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집은 어디인가
완결

나의 집은 어디인가

한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당연한 운명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이방인이라는 꼬리표가 잔인한 운명이다.

2008년에 팔레스타인 여성과 그녀의 아이들이 서안 지구(West Bank)에 있는 이스라엘의 군 검문소를 걸어서 지나가고 있다. ⓒPhotograph: Dan Balilty/AP
나는 22살의 나이에 생전 처음으로 고국에 발을 디뎠다. 팔레스타인인이었던 부모님은 1970년에 망명을 선택했다. 우리는 레바논에서 발발한 전쟁을 피해 달아나 키프로스[1]에서 지냈다. 그러다 새로운 화해의 시대가 찾아왔다. 1993년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오슬로 협정(Oslo Accords)을 체결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난 후 마침내 우리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됐다. 수십 년이나 지나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었다. 갈릴리(Galilee)[2]에 있는 친척들, 그리고 특히 조부모님이 크게 기뻐했다. 우리는 따뜻한 사랑의 조류에 휩싸였다. 나는 마침내 돌아간다는 생각에 짜릿했다. 나는 국가를 원했다. 더 이상 외국인처럼 느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마침내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국가 없이 살아온 나날들은 이제 과거로 남게 됐다. 그러나 다시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아버지[3]는 이스라엘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느라 고군분투하셨다. 떠나 있는 동안 그는 영향력 면에서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갈릴리의 한 시골 마을에서 자랐지만,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과의 연루 및 정치적인 활동 때문에 망명을 선택했다. 그는 또한 《이스라엘의 아랍인들(The Arabs in Israel)》이라는 책도 출간했는데, 이 책에서는 점령 이후 이스라엘에 남아 있던 팔레스타인인들의 가혹한 운명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는 베이루트에서, 이후에는 키프로스에서 PLO를 위해 활동하며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의장의 측근이 되었다. 우리가 돌아오자 아라파트는 아버지에게 새로 설립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PA)에서 직위를 하나 맡아 달라고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관료로서의 지위를 원하지 않았다. (자치정부의 일자리를 맡으면) 오랫동안 해왔던 독자적인 연구와 글쓰기를 못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라파트의 조언자 역할에 머무르며 그의 사무실이나 호텔에서, 또는 지인들과 함께 아라파트를 만났다. 당시에 PLO의 본부는 튀니지에서 서안 지구로 옮겨와 있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나의 아버지가 떠나기 전에 감당해야 했던 번거로운 상황들로부터 대체로 자유로웠다. 예전의 그들은 집요하게 괴롭힘을 당하고 체포되었으며, 그들의 가옥은 급습을 당해서 난장판이 되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더욱 보편화된 차별 시스템에 대처해야만 했다.

아버지의 마을에 도착하고 몇 주 뒤, 아빠는 나와 남동생을 데리고 잠시 드라이브를 나갔다. 우리는 겨우 1마일 정도 거리의 멀지 않은 한 작은 마을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말했다. “이곳이 데이르 엘-카시(Deir el-Qasi) 현장이란다.” 표지판에는 ‘엘코시(Elqosh)’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가 나크바(nakba)라고 부르는 대참사로 1948년에 팔레스타인이 파괴된 후, 데이르 엘-카시에서는 인종청소가 이루어지고 이름이 바뀌었다.

우리가 탄 자동차는 주택들과 비쩍 마른 나무들이 드문드문 퍼져 있는 조용한 도로를 따라서 나아갔다. 그곳에는 닭장이 몇 개 있었다. 아빠가 차를 세웠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이거 보이니?” 아빠가 낡은 석조 구조물을 가리켰다. “이게 이 마을의 원래 집들 가운데 하나였어.”

그걸 바라보고 있으니 그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나는 평생 동안 팔레스타인의 비극에 대한 글을 읽고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는 그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은 이곳의 집들을 전부 허물지 않았어.” 아빠가 말을 계속했다. “저들은 몇 채를 남겨 뒀어. 왜냐하면 이곳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예멘 출신들이었는데, 그들이 아랍인들의 집을 좋아했거든. 저기 또 한 채가⋯.”

