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재생하는 아이콘
도시 재생의 키워드로서 지역 경제의 부흥에 일조하고, 지역의 미래를 상징하는 아이코닉 건축은 이제 어디에나 있다. 아이코닉 건축이 세계의 도시에 전략적으로 건립되고, 우리의 일상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아이코닉 건축에서 파생되는 갖가지 문화 자본과 이에 대한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예를 현대인의 여가 생활인 쇼핑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쇼핑은 단순히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는 것 이상의 다양한 가치를 지닌다. 먼저 이성적인 판단을 기초로 가격 비교, 구매 편리성, 서비스에 따라 만족을 느끼는 ‘실용적 쇼핑 가치(utilitarian shopping values)’가 있다. 그리고 감정적 동기에 기반한 ‘유희적 쇼핑 가치(hedonic shopping values)’가 있다. 유희적 쇼핑은 쇼핑 자체가 주는 기쁨에 대한 감정적인 필요에 초점을 맞춘다. 같은 물건이라도 깔끔하고 우아하게 디자인된 상점을 선호하는 것, 쇼윈도의 감각적인 디스플레이를 보고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윈도쇼핑을 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이때 가격보다는 쇼핑의 경험이 주는 심미성이나 기분 전환, 즐거움 등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사회적 맥락 측면의 쇼핑 가치도 있다. ‘사회적 관계 추구 쇼핑 가치(social engagement shopping values)’는 쇼핑을 같이하는 친구, 가족, 또는 낯선 사람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가치다.[1] 친절한 점원과의 대화를 통해 패션 정보를 얻기도 하고, 온라인상에서 상품평 등을 공유하는 커뮤니티에 접속해 공통의 관심사를 기반으로 관계를 맺기도 한다. 쇼핑하는 과정에서 낯선 사람과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 사회적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주말이면 거대한 쇼핑몰에서 몰링(malling)을 즐기며 하루를 보내는 모습은 실용적 쇼핑 가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유희적 쇼핑 가치와 사회적 관계 추구 쇼핑 가치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들어 기술의 발달로 인터넷과 모바일 쇼핑이 보편화되었는데도 쇼핑몰을 방문하고 시간을 보내는 수고를 하는 이유는 경험과 관계에 있다.
쇼핑의 가치는 대표적인 경험 상품인 여행에도 적용된다. 여행은 일반 상품과 달리 경험을 중시하는 무형 상품이다. 유희와 관계를 추구하는 특성이 있다. 사람들은 여행 상품을 선택할 때 항공 가격을 비교하며 합리적인 소비를 하기도 하지만,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다소 감정적으로 비싼 비용을 치르고 성수기에 인도네시아 발리로 서핑 여행을 가기도 한다. 가족 간의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기 위해 고생을 각오하고 무더운 한여름의 디즈니랜드에 아이들을 데려가기도 한다. 사회적인 과시의 수단으로 여행 상품을 구매하기도 한다. 고급 숙박과 서비스, 음식과 교통수단, 방문지를 선택해 우월적인 경험 소비를 보여 주려는 것이 그 예다. 자랑할 만한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아이코닉 건축은 그 지역의 상징이 되어 간판(sign) 역할을 한다. 훌륭한 관광 자원인 동시에 여행지에서 빠질 수 없는 ‘인증샷’의 배경이 되는 필수 방문지이며, 그 지역을 관광하고 왔다는 증표가 된다. 사람들은 에펠탑을 소개하는 이미지를 볼 때마다 프랑스 여행을 떠올린다. 만약 에펠탑 모양의 액세서리를 기념품으로 구입했다면, 그 액세서리는 마치 섬네일(thumbnail)처럼 여행의 추억을 압축적으로 재생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아이코닉 건축은 장소와 문화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아이콘이자, 소비자의 경험을 전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사람들이 문화를 경험하는 통로이자, 문화 쇼핑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돈을 버는 건축
