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옥희의 울산 교육
먼저 교육감 당선을 축하드린다. 취임 한 달이 되어가는데 소감이 어떤가.
우선 나를 믿고 당선시켜 주신 울산 시민들께 감사드린다. 특히 노옥희 교육감의 교육 정책을 계속 이어가 달라는 시민의 기대가 많았다. 노옥희 교육감이 했던 정책들을 더 발전시켜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관계 기관뿐 아니라 학생, 교직원과 자주 만나 교육 현안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지금 당장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뿐이다.
‘노옥희 울산 교육 중단 없이 한 발 더’라는 표어로 선거를 치렀다. 노옥희의 울산 교육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무엇인가.
주체적이고 당당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시민을 키우는 교육이다.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나가면 학생들이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될 텐데, 그때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다른 사람이 하는 노동의 가치를 이해하고 존중할 줄 아는 학생을 키우고자 했다. 보편적 교육 복지를 통해 단 한 명의 아이도 소외되지 않고 삶과 미래를 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노옥희 교육감의 교육 철학이다.
여기서 ‘한발 더’를 외쳤다.
거기엔 두 가지 뜻이 있다. 우선 노옥희 전 교육감 재임 당시는 제도적인 걸 많이 시도하는 과정이었다. 재임 기간이 5년이 채 안 되다 보니 아무래도 현장에서 그 정책들이 실제로 구현되기엔 시기적으로 좀 부족했다. 그래서 교육 정책에서 한발 더 나아가 실제 시민 교육, 노동 인권 교육, 포괄적 성교육 등이 현장에서 이뤄질 수 있게 해보겠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삶과 배움이 일치하는 교육’을 구현하려 한다. 학교 문화를 바꾸고 싶다. 지금의 학교 문화는 민주주의를 체화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쉬운 예로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지만 이상하게 아이들이 느끼는 학교 문화는 상당히 권위적이다. 학교 운영도 마찬가지다. 교칙은 교사 중심으로 제정되고 행사도 교사가 기획하면 학생들은 와서 참여만 한다. 학생들은 본인이 배우는 민주주의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라 느낄 것이다. 우리가 민주 시민을 키우겠다고 했으면 학교부터가 민주적인 사회가 돼야 한다. 교칙을 만들 때도 학생 대표, 교사 대표, 학부모 대표까지 모여 토론과 타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일정 부분 자율권을 보장하며 권리와 책임을 함께 배울 수 있는 문화, 그것이 삶과 배움이 일치하는 교육이다.
이번 재보궐 선거는 의미가 남달랐을 것 같다. 출마를 결심하기까지 어떤 고민이 있었나?
노옥희 전 교육감이 너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다음 교육감 아래서도 그의 정책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 우려스러웠다. 많은 분들이 적임자로 나를 추대했지만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꼭 출마해서 그 뜻을 이어갔으면 했다.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배우자라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아내에 이어 남편이 또 출마한다며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울산 교육이 퇴보해서는 안 된다는 시민 사회의 우려를 묵과할 수 없어 출마 결심을 굳혔다.
사람을 이끄는 힘
본격적으로 노옥희 선생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조심스럽지만 선생님을 잃은 아픔은 조금 치유가 됐는지.
많이 좋아졌다. 많이 좋아졌는데,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첫 만남은 한 선배의 소개로 이뤄졌다. 교사였던 노 선생님의 첫인상은 어땠나.
제자들을 많이 걱정하던 사람이었다. 보통의 교사는 학교 수업할 때만 학생들에게 관심을 갖고, 아이들이 졸업하면 그 뒤엔 잘살고 있겠거니 하고 만다. 그런데 노옥희 선생은 졸업한 제자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도 관심이 참 컸다. 교사로 부임한 곳이 공고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학생 대부분이 졸업 후 공장에 취업했는데, 학생들에게 공장 생활은 잘하고 있는지 애로사항은 없는지를 많이 물어봤다.