엘코시의 사람들은 닭을 기르고, 소를 방목하고, 채소와 과일을 재배했다. 그들은 우리 마을인 파수타(Fassouta)에 들러서 소소하게 거래도 하고, 의사나 치과 의사를 찾아가기도 했다. 파수타 마을에 정착한 후 나는 매일 차를 몰고 이곳을 지나다녔다. 그러면 아버지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데이르 엘 카시의 집들이 나를 되쏘아봤다. 나는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나쁜지 궁금했다. 사람들의 집을 파괴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남겨두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하는 것일까?

수흐마타(Suhmata)라는 마을에 가보니, 이스라엘의 불도저가 밀어닥친 이후에 남아 있던 것이라고는 그저 올리브 나무들과 불쑥 튀어나온 석재들이 전부였다. 그곳에 살았던 대부분의 주민들은 레바논 사람들이었는데, 그 중의 일부는 어떻게든 남아서 인근의 마을에 살고 있었다. 우리 마을인 파수타에 살고 있는 가족들도 여럿 있었다. 나는 또 한 번 어느 것이 더 고통스러운 것인지 궁금했다. 아주 멀리 완전히 쫓겨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마을이었던 곳을 지나다니면서 그 폐허를 지켜보는 것일까?

사실 우리 가족과 나는 운이 좋았고, 아주 드문 ‘예외 사례’였다. 평화 협정 덕분에 PLO와 연관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다시 팔레스타인 영토로 돌아오는 걸 허락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원래 살던 동네나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됐던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것마저도 그들이 떠나기 전에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보유했던 이들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 PLO와 이스라엘 사이의 긴장이 재개될 무렵까지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들은 10명 정도에 불과했는데, 그 중에서 가족들을 함께 데리고 돌아온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우리에게는 참조할 만한 다른 사례가 없었다. 우리가 겪었던 것과 동일한 경험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다른 가족이 없었던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사회계층의 밑바닥에 있었다. 나이 든 세대는 군사적 통치와 억압이 있던 시절을 기억했다. 그들은 온갖 위협을 받으며 살았다. 그들은 수십 년 동안 스스로를 팔레스타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 대신에 우리에게는 ‘이스라엘계 아랍인’이라는 엄청나게 모순적인 라벨이 붙어 있었다. 내가 팔레스타인에 대해 언급하면 파수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당황스러운 침묵 혹은 극심한 불편함이었다. 심지어 이스라엘에서 우리의 열등한 지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그들은 그 문제를 오직 직업이나 당면한 문제의 측면에서만 다뤘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스라엘 체제의 일부가 되어야만 했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가 알고 있는 체제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체제가 전부였다.
피다 지리스와 그녀의 아버지인 사브리 지리스, 2017년. ⓒPhotograph: Courtesy of Fida Jiryis

 

1.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사람


마을에는 일자리가 거의 없었다. 나도 일자리를 찾으려면 가족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아버지의 남동생인 조지는 옐로페이지(Yellow Pages)[4]에서 일하면서 하이파(Haifa)에 살고 있었다. 조지 삼촌은 교육용 소프트웨어를 판매하는 고객사에 내 일자리를 알선해 줬다. 월급은 낮았지만 나는 어디서든 사회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하이파는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곳이었지만, 나는 자동차를 살 여력이 없었다. 나는 그곳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고, 파수타 출신의 대학교 신입생 몇 명과 함께 아파트를 하나 구했다.

