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 ; 인류가 해방된다
위고비가 모든 것을 바꿨다
“What’s your secret? You look so awesome, fit, ripped & healthy. Lifting weights? Eating healthy?”(당신 정말 멋져요. 탄탄하고, 균형 잡힌 몸이네요. 비결이 무엇인가요? 운동? 건강한 식습관?)
“Fasting. And Wegovy.”(단식. 그리고 위고비.)
2022년 10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 경영자(CEO)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서 몸매 관리 비결을 묻는 한 지인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대체 위고비가 뭔지 궁금해했다. 대충 ‘살 빼는 약’이구나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미처 몰랐다. 1년도 안 돼 전 세계적으로 위고비 열풍이 불 줄은.
9년 뒤인 2033년이면 전 세계 10억 명, 그중 아동 및 청소년 2억 5000만 명이 이 질병으로 고통받게 된다. 바로 비만이다. 1975년 이후 미국의 비만 인구는 대략 세 배가량 증가했다. 현재 미국 성인의 40퍼센트 이상이 비만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2030년엔 이 수치가 50퍼센트까지 증가한다. 인구의 절반이 비만이란 얘기다. 비만을 손쉽게 치료할 방법이 있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시장이 열리는 셈이다.
비만이란 체내에 지방이 비정상적으로 많이 축적된 것을 말한다. 살찐 게 무슨 병이냐 할 수도 있지만, 비만은 명백한 질병이다. 미국 내에선 흑인 아동 비만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데 또 다른 사회 문제로 부각될 정도다. 하버드대학교와 조지워싱턴대학교가 공동으로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음식을 조달하기 어려운 저소득층일수록 체중이 더 나간다. 수치상으로도 흑인과 저소득 성인의 고도 비만율이 다른 인종이나 계층에 비해 높다. 비만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비만연맹에 따르면 향후 비만 인구가 가장 많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다.
보통 비만은 키와 몸무게로 계산한 체질량지수(BMI)로 구분한다. 체중(킬로그램)을 키(미터)의 제곱으로 나눈 값이 BMI다. 세계보건기구(WHO)는 BMI가 25 이상이면 과체중, 30 이상이면 비만, 40을 넘어서면 초고도비만으로 본다. 물론 단순히 이 수치로만 계산하면 근육량이 많아 체중도 많이 나가는 사람을 비만으로, 체지방이 많지만 마른 사람을 정상으로 분류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큰 기준은 일단 BMI다.
시계를 돌려 보자. 사실 ‘사람이 너무 마르면 없어 보인다’, ‘나이를 먹으면 아랫배가 좀 나와야 듬직하고 호감이 간다’ 같은 말이 통용됐던 게 불과 얼마 전이다. 지금은 웃을 일이지만 먹고사는 게 중요했던 시절의 일이다. 퇴근 후 술로 스트레스를 풀며 동료애를 다지는 독특한 회식 문화도 비만의 주범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 비만은 부와 호감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의 인식이 생겼다. 유전적 요인이나 호르몬 이상 등 명백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비만인 사람은 생활 환경에 문제가 있거나 자기 관리를 못 한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건 지양해야 하지만 면접 등에서 불리한 평가를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로 비만은 정신적 열등감을 갖게 하고, 사회 활동을 꺼리게 하는 부정적 효과도 낳는다.
그뿐만 아니라 비만은 심혈관 질환 등 심각한 건강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비만이 건강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밝혀지고, 치료가 필요한 질병으로 인식하게 된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비만은 환경적, 생물학적 요인의 조합에 의해 발생하는 복합적 질병이다. 사회적 지위나 운동 시설 접근성 등은 환경적 요인이다. 여기에 잠 부족이나 스트레스, 유전 등 생물학적 요인이 함께 영향을 미친다.
비만 인구가 늘며 비만 치료제에 대한 관심과 수요도 많이 늘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제약업계는 치료제 개발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대표적인 경구용(먹는 약) 항抗비만 약물인 펜플루라민Fenfluramine은 펜-펜fen-phen이라 불리며 한때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심장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는 심각한 경고를 받고 1997년 시장에서 퇴출당했다. 또 다른 후보 시부트라민Sibutramine도 식욕을 억제하는 비만 치료제로 판매됐지만 심근경색과 뇌졸중 같은 심혈관계 부작용 우려에 2010년 이후 사용이 금지됐다.
그러다 2022년 이후 부작용 우려를 크게 줄인 신약이 등장하면서 관련 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최근 JP모건은 2032년 전 세계 비만 치료제 시장이 710억 달러(95조 원) 규모로 성장할 거라 전망했다. 바이오 분야 시장 조사 업체 아이큐비아IQVIA는 보험 적용이 빨라질 경우 2027년 시장 규모가 1000억 달러(134조 원)에 도달할 것이라 예측하기도 한다. 어떤 시나리오가 맞든 10년 뒤엔 현재 수준(2022년 100억 달러)과 전혀 다른 그림이 펼쳐진다는 얘기다.
