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투자 대상이 아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취업을 준비했던 때, 안면이 있었던 교수님을 만났다. 그는 내게 아직도 학교에 있냐고 물었다. 직장을 구하지 못했느냐는 의미였을 것이다. 강사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꽤 규모가 큰 프로젝트에서 전임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눅 들지 않고 답할 처지가 됐다. 그러나 대답을 들은 교수는 말했다. “서른일곱이면 생각보다 연식이 있네.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하지 않겠어? 여자가 나이 들면 자리 잡기 쉽지 않아.”
그렇다. 기업 입장에서는 나이 든 여성에게 투자할 가능성이 낮다. 인적 자원으로서 가치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고용주 입장에서 채용은 미래를 위한 투자다. 사람을 뽑기 위해 비용을 써야 하고, 이들을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로 키우기 위해서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회사는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교육한 노동자가 다른 회사나 산업으로 이탈하는 것을 우려한다. 그래서 우수한 인재가 오래 회사에 남을 수 있도록 해당 분야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 이렇게 갖게 되는 역량을 전문 숙련(specific skills)이라고 한다. 특정 기업이나 산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전문 숙련과 반대되는 개념이 일반 숙련(general skills)이다. 일반 숙련이란 어느 직장에서나 두루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대학 교육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일반 숙련에 가깝다. 컴퓨터 활용 기술이나 조직 생활에 잘 적응하고 소통하는 기술 등이다. 어디에서나 두루 쓰일 수 있지만, 이런 능력을 갖췄다고 해서 핵심 인재가 되기는 어렵다.
여성은 기업이 전문 숙련을 가르치기에 적합한 노동력이 아니다. 지금의 사회 구조에서 여성은 결혼이나 출산, 양육 등의 이유로 노동 시장에서 떠날 가능성이 높다. 여성이 직장을 그만두면 그 손해는 고스란히 기업에게 전가된다. 결국 기업은 여성에게 비용을 투자해 중요한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전문적인 역량을 기를 수 있는 교육 기회를 받지 못하는 이유다.
더 큰 문제는 여성도 전문 기술을 익히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들이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노동자는 고용에 대한 보호가 약할수록 전문 기술을 익히기보다 일반 숙련을 얻고자 한다. 결혼이나 출산으로 경력이 단절될 수 있는 여성에게는 특정 기업에서만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 오히려 손해다. 언제든 직장을 옮길 수 있는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위험 회피 전략은 일반 숙련에 투자하는 것이다. 여성은 스스로 일반 숙련에 투자하고, 이로 인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평범한 노동자가 된다. 고용주가 여성 인력을 교육하지 않고, 여성도 전문 숙련을 익히지 않는 이러한 경향은 노동 시장의 성별 격차를 심화시킨다.
만약 국가 차원에서 고용 보호를 확실히 한다면 어떨까. 국가 차원에서 노동자가 이탈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면 기업도 내부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업에게는 경쟁 기업이나 산업에 노동력을 빼앗길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인력 교육을 좌우하는 변수다.