그곳은 낡고 칙칙했지만 우리가 마련할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전부였다. 나는 여학생 한 명과 방 하나를 함께 썼고, 다른 두 명의 여학생이 다른 방을 함께 사용했다. 사생활이 없다는 게 힘들었다. 게다가 나는 외톨이였다. 다른 여학생들은 모두 사촌지간이었고, 나와 어떻게 어울려야 할지를 모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입주 초기의 어느 날 밤, 나는 여학생들을 도와서 아파트를 청소하고 저녁을 함께 먹었다. 나는 늦게까지 잠을 이룰 수 없어서 이리저리 뒤척였으며, 룸메이트가 잠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어색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간신히 토스트를 조금 먹은 후에 집을 나섰다. 모두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그들은 대학교에서의 첫날이었고, 나는 일터로의 첫 출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가야하는지도 잘 몰랐지만, 그들이 버스 노선을 확인하면서 나에게 도움을 줬다. 그들이 내려야 할 곳은 나보다 한 정거장 전이었다. 그들은 버스에서 내리더니 몸을 돌려서 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거의 공황 상태의 의식과 맞서 싸우며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나는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군인 두 명이 버스에 올라타는 게 보였다. 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총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통로를 걸어와서 내 앞쪽의 빈 좌석에 앉았다. 나는 그들의 어깨에 걸려있는 소총을 쳐다봤다. 그 차가운 금속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그때가 생전 처음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키프로스에서는 그 누구도 총기를 휴대하지 않았었다. 왜 저들은 길거리에서 총을 갖고 다닐까? 이게 정상인 건가? 만약 저 중에 하나가 발사되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나는 자리를 바꾸고 싶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모든 좌석이 꽉 차 있었다. 좀 더 뒤쪽에 자리가 하나 있었지만 거기에는 더 많은 군인들이 있었다. 버스가 노선을 따라 운행하는 동안 모든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은땀을 흘리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사람도 나 하나인 것 같았다. 나는 나 자신에게 침착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머릿속에서 ‘내가 이스라엘 군인들과 버스에 함께 타고 있어!’라는 끔찍한 생각이 솟구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10분 뒤에 나는 내려야 할 곳에 도착했음을 알았고, 급하게 벨을 울리고는 허겁지겁 밖으로 나왔다. 길거리에서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마치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충격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았다.

일터에서의 첫날은 어색했다. 나는 천장이 낮고 창문도 없는 작은 다락방에 혼자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소프트웨어 테스트 업무를 배정받았다. 오후 5시가 되어 퇴근할 시간이 되자 엄청난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또 다른 공포 때문에 배 속이 뒤틀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러시아워였기 때문에 버스는 느리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거리의 광고판과 도로 표지판은 모두 (이스라엘의 공식 언어인) 히브리어로 적혀 있었다. 아랍식 이름을 가진 식당들은 몇 개에 불과했다. 내 주위의 사람들도 모두 히브리어로 대화했다. 더욱 많은 군인들이 올라탔고, 비좁은 버스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썼다. 바로 그때 어떤 서늘한 느낌이 내 심장을 움켜쥐었다. 이것은 내가 꿈에 그리던 팔레스타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5월 14일에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의 독립 기념일을 맞이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이었던 곳에서 깃발을 흔들고 파티를 열고 바비큐를 구웠다. 이 날을 전후로 몇 주 동안 나라 전체에는 온통 깃발들이 뒤덮었다. 평상시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 나하리야(Nahariya)의 수영장에, 버스 정류장 근처의 작고 지저분한 커피숍에, 그 버스 정류장 자체에, 그리고 바닷가에도 몇 미터마다 하나씩 굳이 깃발이 필요했을까?

그날 나는 너무나도 암울해져서 그냥 집에만 머물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 마을의 상황은 나를 더욱 암담하게 만들었다. 이스라엘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빈곤선(poverty line) 이하의 삶을 살았다. 기반 시설과 경제 개발을 위한 국가 예산의 대부분은 유대계 지역에 할당됐다. 우리에게는 비즈니스 장려책이나 산업, 공장도 없었다. 대부분의 지역 의회는 파산 상태였으며, 상하수도 시스템과 같은 기초 기반시설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해야만 했다.

우리 마을의 가정 대부분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일반적인 유대계 가정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우리 지역 사람들의 기대 수명은 낮았으며, 당뇨병이나 고혈압처럼 스트레스와 연관된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많았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히브리어로 ‘아랍 노동’을 의미하는 ‘아보다 아라비트(avoda aravit)’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형편없는 작업이나 허드렛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서글픈 역설이라면, 이스라엘의 대부분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손으로 건설되었다는 사실이다.