노 선생님이 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투옥 당시 면회를 가며 급격히 가까워진 것으로 안다.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나?
당시 나는 대학 졸업 사실을 숨기고 현대중전기에 기능사로 취직한 상태여서 누군가와 사귀거나 결혼할 형편이 못됐다. 그런데 역시 이런 일엔 중매쟁이가 필요한 것 같다. (웃음) 우리가 워낙 자주 만나고 일도 같이 많이 하니까, 둘이 짝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 한 선배가 거짓말을 한 거다. 내게는 “노 선생이 창수 씨 면회를 기다리더라” 하고, 노 선생한테는 “창수 씨가 면회 오려고 하더라” 하며 다리를 놨다. 석방 후에 거짓말임을 알게 됐지만 그때부터 관계가 발전해 결혼으로 이어졌다.
노 선생님은 자서전 《이제 다시 시작이다》에서 천 교육감님과 평등 부부였다고 말한다. 반려자로서 노 선생님은 어떤 사람이었나.
완벽했다. (웃음) 우리는 친구 같은 사이였다. 대학에 다닐 때부터 노동 운동이나 성 평등에 관한 생각이 많았는데 이런 점이 서로 잘 맞았다. 결혼 후에도 노 선생과 가사나 육아에 있어 의논도 많이 하고 역할도 잘 분담했다. 특히 어머니가 노 선생을 참 좋아했다. 혹독한 시집살이를 거친 구세대 어머니라 며느리 입장에서 고됐을 법도 한데 노 선생은 어머니가 어떤 얘기를 해도 늘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가고 오실 때마다 반겨줬다. 억지스럽게 잘 보여야겠다는 식이 아니라 보통 사람 대하듯 편하게 대하곤 했다.
교육 위원부터 정계 진출까지, 노 선생님의 발자취를 보면 그 곁을 지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다양한 활동으로 워낙 대중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해한다. 노 선생이 출마했던 교육 위원의 경우에도 무보수 직이었지만 누군가는 맡아야 할 직책이었다. 다만 부부 중 한 사람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즈음 나는 다시 교사로 발령도 났고, 교사가 되고픈 꿈도 있었기에 내가 교직을 맡겠다고 했다. 해고자 부부 시절을 오래 겪다 보니 둘 다 교육 위원에 나섰다가는 생활 문제를 감당하기 어렵겠다 싶었다.
노 선생님 본인은 어땠나. 힘든 점을 토로한 적은 없나?
당연히 많다. (웃음)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찾아 왔다. 교육 위원에 나가 달라, 그다음엔 시장에 출마해 달라, 그 뒤엔 국회의원 출마해 달라.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처음엔 정말 많이 힘들어했다. 그러다가도 사람들의 요구가 끊이지 않으니 이것이 ‘내 일’이라면 받아들이겠다면서 가까스로 출마를 결심하곤 했다. 내 생각에 노옥희 선생은 대중적인 인물은 맞지만 정치인 스타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요구에 못 이겨 출마한 건데 정계에 진출할 당시 일각에선 노옥희가 원래 정치를 좋아하나 보다, 하고 오해도 받았다.
노 선생님에겐 무언가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참 많이 따랐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한다고 해야 할까, 누구를 대하든 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무척 존중한다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아주 친근하지는 않아서 의외로 노 선생을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스스로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뒀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친구보다는 리더로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노옥희 선생의 또 다른 강점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꼭 책임을 지려고 했다는 점이다. 불편해도 신념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노동 운동의 최전선에서
노 선생님과는 80년대 말 노동 운동을 함께한 동지이기도 하다.
노옥희 선생은 교사에서 해직된 이후 본격적으로 노동 운동에 몸담았다. 특히 87년은 격변의 시기였다. 노 선생은 6월 항쟁에도, 7월에 현대엔진 노동조합 설립에도 발 벗고 나섰다. 노조 설립으로 촉발된 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는 나와 함께 선두에 섰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굉장했다. 곳곳에서 투쟁이 이어지며 노조도 많이 생기고, 임금도 많이 올랐다. 억압적이던 노동 현장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87년 하반기부터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공권력을 투입하며 상황이 급변했다. 화염병과 곤봉이 난무하는, 요즘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1·8테러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다고.