그런데 여성은 고용 보호 제도가 강력할수록 오히려 투자를 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에서 여성의 고용을 강력하게 보호할수록, 기업은 여성이 이탈할 경우 더 큰 손실을 부담하게 된다. 결국 처음부터 여성을 뽑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하게 된다. 여성 노동력을 보호하는 국가에서 역설적으로 성별 직종 분리 현상이 심화되는 이유다. 강한 고용 보호 정책이 시행되는 국가에서는 기업이 여성에게 성별 격차를 줄일 수 있을 만큼의 숙련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국가의 강한 고용 보호 정책으로 여성이 노동 시장에서 소외되는 현상은 복지 국가인 스웨덴에서도 나타난다. 철강과 자동차 산업으로 경제 발전을 이룩한 스웨덴은 남성 중심의 고숙련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남성 고숙련 노동자에 대한 수요는 여성이 공공 서비스 부문에 몰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반해 미국은 고용 보호가 약하다는 특성이 여성의 고위직, 관리직 진출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기업이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를 보호하지 않는 체제에서는 남녀의 능력이 동등하게 평가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 정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유리 천장을 없애려면 성 평등을 추구하는 인적 자원 관리 전략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분석 결과, 기업이 제공한 교육을 받은 여성일수록 관리직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조직 내에서 여성의 교육 기회를 확대하는 것이 여성의 능력과 전문성 제고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의미로 읽힌다.[1]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여성 인력의 상당수는 전문성이 낮은 기술을 갖고 불안정한 일자리를 감수하고 있다. 2018년 8월 기준으로 남성 임금 노동자 1117만 명 중에서 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은 73.7퍼센트(823만 명)다. 반면 여성 임금 노동자 887만 명 중 정규직 비율은 58.6퍼센트(519만 명)에 그치고 있다.[2]
좋은 일자리를 얻고 승진하는 기준이 명확하다면 여성은 더 공평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여성들이 학력 증명이나 자격증, 전문 학위로 노동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직종을 선호하는 이유다. 여성 교사의 비율이 월등히 높은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여성들은 지원자들이 같은 시험을 치르고, 점수에 따라 합격 여부가 갈리는 것이 더 공정한 방식이라고 여긴다. 의학전문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 등에서 자격증을 취득해서 전문직, 관리직으로 진출하려는 여성들이 많은 현상도 같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여성이 특정 전문직에 몰리는 현상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 평등한 일자리가 적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저임금 저숙련의 늪
남녀의 성별 직종 분리 현상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나타난다. 성별 직종 분리가 심각한 나라는 의외로 북유럽의 복지 국가 스웨덴이다. 성별 직종 분리는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높은 직종에 여성이 적은 현상을 의미하는 수직적 분리와 여성이 공공 영역 등 특정 부문에 몰리는 수평적 분리로 나뉜다. 사회학자 제니퍼 자먼(Jennifer Jarman)이 2002년부터 2006년을 기준으로 성별 직종 분리 정도를 비교한 결과에 따르면, 조사 대상 22개국 가운데 직종 분리 현상이 가장 심한 나라들은 핀란드, 덴마크, 스웨덴 등 북유럽의 사민주의 국가였다.[3]
사민주의를 대표하는 스웨덴과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미국, 그리고 한국의 사례를 비교해 보자. 유리 천장이라 불리는 수직적 분리 현상은 한국이 가장 심한 것으로 나타났고, 여성이 공공 부문에 몰리는 수평적 분리 현상은 스웨덴, 미국, 한국 순으로 심했다.
수직적 분리와 수평적 분리 중에서 무엇이 더 나쁘냐고 묻는다면, 고위직의 대부분을 남성이 차지하는 수직적 분리일 것이다. 스웨덴처럼 수평적 분리 현상이 심할 경우에도 여성 비율이 높은 직종의 처우가 나쁘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스웨덴은 1970~1980년대까지 민간 영역이 흡수하지 못한 여성들을 국가가 공공 분야에서 고용하는 전략을 취했다. 민간 영역에서 여성들이 선택하는 직업도 양육, 보호, 간호 등의 서비스 직종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스웨덴은 여성의 사회 활동을 보장하는 국가로 알려져 있다. 성차별 문제가 지적되는 국가도 아니다. 스웨덴이 비판을 적게 받는 이유는 직종별 임금 격차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여성들은 자녀가 어릴 때 양육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자녀를 돌보기 위해서 근로 시간을 줄이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스웨덴에서 6세 미만의 자녀를 둔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파트타임 일자리를 선호한다. 반면 미국은 자녀가 있는 여성이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비율이 크게 낮다. 미국에서 6세 미만 자녀를 둔 여성의 파트타임 종사 비율은 24퍼센트로,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국가 평균인 30퍼센트에 훨씬 못 미친다.[4]
스웨덴과 미국의 가장 큰 차이는 파트타임 일자리의 임금 수준이다. 스웨덴의 파트타임 일자리는 정규직과 비슷한 수준의 급여를 보장하는 반면 미국은 그렇지 않다. 미국은 파트타임 일자리의 질이 좋지 않기 때문에 자녀가 있는 여성이 어떻게든 정규직 일자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파트타임 노동은 좋지 않은 일자리라는 인식이 강하다. 저임금인 경우가 많고 고용이 불안정하다. 노조가 없거나, 있다 해도 대표성이 약해 보호를 받기가 어렵다. 고용 관련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작업장에서 일하는 파트타임 노동자도 많다.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한국 노동 시장에서는 저임금 여성 노동자의 지위가 낮다. 비정규직 여성들이 더 나은 일자리로 이동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스웨덴의 경우 여성 고용이 사회 서비스 분야에 몰려 있어 직종 분리 현상은 심하지만, 사회 서비스를 공공 부문에서 제공하기 때문에 저임금 여성 노동자라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관대한 국가 복지와 노동조합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한국은 여성이 서비스 부문에 진출하기는 하지만, 스웨덴처럼 양질의 일자리라고 보기가 어렵다. 여성이 몰려 있는 직업군 대부분이 비정규직 형태다. 외환 위기 이후로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임금 격차도 벌어졌다. 이는 여성의 임금을 낮추는 결과로 이어져 성별 임금 격차를 심화시켰다.