교육 받은 사람들에게도 상황은 쉽지 않았다. 마을은 좌절에 빠진 대학 졸업생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면접을 기다렸지만 기회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나의 사촌 한 명은 테크니온 이스라엘 공과대학교(Technion – Israel Institute of Technology)를 졸업했다. 그 대학교에는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수강할 수 없는 과목들이 여럿 있었다. 가령 물리학의 특정 분야, 핵 과학, 조종사 훈련 등의 과목이었는데, 그 핑계는 ‘안보’ 때문이었다. 그리고 취업에 있어서도 팔레스타인 학생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방위 분야나 항공 산업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이러한 구직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많은 학생들은 자신이 직접 개업할 수 있는 법률이나 조경, 치과, 건강 관련 분야에서 자영업을 하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와디 푸킨(Wadi Fukin)이라는 팔레스타인 마을(아래쪽)과 베이타르 일리트(Beitar Illit)라는 이스라엘의 정착촌(위쪽). 두 곳 모두 서안 지구에 위치해 있다. ⓒPhotograph: Nir Elias/Reuters

 

2. 결국, 이방인


어느 주말, 나는 대학 시절의 친구들인 라자(Raja)와 사우산(Sawsan)을 만나러 (서안 지구의) 라말라(Ramallah)로 여행을 갔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어 너무나 기뻤다. 친구들은 웃으며 말했다. “오슬로 협정에서 유일하게 좋은 점은 다시 너를 볼 수 있게 됐다는 거야.”

친구들은 서안 지구에 사실상 갇혀 있었다. 오슬로 협정 이전에는 그들도 이스라엘 안에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냥 차를 타고 하이파든, 예루살렘이든, 자파(Jaffa)의 해변이든 마음대로 가면 됐어.” 지금은 이스라엘로 향하는 모든 출입로에 이스라엘의 검문소가 설치되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가려면 허가가 필요했다. 그 이후로 그들은 불과 30분 거리에 떨어진 텔아비브(Tel Aviv) 공항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외국으로 여행을 가려면 국경 너머 요르단의 암만(Amman)에서 비행기를 타야 한다. 여행에 걸리는 시간과 비용이 더욱 늘어난 것이다.

오슬로 협정에 의해 주어진 팔레스타인의 자치권은 그저 허울에 불과했다. 팔레스타인 당국이 발행한 신분증과 여권은 이스라엘 측의 승인이 필요했다. 이스라엘 점령군이 발행하던 시절과 사실상 다를 바가 없었다. 국경을 넘나드는 통행은 전부 이스라엘이 통제했다. 최악은 팔레스타인의 신규 경찰력이 저항에 가담한 사람들을 추적하고 그들을 넘겨주면서 이스라엘과의 안보 공조를 위한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건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시나리오였다.

이러한 새로운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취업이나 당국의 혜택으로부터 배제되었고, 때로는 투옥되기도 했다. 라자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예전보다 더욱 끔찍한 악몽 속에서 살고 있어.”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일상의 모든 측면에서 이스라엘에 굴종하도록 만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오슬로 협정이 체결됐을 때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이뤄지던 이스라엘의 정착 활동은 즉시 중단되어야만 했다.[5] 그리고 3년 뒤에는 5년 내에 이스라엘의 완전한 철수를 목표로 난민, 이스라엘의 정착촌, 경계선 등의 주요한 사안들에 대한 협상이 개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약속을 이미 허공에 날려 버렸다.

새로 선출된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총리는 팔레스타인의 국가적 지위를 부정하고 점령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철수를 반대하는 우파 리쿠드(Likud) 정당 소속이었다. 그의 정부는 팔레스타인 영토에 대한 점령을 지속하면서 불법적인 유대인 정착촌을 확대하고 이스라엘 사람만이 통행할 수 있는 우회 도로를 건설했다. 이스라엘의 정착 활동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늘어났다.

곧바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오슬로 협정이 평화나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타(Fatah)라는 (비교적 온건한) 정치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와 그들의 라이벌인 (강경 노선의) 하마스(Hamas)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이스라엘은 아라파트에게 테러를 억압하라고 압력을 가했고, 아라파트 자신도 썩 내키지는 않았겠지만 거기에 종종 협조했다. 사실 이스라엘은 어떠한 저항 행동이든 모두 테러 행위로 간주했다. 내 친구들은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분개하며 불안해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살아가는 게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수십 년간의 점령은 그들 각자의 사회에 상처를 남겼고, 예전과 동일한 생활 수준으로 올라가는 건 불가능했다.

