가하다. 하지만 기본소득의 특징 중 하나는 무조건성이므로 고용 상태와 상관 없이 그 금액에 변동이 없다. 즉 실업자는 일을 하는 순간 실업부조가 없어지므로 일하려는 동기가 약한 대신, 기본소득 수령자는 일을 시작하면 기본소득에 임금을 더한 금액이 총소득이 되므로 일할 동기가 더 클 수 있다. 이것이 실험 주체의 가정이었다. 또한 실업부조는 구직 활동을 하고 있다고 입증해야 할 의무가 주어지는 반면, 기본소득은 아무 조건이 없다는 점, 실업부조는 노동 시장 탈락자라는 굴욕감을 주지만 기본소득은 그렇지 않다는 점 등의 차이도 있다.
실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실험 기간 동안 기본소득 수령자는 연간 평균 78일을 일했고, 대조 집단, 즉 기초 실업 보장 수령자는 연간 평균 73일을 일했다. 평균 5일을 더 일한 것이다. 다만 핀란드 정부는 실험 도중에 실업자가 적극적인 구직 노력을 하지 않으면 실업 급여의 4.65퍼센트를 삭감하는 정책인 ‘활성화 모델’을 도입했다. 만약 이 모델을 도입하지 않았거나 실험이 2년보다 더 길었더라면 근로일의 차이는 5일보다 더 커졌을 것이다. 그 외에 기본소득 수령인은 우울증이 10퍼센트포인트 감소했고 10점 만점으로 평가한 삶의 만족도 수치가 대조 집단의 6.8점보다 훨씬 높은 7.3점을 기록했다. 전반적으로 기본소득 수령자는 삶의 질이 올라가고 스트레스는 감소했으며 집중력과 자신감이 증가한 것으로 보고됐다.
한국의 주요 언론들은 핀란드 실험이 시작되기 전부터 진행 중인 동안에도, 기본소득을 받으면 일을 덜 하게 될 것이라고 예단했다. 실험이 끝나고 오히려 기본소득을 수령한 집단이 일을 더 한 것으로 드러나자 이번에는 고용률이 목표만큼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고 논조를 바꿨다. 대표적인 곳이 83개 대기업이 대주주로 있는 《한국경제》다. 2018년 4월 24일, 기본소득 실험 중의 기사 제목은 “공짜 소득에 근로 의욕 떨어져”였지만, 실험이 끝난 뒤인 2020년 5월 7일에는 “고용률 개선이라는 당초 목표 달성에 실패”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기본소득을 받으면 일을 덜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심리적인 편향이거나, 사실 관계에 대한 무지 혹은 왜곡이다. 그런데 일을 덜 할 것이라는 우려가 과연 우리나라 현실에서 적절한가? 근로기준법 제 50조는 1주의 근로 시간을 40시간 이하로 규정하고 있다. 흔히 언급되는 ‘주 52시간’은 당사자 간에 합의했을 시에 가능한 ‘연장 근로’ 규정임을 제 53조가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모두가 마치 주 52시간이 법정 근로 시간인 것처럼 말한다. 심지어 사업주들은 52시간도 적다고 아우성을 친다. 노동자들은 먹고살기 위해 ‘로켓배송’, ‘새벽배송’, ‘샛별배송’을 강요받는다. 이러한 현실에서, 덜 일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 최장 노동을 자랑한다. 일하다 쓰러져 죽는 우리 사회는 일을 줄여야 한다. 기본소득을 받고도 일을 그대로 할지, 기본소득을 받고 일을 줄일지 결정하는 것은 일하는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할 문제다. 그러나 그 이전에 기본소득을 통해서 일을 줄일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기후 위기 시대는 에너지 처리량과 물질적 생산을 줄여야 하는 시대다. 노동 시간의 단축은 이런 맥락에서도 필요하다.
결국 세금을 더 걷겠다는 것 아닌가
앞서 논의했듯 이념적 색안경을 끼고 기본소득을 보는 것은 무용하다. 그럼에도 막상 현실에 적용한다고 생각하면 이러한 의문이 고개를 든다. 결국 세금을 더 걷겠다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다.
이 세상에 세금을 더 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금은 정부의 주요 수입원이고 세금이 없다면 정부가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동시에 알고 있다. 세금을 내고 싶지 않은 마음과 정부의 불요불급한 세입은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작은 정부(small government)’라는 대안을 떠올리게 한다. 정부의 기능과 규모를 축소하고 세금과 재정 지출을 줄여 경제의 운용을 기본적으로 시장에 맡기는 것이다. 이때 주로 축소되는 것은 공공 서비스와 같은 사회 복지, 그리고 규제나 공공 투자와 같은 시장 개입이다.
