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점의 예술
2화

튜링 머신에서 백남준까지

인간은 과연 특별한 존재인가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만들었다는 신화를 한 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신화에서 신은 인간의 원본, 인간은 신의 모사품이다. 원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사품이고, 일반적으로 모사품은 원본에 비해 질이 떨어진다. 이러한 이유로 신의 손길이 닿은 자연적인 것은 아름답고 조화로운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인간이 만들어 내는 인공적인 것은 조작한 것,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됐다.

이러한 대립의 근원은 서양 고대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에게 현실은 이데아를 모방한 세계였으며, 인공물은 그런 현실을 모사한 질 낮은 것이었다. 모사품인 인공물은 결코 원본인 자연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세계에는 위계질서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연적인 생성에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 목적이 내재되어 있지만 기술적인 생성은 그 목적이 명확하지 않다고 했다.

근대에 이르러 자연과 인공의 대립은 인간과 기계의 대립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를 근대의 철학적 문제로 이끌었던 인물은 르네 데카르트다. 데카르트는 인간 외의 모든 동물은 기계라고 정의했다. 인간이 기계와 다른 점은 바로 모든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도구, 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은 이성을 지닌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며, 인위적으로 만든 인공물에는 결코 이성을 주입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1] 다시 말해 데카르트에게 생각하는 기계란 결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세기 뒤 인물인 라 메트리(Julien Offray de La Mettrie)는 데카르트를 비판하며 논의를 확장했다. 프랑스 출신의 라 메트리는 의사이자 계몽주의 시대의 첫 유물론자로 꼽히는데, 데카르트와는 반대로 인간도 기계이며 본질적으로 동물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의 과학 실험에 근거해 인간 역시 하나의 자동인형, 스스로 태엽을 감는 기계라고 주장했다.[2]

지금 들어도 파격적인 라 메트리의 주장이 그 당시에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심지어 교회는 그의 책 《기계-인간(L’homme Machine)》을 불태워 버리기까지 했다. 그 충격 때문인지 라 메트리는 요절했지만, 기계와 인간에 관한 그의 주장은 막 깨어나는 근대 지식인의 상상을 자극했다. 라 메트리의 주장은 후대의 유물론이나 기계 역학 같은 과학 분야에 영향을 끼치며 일반 문화 안으로 퍼져 나갔다.[3]

2018년 1월, 소피아(Sophia)라는 인공지능 탑재 휴머노이드 로봇이 한국에 방문해 한 국회의원과 대담하는 모습이 화제가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민권을 받아 세계 최초의 시민권 보유 로봇이 된 소피아는 한복을 입고 농담을 하며 인간처럼 대화를 이끌었다.

낯설고 기괴해 보이는 이 풍경은 사실 역사 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소피아는 그저 우리 시대의 결과물일 뿐이다. 대부분의 고대 문명에서 인간과 닮은 인공물에 관한 아이디어를 찾아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장인 다이달로스는 인간을 닮은 자동 장치를 만들었고, 기원전 10세기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드》에는 신들의 심부름을 수행하는 거대한 기계가 등장한다. 《탈무드》에도 율법 박사들이 흙으로 인조인간을 만드는 구절이 나온다.[4] 이러한 인공물이 실제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는 살아 있는 인공물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임을 보여 주는 증표다.

18세기 무렵부터는 움직이는 인공물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남아 있다. 이 시기 가장 유명한 것은 프랑스 발명가 보캉송(Jacques de Vaucanson)의 자동 장치다. 1739년 보캉송은 플루트를 연주하는 자동인형과 음식을 먹고 소화하는 자동 오리를 만들었다. 플루트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손가락과 호흡뿐 아니라 입술의 모양도 중요하다. 그래서 자동인형은 공기를 조절하고 호흡을 멈출 수 있는 금속 혀를 포함해 인간의 근육에 해당하는 장치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이듬해 발표한 자동 오리는 살아 있는 오리처럼 소리 내고 헤엄칠 수 있었다. 심지어는 관객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삼키고, 소화하고, 배설했다. 그러나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는 오리가 실제로 음식을 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된 물질을 배출하는 속임수였다.[5]
자동 오리 내부 상상도
그럼에도 보캉송은 생명 활동을 모방하는 자동 장치에 관한 연구를 멈추지 않았으며, 나아가 혈액 순환이 가능한 인조인간까지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보캉송의 열정과 달리, 사람들은 그의 자동 장치를 보고 공포를 느꼈다. 호흡과 소화 등 살아 있는 개체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겼던 행위, 즉 생물의 영역을 인공물이 침범했기 때문이었다.

