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주 동안, 페르시아 고원의 도시와 마을에 혁명의 분위기가 흘렀다. 이 움직임은 지난 9월 16일 이란의 젊은 쿠르드족 여성 마흐사 아미니(Mahsa Amini)가 테헤란의 도덕 경찰에게 체포된 뒤 사망하면서 시작했다. 이 시위는 페미니즘적 성격으로 시작했지만, 다양한 계층과 민족에서 이슬람 공화국을 끝내 버리고 싶다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을 결집시키기도 했다. 이란에서는 지난 15년 동안 수많은 저항 운동이 있었지만 최고 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Ayatollah Ali Khamenei)는 강경 대처와 반대파 내부의 분열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각각의 시위를 편안하게 억압했다. 그러나 이번에 정권의 반대파가 보여 주는 회복력과 단결력은 일시적인 소요에 그치고 말았던 예전의 패턴과는 확실히 다르다. 이란은 대중적 분노의 물결에 맞서 이슬람 공화국 체제를 방어해야 하는 격정적인 시위 단계에 접어들었다.
보안군은 시위대에 보복으로 어린이 60명과 여성 29명을 포함해 최소한 448명을 살해하고, 최대 1만 7000명을 체포했다. 뉴욕에 있는 이란인권센터(ICHRI)에 따르면, 시위에 참가한 사람 중 서른여섯 명이 (사형에 처할 수도 있는) 중범죄로 기소됐고, 그중 몇몇은 보안군 병사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 당국 극도의 자제력을 발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난 11월 9일, 이란의 지상군 사령관은 하메네이가 명령만 내리면 반대파의 “파리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 나라에 남아 있을 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학에서든, 거리에서든, 아니면 경찰의 총탄과 곤봉에 희생당한 사람들이 묻힌 묘지에서든 매일 새로운 시위가 열리고 있다. 그리고 시위대가 한 명 살해될 때마다, 그로부터 시아(Shia)파의 애도 기간이 절정에 달하는 40일이 지나면 무덤가에서 또 다른 시위가 열릴 것이며, 그로 인해 또 다시 사상자가 나올 가능성이 커지고, 잔학성과 반작용의 순환이 더욱 연장될 것이다. 1978년에 (이란의 옛 군주제인) 샤(Shah) 체제를 약화시키고, 1979년 1월에는 결국 국왕이 달아나는 결과를 이끌어낸 것도 바로 죽음 후의 장례식, 장례식과 또 다른 시위, 그리고 시위 이후의 죽음으로 반복되는 순환이었다.
특별한 명칭도 지도자도 없는 이 운동은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적응력도 좋다. 이번 시위는 지금까지 활용되지 않았던 자원, 즉 2등 시민의 지위에 있는 여성들의 잠재적인 불만을 강력한 자산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지만,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초기 이후 처음으로, 전국의 수많은 여성이 어떠한 형태의 히잡도 착용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 지난 12월 4일, 이란 검찰은 도덕 경찰 제도가 “중단”됐다고 선언했다. 이는 이번 시위 초기부터 보였던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들을 눈감아 준 당국의 정책이 영구화됐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소셜미디어상의 회의론자들은 이 선언이 반대파를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려는 정부의 술책이라고 반박했다.
이번 시위의 새로운 점이 여성이 동참하게 된 이유인 사회적 급진주의 외에 또 하나 있다면 바로 젊음이다. 나이 든 이란인들은 시위에 참여하는 자녀들을 걱정하면서 집에 머물거나, 또는 아이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걸 막기 위해서 마지못해 그들과 동행하기도 한다. 그들은 흔히 아이들의 “두려움이 증발했다”는 말을 하곤 한다.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은 일반적으로 잃을 것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특성이다. 그러나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에 해당하는 이란의 청년들에게는 이 특성이 해당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청년들이 이번 시위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물가가 상승하고, 리알(rial)화가 폭락하고, 이란 사회에서 성공의 3대 요소로 여겨지는 결혼, 아파트, 자동차에 대한 전망이 사라지는 걸 목격했다. 코로나19 봉쇄로부터 점차 벗어났지만, 이란 제재로 인해 국경 밖의 세계에 접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성장과 소비력은 계속 억제됐으며, 정부 당국은 인터넷 접속을 방해했고, 정권의 인사와 그들의 가족에게 경제력이 점점 더 집중되는 것을 목격했다.