88년 말 현대중공업에서 단체 교섭이 이뤄지던 때였다. 사측과 노조측 의견이 좁혀지지 않고, 해고자 복직 문제도 발생하며 파업이 장기화했다. 테러 사건이 벌어진 건 89년 1월 8일이었다. 당시 나는 해고된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아 노동자들과 함께 수련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때 회사 측에서 각목을 든 폭력배를 보내 큰 충돌이 일어났다. 결혼을 일주일 앞둔 상황이었는데 허리를 크게 다쳐 난감했다.
해고와 구속, 테러까지. 신혼에 감내하기 어려운 일들이었겠다.
앞서 말한 테러 때문에 허리 복대를 차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세 달 뒤에 나는 노동 운동으로 인해 또 구속이 됐다. 어려운 순간이야 많았지만 그땐 그렇게 어렵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련의 과정 중 하나로 느껴져 그랬나.
다 신념을 갖고 하는 일,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사실 해고나 구속은 크게 힘들지 않았는데 해고 기간이 길어지니 경제적인 어려움이 굉장히 컸다. 노옥희 선생이 해직된 게 86년도고 내가 해고된 게 88년이었으니. 저금했던 것도 다 깨고 거의 바닥 상태까지 갔다. (웃음)
두 분은 그 위기를 어떻게 이겨냈나?
노 선생과 함께 신문을 배달해 가며 겨우 생활비를 벌었다. 나를 지지하던 동료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보내주기도 하고 내가 나타나면 커피나 밥을 사주기도 했다. (웃음) 그러다 당시 전교조가 생기면서 노 선생 앞으로 조금씩 생계비가 나왔고, 나 역시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에서 약간의 생계비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그게 한 94년도부터였다. 그때부터 좀 생활이 유지되며 정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회의 변화를 부부가 함께 지켜보며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그 중심에 서있었다는 건 어떤 느낌이었나?
변화의 중심에 서 있었다는 생각은 한 적 없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었다. 희망이 가장 컸던 시기는 87년도다. 천시받던 노동자들이 사회적인 대우를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동구 지역엔 제대로 된 노동조합이 없었다. 우리가 세상을 올바르게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넘쳤고 보람도 컸다. 다만 그 이후엔 상황이 기대만큼 흘러가진 않았다. 노동자들이 탄압받으며 열기가 다소 꺾이기도 했고, 크고 힘있는 노동조합들이 자기 조합원들의 이해관계를 우선적으로 따지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힘든 마음도 많이 느꼈다.
교육감님과 노 선생님이 기대했던 모습은 무엇이었나.
노동자들이 사회적인 역할을 더 많이 해주길 바랐다. 자신들의 임금이나 월급도 중요하지만 사회 전체가 함께 성장해 가고, 많은 이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충분히 대접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썼으면 했다. 그러기 위해 자신들보다 약자인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기를 기대했는데 그 길로는 잘 가지 않더라.
그래서 노 선생님은 전교조 내에서도 교육을 많이 강조했다고 들었다.
계속 공부해야 시야가 넓어지면서 다른 사람을 보게 된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 이익을 먼저 따지게 되고 주변의 어려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교육감 노옥희, 교육감 천창수
교사, 노동 운동가, 교육 운동가, 교육감. 노옥희 선생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무엇인가?
노옥희 선생에게는 교육감이 제일 맞았던 것 같다. 사실 처음엔 교육감 선거에 나간다고 했을 때 반대했다. 일단 당선이 쉽지 않고, 당선이 된다 해도 과연 교육감이라는 자리가 우리가 꿈꾸던 교육의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자리일까 회의적인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막상 당선되고 직을 수행하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노 선생의 능력과 체질에 교육감이 딱 맞는 것 같았다. 저런 능력이 있었구나, 천직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노 선생님이 교육감이셨을 당시 현직에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교육 현장에서 체감한 변화가 있나?
