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방인과 이끼
현재 내가 다니고 있는 옥스퍼드대학교의 900년 역사에서, 이끼의 손길은 수많은 사람을 매혹시켜 왔다. 그러나 역사학자인 마크 롤리(Mark Lawley)가 지적했듯이, 영국에서는 17세기 말까지도 이끼에 대한 별도의 연구가 시작되지 않았다. 영국 이끼의 다양성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했던 주요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은 바로 독일의 식물학자인 요한 야코브 딜레니우스(Johann Jakob Dillenius)였다. 딜레니우스는 의학을 공부했지만, 기센대학교(University of Giessen)에 다닐 당시에도 식물학에 강한 흥미를 품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자신의 첫 번째 주요 연구 논문인 〈기센 주변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식물들의 카탈로그(Catalog of Plants Originating Naturally Around Giessen)〉(1718)를 썼다. 이 논문의 ‘민꽃식물(Cryptogams)’ 항목에서 그는 다수의 이끼와 균류를 언급한다. 민꽃식물이란 씨앗이 아닌 포자(胞子)를 통해서 번식하는 식물을 의미하며, ‘하등식물(lower plant)’이라고도 알려져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동물들은 똥과 오줌을 싸놓는 더러운 땅바닥을 손으로 직접 만지면서 일과를 보내려고 했던 식물학자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딜레니우스는 그렇게 했고, 그의 연구는 영국의 대표적인 식물학자였던 윌리엄 셰라드(William Sherard)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셰라드는 그 직전에 현재 튀르키예의 이즈미르(İzmir) 지역에 해당하는 스미르나(Smyrna)에서 자란 식물을 많이 확보해 그것의 분류를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는 딜레니우스에게 런던 근교의 엘섬(Eltham)에 있는 자신의 정원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그래서 딜레니우스는 1721년 영국으로 이주해 셰라드의 식물 컬렉션과 영국의 이끼를 연구하고, 영국 식물에 대한 피나크스(pinax, 삽화가 그려진 카탈로그) 작업을 하게 된다.
영국에서의 처음 7년 동안, 딜레니우스는 런던에 있는 자신의 하숙집과 엘섬을 오가며 살았다. 1724년, 그는 영국에서 자신의 첫 번째 책을 만들어 냈는데, 그것은 식물학자이자 박물학자였던 케임브리지의 존 레이(John Ray)가 1670년에 처음 저술한 《영국 생물종의 체계적 개요(Synopsis methodica stirpium Britannicarum)》의 3판이었다. 이 책의 2판(1696)에서 레이는 80가지 종류의 이끼를 소개했다. 조지 클래리지 드루스(George Claridge Druce)의 계산에 의하면 딜레니우스는 여기에 40가지의 균류와 150종류 이상의 이끼, 그리고 200여 종의 종자식물을 추가했다고 한다. 딜레니우스는 민꽃식물을 ‘균류(fungi)’와 ‘선류(musci)’로 구분하고, 여기에서 양치식물(fern)과 쇠뜨기류(equisetum)는 배제했다.
이는 아마도 역사상 처음으로 누군가 오직 ‘하등식물’에게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연구한 것이었다. 18세기의 한 신사가 하루에 몇 시간씩 영국의 이끼를 만지고 수집하면서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는 생각이 나를 매료시켰다. 딜레니우스의 내면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하지만, 그의 편지를 보면 그가 이끼를 사랑했으며 동료들과의 생활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국 사람들 사이에서 보내는 생활은 어땠을까?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3년의 연구 끝에 레이의 《영국 생물종의 체계적 개요》를 자신만의 버전으로 출간했지만, 이 책에는 딜레니우스의 이름이 실려 있지 않았다. 해당 출판사와 셰라드는 영국인들이 자신들 땅의 이끼를 연구한 책에 외국 사람의 이름이 실려 있는 걸 싫어할까 봐 두려워했다. 딜레니우스는 영국의 또 다른 대표적 식물학자이자 동료였던 리처드 리처드슨(Richard Richardson)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 생물종의 체계적 개요》를 익명으로 출간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 책을 리처드슨에게 공개적으로 헌정하는 기회를 갖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밝혔다. 그 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누락되긴 했지만, 그는 리처드슨이 셰라드를 설득해 자신의 꿈인 《이끼의 역사(the History of Mosses)》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게 되길 원했다. 편지에는 이렇게 썼다. “제가 말하는 건 《이끼의 역사》입니다. 물론 제가 그걸 끝낼 시간이 있다면 말입니다. (중략) 혹시 당신께서 (중략) 제가 일주일에 하루를 여기에 투자할 수 있도록 그를 설득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쭙니다.”
