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권위주의와 기후 위기
유럽과 미국에 망명 중인 이집트인들은 지난 몇 달 동안 NGO들과 함께 이집트의 정치범들에 대한 문제를 다가오는 정상 회의의 협상 안건으로 올려달라고 청원해 왔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절대 우선시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번 회의가 “아프리카에서 열리는 COP”라는 말을 들었다. COP는 당사국총회(Conference of the Parties)의 약자이며, 여기에서 당사국이란 기후변화에 관한 유엔 기본협약(UNFCCC)에 서명한 국가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전까지의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번 27차 COP는 “이행” 및 “손실과 피해”에 대해서 마침내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는 오염 유발의 책임이 큰 부유한 국가들이 마침내 파키스탄과 같은 가난한 나라들에 진 빚을 갚을 것이라는 희망에 대한 UN식 표현이다. 가난한 나라들은 탄소 배출을 거의 하지 않았음에도 그로 인해 치솟는 비용의 대부분을 대신 치르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주최국의 인권 상황 같이 사소해 보이는 사안에 한눈팔기에는 이번 정상 회의가 너무나도 심각하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COP27은 과연 정말 기후 정의를 위해 싸우게 될까? 그것이 과연 가난한 나라들에게 친환경 에너지, 깨끗한 교통수단, 식량 주권을 가져다줄까? 과연 많은 이들이 주장하듯, 이번 정상 회의에서 정말로 기후 부채(climate debt)
[6]와 기후 배상금(climate reparations)
[7]이라는 사안을 직시하게 될까? 그렇게 된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이집트의 언론인이자 영화 제작자이며 소설가인 오마르 로버트 해밀턴(Omar Robert Hamilton)은 자신의 진지한
에세이에서 기후 배상금에 대한 사안은 명백하다고 했다. “(그것보다) 더욱 어려운 문제는 배상 시스템이 권위주의적인 국가 권력을 더 강화시키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기후 배상금이 진정한 탈탄소 정책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남반구와 북반구 나라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COP 협상의 핵심에 자리해야만 한다. 하지만 남반구를 위해 협상에 참여하는 이들은 주로 권위주의적인 국가 권력들인데, 그들의 단기적인 이익이 무엇인지는 석유 회사의 임원들보다도 훨씬 더 뻔하다.”
간단히 말해서, 이번 기후 회의에서 “이행”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이전의 다른 모든 회담이 그랬던 것처럼 이집트에서도 실질적인 기후 행동을 통한 성취를 거의 이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성과도 없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고문 정권을 지원하고, 나쁜 이미지를 씻어낼 수 있는 수많은 사진과 현금이 쏟아지는 것만 하더라도, COP27은 이미 호사스러운 선물이다.
압드 엘 파타는 폭력적으로 진압당한 이집트 혁명의 오랜 상징이었다. 그런데 이번 정상 회의가 다가오면서, 그는 또 다른 것의 상징이 되어 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기후 위기의 핵심에 있는 ‘희생구역(sacrifice zone)’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이는 어떤 장소나 사람들이 무시되고, 고려되지 않고, 지워진다는 개념이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화석 연료와 광물들을 채취하고 정제하는 과정에서 지역 사회가 오염됐을 때 이러한 사고방식이 작동하는 것을 목격했다. 우리는 그 지역 사회를 보호해 주지 않는 기후 법안을 통과시킨다는 명분으로 그들이 희생될 때,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을 목격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국제 기후 정상 회의라는 맥락 안에서 그것을 목격하고 있다. 협상에서의 ‘실질적인 진전’이라는 허망한 명분 때문에 주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권리가 희생당하며 무시받고 있는 것이다.
만약 지난해 영국의 글래스고에서 개최된 COP26이 그저 ‘헛소리, 헛소리, 헛소리(blah, blah, blah)’에 불과했다고 한다면, 이번 회담의 의미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불길하다. 그것은 바로 ‘유혈, 유혈, 유혈(blood, blood, blood)’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통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이집트의 군대에 의해 대량 학살된 시위대 약 1000명의 피. 계속해서 암살되는 사람들의 피. 길거리에서 구타당하고 감옥에서 고문당하는 사람들의 피. 압드 엘 파타 같은 사람들의 피.
