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군번을 묻는 사람
다행히도 사촌인 라니아(Rania)가 하이파에 살며 대학을 다니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종종 나를 불러내서 만남을 가졌다. 라니아와 나는 가끔씩 밖으로 나가서 하다르(Hadar) 일대를 걸어 다니며 우리의 빠듯한 예산 내에서 저렴한 옷이나 화장품을 구입했다. 이 도시는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나크바(nakba, 대참사) 이후, 원래 7만 명이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 가운데 그곳에 남아있는 주민들은 3000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고, 그곳에서는 참담한 여건을 견디며 살았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 도시의 특성을 완전히 바꾸는 일에 착수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의 시설을 파괴했고, 유대인이 사용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빼앗기도 했으며, 아랍어였던 도로명을 히브리어로 바꿨고, 팔레스타인의 문화유산을 말살했다. 파괴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이파에는 매우 풍요롭고 활기찬 문화가 존재했다. 우리가 걸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살아남은 주택들은 마치 다른 시대에서 온 유령들처럼 우리를 조심스레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쇼핑몰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외부의 현실과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도 모든 것들이 히브리어로 표시되어 있었다. 아랍어가 이 나라의 두 번째 공식 언어이며 손님의 상당수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아랍어 안내문이 전혀 없었다. 아랍어 도로 표지판들은 맞춤법 표기가 온통 엉망이었으며, 원래의 아랍어 이름이 아니라 그 동네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명칭이 아랍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쇼핑몰이나 정부 청사, 공공건물 등의 모든 입구에는 경비 요원들과 금속 탐지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만약 버스나 기차역에 가방이 방치되어 있거나, 또는 누군가 자신의 짐 가방을 잠시 놓아두고 다른 볼일을 보러 자리를 비우는 것은 위험한 상황으로 여겨졌다. 그러면 사람들은 정신없이 주위를 살폈고, 주인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위기 단계가 급격히 고조될 수 있었다. 나는 중앙역에서 경고 사이렌이 울리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내보내졌고, 폭발물 처리반이 출동해서 의심스러운 물건을 해체했다. 그것은 누군가의 의류로 밝혀졌다. 끊이지 않는 경계 의식이 뚜렷이 느껴졌지만, 마치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간주됐다.
나는 2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세 개의 일자리를 전전했다. 나에게는 실질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나는 세 달 동안 틀어박혀서 히브리어를 공부했다. 그러면서 기계적인 태도를 익혔고 개인적인 감정은 옆에 제쳐 뒀다. 그 시기가 끝날 무렵, 나는 기초적인 히브리어를 말하고 읽고 쓸 수 있게 됐다. 나는 소프트웨어 회사들에 지원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응답 없이 몇 주가 지나갔다. 그러다 하이파에 있는 어느 대기업에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건 여성은 나에게 히브리어로 이야기를 했다. 나는 매우 당황했지만, 겨우겨우 면접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면접 당일, 그 회사의 건물을 확인하고 보안 검사를 통과하던 나는 잔뜩 긴장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거의 아무런 교류가 없었다. 상냥한 젊은 남자가 문 앞에서 나를 맞이하면서 나에게 악수를 했을 때는 식은땀이 흘렀다.
실내에는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그들은 내게 많은 질문을 했고, 다행히도 나는 그 중 일부에 영어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의 이력서를 훑어보면서 내가 키프로스에서 했던 일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물어보았다. 나는 기뻤고, 그것이 관심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그럼, 감사했습니다.” 상냥한 남자가 마침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혹시 당신의 군번(army number)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이었다. “어, 군번은 없습니다만⋯.”
“알겠습니다.” 미소는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젊은이들은 학교를 졸업하는 즉시
[6] 병역의 의무를 마쳐야 한다. 그래야만 학자금 대출과 취업과 조건이 좋은 담보대출을 받을 기회가 열린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병역의 의무로부터 면제되며, 징집 대상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상당수의 일자리나 사회적 혜택을 위해서는 병역 의무를 이수하는 것이 필수 요건이었다.
나는 패배자가 되어 밖으로 걸어 나왔다. 나는 그 회사에 대해서 공부를 했고, 면접을 준비했고, 새로운 정장도 구입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이후에 면접을 봤던 다른 세 곳의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우수한 성적으로 취득한 컴퓨터 공학 학위는 대체 어찌 된 걸까? 최고의 영국계 대학교
[7]에 보내려고 우리 아버지가 쏟아 부은 그 돈은 대체 뭐란 말인가? 대체 왜 이곳에서는 이토록 힘든 것인가?
