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 선고 이틀 뒤인 1898년 1월 13일, 졸라는 《로로르》라는 작은 신문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발표한다. 제목은 〈나는 고발한다...!〉였다. 이 글에서 졸라는 드레퓌스 재판과 에스테라지 재판의 오류를 고발하고,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신문사는 기사가 널리 읽힐 것이라고 예상하고 평소보다 열 배 많은 30만 부를 찍었는데, 금세 동났다. 기사의 반향은 엄청났다.
그해 프랑스 전역은 드레퓌스 재심을 요구하는 공화 진보 세력, 재심에 반대하는 봉건 보수 세력의 다툼으로 시끄러웠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필적이 같네, 다르네 공방이 벌어졌고, 심지어 권총 결투로까지 이어졌다. 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로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졸라는 명예훼손죄로 기소됐다. 1심에서 징역 1년에 벌금 3000프랑에 처해졌다. 졸라는 항소했고 항소심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졸라는 그날 저녁 영국으로 망명한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국내 정치를 넘어 유럽과 미국의 양심적 지식인들까지 관심을 기울이는 사안이 됐다. 혁명의 나라, 톨레랑스의 나라 프랑스는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개최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국내외 여론에 압박을 느낀 정부는 박람회 한 해 전인 1899년에 재심을 연다. 다시 열린 군사 법정은 5 대 2로 드레퓌스의 유죄를 확정했다. 국방부 장관이 공개적으로 이전 판결을 존중해 달라고 말한 것이 컸다. 군사 법정의 육군 판사가 다른 군사 법정의 지난 판결을, 국방부 수장의 권위를 뒤집기란 어려웠다. 대신 정부는 드레퓌스가 더는 무죄를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면했다.
사면은 유죄를 인정할 때 성립한다. 드레퓌스파는 사면 거부를 바랐지만, 벌써 6년 가까이 악마의 섬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그는 사면 제안을 받아들인다. 드레퓌스가 사면 혜택을 반납하고 재심을 청구해 완전하게 누명을 벗은 건 1906년이 되어서다. 프랑스 최고 법원인 파기원의 무죄 판결 이후 정부는 드레퓌스에게 소령 특진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한다. 이렇게 모든 일이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 참고 문헌
에밀 졸라(유기환 譯), 《나는 고발한다》, 책세상, 2020.
유시민, 《거꾸로 읽는 세계사》, 돌베개, 2021.
최창모, 《중동의 미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푸른사상, 2015.
마은지,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본 프랑스의 분열과 통합〉, 《서양사론》, 2017.
The Dreyfus Affair Trials: An Account
The Dreyfus Affair 1894-1906
THE DREYFUS AFFA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