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디자인 시대
10화

에필로그 ; 욕망의 공공성을 향해

어느 겨울날 미국 뉴욕 맨해튼을 방문했을 때였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모든 교통이 마비되고, 학교와 관공서가 문을 닫은 날이었다. ‘뉴욕의 아마존’이라 불리는 거대한 센트럴파크(Central Park)를 지나치던 나는 뉴욕 시민들이 스키와 썰매를 갖고 나와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눈밭 위를 신나게 가로지르는 그 모습이 부러웠다. 도시에 살면서도 가까운 곳에 이런 거대한 공원이 있다는 건 시민 누구나 한번쯤 누리고 싶은 기회일 것이다.

그런데 과거엔 이 센트럴파크가 있던 자리에 공원 대신 집과 건물들이 빽빽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맨해튼의 발전은 남쪽부터 시작됐다. 경제적 부흥으로 인구가 대거 유입됐고, 일하거나 거주할 공간이 부족해지며 도시는 북쪽으로 빠르게 확장해 갔다. 그 결과 1850년대에는 맨해튼 전체가 건물과 도로로 가득찬 도시가 됐다. 주말에 소풍을 가고 싶어도 시민들은 공원 대신 잔디가 깔린 공동묘지에 가야만 하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이때 옴스테드(Olmsted)라는 조경가가, 맨해튼에도 런던의 하이드 파크(Hyde Park)와 같은 거대한 공원을 세우자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곳(센트럴파크)에 공원을 만들지 않는다면, 100년 후에는 이 넓이만큼의 정신 병원이 필요할 것이다.”

그의 꿈은 이뤄졌다. 뉴욕주와 연방정부가 승인했고, 이들의 자금 지원으로 현 센트럴파크 면적의 부지를 모두 매입했다. 이윽고 시민 공모와 추가 건설을 거쳐 1879년, 지금의 센트럴파크가 탄생했다. 1859년 발표된 센트럴파크 성명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원의 주요 목적은 건강한 레크리에이션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을 도시에 사는 모든 계층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 공원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 젊은이와 노인, 포악한 사람과 고결한 사람 모두에게 건강한 오락을 제공해야 한다.’
맨해튼의 리틀아일랜드 ⓒ김주연
센트럴파크 탄생 후 142년이 지난 2021년 5월 21일, 맨해튼 서쪽 허드슨 강 위에 아이코닉한 공원 하나가 개장했다. 강 가운데 흰색 튤립 모양의 구조물들로 솟아난 리틀아일랜드(Little Island)라는 공원이다. 허드슨 강가의 대표적인 힐링 장소로 ‘그린 오아시스’라고도 불린다. 각각 모양과 크기와 높이가 다른 132개의 튤립들은 식물을 심을 수 있는 화분으로 기능한다. 약 3000평 면적의 드넓은 언덕이 마련된 이 공원은 개장 당시 코로나19를 겪고 있던 뉴욕 시민들에게 큰 위로가 됐다.

리틀아일랜드는 이 책에서 짚은 공공디자인의 일곱 가지 침술 중 재생, 제도, 시민, 정서, ESG 침술과 관련 있다. 우선 공원의 피어 54(Pier 54) 선착장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였다. 1910년에서 1935년 사이에 영국을 정기적으로 오가던 여행선이 출항하고 정박하는 곳이었고, 1912년엔 타이타닉 사고의 생존자들이 구조선을 타고 안전하게 도착한 선착장이기도 했다. 그러다 2012년, 허리케인 샌디가 뉴욕시 해안선을 강타하며 피어 54 선착장은 무너졌고 나무 말뚝들만 잔해로 남았다. 이 역사적인 부두를 공원으로 탄생시키고자, 2013년부터 재생 침술 작업이 시작됐다. 현재 리틀아일랜드 입구엔 피어 54 선착장 건물의 파사드가 철제 구조물로 전시돼 있다.