관광 명소가 된 현대 미술관을 필두로 박물관, 스포츠 콤플렉스와 같은 공공 공간도 쇼핑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술관 내부의 전시보다 미술관이라는 건축 그 자체를 관람하기 위해 방문하는 소비자가 늘면서, 건축 관련 상품들도 늘고 있다. 미술관과 박물관의 스페셜 에디션 상품은 방문객의 쇼핑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있다. 뉴욕 현대 미술관(MoMa)의 미술관 스토어의 제곱미터당 매출은 월마트보다 높다고 한다. 관광으로 경제적인 효과가 입증된 아이코닉 건축은 낙후된 재개발 지역 도시 재생의 희망이 된다. 아이코닉 건축이 세계 각지에서 경쟁적으로 건립되는 이유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미술관은 산업 유산을 리노베이션해 성공적으로 지역 경제를 살렸다. 테이트 모던 건물은 뱅크사이드(Bankside) 발전소였는데 1950년대 2차 세계 대전 이후 런던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건설되었다가 1981년 문을 닫았다. 그 후 1995년 도시 재생 사업으로 개발이 시작되었고 2000년 런던 밀레니엄 프로젝트를 통해 현대 미술관으로 재생되었다. 국제 건축 공모에 참가한 7팀 가운데 당선된 스위스의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Herzog and de Meuron)이 설계했다. 건축가는 본래의 특징적인 외형을 살리면서 두 가지의 획기적인 디자인을 추가했다. 첫 번째는 긴 램프로 이어지며 장관을 이루는 입구 터빈홀이다. 두 번째는 기존 건축에 라이트 빔(light beam)으로 불리는 두 개 층의 유리 박스를 추가로 얹은 것이다. 건물 상부의 라이트 빔은 자연 채광을 받아들이며 템스강 건너편의 명소 세인트폴 대성당과 밀레니엄 브리지의 뷰를 감상하는 장소가 되었다. 밤이면 새로운 건축의 모습을 세계에 나타낼 수 있도록 빛을 내는 라이트 박스 역할을 한다.[2] 테이트 모던은 도시 마케팅과 인지도에 일조하며 2400개의 고용을 창출하고 연간 8억 달러(9564억 원)의 관광 수입을 벌어들였다.[3] 현대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방문하는 런던의 명소 중 하나가 되었다.
‘빌바오 효과(Bilbao effect)’만큼 아이코닉 건축이 가져온 경제적 파급력을 잘 설명하는 예를 찾기는 어렵다.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한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은 1997년 개관한 이후 제조업이 쇠퇴한 지역을 관광업으로 부흥시켰다. 스페인 북부의 항구 도시 빌바오는 바스크 지역(Pais Vasco)의 중심 도시로 과거 철광석을 바탕으로 제철 공업이 발달한 교역항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제조업의 침체와 바스크 분리주의 운동 등으로 쇠락하기 시작했다. 스페인령의 바스크 자치 지방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바스크 민족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고유의 언어인 바스크어를 쓴다. 1983년 대홍수는 도시를 무너뜨린 직격탄이었다. 도심을 흐르는 네르비온(Nervión)강이 범람해 수변 도심지가 폐허가 되자 실업률은 25퍼센트로 치솟았다.
1989년 바스크 정부는 빌바오의 재생을 위해 ‘빌바오 리아(Bilbao Ria) 2000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문화 시설 및 녹지, 케이블카를 건설하는 재개발이 핵심이었다. 빌바오는 도시 재생의 핵심 테마를 공업 도시에서 문화 도시로의 전환으로 결정하고 에우스깔두나(Euskalduna) 콘퍼런스 센터 앤드 콘서트 홀, 파인 아트 뮤지엄, 빌바오 국제공항 등을 건설했다. 특히 빌바오시를 가로지르는 네르비온강 변에 미술관을 짓기로 하고 1억 달러(1196억 원)규모의 건설 기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 이탈리아 베니스의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을 운영하고 있는 구겐하임 재단의 미술관을 유치하는 데 성공한다.
건축가 게리는 네르비온강 변의 살베(Salve) 다리 하부를 활용해 도시 기반 구조물과 새로운 미술관이 외형상 어우러지도록 디자인했다. 미술관의 외형은 네르비온강에 정박한 선박의 형상이다. 마치 여러 개의 긴 티타늄 조각으로 해체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만들어진 것 같은 형태로, 물고기 비늘 모양의 0.5 밀리미터 두께 티타늄 3만 300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니멀리즘 조각가인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영향을 받아 건축은 마치 큰 크기의 조각처럼 보이며 그 자체로 관람의 대상이다.[4] 날씨에 따라 은빛과 금빛을 띠는 건축은 조형성을 만개한 꽃의 형태로 나타낸다. ‘메탈 플라워’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유다. 건축의 외형은 말 그대로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대중들은 내부의 전시품보다 건축 자체를 보기 위해 빌바오를 찾고 있다.[5]
미술관 내부의 19개 전시 공간에서는 상설 전시와 영구 전시가 열린다. 매년 약 105만 명의 관람객이 구겐하임 미술관을 찾고 있다. 1997년 미술관이 개관하고 3년 후 건설비 1736억 원을 회수했고 5년 후에는 세금을 포함한 모든 투자액을 회수했다. 이러한 경제적 성공은 지역 경제 활성화로 이어졌다. 미술관 개관 후 10년 만에 인근 숙박 시설의 수가 10배 이상 증가했고, 약 4000명 이상의 고용이 창출됐다. 문화와 환경의 도시로 지역 경쟁력을 높인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는 이유다. 쇠락한 스페인의 항구 도시 빌바오를 국제적인 관광 도시로 탈바꿈시킨 빌바오 효과는 문화 산업의 혁신을 말하는 상징이 되었다.
