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과 도시
도시의 역사는 농업의 발달과 함께 시작했다. 우리가 1차 산업이라고 부르는 농업이 발달하기 전에는 도시라고 부를 만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농업이 발달하며 인간의 정주 환경이 만들어졌고, 인간의 수명과 인구가 급격히 늘어날 수 있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4대 문명의 발상지는 모두 농업 발달과 함께 등장한 도시들이다. 하지만 당시의 도시가 곧 산업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농업의 중심지보다는 물물 교환이 가능했던 물류의 중심지가 도시로 발전했다. 고대 도시까지 살펴보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의 창안(長安)[현재의 시안(西安)], 조선 시대의 한양은 행정과 물류의 중심지였다. 사람들이 만나 각지에서 생산된 물건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도시가 발달했다.
이처럼 도시는 산업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한 도시에 섬유 산업을 위한 공장이 있고, 다른 도시에 자동차 산업을 위한 공장이 있으면 두 도시가 서로 다른 건축 구조와 형태를 갖추게 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도시는 인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망라한 결과물이다. 로마에 가서 콜로세움(Colosseum)을 보면 그 시대에 살지는 않았더라도 당시의 건축 기술은 물론 경제적 상황과 정치 체제를 상상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의 원형을 만든 것은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기계 공업이다. 산업혁명 이전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는 기원전 1세기경의 로마였다. 당시 로마의 인구는 100만 명으로 현재 미국 보스턴(68만 명)보다 많았다. 공공 광장인 포룸(Forum)과 판테온(Pantheon) 신전, 상하수도 시설과 5만 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던 콜로세움은 로마라는 도시의 위용을 보여 준다.
로마의 인구가 100만 명이 넘었다는 사실은 인류 역사에서 꽤 중요한 대목이다. 100만 명의 도시를 운영하고 시민의 삶을 유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한양의 한성부 인구는 초기에 20만 명이 되지 않았고, 1800년대 후반에 가서야 가까스로 40만 명을 넘겼다. 전국의 인구가 700만 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수도 한양의 인구는 그리 많지 않았던 셈이다. 많은 도시 학자는 한양의 기반 시설이 부족했다는 점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도시가 많은 인구를 수용하려면 상하수도 시설이 잘 갖춰져야 하는데, 한양은 인구 40만을 넘겼을 때부터 하수 시설에 과부하가 걸렸다. 청계천에는 매일 처리 한계를 넘어선 하수가 유입돼 주변이 오물 냄새로 가득했다. 200년 전까지 한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의 인구가 50만 명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2000년 전 로마의 100만 도시가 얼마나 위대한 성취였는지 반증한다. 로마 이후 중국의 창안과 항저우(杭州), 베이징(北京) 등이 번성했지만, 중국을 대표하는 이 도시들도 100만 명 규모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로마 이후 100만의 한계를 처음 넘은 도시는 영국 런던이다. 런던은 19세기 초에 인구 100만 명을 돌파하고, 100년이 채 되지 않아 500만 명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그 배경에는 산업혁명이 있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도시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증기 기관차 등 교통수단의 발달이 인구와 물류의 이동량을 늘렸고, 건축 기술은 상하수도 현대화에 기여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지하철이 운행됐고, 20세기 초반에는 자가용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컨베이어 벨트를 활용한 대량 생산 모델도 이 시기에 탄생한 것이다. 대량 생산으로 부유한 일부 계층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산업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생산업이 발달하며 공장이 있는 곳에 노동자가 모였고, 노동자가 모인 곳이 도시로 성장했다. 노동력은 곧 자본의 상징이었다. 더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수록 더 많은 부가 쌓였다. 이는 다시 도시 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우리가 현재 도시라고 부르는 형태는 대부분 산업혁명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 곳이다. 자동차와 지하철이 등장한 것도 산업혁명을 통해서다. 기계 혁명을 통해 발명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는 도시가 수직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을 마련했다. 산업혁명 덕분에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도시가 생겨난 것이다.