리틀아일랜드는 제도 침술이기도 하다. 1998년 뉴욕주에선 맨해튼 해안선을 따라 새로운 공원을 조성하는 허드슨 리버 파크 트러스트(Hudson River Park) Trust, 일명 ‘트러스트’라는 협의체를 만들었다. 트러스트는 공원의 경계를 만들고, 임대료와 민간 기부금 등으로 공원 운영 자금을 충당했다. 허드슨 강변 공원에 대한 전체 비전을 수립하고 설계 및 건설을 진행했으며 특히 일련의 법적 이슈를 해결하기도 했다.

트러스트라는 공조직이 법적 지원과 건설을 담당했다면, 허드슨 리퍼 파크 프렌즈(Hudson River Park Friends)라는 민간 비영리 조직은 리틀아일랜드의 공간과 프로그램을 함께 관리하는 시민 침술이었다. 1996년 출범한 이 그룹은 미래 세대를 위한 공공 공간으로서 공원에 집중했다. 리틀아일랜드의 공공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공원이 쾌적한 상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동시에 리틀아일랜드는 뉴욕 시민들에게 보석과 같은 예술적 공간으로 자리 잡은 정서 침술이다. 영국의 세계적인 건축가 토마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은 “실제로 번잡한 맨해튼을 떠나는 느낌”을 갖도록 이곳을 디자인했다고 한다. 뉴욕이 아닌 곳, 바로 강 한가운데 리틀아일랜드에서 뉴욕을 되돌아보는 듯한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평평함만이 존재하는 맨해튼과는 달리 가파른 언덕의 공원은 마치 입체파의 그림처럼 다양한 시선들을 선사한다. 또 리틀아일랜드의 조경은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는 조경가 시그니 닐슨(Signe Nielsen)이 담당했다. 여러 종류의 나무와 꽃과 잔디를 화려하면서도 차분하게 배치해 여러 높이에서 시민들이 이를 감상하고 향기 맡도록 했다. 산책로 주변에는 예술 작품들을 배치해 방문객들은 예상치 못한 감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700석 원형 공연장에서 일몰의 석양과 함께 때때로 펼쳐지는 공연을 보는 것 또한 누구나 쉽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리틀아일랜드는 ESG 침술이다. 피어 54 선착장을 재생하는 작업은 배리 딜러Barry Diller라는 한 백만장자의 의지와 기부로 시작할 수 있었다. 폭스티비Fox TV 네트워크의 공동 설립자이자 현 미디어 그룹 인터액티브코퍼레이션과 익스피디아의 회장인 그는, 기업의 사회적 공헌에 관해 공공장소에 주목했다. 딜러는 특정 집단을 위한 병원이나 미술관보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을 만들 때 도시민 전체의 삶의 질이 올라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헤더윅에게 자연과 예술에 몰입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공공 공간을 뉴욕시를 위해 디자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리틀아일랜드 건설을 위해 2억 6000만 달러를 지원했으며 향후 20년 동안 리틀아일랜드의 유지 보수를 위한 비용 1억 2000만 달러를 추가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기업이 공공디자인에 투자함으로써 이미지를 제고하는 것은 물론, 시민 입장에선 더 나은 도시 경험을 누리게 된 것이다.

좋은 도시란 무엇일까? 상징적 조형물이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도시, 최첨단 기술이 도입된 도시도 좋지만 결국 그곳을 살아가는 시민이 행복한 도시만큼 좋은 도시는 없을 것이다. 맨해튼 센트럴파크와 리틀아일랜드를 비롯해 공공디자인을 이루는 일곱 가지 침술 모두 결국 시민의 행복을 구현한다는 최종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 지금 우리는 물건이 아닌 가치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동물의 삶은 욕구(needs)로 이루어지지만 인간은 욕망(desire)을 품는다. 선택의 폭은 넓어졌고 더 나은 공간,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이제 공공디자인은 단순히 디자인이 아닌 라이프 스타일의 관점에서, 도시의 관점에서, 시민 사회의 관점에서 개인의 욕구를 넘어 욕망의 공공성으로 진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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