빌바오의 도시 재생은 세계의 각지에 영감을 줬다. 대표적으로 아랍 에미리트 두바이, 아부다비, 카타르 도하와 같은 중동 도시들은 사막으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더 스펙터클한 건축을 건립하고 있다. 아랍 에미리트는 ‘중동의 문화 수도’를 꿈꾼다. 포스트 오일 시대에 대비해 아이코닉 건축을 관광 산업의 선봉으로 삼아 빌바오 효과를 목표로 사막 위 오아시스를 건설하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 분관과 뉴욕대 분교, 네 번째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한 세계 최대 규모 문화 클러스터 사디야트(Saadiyat) 문화 지구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행복의 섬이라는 뜻의 사디야트는 아랍 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위치한 섬이다. 섬과 도시는 칼리파 대교로 연결되어 있다.
아부다비 루브르는 2017년 건축가 장 누벨(Jean Nouvel)의 설계로 사디야트 문화 지구에 문을 열었다. 2007년 아랍 에미리트와 프랑스 정부 간 협정을 통해 30년간 루브르라는 명칭을 쓸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프랑스 루브르에서 가져온 예술품은 10년간, 임시 전시 프로그램은 15년간 차용하기로 했다.
장 누벨은 인터뷰에서 “나는 단지 건물이 아니라 ‘예술 마을(neighborhood)’을 만들고 싶었다”며 “개념적으로 아랍 성지 메디나와 그리스 광장 아고라의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공간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완전한 고요 속에서 서로 만나 삶과 예술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장소로 설계했다”고 밝혔다.[6]
건축가는 아랍 문화권의 건축 양식에서 발견되는 기하학적 문양의 창문 ‘마쉬라비야(mashrabiya)’를 통과하는 채광이 아름다운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것에 착안했다. 루브르 아부다비도 야자나무 잎이 엮여 있는 듯한 모양의 180미터 철골 지붕 틈새를 통해 빛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효과가 나도록 설계됐다. 내부 광장 수로는 아랍 반도의 오래된 수로 시스템인 팔라지(falaji)를 모티브로 삼았다.
영속하는 브랜드 아이덴티티
아이코닉 건축과 소비의 연관성은 상업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플래그십 스토어란 브랜드의 주력 상품을 중심으로 브랜드의 정체성과 이미지를 극대화해 브랜드의 깃발 역할을 하는 대표적인 매장을 가리킨다. 플래그십 스토어는 고객에게 브랜드를 홍보하는 장이다. 많은 브랜드는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고객의 경험을 유도하고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다. 프라다(Prada) 같은 럭셔리 브랜드들은 렘 콜하스(Rem Koolhaas),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 등 유명 건축가를 고용해 설계한 아이코닉 건축을 플래그십 스토어로 사용하고 있다.
일본 도쿄의 프라다 매장은 6층에 걸친 다이아몬드 모양의 유리 크리스털 패널과 버블bubbles로 이루어져 있다. 패널은 오목한 커브로 고객이 걸을 때마다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소비와 문화가 연결되는 지점을 부각한 건물은 쇼핑의 기능과 콘셉트를 소통으로 해석하고 있다.[7] 프라다의 CEO 파트리치오 베르텔리(Patrizio Bertelli)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건축은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광고와 같다”고 말했다.[8] 건축이 브랜드의 정수를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건축은 유통을 위한 공간에서 한층 격상한 브랜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브랜드 아이덴티티(brand identity)로서의 지위를 갖는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란 형체가 없는 무형의 브랜드 정신을 나타낼 수 있는 유형화된 모든 것을 지칭한다. 레슬리 드 샤나토니(Leslie de Chernatony)는 브랜드 아이덴티티의 구성 요소를 비전, 문화, 인격의 세 가지로 설명한다. 먼저 브랜드 비전은 브랜드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브랜드 매니저 등 선구적인 개인에 의해 전략적으로 선정된다. 브랜드 문화는 브랜드의 가치를 보여 주는 것으로, 브랜드 비전과 함께 계획된다. 브랜드 문화는 시간이 지나도 남아 있는 브랜드의 핵심 가치를 담아 브랜드의 비전을 성취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브랜드 비전과 브랜드 문화는 브랜드와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반영하는 브랜드 인격(personality)에 영향을 미친다.[9]
예를 들어 애플(Apple)이라는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브랜드 문화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개척 정신이다. 비전은 혁신적 기술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연결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문화와 비전을 바탕으로 애플은 쿨하고 심플하며 창의적인 브랜드 인격을 구축한다. 브랜드의 인격은 무형이기 때문에 소비자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형의 매체에 코드화되어서 발신되어야 한다. 대표적인 방법이 TV, 라디오, 잡지, 신문 등의 광고다.
