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사냥꾼의 사회
7화

굴욕 당하지 않을 권리

인간의 역사는 야만적인 생존 투쟁에서 벗어나 더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향유하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약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절대 빈곤국에 속했던 한국은 급속한 경제 성장을 달성했다. 어느 때보다도 안정되고 편안해야 할 시점에, 많은 이들이 생존의 한계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는 것은 분명히 정상적 궤도에서 벗어난 예외 상태다. 한국은 물론, 세계 도처에서 국가주의, 민족주의 포퓰리즘, 극우 행동주의와 같이 타자에 대한 혐오로 결집한 운동이 터져 나오고 있다.

혐오 사회로 압축되는 한국 사회의 갈등 상황은 일자리가 늘어나고 임금이 올라가서 급박한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일까? 사회 갈등을 바라보는 계급 정치의 시각에서는 경제적 분배의 부당함을 비판하고, 노동의 가치를 노동자에게 정당하게 분배할 것을 요구하는 논의가 주를 이뤘다. 열심히 일하지만 대다수가 빈곤 상태에 머무는 이유는 다수가 산출한 경제적 부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돌아간 결과라는 게 분배 정치의 결정체였다.

물론 분배 갈등은 현재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갈등은 계급과 분배의 문제를 넘어 생활 양식 차이로 인한 문화 갈등, 사회관계에서 느끼는 수치심과 모욕감, 분노 등으로 변모하고 있다. 수치심은 사회적 순응을 만들어 내는 억압 기제가, 모욕은 보복을 향한 적극적 복수 욕망이, 무시에 대한 심리적 반작용인 분노는 사회적 투쟁의 기제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1] 이런 감정들은 내가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분배를 넘어 인정의 정치가 강조되는 배경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분배 문제를 둘러싼 계급 갈등과 젠더, 세대, 인종, 취향 등을 둘러싼 인정 요구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호네트는 분배 정의는 왜곡된 인정 질서를 바로잡으면 시정할 수 있다고 보고, 인정 정의가 상위의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차이에 대한 불인정이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자격을 박탈하고 배제하는 사회 결과로 나타나는 것처럼, 인정 정의는 분배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경제 구조에서 기인하는 불평등의 문제를 간과한 채 문화 다원성과 차이의 문제에만 골몰하는 소위 문화 좌파와 새로운 사회 갈등의 특수성을 부정한 채 모든 것을 계급 불평등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낡은 좌파는 모두 편협한 태도다.[2]

차이에 대한 혐오로 표출되는 집단 운동에는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대한 불만, 사회로부터의 무시로 인한 수치심, 사회로부터 배제되며 나타나는 생계의 압박, 무력감 등 인정과 분배에 얽힌 절박한 요구들이 혼재되어 있다. 태극기 집회, 일베, 메갈리아, 워마드 등에서 나타나는 혐오의 실천은 상처받은 감정을 재배치하려는 회복의 요구이자 거대한 후퇴다.

그럼에도 이들의 운동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첫째, 이들이 현실에 불만을 표하는 방식은 왜곡되어 있을지라도 한국 사회에 대한 진단 자체가 틀리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태극기 노인이든, 극우 청년이든 양극화와 학력주의,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 등을 문제 삼고 그 해결 방안으로 사회 참여와 연대, 일자리 확충, 양극화 해소를 이야기한다.[3] 둘째, 비합리적으로 감정을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요구에 공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메갈리아나 워마드는 남성에 대한 혐오 내지는 분노 속에서 불법 촬영, 성희롱, 데이트 강간 등 대다수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공공 의제를 발견하고 공론화한다. 셋째, 가족, 친구와 같은 친밀한 집단의 경계를 넘어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일상생활에서 가족, 친구, 지역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의 이기적 연대는 많다. 이런 방식의 운동은 유사성이 높을 경우에만 서로 협력하고, 다른 집단과는 날카로운 경쟁 관계를 형성한다.[4] 집값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장애인 복지 시설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지역민이나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비정규직과 외부 용역을 배제하고 정규직의 권리만을 부르짖는 노동조합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혐오의 정치 운동은 이기적 연대보다 다양한 특성을 아우르며 공감을 형성하는 방향을 택한다.

혐오라는 집단 현상을 방관하자는 것은 아니다. 개인에게 불안 사회에서 스스로의 목표를 낮추고 인성 수양에 힘쓰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혐오가 불안의 사회적 결과라는 말은, 해결책도 사회적 변화로부터 찾을 수 있다는 의미다. 생존의 예외 상태에 제동을 걸고, 고위험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획이 필요한 시점이다. 누구나 존중받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기획해야 한다.

‘사냥꾼이 돼라’는 오늘의 강령은 역설적으로 대다수 사람들이 희생양이 되어 사냥꾼의 대열에 쫓기는 최악의 시스템을 만들었다. 존중받는 사회란 누구도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버려지지 않을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다. 살아남기 위해 굴욕적인 관계를 맺지 않을 권리, 모욕을 당하지 않을 권리는 국가의 의무이자 존립의 이유다. 이 같은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 아래에서 개인은 온전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1]
잭 바바렛(박형신·정수남 譯), 《감정의 거시사회학》, 일신사, 2007.
악셀 호네트(이현재·문성훈 譯), 《인정투쟁》, 사월의책, 2011.
[2]
김원식, 〈생활 세계 식민화론의 재구성〉, 《사회와 철학》, 2009, 99-124쪽.
[3]
이선희, 〈청년 고민 1순위는 역시 ‘취업’〉, 《오마이뉴스》, 2015. 10. 8.
[4]
라이너 촐(최성환 譯), 《오늘날 연대란 무엇인가》, 한울아카데미, 2008,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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