4. 돌을 던지는 아이들
나는 마침내 좋은 일자리를 구했다. 어느 소프트웨어 회사의 테스터였다. 이 회사는 갈릴리의 우리 마을에서 20분 떨어진 테펜(Tefen) 산업지구의 테크놀로지 파크에 있었다. 그곳은 완벽했다. 지난 2년 동안의 불안감과 스트레스가 마침내 사라졌다. 하지만 며칠 뒤에 약 30명의 직원들 가운데 팔레스타인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와 동료들 사이에는 뚫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집과 일자리와 삶이 있었다. 그들이 살고 있거나 일하고 있는 땅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에 대하여 잠시 멈춰서 생각해 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함께 거대한 공동묘지에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수많은 묘비를 무시하는 것 같은 복잡한 감각이 나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고, 결국엔 그것을 통합하려 했던 나의 애석한 시도를 무너트렸다.
나는 인사 부서의 리사(Lisa)와 친해졌다. 신기한 친구관계였다. 그녀는 50대였지만, 당시 내 나이는 24살로 그녀의 딸보다도 어렸다. 하지만 우리는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웠다. 리사는 유대인이었고, 10대 때 영국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이스라엘 현지인과 결혼했다. 그녀는 근처의 탕비실에서 차를 우려낸 다음에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 문간에 나타나서 잠시 수다를 떨곤 했다.
어느 날 리사가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누려고 찾아왔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화면으로부터 시선을 들어 리사를 봤다. 그런데 그녀는 다소 흥분한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나 요즘에 집으로 운전해서 가는 게 조금 걱정 돼.”
“왜요?” 리사는 갈릴리에 있는 유대인 마을인 아츠몬(Atzmon)에 살고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골칫거리 때문에 말이야. 운전해서 지나가는 도로에 일부 아랍인들이 돌을 던지더라고.”
그녀는 팔레스타인 사람이 아니라 아랍인이라고 말했다. 이 나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팔레스타인 사람이라고 말할 때는 서안 지구나 가자 지구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지, 자국의 시민들을 일컫는 표현은 아니었다.
리사가 우리에 대해 언급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골칫거리요?” 내가 되물었다.
“아랍 소년들 몇 명이 아츠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일부 주민들이 화가 나서 아이들을 내보냈어. 그러더니 요 며칠 동안 그 아이들이 우리가 지나가는 차에 돌을 던지고 있어. 정말 스트레스 받는다니까!”
“그 애들이 왜 잘렸는데요?” 내가 물었다.
“아, 그게 말이지⋯” 그녀가 불편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일부 주민들이 그냥 키부츠(kibbutz)
[8]에서 아랍인들이 일하는 걸 싫어했어.”
“아.”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많은 유대인 공동체들이 그 안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일하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대인 공동체는 그 안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주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내 사촌 한 명이 어느 키부츠에서 잡역부로 일했는데, 그와 비슷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유대인 공동체는 ‘입회 위원회(admissions committee)’를 통한 심사 절차를 갖고 있었고, 이곳에서 내려진 결정은 다시 바꿀 수 없었다.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지원자들에게 시오니즘(Zionism)
[9]의 원칙에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요구하기도 했다. 몇몇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불복하여 소송을 제기했지만 그들이 승소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마을에 산다는 것 역시 상상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팔레스타인 공동체에서는 일반적으로 환영을 받았지만,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대체로 외면받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런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나는 리사를 바라봤다. 이 사안에 대한 그녀의 입장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내 생각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남편에게 대기하라고 전화를 해두고 있어.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녀가 했던 말에 대해서 생각했다. 마침 나는 어느 유대인 정착촌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깔끔한 저택들이 늘어서 있었고, 멋진 정원, 분수, 넓은 인도가 조성되어 있었다.
팔레스타인 공동체와 유대인 공동체는 서로 맞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둘의 차이는 너무나도 확연해서 누구라도 즉시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이다. 유대인 공동체는 국가가 자금을 지원하기 때문에 이민자들이 충분히 혹할 정도의 생활 수준을 제공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건국 이후에 수백 곳의 유대인 거주지가 조성되었지만, 팔레스타인 마을이나 동네는 단 한 곳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기존의 거주지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 내가 방문했던 모든 팔레스타인 마을에서 과밀하고 방치된 게토(ghetto, 빈민가)와 구덩이가 잔뜩 패인 비좁은 길거리를 볼 수 있었다. 편의시설은 부족했으며, 공원이나 공용 공간도 없었다. 또한 무겁고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팔레스타인 마을들은 수백 년에 걸쳐서 발전해 왔다. 현대적인 구획 정리나 도시 계획이 존재하기 전이었다. 반면에 새로운 유대인 공동체들은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조성됐다. 그들의 주택은 서양의 주거지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깔끔하게 지어졌다. 그런 곳들은 파괴된 마을을 대신하여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 모든 아름다움과 질서 속에서도 나에게는 단지 추악함만이 보였다. 나는 언제나 그런 곳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