JP모건이 내놓은 또 하나의 예측은 급격히 커지는 비만 치료제 시장의 약 절반을 노보 노디스크가 차지할 것이란 점이다. 서두에 밝힌 위고비의 제조사다. 노보 노디스크는 당뇨병 치료제로 쓰는 인슐린을 생산하는 덴마크의 두 회사가 합병하며 탄생했다. 지금도 당뇨병 치료제 점유율 세계 1위(약 33퍼센트)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업적이지만 이 회사를 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진 건 위고비 때문이다. 인슐린 분비를 촉진하는 이 주사를 맞았더니 살이 빠지는 효과가 나타났다.
위고비의 마법을 이해하려면 GLP-1(glucagon-like peptide1)의 기전을 알아야 한다. GLP-1은 체내에서 인슐린 분비를 유도해 혈당 수치를 조절하는 호르몬이다. 더불어 위장관 운동 조절과 식욕 억제 등에 관여한다. 위고비의 주요 성분인 세마클루타이드Semaglutide는 이 GLP-1의 유사체다. 매주 한 번 주사 형태로 주입하면 GLP-1처럼 작용해 체중 감소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노보 노디스크는 세마클루타이드로 만든 최초의 비만 치료제 삭센다를 2015년 출시했다. 효과는 있었지만, 하루에 한 번 주사를 맞아야 한다는 게 한계였다. 이를 보완한 제품이 2021년 6월 미국 식품의약국이 승인한 위고비다. 주 1회만 맞으면 되는데 효과는 삭센다보다 훨씬 뛰어나다. 임상 3상에서 위고비로 68주간 비만 환자를 치료했는데 체중이 평균 16.9퍼센트나 감소했다. 부작용도 거의 없었다. 시장은 열광적으로 반응했고, 급증하는 수요를 공급이 쫓아가지 못하는 상황이 1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
노보 노디스크는 위고비를 비롯한 GLP-1 계열 치료제의 급성장에 힘입어 2023년 상반기에만 1080억 덴마크크로네(21조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30퍼센트 증가했다. 주가가 따라가는 건 당연했다. 노보 노디스크의 주가는 최근 5년 동안 약 347퍼센트 상승했다. 2021년부터 시작된 주요국의 기준 금리 인상 행진으로 대부분의 바이오테크주가가 주춤했던 걸 고려하면 더욱 눈에 띄는 성과다. 상승세는 진행형이다. 노보 노디스크의 시가 총액은 750조 원을 넘어섰는데 이는 글로벌 제약사 중 2위에 해당한다.
노보 노디스크가 비만 치료제 시장의 선구자라면 추격자는 일라이 릴리다. 현재 글로벌 제약사 시가 총액 1위(950조 원)다. 일라이 릴리의 주가 또한 최근 5년 새 500퍼센트 넘게 뛰었다. 당뇨병 치료제이자 비만 치료제 후보 물질인 마운자로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신약 개발이라고 하면 암 치료제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지금은 당뇨병 강자인 두 회사가 굴지의 글로벌 빅파마를 제치고 글로벌 제약사 시가 총액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마운자로는 FDA의 신약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마운자로도 원래는 당뇨병 치료제다. 2022년 5월 FDA 승인도 받았다. 하지만 비만 치료 효과가 뛰어나다는 걸 확인한 일라이 릴리가 비만 치료제 허가를 위한 추가 임상을 진행했고, 최대 22.5퍼센트의 체중 감소가 확인됐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를 두고 비만 치료제 시장의 킹콩이 될 수 있는 결과라고 평가했다. 현재로서는 승인 가능성이 높은데 그러면 2024년부터는 위고비와 마운자로가 비만 치료제 시장을 양분할 전망이다.
마운자로의 주성분은 티르제파타이드tirzeparide다. 설명한 대로 위고비의 주성분인 세마클루타이드는 GLP-1 작용제, 티르제파타이드는 GLP-1, GIP 이중 작용제란 점이 다르다. GIP 역시 GLP-1 같은 인크레틴(장에서 분비되는 호르몬) 계열이다. 둘 중 무엇이 더 나은지 현재로선 판단이 쉽지 않지만 일라이 릴리는 임상 3상에서 마운자로가 위고비 대비 더 나은 체중 감량 효과를 보였다고 밝혔다.
비만 2라운드, 국내 기업들의 추격전
2023년 7월 FDA 데이터베이스의 의약품 부족 현황에 따르면 주요 당뇨병 치료제와 비만 치료제는 여전히 공급 부족 상태다. FDA는 판매 중인 위고비의 다섯 개 용량 중 세 개 이상이 적어도 2024년 상반기까지 공급이 제한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미 당뇨병 치료제로 승인된 일라이 릴리의 마운자로 역시 의사의 재량에 따라 비만 치료제로 처방하고 있는데 여섯 개 용량 중 네 개는 간헐적인 공급 부족이 나타나고 있다.