고객이 브랜드를 인지하는 것을 넘어 인상을 바탕으로 한 특정한 구상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브랜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브랜드 이미지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의 속성상 기업에서 만들어지는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상징화되고 스토리로 만들어져 매체를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다. 브랜드 이미지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제공되는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고객이 개인적으로 해석해서 만들어진다.[10] 기업이 제공한 정보와 고객이 받아들이는 정보의 차이로 아이덴티티와 이미지의 불일치가 생겨나는 것이다. 기업에게는 이러한 간극을 줄여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브랜드 분야의 석학 데이비드 아커(David Aaker)는 시각적인 은유가 강력한 형태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라고 주장한다.[11] 시각적인 은유에는 디자인이 필요하다. 기업에서는 디자인을 브랜드 아이덴티티 구현의 전략적인 도구로 사용한다.[12] 기업의 아이덴티티를 드라마틱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플래그십 스토어를 건립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아이덴티티는 매장의 디자인으로 선명하게 표현된다.
아이코닉 건축은 심미적인 형상과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파사드 등으로 기업의 아이덴티티 역할을 한다. 내부 인테리어도 기업의 경영 철학이나 브랜드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도록 디자인된다. 폴로 랄프 로렌은 미국 스타일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내는 브랜드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담은 플래그십 스토어를 만들었다. 1986년 첫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인 메디슨 애버뉴의 랄프 로렌 맨션이 대표적이다. 오랜 탐색 끝에 고성 스타일의 낡고 오래된 맨션을 매입하여 동화 같은 파사드와 석고 몰딩, 마호가니 장식 천장, 페르시안 러그 등을 사용하여 2년 동안 단장했다. 마치 영국의 클럽 하우스나 부호의 별장처럼 보이는 공간은 화려한 윈도 디스플레이로 고객의 시선을 끈다.[13] 매디슨 맨션으로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면서 인근 백화점 매장의 매출 역시 상승했다.
디자인 경영학의 선구자인 브리짓 보르자 드 모조타(Brigitte Borja de Mozota)는 공간 아이덴티티(spatial identity)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기업의 빌딩과 공간 디자인은 브랜드 이미지를 확립하기 위한 영속적인 매개체가 된다는 의미다. 사무실과 공장 같은 업무 공간이나 부티크 같은 상업 공간이 공간 아이덴티티를 커뮤니케이션하는 매개로서 기능한다.
건축의 내부와 외부는 기업의 메시지를 담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다. 내부와 외부 관계자들에게 일관성 있는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수행한다.[14] 애플이 새로운 사무 공간인 애플 파크를 건립한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애플 파크는 애플의 미래 지향적 아이덴티티를 보여 주고 있다. 노먼 포스터의 설계로 2017년 문을 연 애플파크는 1만 2000명을 한 지붕 아래에 수용할 수 있는 업무 공간이다. 피트니스 센터, 연구 개발 센터, 카페, 방문자 센터로 구성되어 있는 10만 제곱미터 규모의 공간에는 캘리포니아 과수원에서 영감을 받은 공원이 있다. 재활용 자원을 사용하고, 최첨단 배기 시스템으로 온도를 조절하는 설비는 친환경을 추구하는 애플의 철학을 시사한다. 마치 애플 신제품을 만드는 것처럼 프로토타이핑(prototyping)을 거쳐 선보인 신사옥은 애플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건축이 뿌리내리는 곳
이제 세계의 고객들은 유명 건축가에게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빌바오 구겐하임과 같은 건축을 원한다고 말한다. 영국의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는 잡지 《아이콘(Icon)》과의 인터뷰에서 현대의 건축가들이 겪는 모순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새로운 아이콘 건축은 모든 것이 스펙터클하게 보여야 하고, 특별히 그렇지 않은데도 반드시 세상을 변화시킬 것처럼 보여야 하는 위험이 있다. 나는 의도적으로 아이콘을 만드는 것을 피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이콘은 특별히 계획하지 않은 일이 그냥 발생하는 것이다. 20세기에 아이콘이 된 디자인을 생각해 보면 지금의 의미로는 아이콘으로 규정되지 않는 것들이 아이콘이 되어 있다. (…중략…) 지금 우리는 즉각적인 아이콘을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전달하는 즉시 아이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15]
