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있고 일본에는 없는 것’. 인터넷에 이런 일차원적이고 직관적인 문구를 검색해 보면 헛웃음이 나올 수도 있다. 바로 ‘참외’가 검색 결과 상단에 나오기 때문이다. 겉껍질이 노랗고 속살이 어슥어슥한 참외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으로, 영어로 ‘Korean Melon’이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렇듯 한국에는 있지만 일본에는 없는, 또는 한일 양국이 비슷한 듯 다른 것은 수도 없이 많다. 한 나라의 문화는 그 나라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발전해 왔다는 점에서, 이를 다른 문화나 사회 구조와 견주어 우월성을 따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무엇에 주안점을 두는지에 따라 정의는 달라질 것이다. 지리적인 면에 주목한다면 일본은 해가 뜨는 곳, 극동의 나라, 섬나라 등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아직도 천황이라는 호칭을 가진 군주가 상징적인 통치를 하는, 정규군은 없지만 자위대라는 이름의 군대 아닌 군대가 있는 나라, 가끔 우익 정치인들이 역사에 관해 망언하는 나라로 인식할 수도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한때 세계 경제 시장을 들었다 놓았다 할 만큼 엄청난 저력을 자랑했지만, 거대한 버블에 신음하며 지금껏 경기 침체의 고충을 겪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역사·문화 측면에서는 고대부터 아시아 대륙 및 한반도와 교류하며 각종 문물의 자양분을 얻어간 나라이자, 서구 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여 근대화를 달성하고 한반도를 36년간 통치하며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았던 나라다.
무수한 접점들 속에서, 우리가 한국이 얼마나 성장해 왔는지를 가늠할 때엔 늘 일본에 대한 감정적 열등감이 서려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일본과 한국의 성장 수준을 ‘통계’의 잣대로 비교하는 시대가 왔다. 한국과 일본의 발전 수준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 필자는 학생들에게 일본경제론이니 일본경영론, 일본대중문화를 가르칠 때에 일본을 칭찬하거나 선망하는 수위는 점점 낮아져 갔다. 일본이 여전히 한국을 무시하는 뉘앙스를 풍길 때가 더러 있으나 반대로 한국의 저력에 대한 비판에 빗대어 두려움을 드러낼 때도 많다. 2022년 5월,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일본을 제치고 한국을 먼저 방문한 것, 게다가 청와대도 아닌 삼성전자의 평택 반도체 공장으로 직행한 것이 일본의 입장에선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프롤로그에서 언급했듯, 이 책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반일이나 친일이 아니다. 활용 가치가 높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이제는 극일(克日)을 통해 용일(用日)을 채택해야 한다. 일본의 기술력과 경제력에 대해서는 인정하되, 한국의 정치· 경제·문화적 상황이 일본보다 뒤처져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치부하는 오류는 피하자. 대일 관계를 설정할 때 지표만큼이나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국민의 감정이다. 한일 간 격차가 줄어들기 어려울 것이라는 현상 유지 편향(status quo bias)은 이제 벗어나야 한다. 특히 한 나라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국제 분야는 초두효과(primacy effect)가 강한 만큼, 중등 교육 과정에서 일본이 한국을 앞선 선진국이라 지칭하는 것도 이제는 멈추자. 한국의 도약을 발목 잡는 동시에 시대에 뒤처진 관점이다.
‘일본에게만큼은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던 50~60대의 구세대는 지나가고 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일본을 그저 전 세계 200여 개국 중 하나, 혹은 자유 여행하기 좋은 나라 정도로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익 세력은 고령화에 접어들며 지나가고 있고,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한류를 좋아하는 젊은 청년들은 늘고 있다. 이런 새로운 세대 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 한일 관계가 개선된다면, 한국과 일본은 우열을 따지는 관계에서 벗어나 다름을 인정하는 타자(other)로서의 관계로 나아가지 않을까? 참외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