노보 노디스크는 폭발하는 위고비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최근 서모 피셔Thermo Fisher를 생산업체로 추가 선정했다. 동시에 다른 연구도 진행 중이다. 노보 노디스크는 위고비가 심장마비·뇌졸중 등 주요 심혈관 질환 발생 위험을 20퍼센트 감소시킨다는 자체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위고비를 투약할 경우 음주나 흡연 욕구가 감소한다는 분석도 있는데 이는 GLP-1 계열 약물의 적응증 확장 가능성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상대적으로 심혈관이나 간 질환 적응증 치료제를 개발 중인 제약사는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2024년부터 노보 노디스크와 일라이 릴리의 비만 치료제 2파전이 확실시되는 가운데 두 회사의 파이프라인(신약 후보 물질) 추가 확보 경쟁도 더욱 치열하게 전개 중이다. 더 확실한 시장 장악을 위해서다. 최근 노보 노디스크는 캐나다 바이오테크 인버사고Inversago Pharma를 인수했다. 식욕 조절과 심장대사 경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카비노이드(CB1) 수용체를 개발하는 곳이다. 노보 노디스크는 CB1을 비만 관련 합병증 치료제로 개발할 계획이다. 이어 심장 대사 질환 연구에 강점이 있는 덴마크의 엠바크Embark Biotech를 추가로 인수했다.
일라이 릴리는 마운자로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생산시설의 추가 확장 계획을 발표했다. 아직 규제 당국의 승인이 떨어지기 전이지만 급증한 수요를 반영한 결정이다. 또한 비만 치료 분야를 강화하기 위해 최근 미국 버사니스 바이오Versanis Bio를 인수했다. 버사니스는 비마그루맙bimagrumab 관련 기술을 보유한 곳이다. 위고비나 마운자로와 같은 GLP-1 계열 약물에서 나타나는 흔한 부작용 중 하나가 근 손실인데, 비나그루맙은 이를 보완할 후보로 꼽히는 물질이다. 일라이 릴리는 비마그루밥이 체지방량은 줄이면서 근 손실은 막는 보다 개선된 치료 요법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비마그루맙은 경쟁 상대인 위고비와 병용 투여 방식으로 임상을 진행하고 있는데 비만 치료제를 둘러싼 노보 노디스크와 일라이 릴리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 잘 보여 준다.
탁월한 치료 효능을 나타내는 비만 치료제의 등장으로 미국 다이어트 산업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예컨대 헬스 클럽 같은 곳은 경영 위기에 처했다. 싫든 좋든 다이어트 프로그램에서 비만 치료제를 함께 사용하는 방향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확장해야 한다. 근 손실을 최소화하는 프로그램 개발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근 손실 부작용마저 개선한 비만 치료제까지 개발되면, 미국 다이어트 관련 업체는 사실상 폐업 위기에 내몰릴 수도 있다.
위고비 열풍에 국내 비만 치료제 개발사의 주가도 큰 폭으로 뛰었다. 국내 업체 중 가장 앞선 곳은 한미약품이다. 2023년 7월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에 역시 GLP-1 계열인 에페글레나타이드의 3상 임상 시험 계획(IND)을 제출했고, 10월 승인을 받았다.
에페글레나타이드는 2015년 글로벌 빅파마 사노피와 최대 5조 원에 달하는 기술 수출 계약을 맺었던 후보 물질이다. 이후 사노피는 전 세계에서 다섯 건의 글로벌 임상을 진행했다. 그런데 단계별로 계약을 취소하더니 2020년 6월엔 최종적으로 후보 물질을 반납했다. 한미약품 입장에선 큰 타격이었다.
당시 꽤 논란이 있었다. 3상 진행 중에 후보 물질을 반납한 것인 데다 에페글레나타이드의 유효성과 안전성엔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신약 개발이 실패할 것으로 보고 돌려준 게 아니란 뜻이다. 실제로 사노피는 반납 1년 뒤인 2021년 6월 미국당뇨병학회(ADA)에서 에페글레나타이드의 잠재력을 설명하기도 했다.