치퍼필드는 20세기 거장의 아이콘들이 시대를 거쳐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던 과거와 비교해 의도적으로 즉각적인 아이콘을 만들어 내야 하는 지금의 세태를 지적하고 있다. 즉각적으로 이미지화할 수 있으면서 시간이 지나도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어야 하는 아이코닉 건축의 숙명과 관련한 모순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이토록 어려운 숙제를 하다 보면 성공작뿐 아니라 실패작도 나온다. 의미 전달에 실패한 많은 건축은 외면당하고 흉물스럽다는 오명을 쓰고 있다. 영국 셰필드(Sheffield)의 국립 대중음악 센터는 빌바오 구겐하임의 성공을 계승하고자 했다. 매년 40만 명의 신규 관광객을 유치할 지역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1999년 개장 후 고전을 면치 못하고 1년 만에 문을 닫았다.[16] 현재는 셰필드 할람(Sheffield Hallam) 대학교가 넘겨받아 학생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영국 웨스트 브로미치(West Bromwich)에 건립된 대중 예술 센터 역시 2008년에 오픈했다가 2013년에 문을 닫았다. 미디어 아트 센터, 극장, 오피스의 역할을 했지만, 운영 미숙에 공감대가 부족한 디자인으로 외면당했다. 검정 금속 파사드와 말풍선 모양의 핑크 프레임 창문의 독특한 외관은 쿠킹 호일이 사고를 당한 것 같다는 비난을 받았다. 영국 의회의 문화 미디어 스포츠 위원회는 ‘공공 재화의 중대한 낭비(a gross waste of public money)’라고 지적했다.[17] 외부 형태에만 집착하다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건축의 기능을 등한시한 결과다.
일련의 실패들과 더불어 프로젝트 경쟁 공모를 통해 빠르게 도시의 아이콘을 생산해야 하는 환경은 건축의 변화를 불러왔다.[18] 변화의 첫 번째는 건축가가 건축 공간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 디자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15년에 걸쳐 디테일까지 디자인했던 것과 달리, 노먼 포스터는 영국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30 세인트 메리 액스(St. Mary Axe)의 외부만 설계하고 내부는 베넷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에 맡기자는 고객의 요구를 수용했다. 점점 더 복잡해지고 커지는 현대 건축을 만드는 과정에서 설계 단계에 맞춰 여러 회사가 함께 참여하는 일은 이제 흔히 접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두 번째로 연속적인 복제 건축이 나타나고 있다. 프랭크 게리의 공인된 인상적 오리지널 디자인으로 꼽히는 빌바오 구겐하임(1997)의 콘셉트는 미국 클리블랜드의 피터 루이스(Peter B. Lewis) 빌딩(2002), LA의 디즈니 콘서트홀(2004), 스페인 엘시에고(Elciego)의 마르께스 데 리스칼(Marques de Riscal) 와이너리 호텔(2006) 등에 반복해 등장했다. 스타일의 연장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앞서 건립된 모델과 유사한 건축을 고유한 작품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19]
이미 성공한 현대 아이코닉 건축과 유사한 아이콘을 만드는 것은 유명세를 잇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건축 고유의 독창성과 의미를 상실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미 특정한 스타일의 쇼핑몰, 테마파크, 수변 공간 등은 세계 어디에나 비슷하게 존재하고 있다. 특징 없이 비슷한 건축은 지역의 문화를 읽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다.
지역과 단절된 기호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모든 기호의 의미는 문장의 맥락에서 발생한다는 맥락주의는 건축의 내외부적 요소에서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령 문은 기능적으로 공간을 구분하지만, 전체적인 환경 차원에서는 장식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건축에서는 절대적인 맥락과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주변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건물의 완전한 의미만을 고집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20]
게리가 반복한 스타일의 원류인 빌바오 구겐하임은 얼핏 보면 메탈 플라워라는 독특한 디자인과 빌바오라는 지역의 연관성을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게리는 빌바오의 네르비온강과의 연계성을 고려했고, 빌바오의 문화적인 미래 비전을 형태로 표현해 상징으로 만들었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역시 건물의 유기적 형태가 센트럴 파크와 어울릴 수 있도록 디자인됐다. 대지의 지역성을 반영하는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아이코닉 건축의 특별한 형상이 대중에게 외면당하지 않으려면 이미지로서 즉각적으로 어필하면서도, 아이콘으로 각인될 수 있는 지역과의 조화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