일반 시민들의 체감은 컸을 것이다. 비리를 강력하게 처벌하고, 무상급식과 무상교육 등 눈에 보이는 변화가 많았다. 교사로서 내가 현장에서 느꼈던 건 대표적으로 교사 업무 중 행정적인 부분에서의 변화였다. 기존 교사 일에 잡무가 많다는 불만이 컸는데, 그걸 다 없애주진 못하더라도 교육청에서 공문도 좀 적게 내려고 하고, 학교에서 진행하는 행사도 과감하게 없애라 하는 등 많은 노력을 보였다. 예전엔 과학의날 행사처럼 보여 주기식으로 잡다한 행사를 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런 게 많이 줄었다.
교사 입장에서 곁가지 업무가 줄어든 만큼 교육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었겠다.
그렇다. ‘혁신교육’, ‘혁신학교’를 내걸고 관련 정책을 추진하면서 교사들에게 길을 터줬다. 기존에는 특별함 없이 관성적으로 교육을 해왔던 교사들로부터 ‘나도 이제 내가 꿈꾸던 교육을 한번 해볼 수 있겠다’라는 기대감이 싹텄다. 교사들끼리 동아리나 모임을 구성하는 걸 지원하기도 했다. 특히 학생들이 학교의 주인으로 나설 수 있게 학생 대표들을 불러 교육하고, 학생회가 독자적으로 쓸 수 있는 예산도 학교마다 얼마씩 꼭 배당했다. 확 확 바뀐 건 아니지만 교육 전반이 민주적인 방향으로 가려 한다는 걸 체감했다.
교육의 변화는 이어질 것이다. 교육감 노옥희에 이어 교육감 천창수의 해법은 무엇인가.
교육의 변화는 교사만 갖고는 안 된다. 학생도 그렇지만 특히 학부모가 학교 운영이나 행사에 주체적으로 더 많이 참여하게 만들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소수 학부모가 학교 행사를 꾸려왔다. 그러나 학교 운영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학부모일수록 자녀에 대한 고민이 더 큰 경우가 많다. 만약 자녀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을 때, 학부모가 전혀 학교와 소통이 안 되는 상태에서 자녀의 이야기만 들으면 오해가 커진다. 그래서 소통과 참여가 중요하다. 자녀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생긴다. 끈끈한 학교-교사-아이-학부모 관계를 만들기 위한 첫 단추다.
쉬운 이야기 같지만 큰 과제다.
그렇다. 학교 운영에 참여하지 않는 학부모의 경우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어 못 오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참여를 어떻게 독려할지가 고민이다. 또 학생들의 자율권을 보장하려면 교육청과 교사 간의 소통도 선행돼야 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건 주인 의식과 책임 의식 두 가지인데 자칫 한 쪽이 더 부각될 수 있으니 많은 의논이 필요하다. 학생과 학부모가 주체적으로 더 많이 참여하는 학교를 그려나가고 싶다.
취임식에서 도종환 시인의 시 ‘담쟁이’를 읊어주셨다. 울산 교육이 모범이 되어 다른 지역을 푸르게 물들일 수 있을까.
‘단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울산 교육이 대한민국 공교육의 표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다른 시·도에 본보기가 되도록 한발 앞서 좋은 정책을 만들어 추진하겠다.
교육감님께 노 선생님은 어떤 분이었는지 한마디로 표현해 달라.
내 인생을 풍부하게 해준 사람. 만났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을 접했고, 내가 꿈꾸던 것을 해나갈 수 있었다. 한 번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제지한 적이 없이 언제나 응원해 주고 지지해 준 사람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노옥희 선생의 행보를 늘 곁에서 응원했다. 처음에 정치 활동하는 건 반대를 좀 했지만. (웃음) 그래서 평생 친구다, 동지다, 이런 표현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