당시엔 사노피가 연구 개발(R&D) 방향을 항암제로 명확하게 틀면서 당뇨 쪽을 정리했다는 관측에 힘이 실렸다. 어찌 됐건 한미약품 입장에선 유학 보낸 자녀가 공부를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돌아온 것과 같은 악재였다. 그러다 절치부심한 한미약품이 에페글레나타이드를 다시 비만 치료제로 개발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일단 사노피의 임상에서 혈당을 낮추고, 체중을 줄이는 효과를 확인한 만큼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다. 한미약품은 일단 한국인에게 가장 적합한 치료제로 개발하겠다는 구상이다. 앞선 GLP-1 계열 치료제는 WHO의 비만 기준인 BMI 30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사실 고도 비만 환자는 한국 등 아시아보다는 미국 등 서구에 훨씬 많다. 사노피는 한국질병관리청의 비만 기준인 BMI 25를 적용했다. 우리 상황에 맞는 약을 개발하기로 한 셈이다.
한국인의 췌장 크기가 서양인보다 작고, 인슐린 분비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도 고려했다. 이에 맞춰 약물의 강도나 부작용 위험 등을 조절하려는 시도다. 기존 GLP-1 계열 치료제를 보면 임상 3상에 대략 1년 반 정도가 걸렸다. 이르면 2026년, 한국형 비만 치료제가 등장할 수 있다는 의미다. 국내에서 만드니까 한 달에 최소 100만 원 이상 드는 위고비나 마운자로보다 가격 또한 훨씬 저렴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동아에스티는 비만 치료제 신약 후보 물질의 글로벌 1상 IND를 제출했다. 대원제약은 붙이는 형태, 일동제약은 먹는 형태의 치료제를 개발 중이다. 모두 전 임상 단계에서는 효능을 확인한 터라 역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처럼 비만 치료제 시장은 100조 원이 넘는 거대 시장을 향해 가고 있다. 노보 노디스크와 일라이 릴리는 위고비와 마운자로라는 걸출한 제품의 경쟁력 강화와 함께 치료 범위 확장에 전력을 집중한다. 추격자를 압도적 효능과 안전성으로 확실하게 뿌리치겠다는 전략이다. 앞으로는 GLP-1 계열 비만 치료제의 부작용을 완화하는 병용 요법 약물이나 비만 합병증을 치료하는 기술, 치료 과정에서 환자를 조금 더 편하게 만드는 기술 등에 초점이 맞춰질 전망이다. 이런 흐름을 잘 활용하면 국내 바이오테크에도 기회가 열려 있다.
암 ; 불치병이 아니다
항체 치료제, ADC의 가능성
대부분 국가에서 암은 사망 원인 1위에 올라있다. 환자 수가 많은데 치료 난이도는 높으니 당연한 결과다. 앞으로도 암 환자는 계속 증가한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2055년 전 세계 신규 암 발병은 2022년보다 77퍼센트 늘어난 3500만 건에 이른다. 검진 자체가 증가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흡연이나 음주, 대기 오염 같은 위험 요인에 노출되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나는 게 핵심 요인이다. 암을 치료하려는 처절한 도전이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확실한 길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암 정복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독감 바이러스를 배양한 뒤 특정 약물을 주입하면 바이러스는 활동을 멈춘다. 이렇게 사멸한 바이러스는 인체에 주입해도 독감에 걸리지 않는다. 대신 좋은 기능을 한다. 외부에서 들어온 적에 대응해 항체(Antibody)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번 생성된 항체는 이후 실제 바이러스가 침투했을 때 대응하는 역할을 한다. 독감 예방 주사의 원리다.
코로나19를 경험하면서 부쩍 항체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됐다. 일상에서 “몸에 항체가 있다” 혹은 “항체가 만들어졌다”는 말을 쉽게 쓴다. 항체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항원(Antigen)에 대항하기 위해 면역 세포에서 만든 물질이다. 항체는 항원에 결합해 항원의 활동을 차단한다.
화학 의약품보다 항체 의약품을 선호하는 이유는 치료 효과가 좋으면서도 부작용이 적기 때문이다. 이는 특정 항원과만 결합하는 항체의 특성 때문이다. A라는 항원에는 반드시 A라는 항체만이 결합하는 식이다. 이런 항체의 특성을 이용한 게 항체 치료제다. 의약품 시장의 주력은 여전히 화학 물질을 조합한 합성 의약품이지만, 생물에서 유래한 물질을 이용해 만드는 바이오 의약품 시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항체 치료제가 그 대표 주자인데 주 목표는 암 정복이다.
항체 치료제는 어떻게 만들까. 바이러스 같은 외부 물질이 침투하면 항체가 생성된다. 항체 치료제는 이 중 가장 효과적으로 항원에 대항하는 항체를 골라서 만든다. 초기에는 동물 면역계를 이용한 단클론항체(Monoclonal antibody) 제작 기술이 널리 사용됐다. 현재 승인된 항체 치료제 대부분이 단클론항체인 만큼 우선 그 의미를 꼭 이해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단클론항체는 한 종류의 모두 똑같은 항체란 의미다. 다른 항체가 섞여 있지 않은 똑같은 항체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항체 치료제를 만들기 위한 첫 과정으로 항원을 동물에 주입하면 동물의 면역 세포인 B세포는 항원을 감지하고, 항체를 생산한다. 그런데 수많은 B세포는 각자 항원의 다른 에피토프(항체가 항원을 인지하는 항원의 일부)와 결합하는 항체를 만들게 된다.