어쩌면 이런 시나리오를 바꿀 시간이 여전히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정상 회의는 전 세계에 밀려드는 권위주의와 기후 혼란 사이의 연관성을 비추는 탐조등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Giorgia Meloni) 총리와 같은 극우 지도자들이 지지를 얻기 위해 기후 위기의 피해자를 포함한 난민들에 대한 공포를 부추기는 것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의 해안으로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유럽연합(EU)이 알 시시와 같은 잔혹한 지도자들에게 현금을 쏟아 주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정치적인 자유 없이는 기후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할 시간은 아직 남아 있다.
“저와는 다르게, 당신들은 아직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알라 압드 엘 파타가 2017년에 쓴 글이다. 당시 그는 많은 기술 대기업이 후원하는 디지털 시대의 인권을 다루는 연례 모임인 라이츠콘(RightsCon)의 연사로 초대를 받은 상태였다. 이 컨퍼런스는 미국에서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압드 엘 파타는 악명 높은 토라(Tora)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신 편지를 보냈다. (당시는 그가 이곳에서 4년을 지낸 후였다.) 그것은 매우 훌륭한
글이었다. 그는 인터넷을 창의성과 실험과 자유의 공간으로 지켜내기 위해 해야 할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아직) 철창에 갇히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자유롭게 컨퍼런스에 참석해 정의, 민주주의, 인권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촉구이기도 했다. 그러한 자유에는 책임이 있다. 그것은 단지 자유로워야 할 책임만이 아니라 자유롭게 행동해야 할 책임이며, 그리고 그것이 가진 변혁적인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할 책임이다. 너무 늦지 않도록 말이다.
비교적 자유로운 수만 명의 COP27 대표단들이 샤름 엘 셰이크의 11월 평균 기온을 확인하고(섭씨 28도로 높은 편이다), 혹시 모르니까 가벼운 셔츠와 샌들, 수영복까지 적절하게 짐을 꾸리며 회의 장소로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아직 패배하지 않은 사람들이 가져야 할 책임에 대해 말했던 압드 엘 파타의 발언을 다시 한번 우선적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정상 회의에 참석하는 이집트인들이 마주하게 될 강도 높은 조사와 위협을 고려할 때, 이곳에 참석하는 외국인들은 과연 어떻게 자신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을까? 그들은 여전히 패배하지 않은 상태일까?
이집트는 그들과 똑같은 사람들이 그들이 누리는 자유를 위해 싸우다가 죽는 곳이다. 우리의 지구와 정치적 상황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세계 공통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맞서 싸우고 있는 곳이다. 그런 곳을 단지 회담이 이루어지는 배경으로서만 대할 것인가? 혹은 화려한 녹색 컨퍼런스 센터 내부로, 이집트의 교도소가 가지고 있는 섬뜩한 진실의 일부라도 들일 방법을 찾을까? 몇몇 수감자의 이름이라도 언급할 수 있을까? COP시민공간(
COP Civics Space)의 이름하에 모여 있는, 카이로에 얼마 남지 않은 시민 사회 단체를 찾아낼까? 그들을 도울 방법을 모색할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압드 엘 파타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나 자선도 아니라고 가장 먼저 말할 것이다. 오히려 멕시코의 치아파스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투쟁에 연대해 온 헌신적인 국제주의자인 그는 모든 나라의 전투 현장에 있는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라이츠콘에 보낸 옥중 서신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손을 내미는 이유는 강력한 동맹을 찾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동일한 전 지구적 문제에 직면해 있고, 연대의 힘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함께 보편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는 반민주적인 파시스트 세력이 부상하고 있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자유가 위기에 처해 있거나 사라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정치적 조류는 좋든 나쁘든 국경선을 넘는 파도를 타고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진전’이라는 대의를 위한 편의성의 이름으로 국제적 연대가 절대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이집트의 혁명은 튀니지의 혁명에서 영향을 받았고, 그 결과 ‘타흐리르(Tahrir)
[8] 정신’이 전 세계에 퍼졌다. 이는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처럼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청년들이 주도하는 여러 운동들에 영감을 주었다. 그리고 이 시위는 다시 반자본주의적이며 생태사회적인 새로운 정치의 탄생에 일조했다. 실제로 우리는 타흐리르에서부터 월스트리트까지,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의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에 이르기까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lexandria Ocasio-Cortez)가 미국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그녀가 그린 뉴딜(Green New Deal)을 옹호하기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반듯한 직선을 그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