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100년 전쟁은 드레퓌스에서 시작했다.

프랑스 육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
1894년 9월 프랑스 육군 참모 본부 정보국은 군사 기밀을 적국에 팔아넘긴 반역자를 색출하고 있었다. 발단은 편지 한 통이었다. 정보국은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에 요원을 청소부로 위장 취업시켜 첩보를 수집했는데, 얼마 전 독일 무관의 휴지통에서 여섯 조각으로 찢어진 손편지를 확보했다. 조각을 이어 붙이자 추악한 거래가 드러났다. 익명의 발신인이 독일 무관에게 프랑스군이 보유한 120밀리 신형 대포의 작동법을 비롯한 군사 기밀을 팔겠다고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정보부는 이 문서를 ‘명세서’라고 불렀다.

당시 프랑스 국민은 독일이라면 치를 떨었다. 1870년 보불 전쟁에서 프랑스는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에 처참하게 패했다. 1871년 프로이센은 파리를 포위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 수립을 선포했다. 독일군은 개선 행진을 벌이며 파리에 입성했고, 전리품으로 프랑스 북동부의 알자스와 로렌 지방을 가져갔다. 전쟁 배상금으로는 50억 프랑을 요구했다. 프랑스 1년 예산의 두 배가 넘는 규모였다. 독일을 향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을 때 독일 간첩 사건이 터진 것이다.

참모 본부는 조직 내부에 첩자가 있다고 봤다. 명세서에 담긴 정보는 참모 본부 소속이 아니면 알기 어려운 것이었고, 120밀리 대포에 관한 정보를 넘기겠다고 했으니 포병 장교일 것이었다. 참모 본부는 소속 장교 명단을 뒤졌다. 이내 용의자를 특정했다. 35세의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였다. 그가 독일이 보불 전쟁으로 점령한 알자스 지방 출신의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따져 봐도 드레퓌스는 간첩이 될 동기가 없었다. 프랑스의 명문 대학을 졸업했고, 성적도 뛰어났다. 군 생활에도 잘 적응했다. 융통성은 없어도 성실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동료들에게 인기가 없었지만, 복무 성적도 우수했다. 정치 성향이 좌도 우도 아니었고, 독일과 아무 관련도 없었다. 집안은 부유했고, 두 아이가 있었고, 아내는 큰 아파트와 말을 소유하고 있었다. 독일에 매수될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명세서 사본 ⓒFrench National Archives
10월 15일 참모 본부는 드레퓌스를 호출했다. 뒤파티 소령은 드레퓌스를 작은 방으로 데려가더니 펜과 종이를 내밀었다. “써야 할 편지가 있는데 손가락이 아파서 쓸 수 없으니 대신 써 주겠나?” 드레퓌스는 소령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었다. 명세서에 적힌 내용이었다. 드레퓌스가 작업을 마치자 소령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외쳤다. “법의 이름으로 대위를 체포한다. 당신은 반역죄로 기소됐다.” 드레퓌스는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군 교도소로 이송되어 독방에 갇힌다. 외부와 연락할 수도 없었다.

7주간 조사가 진행됐다. 참모 본부는 드레퓌스의 사생활을 탈탈 털었지만, 간첩 혐의의 증거나 동기를 찾을 수 없었다. 유일한 증거는 명세서였다. 참모 본부는 필적 감정을 의뢰했다. 감정가는 드레퓌스의 필적이 명세서의 필적과 차이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드레퓌스가 명세서를 적을 때 남의 필적을 모방했기 때문에 필적이 다를 수밖에 없으며 두 필적의 차이가 클수록 위조라는 증거가 더 확실해진다고 ‘과학적으로’ 설명했다. 기소를 앞두고 참모 본부 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범죄 동기를 찾기 어렵고 증거가 빈약하니 차라리 드레퓌스를 전쟁 중인 아프리카로 보내 전사하길 기대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국방부 장관은 기소를 결정한다.