하나의 항원에는 항체가 인지할 수 있는 부분이 수없이 많다. 모든 B세포는 저마다 항원의 다른 부분을 인식하는 다양한 항체를 생산한다. 외부의 공격을 철저히 막아 내기 위해 우리 몸이 오랜 시간 축적한 방식이다.
예컨대 항원을 인지한 B세포를 골수암세포와 융합하면 두 가지 세포의 속성을 갖게 된다. 이후 암세포처럼 계속 증식하면서 항체를 생산하는 잡종 세포(골수암 B세포)가 된다. 이 잡종 세포를 항체별로 각각 분리해 배양하면 항체A·항체B·항체C와 같이 다양한 단클론항체를 생산할 수 있다. 즉, 항원의 같은 에피토프와 결합하는 동일한 단클론항체가 만들어진 셈이다.
그런데 동물의 B세포에서 생산된 단클론항체 치료제는 인간의 면역 체계에선 항원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다. 동물의 유전 정보가 포함되면 우리 면역계를 자극하고, 이에 대응하는 항체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그러면 결국 치료제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화 항체 혹은 완전 인간 항체 개발을 위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효과적인 인간 항체를 개발하기 위해 항원과 항체의 여러 결합 정보를 한곳에 모아 놓은 것이 항체 라이브러리다. 다양한 기전의 항체로 이뤄진 항체 은행과 같다. 이 라이브러리를 활용해 항원의 특정 부위를 공격하는 최적의 항체를 찾아내는 것이다. 만일 어떤 암 항원의 유전 정보가 밝혀지게 되면 항체 라이브러리를 통해 비교적 빨리 맞춤형 항체를 개발할 수 있다. 라이브러리의 다양성이 신약을 개발하는 제약사의 핵심 경쟁력인 셈이다.
항원은 단백질이다. 수많은 아미노산이 선형으로 연결돼 매우 복잡한 3차원 구조를 형성한다. 최적의 항체를 선별하는 작업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의미다. 최근에는 단백질의 구조를 밝히는 구조생물학 연구에 인공지능(AI)을 활용해 큰 성과를 보이고 있다.
항원을 정확히 찾아가는 하이브리드 항체 기술인 항체-약물 접합체(Antibody-Drug Conjugate·ADC)도 최근 신약 개발 트렌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아스트라제네카·길리어드 같은 글로벌 빅파마(대형 제약사)가 앞다퉈 뛰어들고 있다.
2023년 유럽종양학회(ESMO)에선 키트루다Keytruda와 파드세브(Padcev·아스텔라스와 씨젠이 개발한 ADC 치료제) 병용 요법으로 요로상피암 환자를 치료하는 임상 3상 결과가 발표됐다. 전체 생존 기간 중앙값(median Overall Survival·mOS)이 표준 요법 대비 두 배나 증가했다. 머크는 이 시점에 맞춰 본격적인 ADC 투자를 선언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또다른 빅파마 애브비도 이뮤노젠ImmunoGen을 101억 달러에 인수하며 ADC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뮤노젠은 백금저항성 난소암 ADC 치료제 엘라히어Elahere로 미국 식품의약국로부터 가속 승인을 받아 판매 중이다. 애브비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면역 항암제 휴미라Humira의 제조사다. 미래 먹거리로 ADC를 택한 셈이다. 또, 화이자도 이 분야 강자인 시젠Seagen 인수로 참전을 선언했다. 시장 조사 기관인 글로벌데이터에 따르면 2029년 글로벌 ADC 시장은 연간 360억 달러(48조 원) 규모로 커질 전망이다.
일명 유도 미사일 항암제로 불리는 ADC는 항체와 약물이 결합한 구조다. 항체는 ADC를 공격하고자 하는 목표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목표에 도달하면 항체와 약물을 화학적으로 연결하고 있던 링커가 특정 조건하에서 분리된다. 그러면 약물이 목표를 공격하는 원리다. 예를 들어 암세포 치료제로 개발된 ADC는 혈관을 타고 수많은 정상 세포 사이에 숨어 있는 암세포를 정확히 찾아가 탑재된 약물로 사멸한다. 유도 미사일이라 불릴 만하다.
