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여름 미국 오리건주 후드산(Mt. Hood)에서 빙벽 등반을 강의하는 이본 쉬나드
이본 쉬나드는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나는 거의 60년 동안 비즈니스맨이었다. 그 말을 입에 담는 것이 알코올 중독자나 변호사임을 인정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다.” 두 사람은 오염되지 않은 황무지를 탐험하는 즐거움을 알리면서, 하이킹이나 클라이밍 같은 아웃도어 활동을 대중화하는 데 집중했다. 그런 활동이 이어지면 자연이 조금 덜 훼손될 것이라 생각했다.
전문가 수준의 장비를 전문적으로 사용할 의도가 없는 사람에게 판매하는 것은 마케팅에서 완전히 새로운 방법은 아니다. SUV 차량이나 디지털 카메라, 헤드폰 제조사들도 그렇게 한다. 육상 선수 모하메드 파라(Mo Farah)가 광고하는 나이키 운동화를 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거리 육상을 하는 데 그 신발을 신지는 않는다.
그러나 노스페이스와 파타고니아는 더 중대한 역설과 씨름하고 있다. 바로 현시대의 소비 지상주의다. 우리는 우리가 구입하는 물건에 대해 도덕적으로 옳다고 느끼기를 원한다. 두 회사는 단지 윤리적이고 친환경적이라는 것 이상의 이미지를 만들어 왔다. 재킷을 팔고 돈을 벌면서도 지구를 지나치게 해치지 않으려 한다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자연과 모험, 탐험에 관한 장대한 신념을 만들었기 때문에 경이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노력이 판매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두 회사는 더 많은 물건을 팔거나 세상을 더 많은 물건으로 채우려고 지나치게 애쓰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물건을 팔고 있다.
진정성의 문제라 할 수도 있을 텐데, 두 회사는 많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문제 해결에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우리는 암벽이나 빙하를 오르는 것이 사회에서 경제적 가치가 없다는 사실에 특별한 자부심을 가졌다.
더그 톰킨스와 이본 쉬나드는 대자연에 빠진, 일종의 낙오된 청소년이었다. 둘은 20세기 중반 미국 서부에서 클라이밍과 서핑에 심취했다. 유명 등반가이자 탐험가인 릭 리지웨이(Rick Ridgeway)에 따르면 1950~1960년대에 클라이밍은 ‘사회 부적응자 같은 소수의 별종들이나 하는 별난 스포츠’였다. 《롤링 스톤(Rolling Stone)》 매거진에서 ‘현실의 인디아나 존스’라 불렀던 릭 리지웨이는 톰킨스와 쉬나드의 오랜 친구이자, 현재 파타고니아에서 대중 소통 부문 부사장을 맡고 있다.
노스페이스와 파타고니아는 가이드북이 없는 외딴 곳을 탐험하는 데 그들의 뿌리를 두고 있다. 그 시절 부패하지 않은 자연으로 돌아가 캠프파이어 옆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책을 읽는 것은 초기 대항문화와 잘 어울렸다. 쉬나드는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암벽이나 빙하를 오르는 것이 사회에서 경제적 가치가 없다는 사실에 특별한 자부심을 가졌다.”
톰킨스는 1966년 샌프란시스코 노스 비치(North Beach) 인근에 노스페이스 첫 매장을 열고 등산 장비를 팔았다. 록 밴드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가 개점 축하 공연을 했고, 가수 조안 바에즈(Joan Baez)와 그녀의 동생인 사회 활동가 미미 파리냐(Mimi Farina)가 등장하는 패션쇼가 열렸다.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요세미티 등반의 황금기’를 이끈 선구자 중 한 명인 쉬나드는 1950년대 후반에 자신의 장비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바위 표면에 망치로 박은 뒤 뽑아서 재사용이 가능한 피톤(piton, 암벽 등반에 쓰이는 쇠못)을 만들었다. 이후 등반로 훼손을 막기 위해 피톤 대신 암벽 틈 사이에 손으로 끼워 흔적을 남기지 않는 알루미늄 초크를 고안했다. 당시 그의 열망은 가능한 한 적은 손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암벽 등반가인 더그 로빈슨(Doug Robinson)은 이를 ‘자연인을 위한 오가닉 클라이밍’이라 불렀다.
두 사람은 1960년대 중반에 만났는데, 그때 톰킨스는 노스페이스를 통해 쉬나드의 장비를 유통했다. 그들이 우정을 쌓던 초기, 둘은 캘리포니아로 급류 카약 여행을 떠났고, 그 여행에서 쉬나드는 얼굴에 15바늘을 꿰매는 부상을 입었다. 1968년 둘은 캘리포니아 벤투라(Ventura)에서 포드 이코노라인(Econoline) 밴을 타고 칠레와 아르헨티나 사이의 외딴 지역, 파타고니아로 갔다.
그해 톰킨스는 노스페이스의 지분을 5만 달러(5655만 원)에 팔고, 당시 아내였던 수지(Susie)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기반을 둔 캐주얼웨어 브랜드 에스프리(Esprit)를 세웠다. 스포츠웨어의 힙한 버전인 에스프리는 1980년대 스타일을 주도했다. 이후 톰킨스는 환경 운동을 촉구하는 빌 디벌(Bill Devall)의 《Deep Ecology: Living as if Nature Mattered》를 읽고, 의류 산업을 떠나 환경 보호에 전념하기로 한다. 1990년 에스프리가 매각될 당시 연간 매출은 10억 달러(1조 1310억 원)였다.
쉬나드 역시 등산 장비에서 시작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등반 의류를 수입하기 시작했고, 1973년 파타고니아라는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다. 초창기 직원 중 한 명인 크리스 맥디비트(Kris McDivitt)는 활강 스키 선수였다. 그녀는 파타고니아의 총괄 매니저를 거쳐 CEO에 올랐다. 이후 이혼한 톰킨스를 만나 1993년 결혼했는데, 두 회사의 결합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 커플은 자연을 보존하는 데 모든 시간을 쏟으며 살기 위해 파타고니아에 있는 220만 에이커(27억 평)의 땅을 사들였다. 그들은 이 야생 지역을 보호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를 위해 톰킨스가 야생을 탐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열정에 불을 지펴 얻은 돈을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