돌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서안 지구와 가자(Gaza) 지구에서 생활 기반을 재건하려 시도하는 동안, 나 역시도 이스라엘에서 나의 입지를 마련하려고 힘겹게 노력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거의 아무런 교류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히브리어를 하지 못했다. 나는 팔레스타인 여학생들과 함께 지내는 하이파의 아파트와 우리 마을 사이를 오가며 살았다. 그리고 나는 팔레스타인계 회사에서 일했다. 점심을 사먹으러 거리를 내려가면, 그곳에 있는 팔라펠(falafel, 아랍식 고로케)과 샤와르마(shawarma, 케밥과 비슷한 음식) 가게의 주인들은 모두 팔레스타인 사람이었다. 버스를 타거나 뭔가를 구입하려고 슈퍼마켓을 들르면, 버스의 운전기사나 슈퍼마켓의 계산원은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금액이 얼마인지를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냥 금전 등록기에 표시된 숫자를 보고 돈을 꺼내 그들에게 건네 줬다. 그러면 그들이 내게 거스름돈을 줬다. 그게 전부였다. 어디에서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볼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들과 완전히 별개이며 서로 만나지 않는 평행선의 관계였다. 그러다 나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꼈고, 그 이후로 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모국에서조차 나는 이방인이라는 감각이었다.
2005년, 라말라(Ramallah) 인근에 설치된 이스라엘 측 분리 장벽의 일부. ⓒPhotograph: Oded Balilty/AP

 

3. 군번을 묻는 사람


다행히도 사촌인 라니아(Rania)가 하이파에 살며 대학을 다니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종종 나를 불러내서 만남을 가졌다. 라니아와 나는 가끔씩 밖으로 나가서 하다르(Hadar) 일대를 걸어 다니며 우리의 빠듯한 예산 내에서 저렴한 옷이나 화장품을 구입했다. 이 도시는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나크바(nakba, 대참사) 이후, 원래 7만 명이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 가운데 그곳에 남아있는 주민들은 3000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고, 그곳에서는 참담한 여건을 견디며 살았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 도시의 특성을 완전히 바꾸는 일에 착수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의 시설을 파괴했고, 유대인이 사용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빼앗기도 했으며, 아랍어였던 도로명을 히브리어로 바꿨고, 팔레스타인의 문화유산을 말살했다. 파괴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이파에는 매우 풍요롭고 활기찬 문화가 존재했다. 우리가 걸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살아남은 주택들은 마치 다른 시대에서 온 유령들처럼 우리를 조심스레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쇼핑몰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외부의 현실과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도 모든 것들이 히브리어로 표시되어 있었다. 아랍어가 이 나라의 두 번째 공식 언어이며 손님의 상당수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아랍어 안내문이 전혀 없었다. 아랍어 도로 표지판들은 맞춤법 표기가 온통 엉망이었으며, 원래의 아랍어 이름이 아니라 그 동네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명칭이 아랍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쇼핑몰이나 정부 청사, 공공건물 등의 모든 입구에는 경비 요원들과 금속 탐지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만약 버스나 기차역에 가방이 방치되어 있거나, 또는 누군가 자신의 짐 가방을 잠시 놓아두고 다른 볼일을 보러 자리를 비우는 것은 위험한 상황으로 여겨졌다. 그러면 사람들은 정신없이 주위를 살폈고, 주인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위기 단계가 급격히 고조될 수 있었다. 나는 중앙역에서 경고 사이렌이 울리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내보내졌고, 폭발물 처리반이 출동해서 의심스러운 물건을 해체했다. 그것은 누군가의 의류로 밝혀졌다. 끊이지 않는 경계 의식이 뚜렷이 느껴졌지만, 마치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간주됐다.

