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빙 하우스 역시 다수가 공유하는 공간이지만 공공장소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공적 영역인 공공장소와 달리 코리빙 하우스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의미가 혼재해 있다. 집은 개인의 생활 습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이다. 누군가에겐 오롯이 하루를 보내는 곳이기도 하며 누군가에겐 피곤한 일과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입주자가 내는 월 사용료에는 공용 공간의 사용도 포함되는데 이 공간은 입주자들에게 사적 영역이기도, 공적 영역이기도 하다. 에티켓만 강조할 수도, 각자의 편의만을 강조할 수도 없다.
코리빙 하우스는 일종의 1인 가구 ‘샐러드 볼(salad bowl)’이다. 각기 다른 사정을 가지고 입주한 사람들은 다양한 생활 습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코리빙 하우스 내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미묘하고도 복잡하다. 긴밀하게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각자의 요구를 정확하게 관철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에 갈등을 유연하게 해결하고, 시시각각 생기는 요구 사항을 가시화하는 매체가 필요하다. 코리빙 하우스들을 조사해 보니 공간 텍스트가 이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먼저 공간 텍스트가 활용되는 방식을 확인하기 위해 현장 답사와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다. 다양한 코리빙 하우스의 공용 공간을 탐방하며 어떤 규칙들이 오가는지 살펴보고 현장 답사로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은 입주민 인터뷰를 통해 해결했다.
코리빙 하우스에서 활용되는 공간 텍스트의 유형과 목적은 다양했다. 먼저 목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정보 전달, 규칙 주지, 공간 분위기 조성이 그것이다. 우리가 수집한 공간 텍스트를 분류에 따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세탁실입니다”, “영양 가득 스무디를 만들 수 있는 진공 블렌더입니다” 등은 정보 전달에 해당한다. 규칙 주지는 주로 입주민에게 특정 행동을 요청하거나 제지하는 양식을 가졌다. 예컨대 “TV 프로그램 유료 결제는 하지 말아 주세요”, “이용 후 다른 사람을 위해 뒷정리를 부탁드립니다” 등이다. 공간 분위기 조성을 위한 공간 텍스트는 “나의 일상이 바뀌고 지역이 즐거워지는 공간”, “오늘은 다른 리빙 메이트와 직접 만든 음식을 나눠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등이다. 인쇄물 형태의 공간 텍스트가 지니는 한계도 목격했다. 공간 텍스트가 많이 붙어 있으면 오히려 입주민들이 공간 텍스트를 간과하기 쉬웠다. 또 한 인쇄물의 글자 수가 많으면 가독성이 떨어져 역시나 입주민의 주목을 받기 어려웠다.
입주민 인터뷰에서는 코리빙 하우스 내 규칙의 근본적인 문제를 엿볼 수 있었다. 공간 텍스트를 통해 공유되는 규칙은 시시각각 변하는 입주민의 요구 사항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대부분 관리자가 배포한 것이었다. 공공장소의 공간 텍스트처럼 공식적인 규칙이라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입주민의 현실적인 요구를 담지 못했고 단발성에 그치는 것도 많았다. 반면 입주민이 주도해서 생활 속 불편을 설명하고 규칙 수정을 건의하는 공간 텍스트가 등장하기도 했다. 소셜 미디어의 단체 채팅방을 통해 새로운 규칙을 건의하는 입주민도 있었으나 익명의 제안으로 남아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익명이라는 장점을 발판 삼아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오히려 익명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익명의 의견들이 수시로 건의되고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 반복되다 보니, 입주민의 메시지가 금세 휘발되는 단점도 있었다.
무엇보다 코리빙 하우스에 거주하는 1인 가구는 규칙을 건의하고 갈등에서 합의를 이루는 데 있어 소극적인 경향이 있었다. 공용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다 논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행주를 쓰고 걸어 두는 건 위생상 중요한 규칙이지만, 누군가에겐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때문에 입주자들은 암묵적인 규칙에 의존하고 있었다. 인터뷰에 참여한 입주민은 “암묵적인 룰이 있어요. 휴지 같은 건 마지막으로 쓴 사람이 채우는 거죠.”라고 말했다. 눈치를 통해 암묵적인 규칙을 준수한다는 것이다. 다만 눈치와 암묵적인 규칙에 의존하면 인지적 노고가 많이 들 수밖에 없다.
공간 텍스트는 갈등을 중재하기 위한 여러 대안적 기술 중 하나지만 의견의 발화 주체와 수렴, 구성 방식에 있어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공장소의 공간 텍스트는 보통 갈등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것이고 많은 경우 포괄적 규칙이지만 거주 공간의 갈등은 실시간으로 발생하고 갈등의 형태도 좁고 구체적이다. 꼭 코리빙 하우스가 아니더라도 인구가 도시로 밀집되며 주거 공간을 둘러싼 갈등은 첨예해지고 있다. 아파트, 오피스텔 등의 대규모 공동 주거 시설에서 다양한 거주민의 갈등을 중재할 방안이 필요하지만 아직 많은 경우 관리자에 의지하는 등 간접적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세세한 부분에서는 규칙의 암묵화가 일어난다. 층간 소음 문제를 떠올려 보자. 직접 찾아가서 따지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관리실에 연락을 취하거나 문 앞에 메모를 붙이고 오는 방식으로 불만을 전달한다.
건물을 공유하는 아파트, 오피스텔과 달리 코리빙 하우스는 생활과 닿아 있는 공간을 공유한다. 모든 생활 밀착형 문제를 관리자를 통해 해결할 수 없기에 기술적 고민이 수반되어야 한다. 앞선 두 프로젝트는 기술이 소통의 과정을 대신했다. 소통은 관계를 만들고 갈등을 해결하는 열쇠다. 입주민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규칙을 제안하고 수정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있다면 어떨까?
주거 공간은 아니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공장소인 도서관을 대상으로 비슷한 시도를 했던 사례가 있다. 호주 퀸즐랜드공과대학에서 도시 정보학 및 HCI를 연구하는 마크 빌란직(Mark Bilandzic) 교수는 ‘젤라틴(Gelatine)’이라는 인터랙티브 스크린(Interactive Screen)을 제작해 도서관에서 실험을 진행했다.
[3] 이용객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시각화하는 제품이다. 도서관 이용객들이 어떤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도서관을 이용하는지, 현재 겪고 있는 학문·교육적 어려움은 무엇인지 등을 파악할 수 있게 디자인했다. 실제로, 젤라틴을 이용한 사람들은 도서관 이용자들 간의 암묵적 분위기를 더 잘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서로가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대화도 가능했다. 젤라틴은 서로 목적이 있는(on demand) 우연적(serendipitious) 만남이 형성되기 좋은 매개체로 밝혀졌다. 스크린을 통해서 같은 공공장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에 대해 인지하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커뮤니티의 분위기와 정체성을 더 잘 느끼며 녹아들기 수월하다.
코리빙 하우스에도 입주민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규칙을 제안하고 수정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있다면 어떨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입주민 전용 커뮤니케이션 애플리케이션과 더불어 오고 가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스마트 월(smart wall)이 함께 생긴다면 더 효과적일 것이다. 단순히 스마트폰을 통한 애플리케이션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입주민에게는 요긴하지만, 소극적인 입주민에게는 그마저도 큰 노력을 들여야 할 것이다. 실시간으로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남겨진 의견을 확인할 수 있는 디스플레이가 있다면 암묵지로 해결하던 규칙마저도 가시화되며 좀 더 많은 입주민에게 퍼져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입주민들 마음에 쌓인 불편함도 한층 해소됨과 더불어 입주민 간의 심리적 거리도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