디지털 혁명이라 불리는 3차 산업혁명은 도시의 연결을 강화했다. 기존에는 편지로 오갔을 법한 정보가 이메일로 대체되고, 거리의 제약이 해소됐다. 도시 외곽에 살면서 원격 근무를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왔다. 하지만 3차 산업혁명은 도시의 형태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물리적인 형태와 조직을 완전히 바꿔 놓은 이전의 산업혁명과 비교해 보면 3차 산업혁명의 혁신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현대인은 3차 산업혁명 이전의 1960년대 런던에서는 살 수 있어도, 2차 산업혁명 이전의 1800년대 도시에서는 살지 못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로봇 공학, 인공지능, 사물 인터넷 등을 통해 도시 간 이동 수단의 재편을 예고하고 있다. 이동성의 변화는 인류의 도시에 기차와 지하철, 자동차가 생겼을 때처럼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자율 주행 자동차가 생긴다는 것은 출퇴근 시간에 운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단순한 사실 이상의 의미다. 사람들은 이제 지하철역 근처나 주차가 편리한 아파트에 살 이유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운전할 필요가 없으니 그 시간에 부족한 수면을 보충할 수도, 게임을 하거나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 퇴근이 늦어도 주차 공간을 찾느라 헤매지 않아도 된다. 자율 주행 자동차가 주차 공간이 있는 곳으로 알아서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역세권 아파트의 부동산 가치가 높고, 주차장이 없는 주택 단지의 부동산 가치는 낮다. 자율 주행 자동차가 확산돼 이런 가치가 무의미해지면 도시의 형태가 달라지고, 부동산 가치도 재편된다.
유럽의 도시는 운송 수단의 변화에 맞춰 발전해 왔다. 과거 마차가 다닐 수 있는 폭의 도로를 필요로 했던 유럽 도시는 근대화 이후 자동차가 잘 움직일 수 있는 방향으로 도로 형태를 바꿨다. 사람의 이동보다 자동차의 이동성이 중시되는 근대적 개념의 도시가 발달한 것이다. 도심에 왕복 14차선 도로가 있는 서울은 자동차 이동을 기준으로 계획된 도시다. 그러나 빅데이터를 활용하면 4차선이나 6차선만으로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조절할 수 있다. 결국 도로 폭은 줄어들고, 새로운 도시 공간이 생겨날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도시는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새로운 도시의 필요성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건축가의 일은 건물을 짓는 것에서 그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건축가의 중요한 역할은 인간의 삶을 읽어 내고, 이를 물리적인 환경으로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술의 진보는 우리 도시를 외형적으로 변화시키겠지만 궁극적으로 도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지는 못한다. 기술에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주체적으로 활용해 원하는 도시의 모습을 만들어 가야 한다.
디트로이트와 보스턴
이제는 전화선이 없어도 통화를 하거나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고, 스위치가 없어도 전등을 켜고 끌 수 있다. 1990년대에 ‘미래의 도시’나 ‘미래의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됐던 미래 주택의 모습이 많은 부분 일상으로 실현됐다. 그러나 지금의 도시가 1990년대의 도시보다 인간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주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 산업혁명을 통해 도시가 성장하는 동안 숨어 있던 많은 문제들이 불거지고 있어서다. 도시 공간의 불균형, 계층 간의 분리, 도심의 공동화나 사각 지대의 발생 등은 도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지 않는 탈산업 시대가 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세계 여러 도시는 탈산업화로 인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외적 성장이 없는 도시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도시가 더 빠르게 경쟁력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도시에 공장이 들어섰고, 도시는 잉여 생산을 통해 새로운 부를 창출했다. 그러나 조그만 골목길에 하나의 우물을 파서 사용하고,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비좁게 살았던 19세기 도시의 삶은 위생 문제를 일으켰다. 한편 부가 가치 생산을 통해 부를 쌓은 계층은 더 높은 삶의 질을 원했다. 과거의 귀족들이 서민들과 떨어져 성을 쌓고 살았던 것과 달리, 부르주아들은 도시 안에서 넓은 집터를 가지고 새로운 삶을 꾸려 가기 시작했다. 결국 도시 내의 공장은 위대한 생산 기지에서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가 불편해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여기에 부동산 개념이 확립되고 토지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공장은 도시에서 밀려나는 신세가 됐다. 도시가 새로운 모습으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지만 우리는 변화 기저에 있는 경제 논리를 간과하기 쉽다. 도시의 근대화는 넓은 길을 내거나 새로운 교통수단을 만들고, 더 쾌적한 주거 시설을 확충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도시 계획은 토지를 어떻게 하면 합리적으로 사유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19세기 파리는 불분명한 토지 구획을 정리하고 필지를 나눴다. 당시 토지 계획을 맡은 조르주 외젠 오스만(Georges Eugene Haussmann)은 도로를 기준으로 필지를 재정비했다. 모든 건물이 도로에 면하고 있으니 건물에도 충분한 빛과 공기가 유입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부동산 가치라는 새로운 개념도 생겨났다. 이전에는 거래의 대상이 아니었던 토지나 주택이 조건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상품으로 거래되기 시작했다. 부동산 개념은 실제 도시의 구조를 바꿨다. 산업화 초기에 공장은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방법만을 고민하면 됐지만, 이제는 공장의 부가 가치가 해당 부지에서 나올 수 있는 기대 가치보다 높아야 공장을 계속 운영할 수 있었다. 이전의 생산 시설은 공업용수를 공급할 작은 규모의 관개 시설과, 생산된 제품을 기차에 실어서 운반할 수 있는 정도의 물류 시스템만 있으면 충분했다. 하지만 생산량이 늘면서 추가적인 공장 부지와 공업용수, 물류 시스템이 필요했다. 도심에서는 이런 조건을 갖춘 부지를 찾을 수 없었다.
