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유한 역사를 가진 힙합은 정치적 올바름을 요구받기도, 쿨하고 무모할 것을 요구받기도 한다. 우리에게 힙합은 ‘힙찔이’, 갱스터 음악을 넘어 그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혹은, 되어야 할까?
힙합은 1970년대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동한 이래 줄곧 논쟁적이었다. 힙합이 인권 운동에 앞장서며 사회적 메시지의 선봉장이 될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저 자유롭고 신랄한 악동 혹은 독설가가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힙합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힙찔이’라고 조롱당하거나, 과격하고 혐오 섞인 가사와 문화로 비난받기 일쑤다. 한국 힙합은 미국의 그것과 분명 다른 형태로 발전해 대중문화로 자리잡았으나, 힙합의 탄생 배경과 특유한 역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 없이 반문화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 것도 분명하다.
저자는 기존과는 사뭇 다른 시선으로 힙합을 바라본다. 힙합은 물론 정치적 색깔을 띠고 사회 운동의 일환이 될 수 있지만, 반드시 교훈적인 계몽의 메시지를 주어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장르로서의 힙합뿐 아니라, 아티스트 개인을 표현하는 예술적 수단으로서의 힙합에 주목한다.
그럼에도 분명 지켜져야 할 선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정치적 올바름을 제공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지나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개념은 성립하는가? 한국 사회에선 PC주의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다. ‘어느 새부터 안 멋져’진 힙합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The Guardian × BOOK JOURNALISM
북저널리즘이 영국 《가디언》과 파트너십을 맺고 〈The Long Read〉를 소개합니다.〈The Long Read〉는 기사 한 편이 단편소설 분량입니다. 깊이 있는 정보 습득이 가능합니다. 내러티브가 풍성해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부터 패션과 테크까지 세계적인 필진들의 고유한 관점과 통찰을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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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