현재의 운동은 “여성, 삶, 자유”라는 고무적인 구호와 함께 시작했다. 온라인에는 활기찬 시위 영상이 퍼졌다. 그중 하나는 학교나 관공서에서 흔히 착용하는 머리를 단단히 덮는 형태의 히잡을 벗어 던진 여학생들이 남성 공무원에게 문구류를 집어 던지면서 학교 밖으로 그를 쫓아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 시위의 비공식 찬가는 이란 북부 출신인 셔빈 하지푸르(Shervin Hajipour)가 달콤한 목소리로 탄식하듯 부르는 “위하여(For)”라는 곡이다. 몽환적이고 슬픔과 갈망으로 가득한 이 노래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폭력이 거의 3개월 동안 이어지면서 구호는 더욱 강경해졌다. 이제는 “내 형제를 죽인 그를 죽일 것이다”라는 말이 더 많이 들릴 것이다. 인스타그램의 피드에는 화염병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는 동영상과 정권의 자원 민병대인 바시즈(Basij)의 병영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 올라온다. 이렇게 어두워지는 분위기는 10월 말에 인기 래퍼인 투마즈 살레히(Toomaj Salehi)가 체포되기 직전부터 시작했다. 살레히가 자유로운 신분일 때 마지막으로 공개한
뮤직비디오를 보면, 그가 말쑥한 엘리트 지배층의 누군가를 위해 커피 찌꺼기의 의미를 해석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1] 그는 “당신 잔의 바닥은 (중략)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랩을 한다. 그리고 이란의 심문관들이 사용하는 기법을 빌려서 상대방에게 (잘못에 대한) 자술서를 쓰라고 하며, 이번에는 “최고 지도자에게 그것을 확실히 전달하라”고 말한다.
살레히는 시위대의 뒤에서 지지를 보낸 수많은 유명인 중 한 명이다. 그중에는 히잡을 벗어 던진 여배우와 당국의 탄압을 비난하는 동영상을 게시한 영화감독이 있고, 자신의 모교이자 이란의 MIT라고 할 수 있는 테헤란의 샤리프공과대학교(Sharif University of Technology in Tehran)에 모인 활기 넘치는 군중 앞에서 모든 체포된 학생을 석방하라고 촉구한 이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구 해설가도 있다.
살레히가 시위의 전술에 대해 (‘시간과 장소가 명기된 시위 초대에는 응하지 말라, 그건 함정이다’와 같은) 조언하고 나이 든 세대에게는 길거리의 자녀들과 합류하라고 애원하는 등 자신의 소셜미디어 팔로워들에게 저항하라고 촉구하기 시작했을 때, 앞으로 자신에게 닥치게 될 운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살레히가 체포된 후, 당국은 그가 눈을 가린 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친다고 말하는 동영상을 내보냈다. 그러자 그의 삼촌이 즉시 소셜미디어에 등장해서 해당 동영상의 살레히가 가짜라고 주장했다. 이는 진짜 살레히가 여전히 꺾이거나 굽히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지난 11월 27일, 이란 사법부의 한 관계자는 살레히가 “지상을 타락시킨 혐의(corruption on earth)”의 (살인죄로 처벌 가능한) 중죄로 기소됐다고 발표했다.
보안군의 총구와 곤봉에 맞서는 이란 청년들의 용기는 전 세계에서 존경받았다. 그러나 세계의 관심은 변덕스럽고 이란 정권은 엄청난 자원을 갖고 있다. 문제는 현재 이슬람 공화국의 반대 세력이 이전의 실패한 혁명들에서 부족했던 충분한 숫자와 지속적인 힘, 전술적 지식을 가질 수 있을지다. 다시 말해서, 이번에는 과연 다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