산업화의 광풍이 지나간 공장 지대는 개발 대상으로 전락했다. 18세기 후반부터 서인도와의 교역을 통해 발전한 런던의 대표 항만 지역 도크랜즈(Docklands)는 1960년대 물류 방식의 변화와 탈산업화로 고전하다가 1967년 항만 폐쇄로 몰락했다. 1980년대까지 도시 면적의 60퍼센트에 달하는 항만을 방치했던 런던은 새로운 산업을 유치하겠다는 목표로 도크랜즈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도크랜즈는 런던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부상했지만, 지역 내 생산 기능은 사라지고 서비스 산업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미국 디트로이트의 사례를 보자. 디트로이트는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와 포드(Ford)의 고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장들은 20세기가 시작될 때부터 한 세기 가까이 미국 생산업의 주축이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한국과 일본의 자동차 산업이 부상하면서 디트로이트는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공장은 문을 닫았고 노동자는 갈 곳을 잃었으며 도시는 폐허가 됐다. 여러 공공 기관과 민간단체에서 디트로이트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무너진 산업을 다시 복구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디트로이트의 사례는 단일 산업에만 의존하는 생산 도시의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에드워드 글레이저(Edward Glaeser)는 저서 《도시의 승리(Triumph of the City)》에서 미국 보스턴과 디트로이트를 비교하며 단일 산업에 의존하는 도시가 얼마나 취약한지 설명한다. 보스턴에서는 여러 산업이 성장하고 쇠퇴했다. 보스턴은 18세기 아프리카와 서인도 제도를 연결하는 삼각 무역으로 발달한 곳이다. 19세기에는 뉴욕과 필라델피아에 뒤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미국의 첫 기차 노선을 유치하며 새로운 물류 산업의 기지로 부상한다. 열차 기반의 물류 산업이 저물면서부터는 병원과 금융 산업 등을 지역 내에 유치했다. 이때 생긴 미국 최초의 병원인 매사추세츠 종합 병원(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은 여전히 미국 내에서 가장 큰 병원이다. 페이스북이 서비스를 시작한 지역도, 세계에서 가장 큰 바이오 테크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곳도 보스턴이다.
글레이저는 보스턴의 경쟁력으로 교육을 꼽는다. 하버드 대학과 매사추세츠 공과 대학(MIT)을 필두로 하는 보스턴의 교육은 경쟁력 있는 인재를 배출하며 지역 전체가 하나의 산업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산업을 창출해 나갈 수 있는 토대가 됐다. 디트로이트처럼 하나의 산업에 의존하는 도시는 위기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반면, 보스턴 같은 도시는 새로운 산업을 통해 계속해서 생존해 나갈 수 있다.
탈산업화가 시작된 한국에서도 여러 산업 도시가 디트로이트의 패턴을 닮아 가고 있다. 구미와 군산, 울산 등지에서는 탈산업화 도시 문제가 수면 위로 등장했다. 이런 흐름이 전국의 중소 산업 도시를 강타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소수의 산업에 도시 전체가 의존하는 디트로이트 도시 모델과 비슷한 국내의 많은 중소 산업 도시들은 시기에 차이가 있을 뿐, 탈산업화로 인한 도시 문제를 피하기는 어렵다. 일례로 울산은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전국 지방 자치 단체 중에서 1인당 개인 소득이 가장 높은 도시였다. 그러나 2018년의 사정은 다르다. 4월에 이어 7월, 9월까지 실업률이 가장 높은 도시로 전락했다. 2017년 울산의 자영업자의 폐업률은 13퍼센트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높았다. 한 지역의 대표 산업이 쇠락하며 인구가 외부로 유출되고, 감소한 인구가 도시 재정에도 영향을 주는 형국이다.[1]
생산의 효율성과 토지 가치의 경제성 때문에 대도시에서는 생산 시설이 점점 도시 밖으로 밀려난다. 이로 인해 대도시는 생산 기능을 잃은 소비 중심의 도시로 변하고, 생산 시설을 유치한 중소 도시는 소수의 산업에 의존하는 생산 도시가 된다. 이분법적인 도시 구조는 생산 도시의 기능이 잘 작동하는 산업화 성장 시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탈산업화 시기가 되자 생산의 기능을 상실하며 문제를 낳고 있다.