딜레니우스는 1732년까지도 일주일에 하루를 빼서 《이끼의 역사》를 저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그가 피나크스 작업을 즐겼더라도, 진정한 열정은 하등식물들을 향해 있었다. 약 4년 동안 셰라드의 피나크스 작업을 하는 동안, 그는 단 하루라도 자유롭게 온전히 이끼에 전념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던 중 1728년에 셰라드가 사망하자, 딜레니우스의 운명은 하룻밤 사이에 바뀌었다. 셰라드는 자신이 소장한 책과 식물들을 딜레니우스에게 남겼으며, 옥스퍼드대학교 측에는 식물학 교수직을 유지하는 데 사용할 목적으로 상당한 액수의 돈을 남겼다. 그렇게 해서 셰라드 석좌교수(Sherardian professor)직이 만들어졌으며, 셰라드가 유언장에서 첫 번째 인물로 지명한 사람은 딜레니우스였다.
1728년에 딜레니우스는 옥스퍼드로 이사 가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 살았다. 이곳에는 사망한 윌리엄 셰라드의 남동생 제임스 셰라드(James Sherard)가 있었는데, 그는 딜레니우스를 상당히 싫어했다. 딜레니우스에게 이끼 연구와 피나크스 작업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으며, 대신에 《호르투스 엘타멘시스(Hortus Elthamensis, 엘섬의 정원)》(1732)라는 책을 쓰라고 강제했다. 이 작업 때문에 딜레니우스는 재정적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호르투스 엘타멘시스》 이후, 딜레니우스는 자신의 커리어와 삶을 이끼 연구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1741년에 《히스토리아 무스코룸(Historia Muscorum, 이끼의 역사)》를 출간했다. 576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85개의 삽화가 들어 있는, 어마어마하게 상세한 이 책은 이끼와 균류, 지의류(地衣類), 조류(藻類), 우산이끼류, 뿔이끼류, 석송류(石松類)를 포함하여 모두 661 종류의 하등식물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끼를 초롱이끼, 털깃털이끼, 솔이끼, 참이끼, 물이끼, 석송의 여섯 가지 속(屬)으로 나눴다. 이 분류는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필생의 임무였던 이 책은 시장에서 잘 팔리지 않았다. 책의 가격을 낮추면 사람들이 사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한 딜레니우스는 곧이어 요약본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대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이탈리아의 피에르 안토니오 미첼리(Pier Antonio Micheli)가 이미 10여 년 전에 민꽃식물 분야를 규정하는 자세한 책을 썼던 것이다. 딜레니우스는 《이끼의 역사》 요약본을 출간하지 못한 채, 1747년에 옥스퍼드의 자택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딜레니우스의 이야기에서 가장 애잔한 부분은 심지어 오늘날에도 영국 선태학(bryology)의 역사에서 그가 기여한 부분이 대륙 식물학자들(Continental Botanists)이라는 항목 아래에 묶여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고국인 독일은 물론이고 그가 살았으며 묻혀 있는 영국에서도 추모받지 못했다. 그의 생애는 이민자의 운명이었다. 나는 딜레니우스에게 금세 친밀감을 느꼈다. 이방인이었던 그가 나에게는 친구가 된 것이다. 템스 강을 따라 걸으면서, 나는 그가 그린 놀라운 삽화를 손에 들고 무리 속에서 초롱이끼와 솔이끼를 구별하는 방법을 공부했다. 나는 언제나 나무를 바라보면서 숲에서 부는 바람에 귀를 기울이는 걸 좋아했는데, 그 삽화들은 나의 마음과 감각이 의식적으로 이끼들에게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이끼는 우리를 향해 덤벼들지도 않고, 소나무의 잎이나 참나무의 가지처럼 우리를 붙잡지도 않는다. 그것이 경이로워 보일 때조차도, 자세히 관찰할 정도로 오랫동안 흥미를 가지기는 어렵다. 나는 궁금했다.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이민자였던 딜레니우스 같은 사람이 왜 모두가 그냥 지나치는 식물에게 자신의 에너지와 희망을 전부 쏟아부었던 것일까?
역사학자로서 나는 몇 가지의 이유를 나열하고 싶다. 과학적 세계관의 부흥, 제국주의, 식물과 사람의 세계를 분류하고픈 충동, 1609년에 독일의 기센(Giessen)에 설립된 식물원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대체 왜 이끼였을까? 왜 이 사람이었을까? 그에 대한 기록은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