19세기부터는 인공물의 이야기가 문학에 나타난다. 안데르센의 동화 《나이팅게일》에 등장하는 인조 새는 진짜 새보다 아름답고 지치지도 않는다. 이는 아무리 연주를 해도 지치지 않던 보캉송의 자동인형을 상기시킨다. 안데르센은 진짜 새가 생명을, 인조 새는 죽음을 상징한다고 주장하며 자연물과 인공물을 대비시켰다.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소설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은 인간을 위협하는 공포의 인공물을 대표한다. 공포로 인해 자신의 피조물을 거부하는 인간들에게 오히려 그 괴물이 배신당하고 소외되며 스스로 죽음을 택했지만 말이다. 로봇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Karel Čapek)의 희곡 《R.U.R(Rossum’s Universal Robots)》은 인간을 학살하는 인공물이 등장하는 공상 과학물의 시초다. 《R.U.R》에서 로봇은 지능과 힘 모두 인간보다 우월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처럼 대부분의 문학 작품은 인공물을 인간과 대립하는 존재로 그려 냈다. 작품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인공물을 거부한다. 고대부터 내려오던 인식은 기계의 사용이 본격화되던 무렵에 문화 속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인공지능과 인간을 대립 구도로 그리는 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모방을 넘어 초월로


만약 어린아이가 당신에게 인공지능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계산을 대신 해주는 기계? 목소리만으로 영화와 음악을 찾아 주는 기계? 당신은 아이가 이해할 수 있게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단순하게는 사람의 지능을 따라 한 컴퓨터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 따라올 확률이 높다. “그럼 지능은 뭐예요?”

지능이 뭘까? 이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지능이 단순히 수학 문제를 잘 풀거나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능(intelligence)은 이해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intelligentia에서 유래했다. 교육학이나 심리학에서는 지능을 더 구체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발달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는 지능을 “문제를 찾아서 해결하는 기술들의 집합”으로 정의했고, 심리학자 뢰벤 포이어스타인(Reuven Feuerstein)은 “생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인지적 기능을 변화시키는 인간 고유의 능력”으로 보았다. 이 정의들의 공통점은 지능이 문제 해결 능력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계산기는 복잡한 연산을 빨리할 수 있지만, 계산 이외의 다른 문제는 전혀 풀 수 없기 때문에 지능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지능은 단순히 수학적, 논리적 문제를 푸는 능력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복잡한 의사 결정 능력, 즉 주체에게 이로운 결과를 선택하는 능력이다.[6] 계산기는 1+1, 2+2에 대해 절대로 틀린 답을 내지 않는다. 하지만 알파고는 자신에게 설정된 이로운 결과, 목표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라도 내놓을 수 있다. 물론 알파고는 스스로 목표를 설정할 수 없다. 그래서 현재 개발된 인공지능은 인간의 일부 행동을 수행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이지만, 인공지능 연구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분야에서 인간처럼 행동하는 인공 일반 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AGI)이다.

인공지능 연구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인공지능: 현대적 접근 방식》에서 스튜어트 러셀(Stuart Russell)과 피터 노빅(Peter Norvig)은 인공지능을 네 가지로 구분해 정의했다. 구분 방식은 이렇다. 첫 번째는 인간의 사고 과정과 추론을 기준으로 삼은 인간적 사고 접근 방식이다. 이 구분 방식의 목표는 사고, 학습, 의사 결정 등 인간의 활동을 자동화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합리적 사고방식, 사고 과정과 추론을 모방하되 인간의 사고방식이 아닌 이상적인 사고의 법칙으로 정의한 것이다. 세 번째는 인간의 행동을 얼마나 똑같이 모방할 수 있는지를 중요한 잣대로 삼는 인간적 행위 접근 방식이다. 그러나 러셀과 노빅은 지정된 형식이 없는 지식을 논리적인 법칙으로만 표현하기 어렵고, 어떤 문제를 원칙적으로 푸는 것과 실제로 해결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에 위의 접근 방식에는 모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위의 세 가지 접근 방식이 지닌 한계를 보완한 것이 합리적 에이전트 접근 방식이다. 에이전트(agent)는 ‘~를 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agere에서 유래한 것으로, 무언가를 수행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러셀과 노빅은 에이전트를 “감지기를 통해서 자신의 환경을 지각하고, 작동기를 통해서 환경에 대한 어떤 동작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나아가 인공지능 연구를 “환경으로부터 지각을 받고 동작을 수행하는 에이전트에 대한 연구”라고 정의했다.[7]

에이전트는 기계와 동물, 인간까지 포함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인간 역시 눈, 귀와 같은 감지기가 있으며 손, 성대와 같은 작동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 연구는 인간을 흉내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유롭게 지능이 가지는 특징을 분석하려는 연구로 확장되고 있다.