1894년 12월 군사 재판이 열렸다. 필적 감정가는 사이비 과학을 증언했다. 뒤파티 소령은 드레퓌스가 편지를 쓸 때 손을 떨었는데 죄책감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드레퓌스는 날이 추워 손이 얼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동료 장교는 그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성들과 교제했고 도박도 했다고 증언했다. 불쾌한 성격에다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다는 증언도 나왔다. 그가 간첩이라는 억측만 있고 증거는 없었다. 이대로면 무죄 석방도 가능해 보였다. 그러자 군은 없던 증거를 만든다. 조작한 문서를 재판관에게 비밀리에 전달했는데, 국가 안보를 이유로 드레퓌스와 변호인은 볼 수 없었다. 육군 판사 일곱 명은 만장일치로 드레퓌스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드레퓌스의 군적 박탈식 ⓒmeisterdrucke.fr
1895년 1월 파리의 사관 학교 에콜 밀리테르에서 드레퓌스의 군적 박탈 행사가 열렸다. 기자가 진을 치고 군중이 운집했다. 나팔이 울리고 북소리가 진동했다. 장군이 말했다. “드레퓌스 대위, 당신은 제복을 입을 자격이 없다.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당신의 계급을 박탈한다.” 드레퓌스는 외쳤다. “맹세코 나는 결백합니다! 프랑스 만세!” 부관이 다가와 드레퓌스의 군복에서 계급장과 훈장과 단추를 뜯고 칼을 반으로 부러뜨렸다. 드레퓌스는 망가진 군복을 입고 경내를 돌았다. “모든 유대인은 죽어라!” 구경꾼들이 조롱하고 침을 뱉었다. 중세 유럽의 종교 재판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유다였다.

드레퓌스는 남아메리카 프랑스령 기아나 해안에 자리한 악명 높은 유형지 ‘악마의 섬’으로 유배된다. 영화 《빠삐용》의 배경이 된 섬이다. 이 척박한 섬에 간수는 열한 명, 죄수는 오직 드레퓌스 한 명이었다. 드레퓌스는 작은 오두막에 거주하며 24시간 감시를 받았다. 간수와 대화도 허용되지 않았다. 가족과 주고받는 편지는 검열됐고 그마저도 몇 달 지나야 전달됐다. 본국에서 드레퓌스가 탈출했다는 거짓 소문이 돌면서부터는 밤마다 발에 족쇄를 차야 했다. 드레퓌스는 말라리아와 이질에 걸렸고 자주 아팠다. 드레퓌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결백하다.”
1898년 악마의 섬 오두막에 앉아 있는 드레퓌스 ⓒGL Archive/Alamy
에밀 졸라의 말처럼 진실은 땅에 묻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땅 밑의 진실이 외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악마의 섬에 도착한 지 1년이 지난 1896년 3월이었다. 참모 본부 정보국장으로 새로 부임한 피카르 중령은 수상한 엽서를 조사하다가 우연히 명세서와 필적이 같은 사람을 발견했다. 정보국 방첩대에서 일하는 에스테라지 소령이었다. 피카르는 조사에 착수했고 그가 진범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피카르는 곧바로 직속상관인 공스 장군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군 수뇌부는 끝난 사건을 들추고 싶지 않았다. 사법적 오판을 바로잡는 것, 진실을 밝히는 것, 한 개인의 영혼을 구하는 것보다 군대의 명예가 더 중요했다. 피카르는 참모 총장에게도 보고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참모 본부 전체가 공범이었다. 피카르가 계속해서 공식 조사를 요구하자 공스 장군이 말했다. “그 유대인이 악마의 섬에서 썩어가더라도 무슨 상관인가?” 피카르는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참모 본부는 피카르가 더는 사건을 캐지 못하도록 파리의 정보국에서 아프리카 튀니지로 발령을 냈다. 진범인 에스테라지를 따로 만나서는 조용히 지내라고 당부했다.

드레퓌스의 재심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시민 사회에서 조금씩 터져 나오자 참모 본부는 여론 뒤에 숨기로 했다. 참모 본부는 반유대주의 신문에 드레퓌스를 깎아내리는 거짓 정보를 흘리고, 신문들은 그대로 보도했다. “유대인 집단이 수백만 프랑을 써서 더러운 반역자를 구출하려고 한다.” “죄 없는 기독교도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한다.” “재심이 열리면 기밀문서가 공개돼 외교 마찰이 생길 수 있다.” “유대인 집단이 군대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있다.” “유대인과 유대주의가 프랑스를 쇠퇴시키고 있다.”
1893년 《라 리브르 파롤》 1면에 실린 반유대주의 일러스트 ⓒLa Libre Parole
당시 프랑스 사회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다. 1789년 대혁명 이후 80년간 일곱 개의 정치 체제를 겪었다. 왕정과 공화정을 왔다 갔다 했고, 보불 전쟁으로 치욕을 당했고, 파나마 운하 뇌물 사건으로 유대계 금융 자본과 결탁한 정계의 부패가 드러났다. 그리고 유대인 장교 간첩 사건이 터졌다. 어수선한 시기에 분노를 쏟아부을 대상이 필요했다. 그게 유대인이었다. 프랑스는 유럽 최초로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외국인 취급을 받았다. 유대인이 프랑스를 삼켜 버릴 것이라 경고했던 《유대인의 프랑스》가 출간돼 인기를 얻었던 것도 이 무렵이다. 그야말로 “집단적 정신 착란”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에 반유대주의가 기름을 부으면서 프랑스 사회는 혁명 이전으로 돌아간 듯 보였다. 상황이 더 악화했지만 드레퓌스의 가족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결백을 입증할 자료를 모았고 진실을 알리는 팸플릿을 찍었고 의회에 재심을 요구하는 청원을 넣었다. 시대의 광기 앞에서 납작 엎드려 있던 지식인들도 하나둘 나서기 시작했다. 그중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도 있었다. 애초 졸라는 이 사건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동료 문인에게 사건의 진상을 듣고는 싸움에 뛰어들기로 한다. 졸라는 법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먼저 여론에서 이겨야 했다. 그렇게 졸라는 《르 피가로》에 언론의 타락과 군중의 광기와 사법의 오판을 지적하는 세 편의 글을 발표한다.