우리 사회에서 정규직 여부는 일자리의 질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다. 구직자들은 월 급여가 낮더라도 비정규직보다는 정규직 일자리를 선호한다. 그런데 최근 정부가 내놓는 여성을 위한 일자리 정책에는 ‘시간제 일자리의 확대’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아이를 둔 엄마가 시간제 일자리를 선호한다는 수요 조사에 근거한 것인지, 스웨덴 같은 국가에서 여성들이 시간제 일자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례를 보고 정책 이식을 시도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시간제 일자리의 확대는 한국 여성에게, 특히 고학력 여성에게 효용이 적다. 시간제 일자리에 한번 진입하면 정규직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낮은 상황에서 고학력 여성들의 노동력이 낭비되는 현상만 심해질 수 있다. 한국에서 남녀의 대학 진학률은 1980년대부터 2016년까지 비슷하게 증가했다. 그러나 경제 활동 참가율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계속 낮은 상태다.
취업률 격차와 맞물려 주목할 부분이 남녀 간의 임금 격차다. 2017년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고학력 여성이 증가하고, 경제 활동 참가율이 상승하며 성별 임금 격차가 전에 비해 줄어드는 추세라고는 한다.[5] 하지만 임금 격차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고용노동부가 실시한 2016년 고용 형태별 근로 실태 조사에 따르면, 정규직 여성의 임금은 정규직 남성이 받는 임금의 71.3퍼센트 수준이다.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 문제는 더 심각하다.
비정규직 고용의 형태는 단시간 근로, 기간제 근로, 한시적 근로, 파견, 용역 등으로 나뉜다. 정규직 남성과 비정규직 남성 간의 임금 격차도 상당하지만, 여성은 모든 형태의 비정규직에서 남성보다 더 낮은 임금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금 수준을 10분위로 구분했을 때, 소득이 가장 낮은 1분위에 속한 여성은 전체의 13.7퍼센트였다. 남성(7.9퍼센트)에 비해 5.8퍼센트포인트나 높았다. 고소득 구간인 10분위에는 남성의 13.2퍼센트가 속해 있는데, 여성은 4.4퍼센트에 불과했다.
남녀 임금 격차가 확대되는 연령은 35세부터 54세까지다. 이 시기에는 과반수에 가까운 여성이 1~3분위에 해당하는 낮은 임금을 받는다. 게다가 여성은 경력 단절로 인해 근속 기간이 짧아지면서 연차에 따른 임금 상승 효과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조사 표본이 된 여성의 절반 이상이 근속 3년 미만에 해당하는 노동자인데 반해, 남성은 근속 3년 이상에 해당하는 비율이 과반수였다. 한국에서 여성들은 노동 시장에 진출하기까지의 어려움에 더해 노동 시장에서의 임금 격차라는 중첩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한국 노동 시장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한국 노동 시장에서 여성의 소외 현상은 오랜 기간 축적된 차별의 결과다. 한 나라의 제도는 단일한 행위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기보다 복지 체제, 산업 및 노동 시장 체제, 교육·숙련 시스템, 정치 체제의 상호 보완으로 만들어진다. 다양한 제도가 경합을 벌이며 한 나라의 시스템을 만들게 된다는 개념을 제도적 상호 보완성이라고 한다. 한 영역에 속한 어떤 제도가 다른 영역에 속한 제도의 존속 여부나 효율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때 보완적 성격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6] 서울시의 청년 수당 정책을 노인 인구 비율이 높은 경기도 연천군에서 실시하면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같은 정책도 어떤 맥락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다른 결과를 낳는다.