인공지능은 최근에야 낯설지 않은 기술이 되었다. 하지만 학문으로서의 인공지능은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진지하게 다뤄졌다. 논리적인 문제만을 해결할 수 있는 초기 인공지능은 조금 더 똑똑한 계산기에 불과했다. 최초의 인공지능 연구는 무려 194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연구는 인간의 뇌를 논리적 모델로 삼은 인공 신경망에 관한 연구였다. 수학과 과학 여러 방면에서 천재성을 보여 주었던 월터 피츠(Walter Pitts)와 신경학자 워런 맥컬록(Warren McCulloch)은 인간의 신경계를 구성하는 뉴런들이 서로 연결된 회로망을 통해 논리 관계를 구현할 수 있으며 학습도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8] 그들은 이러한 연구를 기반으로 인공 신경망 모델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인공지능 연구의 시초다.

인공지능의 개념적 기반을 제공한 인물은 현대 컴퓨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이다. 1950년에 발표한 논문 〈계산 기계와 지능〉은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유명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튜링은 기계가 생각한다는 개념을 정의하는 것 대신 흉내 게임(Imitation Game)이라는 지능 검사를 제안했다. 이 검사에서 기계와 심문자(사람)는 5분간 다른 방에서 문자로 대화를 나눈다. 대화를 마친 후 심문자가 상대(기계)를 사람으로 오인한 경우가 30퍼센트를 넘으면 그 기계에게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9] 튜링은 50년 정도가 지나면 컴퓨터가 이 검사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영화나 소설에서 인간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인공지능의 시작이 바로 튜링의 논문인 것이다.

인공지능 탄생 후 10년 동안, 사람들은 금방 인간처럼 사고하는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을 거란 희망에 차 있었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성능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초기 인공지능은 기초적인 추론 단계들을 연결해서 답을 찾는 범용 검색 방식이었는데, 데이터 저장 기술의 한계로 문제의 범위를 확장하기 어려웠다. 성과가 나오지 않자 인공지능 연구 지원금이 끊겼고, 많은 연구소가 해체됐다. 이후 인공지능 연구는 인공지능의 겨울(A.I. winter)이라고 불리는 긴 암흑기를 겪는다.[10]

긴 겨울을 깨고 인공지능의 봄을 알린 것은 바로 신경망이었다. 신경망은 뇌의 뉴런 구조를 모방한 것으로, 당시에는 기술적 한계 때문에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 2006년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제프리 힌튼(Geoffrey Hinton) 교수가 머신 러닝의 일종인 딥러닝을 공개하면서 신경망은 새로운 국면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구글 번역, 음성과 얼굴 인식, 이미지 생성 등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인공지능은 모두 머신 러닝의 결과물이다. 머신 러닝은 사람이 데이터와 분석 패턴을 인공지능에 입력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직접 데이터를 분석하여 그 패턴을 찾아내는 것이다. 인간을 벗어난 지능 확장이 머신 러닝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

 

사이버네틱스, 기술과 예술의 벽을 허물다


사이버 공간, 사이버 대학, 사이버 수사대 등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인 사이버(cyber)는 무슨 뜻일까? 아마도 가상 현실이나 인터넷, 컴퓨터 등을 떠올렸을 것이다. 인공지능을 이야기하는데 왜 사이버를 언급하는지 의문스러울 수 있겠다. 하지만 사이버와 인공지능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이버의 어원인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를 번역하면 인공 두뇌학이다. 그리고 이는 근대의 기계-인간 논쟁과 현대의 인공지능 기술을 잇는 학문적 토대이기도 하다.

사이버네틱스라는 개념을 처음 만든 사람은 수학자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였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포탄이 떨어질 지점을 자동으로 계산, 예측하는 무기를 연구하면서 이러한 근대 기계가 과거의 결정을 바탕으로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는 점에서 인간의 신경계와 근본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위너는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사이버네틱스를 인간의 신경계뿐 아니라 기계와 사회에서의 제어와 통신에 관한 연구라고 정의했다.[11]

인공지능이 태동했던 시기는 사이버네틱스가 번성했던 1940~1960년대와 일치한다. 기계, 동물, 그리고 인간을 비교하는 연구가 증가했고, 그 결과 복잡한 행동 패턴을 가진 동물과 인간의 유사성이 밝혀지기 시작했다.[12] 사이버네틱스 이후 인간은 지능을 가진 기계와 본질적으로 유사한 정보 처리 개체로 여겨지게 되었다.[13] 사이버네틱스에 이르러 인간과 기계, 자연과 인공의 구분이 이분법적으로 이루어 질 수 없음이 학문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사이버네틱스는 학문뿐만 아니라 예술을 포함한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그 영향력은 바이오 아트(bio art), 가상 현실(virtual reality), 증강 현실(augmented reality)을 이용한 예술, 그리고 인공지능의 창작으로 이어진다.[14] 따라서 최신 기술을 활용하는 인공지능 창작의 특징과 예술적 가능성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사이버네틱스 예술을 살펴봐야 한다.