드레퓌스가 수감된 지 3년이 지난 1898년 1월, 양심 있는 지식인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진범 에스테라지가 군사 법정에 선다. 그러나 참모 본부의 증거 조작으로 무죄 판결을 받는다. 에스테라지가 유죄라면 드레퓌스는 무죄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군은 오류를 인정할 수 없었다. 재판정을 걸어나오는 에스테라지는 존재하지도 않는 유대인 국제 비밀 조직에 대항하는 영웅으로 그려졌고, 증거 조작을 주도한 앙리 소령은 중령으로 진급했고, 진범을 찾아내 상부에 보고했던 피카르 중령은 군사 기밀 누설죄로 체포됐다.
에밀 졸라가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 서한 〈나는 고발한다...!〉ⓒL'Aurore
무죄 선고 이틀 뒤인 1898년 1월 13일, 졸라는 《로로르》라는 작은 신문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발표한다. 제목은 〈나는 고발한다...!〉였다. 이 글에서 졸라는 드레퓌스 재판과 에스테라지 재판의 오류를 고발하고,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신문사는 기사가 널리 읽힐 것이라고 예상하고 평소보다 열 배 많은 30만 부를 찍었는데, 금세 동났다. 기사의 반향은 엄청났다.

그해 프랑스 전역은 드레퓌스 재심을 요구하는 공화 진보 세력, 재심에 반대하는 봉건 보수 세력의 다툼으로 시끄러웠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필적이 같네, 다르네 공방이 벌어졌고, 심지어 권총 결투로까지 이어졌다. 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로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졸라는 명예훼손죄로 기소됐다. 1심에서 징역 1년에 벌금 3000프랑에 처해졌다. 졸라는 항소했고 항소심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졸라는 그날 저녁 영국으로 망명한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국내 정치를 넘어 유럽과 미국의 양심적 지식인들까지 관심을 기울이는 사안이 됐다. 혁명의 나라, 톨레랑스의 나라 프랑스는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개최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국내외 여론에 압박을 느낀 정부는 박람회 한 해 전인 1899년에 재심을 연다. 다시 열린 군사 법정은 5 대 2로 드레퓌스의 유죄를 확정했다. 국방부 장관이 공개적으로 이전 판결을 존중해 달라고 말한 것이 컸다. 군사 법정의 육군 판사가 다른 군사 법정의 지난 판결을, 국방부 수장의 권위를 뒤집기란 어려웠다. 대신 정부는 드레퓌스가 더는 무죄를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면했다.

사면은 유죄를 인정할 때 성립한다. 드레퓌스파는 사면 거부를 바랐지만, 벌써 6년 가까이 악마의 섬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그는 사면 제안을 받아들인다. 드레퓌스가 사면 혜택을 반납하고 재심을 청구해 완전하게 누명을 벗은 건 1906년이 되어서다. 프랑스 최고 법원인 파기원의 무죄 판결 이후 정부는 드레퓌스에게 소령 특진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한다. 이렇게 모든 일이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 참고 문헌
에밀 졸라(유기환 譯), 《나는 고발한다》, 책세상, 2020.
유시민, 《거꾸로 읽는 세계사》, 돌베개, 2021.
최창모, 《중동의 미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푸른사상, 2015.
마은지,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본 프랑스의 분열과 통합〉, 《서양사론》, 2017.
The Dreyfus Affair Trials: An Account
The Dreyfus Affair 1894-1906
THE DREYFUS AFF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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