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4년에 콘스탄체가 다시 잘츠부르크로 이사를 가면서 모차르트의 고향은 확고한 순례 장소가 되었다. 참고로 영국의 선구적인 음악 출판인 빈센트 노벨로(Vincent Novello)는 1829년, 이곳으로 콘스탄체를 찾아왔다. 콘스탄체는 80세의 고령이 될 때까지 잘츠부르크에 살았는데, 19세기로서는 상당히 장수를 한 셈이다. 만약 그녀의 남편이 그렇게 오래 살았다면 어땠을까. 1842년에 그녀가 죽은 지 몇 달 뒤, 모차르트의 두 아들이 참석한 가운데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의 동상이 공개됐다. 참고로 이후에 모차르트의 두 아들은 모두 아이를 남기지 않고 죽었는데, 이로써 세상에 모차르트의 직계 후손은 남지 않게 되었다.
이 동상은 그의 사후 50년 동안 모차르트의 대중적 이미지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 준다. 모차르트 당대의 초상화에서 그는 혈색이 나쁘고 뭔가 병약해 보이는 인물로 그려진다. 코는 길고 눈은 툭 튀어나와 있다. 못생긴 것까진 아니지만,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신장이 163센티미터에 불과한 작고 왜소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반면 이 동상은 근육질의 영웅적인 인물을 표현한다. 현실이 신화에 가려진 것이다. 1880년에는 그가 태어난 집이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모차르트에 대한 신격화가 완성된 것이다.
모차르트의 생애에 대한 이러한 허구화는 잘츠부르크 위상에 생긴 변화에 의해 더욱 뒷받침됐다. 잘츠부르크는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독립국의 지위를 상실했다. 그리고 1815년에 나폴레옹이 패배한 뒤 오스트리아에 병합됐다. 자치권은 뺏겼지만, 대신 그곳은 문화적 수도가 되었다. 오스트리아가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동쪽 영토들이 잘려나간 뒤, 잘츠부르크는 몰락한 제국의 수도인 빈과 대조되는 목가적인 곳으로 부상했다.
4. 평화의 축제
1920년에 시작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1차 대전 뒤에 유럽 사람들을 다시 하나로 모으고, 공연 예술의 공통적인 속성인 사랑을 통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과감한 시도였다. 페스티벌은 19세기 말부터 이곳에서 개최됐는데 전선의 참호에서 대학살이 일어나는 동안 사멸된 다양한 모차르트 관련 축제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페스티벌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번성했지만, 1938년에 히틀러가 쳐들어오면서 잘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 나머지 지역과 함께 제3 제국(Third Reich)의 수중에 넘어갔다.
나치는 모차르트를 위대한 독일 작곡가로 여겼다. 모차르트 사후 80년이 될 때까지도 독일은 하나의 국가가 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괴벨스(Goebbels)를 비롯 그의 야만적인 수하들에 의해 전용되고 착취당했다. 다행히도 2차 세계 대전 말미에 잘츠부르크는 미국인들이 점령했는데, 그들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모차르트가 중심에 있는 문화 명소로서 잘츠부르크를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반유대주의적 인습으로부터 벗어난 모차르트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게르만계 작곡가였다. 그의 음악은 보편적이었고, 전 세계의 사랑을 받았으며, 바로 그 점이 위대한 치유력을 부여했다. 잘츠부르크가 프록코트를 입고 하얀 가발을 쓴 모차르트의 닮은 꼴이 걸어 다니는 클래식 음악의 디즈니랜드가 되었다는 게 정말 그렇게 중요할까? 물론 그것은 판타지다. 그러나 두 차례의 끔찍한 세계 대전을 겪고 나니, 그것은 보존할 가치가 있는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현재 유럽에서 다시 전쟁이 격화되면서, 모차르트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아름다움과 인류에 대한 공통된 이상을 대변하고 있다. 그들이 1차 대전과 2차 대전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