사이버네틱스 예술은 시기에 따라 세 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 사이버네틱스 예술은 한 시스템 안에서의 정보 흐름에 집중하고자 했다. 키네틱 아트(kinetic art)가 바로 그 예다. 키네틱 아트는 관객과 기계 장치의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하는 예술 작품을 의미한다. 키네틱 아트의 움직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관객의 참여, 소리, 빛, 온도 등에 의한 움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힘이나 기계적 메커니즘에 의한 움직임이다.
알렉산더 칼더의 작품 〈모빌〉
예를 들면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의 작품 〈모빌〉은 자연 바람에도 움직일 수 있지만, 관객이 손으로 만져도 움직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계와 관람자의 움직임 모두 예술 작품을 작동시키는 동등한 원리라는 점이다. 인간과 기계가 작품 시스템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작가들이 사이버네틱스 예술을 기계와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관객과 예술 작품 사이의 피드백에 중점을 두고 이를 해프닝(happening)이라는 예술의 형식으로 발전시킨 예술가들도 있었다. 〈4’33”〉을 작곡한 존 케이지(John Cage)가 그렇다. 이 작품이 유명한 이유는 존 케이지가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은 작가가 제공하는 음악의 우발성에 적응하고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효과적으로 작품을 감상한다. 1단계 사이버네틱스의 특징인 정보 교환, 그리고 인간(관객)이 환경에 적응한다는 원리가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다.[15]

2단계 사이버네틱스 예술의 핵심은 비물질성을 활용한 관객과 매체 간 작동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한 매체로 등장한 것이 바로 비디오였다. 비디오는 일대일 개인 매체인 동시에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상호 매체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는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 백남준이다. 백남준의 〈참여 TV〉는 관객이 마이크를 통해 내는 소리가 TV 화면 속에 그래픽으로 나타나는 작품이다. 〈참여 TV〉라는 작품의 제목처럼 관객의 목소리는 파동이라는 정보가 되어 화면에 나타난다. 〈모빌〉처럼 물리적인 바람, 움직임은 아니지만, 관객과 비디오 사이에는 비물질적인 피드백 과정이 있다. 다시 말해 비디오는 모니터에 투사된 이미지와 주체 사이의 간격을 없애 관찰자의 위치를 작품에 참여하는 주체로 변환시킨다. 이 작품에서 관객은 창조의 주체이며, 동시에 감상의 주체다.

3단계 사이버네틱스 예술에서는 물질적 대상을 정보 패턴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인공 생명(artificial life)이 중요한 주제로 떠올랐다. 인공 생명은 생명체의 정보를 해석하여 인공적으로 생명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인공지능의 목표가 인간과 구분할 수 없는 지능을 기계 안에 만드는 것이었다면, 인공 생명의 목표는 생물이 스스로 찾아낸 경로를 통해서 기계 지능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예컨대 플루트를 연주하는 자동인형이 인공지능의 구현 가능성을 보여 준다면, 소화하는 자동 오리는 인공 생명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인공 생명을 만들려고 하는 움직임은 장차 바이오 아트와 사이보그 아트(cyborg art)로 이어진다.

MIT 인공지능 연구소의 로드니 브룩스(Rodney Brooks)는 세상 자체가 최고의 모델이라는 믿음으로, 인식과 행동을 통해 세상과 직접 연결되는 로봇을 꿈꿨다.[16] 그는 인간의 특성을 환경과의 상호 작용으로 파악했고, 인공지능보다 인공 생명이 인간의 미래에 더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사실상 브룩스가 인공 생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현대적 인공지능에 가깝다. 오늘날의 인공지능은 환경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필요한 것을 직접 배우기 때문이다.