나는 2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세 개의 일자리를 전전했다. 나에게는 실질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나는 세 달 동안 틀어박혀서 히브리어를 공부했다. 그러면서 기계적인 태도를 익혔고 개인적인 감정은 옆에 제쳐 뒀다. 그 시기가 끝날 무렵, 나는 기초적인 히브리어를 말하고 읽고 쓸 수 있게 됐다. 나는 소프트웨어 회사들에 지원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응답 없이 몇 주가 지나갔다. 그러다 하이파에 있는 어느 대기업에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건 여성은 나에게 히브리어로 이야기를 했다. 나는 매우 당황했지만, 겨우겨우 면접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면접 당일, 그 회사의 건물을 확인하고 보안 검사를 통과하던 나는 잔뜩 긴장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거의 아무런 교류가 없었다. 상냥한 젊은 남자가 문 앞에서 나를 맞이하면서 나에게 악수를 했을 때는 식은땀이 흘렀다.

실내에는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그들은 내게 많은 질문을 했고, 다행히도 나는 그 중 일부에 영어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의 이력서를 훑어보면서 내가 키프로스에서 했던 일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물어보았다. 나는 기뻤고, 그것이 관심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그럼, 감사했습니다.” 상냥한 남자가 마침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혹시 당신의 군번(army number)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이었다. “어, 군번은 없습니다만⋯.”

“알겠습니다.” 미소는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젊은이들은 학교를 졸업하는 즉시[6] 병역의 의무를 마쳐야 한다. 그래야만 학자금 대출과 취업과 조건이 좋은 담보대출을 받을 기회가 열린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병역의 의무로부터 면제되며, 징집 대상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상당수의 일자리나 사회적 혜택을 위해서는 병역 의무를 이수하는 것이 필수 요건이었다.

나는 패배자가 되어 밖으로 걸어 나왔다. 나는 그 회사에 대해서 공부를 했고, 면접을 준비했고, 새로운 정장도 구입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이후에 면접을 봤던 다른 세 곳의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우수한 성적으로 취득한 컴퓨터 공학 학위는 대체 어찌 된 걸까? 최고의 영국계 대학교[7]에 보내려고 우리 아버지가 쏟아 부은 그 돈은 대체 뭐란 말인가? 대체 왜 이곳에서는 이토록 힘든 것인가?

 

4. 돌을 던지는 아이들


나는 마침내 좋은 일자리를 구했다. 어느 소프트웨어 회사의 테스터였다. 이 회사는 갈릴리의 우리 마을에서 20분 떨어진 테펜(Tefen) 산업지구의 테크놀로지 파크에 있었다. 그곳은 완벽했다. 지난 2년 동안의 불안감과 스트레스가 마침내 사라졌다. 하지만 며칠 뒤에 약 30명의 직원들 가운데 팔레스타인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와 동료들 사이에는 뚫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집과 일자리와 삶이 있었다. 그들이 살고 있거나 일하고 있는 땅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에 대하여 잠시 멈춰서 생각해 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함께 거대한 공동묘지에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수많은 묘비를 무시하는 것 같은 복잡한 감각이 나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고, 결국엔 그것을 통합하려 했던 나의 애석한 시도를 무너트렸다.

나는 인사 부서의 리사(Lisa)와 친해졌다. 신기한 친구관계였다. 그녀는 50대였지만, 당시 내 나이는 24살로 그녀의 딸보다도 어렸다. 하지만 우리는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웠다. 리사는 유대인이었고, 10대 때 영국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이스라엘 현지인과 결혼했다. 그녀는 근처의 탕비실에서 차를 우려낸 다음에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 문간에 나타나서 잠시 수다를 떨곤 했다.

어느 날 리사가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누려고 찾아왔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화면으로부터 시선을 들어 리사를 봤다. 그런데 그녀는 다소 흥분한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나 요즘에 집으로 운전해서 가는 게 조금 걱정 돼.”

“왜요?” 리사는 갈릴리에 있는 유대인 마을인 아츠몬(Atzmon)에 살고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골칫거리 때문에 말이야. 운전해서 지나가는 도로에 일부 아랍인들이 돌을 던지더라고.”

그녀는 팔레스타인 사람이 아니라 아랍인이라고 말했다. 이 나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팔레스타인 사람이라고 말할 때는 서안 지구나 가자 지구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지, 자국의 시민들을 일컫는 표현은 아니었다.

리사가 우리에 대해 언급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골칫거리요?” 내가 되물었다.

“아랍 소년들 몇 명이 아츠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일부 주민들이 화가 나서 아이들을 내보냈어. 그러더니 요 며칠 동안 그 아이들이 우리가 지나가는 차에 돌을 던지고 있어. 정말 스트레스 받는다니까!”