오늘날 도시 재생의 성공 여부를 좌우할 질문은 ‘어떻게 생산과 소비를 도시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것인가’다.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도시가 되려면 생산과 소비를 분리하지 않고 결합해야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된 산업화는 생산과 소비를 분리하는 방향으로 발전했고, 탈산업화 단계에 이르러 그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다. 산업화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이었던 것처럼, 탈산업화 시기에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사회주의 도시에서 배운다
지역 순환 경제는 음식, 의류 등 생활에 필요한 재화를 지역 내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구조를 말한다. 생산자는 번 돈으로 다시 지역 내의 다른 상품을 소비하기 때문에, 지역의 부가 다른 곳으로 유출되지 않고 선순환한다는 의미가 있다. 외부 요인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런 모델은 최근에서야 많은 서구 도시에서 화두로 떠올랐지만, 이전부터 비슷한 모델을 시도한 경우 가 있었다. 바로 사회주의 도시에서다. 사회주의 도시는 주거와 생산, 도시와 농촌을 결합한 도시 모델을 추구했다. 소비 도시로 전락하지 않고 도시 내에서 생산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회주의 도시의 기원은 도시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근대 산업혁명은 인류의 도시가 새로운 차원으로 성장할 기회를 제공했지만, 급격한 도시화로 이전에 없던 문제도 낳았다. 1854년 런던을 강타한 콜레라가 대표적이다. 빈민가였던 소호 일대에서 퍼진 콜레라는 식수원을 타고 전염돼 2주 만에 반경 200미터 안에 거주하던 주민 6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열악한 도시 기반 시설과 폭발적인 인구 유입으로 인해 벌어진 참사였다.
많은 학자가 도시화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칼 마르크스(Karl Marx)와 함께 사회주의 이념의 창시자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도 그중 하나였다. 엥겔스는 20대 초반이었던 1840년대, 공업 도시로 빠르게 성장 중이던 맨체스터(Manchester)에서 생활했다.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 전에 경영 수업을 받기 위해서였다. 맨체스터 생활 초반에는 부모의 기대와 다르지 않은 생활을 했다. 그러나 좁은 골목에 모여 사는 노동자의 삶을 목격하고, 기업가 집안의 도련님에서 노동자의 거주 환경 개선을 외치는 투사로 변했다. 엥겔스는 맨체스터 골목을 누비며 목격한 현실을 1845년에 발간한 저서 《영국 노동 계급의 상태(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에 담았다. 엥겔스의 책에는 영국 노동자의 주거 및 노동 실태가 적나라하게 서술되어 있다. 당시 맨체스터는 약 40만 명이 거주하는 큰 도시였는데, 그는 기록되지 않은 비공식 인구까지 집계하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세기 말까지는 도시 계획이라고 부를 만한 개념이 없었다. 로마 시대에는 새롭게 정복한 지역에 로마의 도시를 건설하기 위한 도시 계획이, 중세 시대에는 왕권이나 신권을 내세우기 위한 상징적 건축물을 기반으로 하는 도시 계획이 존재했다. 하지만 도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서의 도시 계획은 아니었다. 산업화 시기에 가장 크게 팽창한 런던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런던은 1840년에서 1901년까지 60여 년 만에 인구가 200만 명에서 400만 명으로 급증했다. 개발업자들이 많은 주택 단지를 마구잡이로 개발하면서 성장세는 계속됐다. 학자들은 새로운 산업 도시의 모델을 고민했다. 19세기 말 에버니저 하워드(Ebenezer Howard)는 전원도시(garden city) 운동을 통해 도시에 충분한 녹지 공원을 조성하고, 무분별한 팽창을 막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