사이버네틱스 이전까지 예술의 역사는 기술을 지워 나가는 과정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회화, 조각, 음악, 시, 무용에 기술적 활동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사이버네틱스 예술은 기술과 예술 사이의 벽을 무너뜨렸고, 인간과 기계를 동일하게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을 만들었다. 사이버네틱스는 새로운 기술 매체인 인공지능에게 창작 가능성을 열어 준 기술적, 철학적 토대다.
[1]
르네 데카르트(이현복 譯), 《방법서설,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 문예출판사, 1997년, 214-217쪽.
[2]
우선 라 메트리는 암수 교배 없이 신체를 분리해서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 내는 생물인 담수 폴립(freshwater polyp)의 발견을 통해, 생명이 영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물질적 속성임을 증명했다. 또 자극 감응성 원리를 근거로, 근육이 데카르트가 주장했던 것처럼 생기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을 입증했다.
게이비 우드(김정주 譯), 《살아 있는 인형: 인공 생명의 창조, 그 욕망에 관한 이야기》, 이제이북스, 2004년, 39-41쪽.
[3]
루소는 “나는 동물에게서 정교한 기계 외의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고 주장했으며, 디드로(Diderot)는 《달랑베르의 꿈》에서 “인간이나 동물의 생성 과정을 설명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물리적인 작용에 의해서만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19세기 초 과학자 카바니스(Cabanis)는 라 메트리의 주제를 현대 과학의 흐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1870년대 뒤 부아 레몽(Du Bois-Reymond)은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서 라 메트리의 관점에 대해 연설했다.
브루스 매즐리시(김희봉 譯), 《네 번째 불연속: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 사이언스북스, 2001년, 58쪽, 미주 39에서 재인용.
[4]
이인식, 《사람과 컴퓨터》, 까치, 1992년, 348-350쪽.
[5]
게이비 우드(김정주 譯), 《살아 있는 인형: 인공 생명의 창조, 그 욕망에 관한 이야기》, 이제이북스, 2004년, 50-66쪽.
[6]
이대열, 《지능의 탄생》, 바다출판사, 2017년, 24-26쪽.
[7]
스튜어트 러셀, 피터 노빅(류광 譯), 《인공지능: 현대적 접근 방식》, 1권, 제이펍, 2016년, 2-6쪽, 44쪽.
[8]
Walter Pitts, Warren McCulloch, 〈A Logical Calculus of Ideas Immanent in Nervous Activity〉, 《The bulletin of mathematical biophysics》, Vol. 5, 1943, pp. 115–133.
[9]
흉내 게임에는 남자(A), 여자(B), 그리고 심문자(C), 세 사람이 참여한다. 심문자는 다른 방에서 문자로 A, B와 5분간 대화를 나누고 누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아맞혀야 한다. 튜링은 A의 역할을 기계가 대체할 때, C의 오답 확률이 A가 인간일 때와 비슷하다면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대체할 수 있다고 보았다.
Alan Turing, 〈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 《Mind》, Vol. 16. No. 236, 1950, pp. 433-460.
[10]
인공지능의 겨울이라는 용어는 1984년 미국 인공 지능 협회(AAAI)의 연례회의에서 공개 토론의 주제로 처음 등장했다. 인공지능 연구의 성과는 연구비를 지원했던 기업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언론은 인공지능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연쇄 효과로 연구 지원금이 대폭 삭감되고 인공지능 연구는 침체기를 겪게 되었다.
[11]
노버트 위너(이희능, 김재영 譯), 《인간의 인간적 활용》, 텍스트, 2011년, 21-43쪽.
[12]
N. Katherine Hayles, 〈Cybernetics〉, 《Critical terms for media studies》,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0, pp. 145-146.
[13]
캐서린 헤일스(허진 譯),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 휴먼이 되었는가》, 플래닛, 2013년, 31-32쪽.
[14]
사이버네틱스는 생물학적 유기체와 기계 그리고 관찰자까지 포함하는 경계를 넘어서 인간과 동물의 몸을 미디어로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했다. 캐서린 헤일스는 사이버네틱스를 세 단계로 정리했다. 1단계 사이버네틱스가 시스템 안에서 정보 흐름에 집중했다면, 2단계에서는 관찰자와 시스템 사이의 상호 작용, 그리고 3단계 사이버네틱스에서 몸과 인터넷과 웹 같은 컴퓨터 미디어와의 긴밀성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사이버네틱스의 영향을 받아 컴퓨터의 자기생성 시스템을 이용한 인공 생명 예술, 생물체를 정보로 파악하는 바이오아트가 탄생했으며, 기술과 혼합된 현실 시스템 안에서의 몰입과 현전을 중시한 3단계 사이버네틱스 이후, 가상 현실과 증강 현실을 이용한 예술이 등장했다.
[15]
오병희, 〈사이버네틱스 3단계에 따른 매체 미술의 변화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2014, 60-64쪽.
[16]
Rodney A. Brooks, 〈Intelligence without representation〉, 《Artificial Intelligence》 Vol. 47, 1991, pp. 139–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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