학자들은 1970년대 오일 쇼크로 전 세계가 똑같이 경제 불황을 겪었음에도 많은 나라가 서로 다른 변화를 겪었다고 진단한다. 정치경제학자 토번 아이버슨(Torben Iversen)과 안느 렌(Anne Wren)은 1970년대의 경제 위기로 인해 세 가지 형태의 복지 국가가 발달했다고 설명한다. 소득 평등을 희생하면서 건전 재정과 고용 증대를 추구하는 영미 자유주의, 건전 재정보다는 소득 평등과 고용 증대를 우선시하는 북유럽의 사민주의, 건전 재정과 소득 평등을 강조하며 고용 부문을 희생하는 유럽 대륙의 보수주의 모델이다.
이렇게 다른 모델이 나타난 이유는 한 나라의 생산 레짐이 복지 정책과 맺는 관계가 상이해서다.[7] 생산 레짐은 산업 구조와 산업 정책, 금융 시장 구조와 금융 정책, 노동 시장 구조, 노사 관계, 직업 훈련 시스템, 기업의 지배 구조 등을 통칭하는 한 나라의 경제 체제다. 이런 요소가 사민주의, 자유주의, 보수주의 등의 복지 기조와 맞물려서 개별 국가의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노동 시장에서 여성의 지위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경제 체제와 복지 정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생산 레짐을 연구하는 한국 학자들은 한국의 발전주의 국가 전략에 주목했다. 한국은 정부가 금융, 기업과 긴밀하게 상호 작용하되 노동 부문을 배제하고 억압하며 발전한 나라다. 한국의 복지 체제는 스웨덴처럼 노사 간의 힘의 균형을 통해 상호 보완을 이루며 정착된 것이 아니다. 복지 정책은 권위주의 국가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산업화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보완 기제였다.
발전주의 국가 전략은 196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제 발전을 위해 수출 지향 전략을 추진하면서 본격적으로 제도화됐다. 산업화에 필요한 자본이나 생산 기술이 부족했던 한국 정부는 금융 기관을 국유화하고, 기업가들과 지배 연합을 맺으며 자본금을 조성했다.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경공업 분야에서의 수출 증대를 노렸다. 1970년대 중화학 공업이 발달하면서 국가의 영향력은 더 커졌다.
국가의 개입은 부존자원이나 생산 기술이 없는 상황에서 초기의 산업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요인이었다. 반면 복지 부문에는 재정을 투입할 여력이 없었다. 한국의 복지 정책은 경제 성장에 우선순위를 두고 낮은 복지 지출을 강조하는 보수주의 모델로 공고화됐다.
특히 여성 정책은 처음부터 선별적으로, 자선의 형태로 제공됐다. 한국의 여성 복지는 1946년 미군정(美軍政) 시기의 여성 정책을 시발점으로 한다.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 남편을 잃은 아내와 그 가족, 공창 제도로 인한 윤락 여성 등 국가의 보호가 필요해 보이는 일부 여성에게 선별적으로 복지 정책을 제공했다. 1960년대에 국가 발전이 주된 목표가 되면서 여성의 저임금 노동이 중요한 노동 자원으로 떠오르기는 했지만, 자활과 자립을 중시하는 정책 기조로 인해서 보편적 복지라는 관점이 확대되지는 못했다.[8]
우리나라가 1970년대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했을 때 정부와 기업은 남성 중심으로 직무 훈련을 실시했다. 1970년대의 중화학 공업화는 여성이 노동 시장에서 심각하게 배제되는 결과를 낳았다. 경공업이 경제 성장의 중심이었던 1960년대에는 저숙련 여성 노동에 대한 선호가 높았다. 하지만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남성 중심의 고숙련 노동자가 노동 시장의 중심이 됐다. 숙련 노동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정부가 기술 훈련 프로그램을 내놓기도 했으나, 기업은 내부 교육을 통해 자체 인력 풀을 양성하고자 했다.[9] 직장 내 직무 교육이 활성화되는 노동 환경에서 여성은 임신이나 자녀 양육 등으로 인해 노동 시장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였고, 기업의 숙련 투자 대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노동 시장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아지는 와중에도 한국의 복지 정책은 확대되지 못했다. 전두환 정권은 노동 조직을 산업 노조에서 기업 노조로 전환했다. 산업이나 국가 수준의 조직화가 불가능한 방식이기 때문에 복지 제도는 보편적인 형태를 지향하기가 어려웠다. 국가는 대기업의 핵심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회 보험 중심의 복지 정책을 만들었고, 사회 보험도 기본적인 소득 보장보다는 위험 비용을 경감하는 최소한의 소득 보장에 머물렀다. 동시에 근로 의욕을 강조하다 보니 일할 능력이 없는 이들을 위한 선별적 혜택에 그쳤다.