ADC가 시장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일본 제약사 다이이치산교와 영국 아스트라제네카가 공동 개발해 상업화에 성공한 엔허투(트라스트주맙–데룩스테칸)가 유방암 치료에서 뛰어난 효과를 증명하면서다. 이를 바탕으로 2023년 상반기에 전년 대비 146퍼센트 성장한 6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여기서 트라스트주맙은 항체, 데룩스테칸은 암을 공격하는 약물이다. 항체인 트라스트주맙이 타깃인 암세포 표면에 발현된 HER2(인간 상피 성장인자 수용체2)를 찾아가 결합하면 세포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고, 세포질에서 ADC의 링커가 풀리며 데룩스테칸이 암세포를 공격하는 방식이다.
아이디어는 비교적 간단하지만 항체와 약물, 링커 각각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이 셋이 조화롭게 움직여야 한다. 무엇보다 항체의 특정 부위에 링커를 접합해 특정 환경에서만 약물을 방출하는 안정적인 플랫폼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항체의 변형을 최소화하고,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다.
먼저, 항체는 전달체로서 기능한다. 다양한 항체에 약물을 결합하면 원하는 곳으로 약물을 보낼 수 있어 보다 강력한 치료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항체의 역할에 대한 인식 변화는 항체 링커 플랫폼의 다양한 응용을 가능하게 만든다. 예컨대 이중 항체를 사용할 수 있다. 미국 빅파마 BMS는 중국계 바이오테크 시스트이뮨SystImmune과 84억 달러의 규모의 ADC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시스트이뮨은 EGFR·HER3(이중 항체)와 제3세대 페이로드(세포 독성 약물)를 적용한 ADC 플랫폼을 보유하고 있다. 두 개의 항원을 타깃할 수 있어 단일 항체 대비 치료 효과가 더 좋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약물의 다양화 또한 화두다. ADC에서 약물은 암세포를 파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재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약물은 두 가지다. 암세포 미세 소관(세포 모양을 유지하는 골격 구조)의 성장을 교란시키는 튜블린 억제제(Tubulin inhibitor)와 암세포의 DNA를 손상시키는 PBD(피롤로벤조디아제핀)·Dxd(데룩스테칸) 등이다.
최근엔 ADC 약물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단백질 분해제인 TPD가 새로운 ADC 약물로 개발되는가 하면 방사성 물질을 항체에 연결하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얼마 전 머크는 현재 보유하고 있는 ADC 기술과 바이오테크 C4 테라퓨틱스(C4 Therapeutics)의 TPD 기술을 결합해 분해제-항체 접합체(DAC)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DAC의 원리는 ADC와 같다. DAC의 항체가 암세포를 찾아간 후 약물인 TPD가 항원 단백질을 분해하는 원리다.
만약 목표에 도착하기 전에, 즉 항체와 약물이 분리되면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혈중에서는 단단히 결합력을 유지하다가 정확한 장소에서 약물이 분리되는 링커 기술 또한 중요한 이유다. 혹시 ‘배달 사고’로 조기에 약물이 방출되더라도 비활성 상태를 유지해 위험을 줄이는 톡신 플랫폼도 필요하다. 약물의 경우 독성이 강한 물질일수록 치료 효과는 높지만, 부작용의 위험 또한 증가한다. ADC 돌풍을 일으킨 엔허투도 간질성 폐 질환 부작용 가능성이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후발 주자에게는 기회일 수 있다.
단기적으로 뚜렷한 기술 발전을 이룬 덕에 ADC는 비만치료제와 더불어 바이오 업계의 최대 화두로 우뚝 섰다. 다양한 약물을 적소에 전달하는 DDS(Drug Delivery System) 플랫폼은 그동안 발전이 가장 더딘 분야 중 하나였는데 ADC가 하나의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한 제약 회사가 약물과 링커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검증된 항체까지 보유한 경우는 드물다. 여러 제약사 간 협업이 활발해지면 신약 개발 속도는 더욱 빨라질 수 있다. ADC의 성장세를 미풍으로 단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또 다른 항체 응용 치료제로는 이중 항체 치료제가 있다. 하나의 항원에만 결합하는 항체 치료제와는 달리, 이중 항체는 두 개의 항원을 인식해 동시에 결합하는 항체 치료제다. 단일 항체 대비 치료 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지면서 최근 활발히 개발되고 있다. 예를 들어 한쪽 부위로는 T세포와 결합하고, 다른 한쪽은 암세포와 결합해 살상 효과를 극대화하는 식이다.
이중 항체 치료제는 2022년 12월 글로벌 제약사 로슈의 습성 황반변성 치료제 바비스모가 미국 식품의약국의 승인을 받으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망막의 중앙부에 위치한 황반은 시각 세포가 밀집한 중심 기관이다. 어떤 이유로 황반에 변형이 생기면 사물이 구부러져 보이는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노화가 주원인이라 60세 이상에게 흔히 발병하고, 전 세계적으로 환자 수도 매우 많다.