“그 애들이 왜 잘렸는데요?” 내가 물었다.

“아, 그게 말이지⋯” 그녀가 불편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일부 주민들이 그냥 키부츠(kibbutz)[8]에서 아랍인들이 일하는 걸 싫어했어.”

“아.”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많은 유대인 공동체들이 그 안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일하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대인 공동체는 그 안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주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내 사촌 한 명이 어느 키부츠에서 잡역부로 일했는데, 그와 비슷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유대인 공동체는 ‘입회 위원회(admissions committee)’를 통한 심사 절차를 갖고 있었고, 이곳에서 내려진 결정은 다시 바꿀 수 없었다.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지원자들에게 시오니즘(Zionism)[9]의 원칙에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요구하기도 했다. 몇몇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불복하여 소송을 제기했지만 그들이 승소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마을에 산다는 것 역시 상상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팔레스타인 공동체에서는 일반적으로 환영을 받았지만,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대체로 외면받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런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나는 리사를 바라봤다. 이 사안에 대한 그녀의 입장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내 생각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남편에게 대기하라고 전화를 해두고 있어.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녀가 했던 말에 대해서 생각했다. 마침 나는 어느 유대인 정착촌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깔끔한 저택들이 늘어서 있었고, 멋진 정원, 분수, 넓은 인도가 조성되어 있었다.

팔레스타인 공동체와 유대인 공동체는 서로 맞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둘의 차이는 너무나도 확연해서 누구라도 즉시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이다. 유대인 공동체는 국가가 자금을 지원하기 때문에 이민자들이 충분히 혹할 정도의 생활 수준을 제공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건국 이후에 수백 곳의 유대인 거주지가 조성되었지만, 팔레스타인 마을이나 동네는 단 한 곳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기존의 거주지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 내가 방문했던 모든 팔레스타인 마을에서 과밀하고 방치된 게토(ghetto, 빈민가)와 구덩이가 잔뜩 패인 비좁은 길거리를 볼 수 있었다. 편의시설은 부족했으며, 공원이나 공용 공간도 없었다. 또한 무겁고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팔레스타인 마을들은 수백 년에 걸쳐서 발전해 왔다. 현대적인 구획 정리나 도시 계획이 존재하기 전이었다. 반면에 새로운 유대인 공동체들은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조성됐다. 그들의 주택은 서양의 주거지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깔끔하게 지어졌다. 그런 곳들은 파괴된 마을을 대신하여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 모든 아름다움과 질서 속에서도 나에게는 단지 추악함만이 보였다. 나는 언제나 그런 곳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글은 피다 지리이스(Fida Jiryis)의 책 《내 땅의 이방인: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그리고 고향에 돌아온 어느 가족의 이야기(Stranger in My Own Land: Palestine, Israel and One Family’s Story of Home)》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1]
레바논을 마주보고 있는 지중해 동부의 섬
[2]
이스라엘 북부 및 레바논 남부 지역
[3]
사브리 지리이스(Sabri Jiryi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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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스라엘은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을 통해 점령한 지역에서 이스라엘계 유대인들의 정착촌을 꾸준히 늘려왔는데, 이는 국제법상 불법에 해당한다.
[6]
이스라엘의 병역법에는 ‘만 18세가 되면’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7]
키프로스는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1960년에 독립한 뒤에도 영연방(Commonwealth)에 가입하는 등 여러 측면에서 영국과의 관계가 이어져 왔다. 1974년에 쿠데타가 발생하고 터키가 침공하여 점령한 북부(북 키프로스)를 제외한 남쪽(키프로스 공화국)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지원을 받으며 2004년에는 유럽연합(EU)의 회원국이 되었다. 2006년에 발생한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분쟁으로 인해 많은 레바논 사람들이 키프로스 공화국으로 건너왔는데, 이 글의 저자도 이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키프로스 공화국에는 영국 센트럴랭커셔대학교(University of Central Lancashire)의 캠퍼스와 런던대학교(University of London)의 교수센터가 있다.
[8]
시오니즘(Zionism)에 기반을 두고 건설된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농업 공동체
[9]
유대인들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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