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 산책과 방황
3. 로베르트 발저와의 산책
잠이 올 듯 말 듯 한 오후에는 로베르트 발저의 단편 모음집 《
산책자》를 읽어 보는 건 어떨까요? 로베르트 발저의 삶은 쓸쓸했습니다. 책을 읽고 있자면, 자기 자신과 세상이 겪는 쓸쓸함에 대한 끝없는 경계와 의심, 그럼에도 쓸쓸하게 남아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고집이 묻어나옵니다. 발저의 작품은 걷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걸으면서 때로는 모르는 이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삶을 상상하기도 하며, 자신이 가상의 화자가 되어 다른 이에게 자신의 생을 의탁하기도 하죠. 요컨대 발저의 글에는 자기 자신이 없습니다. 발저는 자신의 자아를 텅 비우고, 산책하며 만난 수많은 것들을 그 안에 담습니다. 그릇이 되기 위한 산책에 가까워 보여요. 이런 모습의 산책은 항해하는 이의 마음가짐과 닮아있습니다. 역사 속 항해사들은 우연한 만남 속에서 발견을 마주쳤습니다. 우연이 없다면 그들의 항해는 산책보다는 경주에 가까웠을 테죠. 모두가 자기 자신에 골몰해 타인을 돌보지 못할 때, 발저의 자아에 대한 끝없는 의심은 낯설 정도로 고독합니다.
“
내 이름은 헬블링. 아무도 내 이야기를 글로 써주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여기서 내가 직접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인간들이 고도로 세련되어진 오늘날 한 사람이, 예를 들면 나 같은 사람이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하는 것은 조금도 특별하지도 이상하지도 않다. 내 이야기라고 해봐야 간단하다. 나는 아직 젊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한참 더 남았으므로 내 이야기는 종결지을 수가 없을 테니까. 내게서 두드러지는 점이라고는 아주 심하게, 거의 과도할 정도로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 나는 무수한 인간들 중 하나이며, 바로 그 점을 나 스스로 기이하게 여긴다.”
- 〈헬블링 이야기〉, 《산책자》
4. 기묘한 관광, 웹 서핑
얕은 낮잠 후에는 활기찬 서핑도 가능할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추운 겨울, 바다에 들어가기 어렵다면, 하이퍼 링크 파도를 타고 웹 서핑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위키의 수많은 링크를 타고 움직이다 보면 전혀 몰랐던 사실에 당도하기도 합니다. 독일의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조크의 영화 〈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는 미스터리한 사람인 카스파 하우저를 다룹니다. 영화를 보다가, 카스파 하우저를 검색했다가, 하이퍼 링크의 파도에 갇혀 기묘한 여정을 떠난 적도 있어요. 카스파 하우저의 링크를 타고 가다가 어느새 《성호사설》에 소개된 끔찍한 저주, 염매에 관한 정보를 읽게 되기도 했죠….
커뮤니티 사이트도 기묘한 관광의 시작점이 됩니다. ‘리미널 스페이스’의 사진을 모아 놓은
레딧의 한 게시판은 왜인지 모르게 불편한 사진들로 가득합니다. 리미널 스페이스는 직역하자면 ‘
경계 공간’입니다. 복도, 대기실, 빈 방이 대표적입니다. 리미널 스페이스를 담은 사진들은 텅 비어있고, 멈춰있습니다. 불편한 감정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복도는 지나쳐야 하는 곳이지 오래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아니고, 놀이동산은 사람으로 꽉 차있어야 하지, 비어있으면 안 되는 공간이기 때문이죠. 레딧의 게시판을 보면, 살면서 모를 수 있었던 (혹은 몰라도 됐던) 공간들을 만나게 됩니다. 마이애미 비치 모텔의 복도를 언제 볼 수 있을까 싶은데, 리미널 스페이스 게시판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웹 사이트 ‘
영화 속 저글링(Juggling in Movies)’은 저글링 장면이 등장하는 444개의 영화를 리스트 업 해놓은 사이트입니다. 왜 이런 일을 할까 싶지만, 또 이런 일들이 재미있기도 합니다. 영화 속 저글링이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1907년에 발표된 영화 〈
The Maniac Juggler〉를 추천합니다. 저글링을 멈출 수 없는 남자의 6분간의 여정을 그린 코미디 영화입니다. 저글러의 항해라고 할 수 있으려나요?
저녁 ; 나를 위한 항해
5. 나를 위한 플레이리스트
저녁에는 대항해시대, 선원들의 괴혈병을 막아줬던 상큼한 럼 칵테일을 마시며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 럼을 구하기가 어렵다면, 소주에 모히토 향이 나는 주스를 섞어도 좋아요. 직접 만든 야매 칵테일은 맛이 있어도 맛있고, 맛이 없어도 맛있는 편이니까요. 술을 홀짝거리며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죠. 요즘은 알고리즘을 통해 나만을 위한 음악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세상이지만 또 가끔은 직접 음악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이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무작정
디스콕스를 켜고 둘러보기에서 마음에 드는 앨범 아트의 음악을 들어 보세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빠르게 넘기고, 마음에 든다면 나의 음악으로 저장해 보세요. 상황과 계절감을 생각하며 만드는 플레이리스트는 하루를 마무리하기에도, 내일을 시작하기에도 좋은 동력이 돼요. 제가 방금 발견한 앨범은 캘리포이니아의 사운드 디자이너, Xarxay의 하우스 음악이 모인 〈The Note of Admiration〉이었어요. 신이 나서 살짝 몸을 흔들어 보기도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