아일리아 등 기존 주사 치료제가 있지만 바비스모는 치료 횟수가 적다는 게 강점이다. 출시한 지 1년도 안 됐지만, 올해 2분기에만 매출 1조 원을 돌파하며 ‘블록버스터’ 타이틀을 얻었다. 이중 항체는 두 개의 결합 부위를 갖는다는 공통성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형태로 개발되고 있다. Y자 항체의 말단 부분으로도 항원과 결합하는 형태, 몸통을 제거한 한쪽 가변 부위 두 개와 결합하는 V자 형태 등 여러 연구가 진행 중이다.
관련 국내 기업의 기술력과 가치도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레고켐바이오는 2022년 12월 빅파마 암젠과 최대 1조 6000억 원 규모의 기술 이전 계약을 체결했다. 암젠이 레고켐바이오의 ADC 플랫폼 기술을 이전받아 치료제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다. 암젠과의 계약은 레고켐바이오가 ADC와 관련해 기술을 수출한 열 번째 사례다. 적어도 국내에선 이 정도의 성공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정확히 1년 후인 2023년 12월 레고켐바이오는 또 다시 국내 제약 바이오 기업 중 단일 신약 후보 물질로는 최대 규모인 2조 2000억 원 규모의 기술 수출 계약을 얀센(존슨앤존슨의 자회사)과 체결했다. 글로벌 기술 경쟁력을 확실히 입증한 셈이다.
암 정복의 또 다른 가능성: CAR-T 면역 세포 치료제
덥거나 추워지면 인간의 신체는 외부 기온에 맞춰 반응해 정상 체온으로 되돌린다. 이와 같이, 우리 몸이 생존에 최적의 조건을 유지하는 경향을 항상성이라고 한다. 이런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면 다양한 조절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적이 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인체에는 외부에서 유래한 물질이나 암세포가 나타났을 때 대응하는 면역 체계가 존재한다.
면역은 우리 몸이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 시스템이다. 우리 몸에 속하는 ‘자기’와 이물질로 취급하는 ‘비非자기’를 구별하고, 만일 비자기로 확인되면 가차 없이 공격해 제거하는 방식이다. 면역 체계의 핵심 전력은 몸에 침입한 바이러스나 암세포와 같은 병원체를 공격하는 면역 세포다. 앞서 살펴본 B세포를 비롯해 T세포, NK세포, 수지상 세포 등이 대표적이다.
크게는 선천적·후천적 면역 세포로 구분할 수 있다. 선천적 면역 세포인 NK(Natural Killer·자연 살상)세포는 이름처럼 침입한 바이러스나 암세포를 만나면 즉시 활성화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특정 타깃만 공격하는 게 아니라 이물질이라고 판단되면 가리지 않고 공격한다. 반면에 후천적 면역 세포는 공격 대상을 특정한다. T세포가 그렇다. 침입자에 대해 학습한 뒤 이 타깃(표적)만 제거한다. 한 번 경험한 침입자는 기억해 뒀다가 다시 침입했을 땐 학습 과정 없이 인식하고, 공격한다.
현재 항암 면역 세포 치료제로 가장 활발히 개발 중인 건 T세포다. T세포는 종류와 역할에 따라 세포 독성 T세포, 도움 T세포, 조절 T세포, 자연 살상 T세포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 세포 독성 T세포는 바이러스나 암세포 공격에 특화된 전사다. 직접 항원을 찾아내서 파괴하거나 사이토카인Cytokine을 활용해 다른 세포의 활성과 기능을 조절한다. 사이토카인은 면역 세포에서 분비되는 면역 조절 인자로, 암세포와의 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평소 조용하던 T세포는 정찰병 역할을 하는 항원제시세포(APC·B세포나 수지상 세포)를 만난 뒤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APC는 인체의 이물질인 항원을 감지한 뒤 항원 단백질(펩타이드) 조각을 주조직 적합성 복합체1(MHC1)와 결합한 형태로 T세포에 보여 준다. 이 펩타이드-MHC1 조합이 세포의 표면에 위치하면 안테나 역할을 하는 T세포 수용체(TCR)는 평소와 다르다는 걸 인지한다. 그런 뒤 적군이라고 판단하면 T세포는 상대를 공격해 없앤다.
복잡하지만 효과적인 이 시스템이 늘 작동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마을에 흉악범이 잠입했다는 제보가 들어와서 경찰이 순찰을 강화했다고 하자. 마침내 흉악범이 검문에 걸렸는데 신분증이 없다고 했다. 범인이 아니라고 판단한 경찰이 그냥 보내 줬다면 그건 정말 큰 실수다.
펩타이드-MHC1 조합으로 암세포를 알아차리는데, 만일 암세포가 MHC1을 암 표면에서 제거해 버리면 T세포는 암세포를 인식할 수 없다. 당연히 공격도 못 한다. 종양이 가진 회피 기전이다. T세포가 아무리 강력한 독성 무기를 갖췄다 해도 적을 알아채지 못하고 공격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초기에는 T세포가 암세포의 항원을 인지하고 공격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암세포의 회피 기술도 향상된다. T세포의 허점을 암세포도 알아차린 것이다.