만약에 경제학원론의 가정처럼 시장 참여자의 경제적 힘이 동등하고 정보가 균등하다면 시장은 실패 없이 잘 작동할 것이다. 다만 시장은 생겨난 이래 단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다. 항상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따라서 시장을 내버려 두면 항상 시장 내부의 권력이 작동하여 자원과 부가 한쪽으로 쏠리게 된다.
1970년대 선진국에서 경기 불황 속에 인플레이션이 함께 일어나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발생하면서 규제 완화(deregulation)와 감세(tax cut), 사유화나 다를 바 없는 민영화(privatization)로 무장한 ‘신자유주의’ 아이디어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1979년 영국 수상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의 보수당 정부 수립과 1980년 미국 로널드 레이건의 대통령 당선은 만개의 신호탄이었다.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의 주장대로 ‘낙수 효과(trickle-down effect)’가 발생하여 부유층의 소득 증대가 전 국민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졌을까? 앞에서 살펴본 미국의 1980~2015년 소득 양극화 그래프는 신자유주의 이론이 거짓말임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미국의 소득 불평등이 그렇게 확대된 배후에는 무엇이 작동하고 있었을까? 바로 감세 정책이다. ‘세금을 줄여주면 투자가 촉진되고 투자가 촉진되면 성장이 일어나서 그 풍요를 모두 누리게 된다’는 단순한 이데올로기를 강변하며 공화당 레이건 정부와 부시 정부는 엄청난 세율 인하를 단행했다.
누진세의 의미
소득세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누진세(progressive tax)’ 제도로 과세한다. 누진세란 소득 구간을 몇 개로 나누고 소득이 높은 구간의 ‘세율’을 높이는 것을 말한다. 물론 세율이 똑같은 비례세(flat tax)를 적용하더라도 소득이 많은 사람은 세금을 많이 낸다. 예컨대 세율이 10퍼센트로 고정되어 있다고 하면 1000만 원 번 사람은 100만 원을 내고, 10억을 번 사람은 1억을 낸다. 누진세는 이와 달리 예를 들어 1000만 원까지는 10퍼센트 세율, 1억까지는 20퍼센트 세율, 10억까지는 30퍼센트 세율, 이렇게 단계적으로 세율을 높여 부과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까의 10억 소득자는 어떻게 세금을 내게 될까?
①1000만 원까지는 10퍼센트 세율, 즉 100만 원.
②1000만 원에서 1억까지는 20퍼센트 세율, 즉 1800만 원(9000만 원×0.2).
③1억에서 10억까지는 30퍼센트 세율, 즉 2억 7000만 원(9억×0.3).
④누진세 총합은 이 모두를 더한 것으로 2억 8900만 원이다. 아까의 1억보다 훨씬 늘어난다.
세율이 똑같더라도 어차피 많이 벌면 많이 내게 되어 있는데 거기에 구간별로 세율까지 높인다고 하니, 고소득자는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선진국 모두가 이런 누진세 제도를 운영한다. 왜일까? 그만큼 시장 경제는 소득 불평등이 심하게 발생하고 고소득 구간일수록 불로 소득 등의 불공정한 소득의 비율이 높으며, 그것을 정부가 개입하여 재분배하지 않으면 체제를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누진세는 바로 이 점을 말해주는 제도다.
감세의 비밀
미국의 감세 정책을 설명하려고 먼 길을 돌아왔다. 10억 소득자의 예시에서 30퍼센트를 ‘한계세율’ 혹은 최고세율이라 한다. 미국의 한계세율 추이 그래프를 보면, 미국의 최고세율은 1963년까지 91퍼센트였다. 당시 연간 소득 40만 달러를 넘는 소득에는 소득세율 91퍼센트가 적용됐다. 미국의 소비자 물가가 당시보다 9배 높아졌으므로 1963년의 40만 달러는 지금 360만 달러(43억 원) 정도 된다. 쉽게 말해 연간 43억을 상회하는 소득분에 대해서는 91퍼센트를 세금으로 걷어간 것이다. 자본주의 본산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가 바로 미국의 경제가 가장 좋던 시절이며 중산층이 가장 두터웠던 ‘아메리칸 드림’의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