국가 복지가 최소 비용을 지향하는 것과 달리 기업 복지는 상대적으로 발전했다. 노사의 자율적인 협상을 통해 기업 복지가 발전한 영미 자유주의 유형과도 다른 형태다. 한국에서는 국가 복지를 보완하기 위해 민간 복지, 기업 복지가 발전했다.[10] 결과적으로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핵심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높은 수준의 국가 복지와 기업 복지를 동시에 누리고, 그렇지 못한 노동자와 주변 계층은 낮은 수준의 국가 복지와 기업 복지를 누리는 노동 시장의 이중 구조가 만들어졌다. 산업 구조가 고숙련 노동자 중심의 자본 집약 산업과 전통적인 노동 집약 산업으로 이분화되고, 기업의 지배 구조가 대기업 중심으로 강화되며 주변 노동의 소외는 더 심해졌다.[11]
결국 급여 수준도 좋고, 급여 외의 복리 후생도 좋은 핵심 노동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지가 삶의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지표가 됐다. 수많은 청년이 대기업에 입사하고 싶어 하는 이유를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쉽다. 한국에서 직업 고교와 전문 대학의 허약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중급 숙련의 부족은 이런 격차를 더 심화시킨다. 중급 숙련의 부족으로 중소기업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동시에, 중소기업은 중급 숙련에 투자하지 못해 더 허약해진다.[12] 한국과 비슷한 복지 체제를 가지고 있는 일본만 해도 부품이나 첨단 기술 개발, 중급 숙련 형성에 중소기업이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그러나 한국의 대기업은 부품 납품을 대부분 해외에 의존하기 때문에 중소기업과 상생을 도모할 유인이 적다.
중산층 이상의 자녀들은 직업 교육이나 기술 교육을 회피하고, 대기업에 진입할 수 있는 경쟁력을 얻기 위해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이수하려고 한다. 이로 인해 고등 교육은 과잉 팽창되고, 고학력 청년의 실업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한국처럼 대부분의 국민이 일반 대학 교육을 받고, 명문 대학 진학을 원하는 상황은 교육을 지위재positional goods로 만든다. 명문 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능력이 노동 시장에서 개인의 가치를 결정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지위 경쟁(positional competition)을 유발하고 교육 기회와 경제 전체의 양극화를 불러온다.[13]
우리 사회에서 명문 대학 진학을 위한 지위 경쟁은 심각한 수준이다. 2018년 방영된 드라마 〈시크릿 마더〉는 아들 교육을 위해 의사라는 직업도 버린 열혈 엄마를 그린다. 한국 사회에서는 교육열이 높은 엄마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그려진다. 대학 교육을 받고도 전업주부로 일하는 여성이 많아서다.
남성 중심의 핵심 노동 시장과 여성 중심의 외부 노동 시장이라는 이중 구도는 한국 경제를 지배해 온 시스템이다. 그렇다면 중화학 공업화 시기가 끝나고, 화이트칼라라 불리는 사무직이 주류가 된 한국 사회는 과거와 다를까. 노동 시장에서 여성의 어려움을 논할 때 ‘여성 차별은 옛말이고, 요즘은 여성이 더 좋은 대우를 받는다’거나 ‘여성이 일자리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경제 불황으로 남녀 가릴 것 없이 어려운 시기이기 때문’이라며 여성만의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회피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핵심 노동과 주변 노동이라는 이중 구조는 노동 시장에서 여성의 지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