앞선 흉악범 사례처럼 암세포의 회피 전술이 통한다는 건 T세포 수용체가 안테나 역할(경찰 역할)을 제대로 못 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기존 T세포 수용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항원을 인식하는 고성능 안테나를 고안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CAR-T(키메릭 항원 수용체 T세포) 치료제다. 쉽게 말해 T세포에 CAR라는 새로운 수용체를 장착한 개념이다.
CAR는 B세포에서 분리한 항체의 유전자를 세포질 내 신호 전달 유전자와 결합해 만든다. 기존 T세포의 복잡한 활성 과정을 생략하고, 다양한 항체를 생산하는 B세포의 장점을 활용해 특정 종양을 직접 인식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표적을 찾아가 결합하는 항체의 독특한 특성을 세포 치료제에서 활용한 것이다.
CAR-T의 작동 원리는 다음과 같다. 먼저 환자의 혈액을 채취해 세포 독성 T세포를 분리한다. 그다음 CAR 유전자를 세포 독성 T세포와 결합하면 고성능 안테나를 장착한 CAR-T가 완성된다. 이 CAR-T를 대량으로 배양한 다음 다시 환자에게 넣어 준다. 특정 항원을 인식하도록 설계된 CAR-T는 해당 암세포만을 골라서 파괴한다. 신분증이 없다는 암세포의 잔꾀도 더는 통하지 않는 셈이다.
미국 식품의약국은 2019년 최초의 CAR-T 치료제인 킴리아Kymriah를 승인했다. B림프구 종양을 타깃하는 CAR-T로, 암세포 표면에 발현된 단백질(CD19)의 특정 부위를 인식하도록 설계된 치료제다. 킴리아는 기존에 5년 생존율이 10퍼센트에 불과했던 B세포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환자의 치료 환경을 획기적으로 바꿔 놓았다. 킴리아로 치료한 환자의 완전 관해율(CR·암세포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 82퍼센트를 나타냈고, 이 환자가 재발 없이 5년간 생존할 확률도 44퍼센트에 달한다. 혈액암 치료의 지형을 바꾼 것으로 평가할 만한 결과다.
CAR-T는 저마다 인식하는 특정 단백질의 이름을 앞에 넣어 CD19 CAR-T, BCMA(B세포 성숙 항원) CAR-T, HER2 CAR-T 등으로 부른다. 지금까지 상업화에 성공한 CAR-T는 CD19 계열로 킴리아·예스카타·브레얀지·테카투스, BCMA 계열로 아벡마·카빅티 등이 있다. 모두 혈액암 치료제로 환자의 T세포를 채취해 만들고, 한 번 투여로 끝나는 ‘원샷’ 치료제 형태다.
혈액암은 정확한 원인을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다양한 치료제가 개발될수록 환자의 희망도 커진다. 다만 CAR-T는 놀라운 치료 효과만큼 가격 또한 놀랍다. 킴리아의 경우 국내 기준 3억 원 이상이다. 환자 맞춤형으로 만드는 만큼 비싸고, 기간도 꽤 오래 걸린다.
부작용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사이토카인 신드롬 (CRS·Cytokine Release Syndrome)이 대표적이다. T세포 치료제를 주입한 뒤 면역 세포가 활성화되면서 사이토카인이 과분비 되는 증상을 말한다. 사이토카인은 암세포와 싸우기 위해 면역 세포가 내는 물질이지만, 과잉 상태가 되면 다른 장기까지 공격할 수 있다. CAR-T 치료 때 70퍼센트 이상의 환자에게서 발생하는데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다.
확장성 역시 고민거리다. 아직 CAR-T는 혈액암 치료에 한정돼 있다. 고형암(세포로 이뤄진 단단한 덩어리 형태의 종양을 총칭)으로 연구가 확장되고 있지만 고형암은 종양 미세환경(TME, 암을 둘러싼 주변 미세 물질)이 혈액암보다 훨씬 복잡하다. 그래서 다른 치료제와의 병용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NK세포
T세포가 ‘자기’와 ‘비자기’를 구분해 적을 공격하는 것과 달리 NK세포는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를 기준으로 공격 대상을 선별하는 선천적 면역 세포다. 쉽게 말해 신분증 제시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그 자체를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체포하는 식이다.
NK세포의 최대 장점은 특정 항원이 필요 없다는 점이다. 별도의 유전자 조작 없이 타인에게 사용할 수 있는 동종 세포 치료제 개발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당연히 치료 비용도 훨씬 저렴하다. 효과만 확인하면 훨씬 낮은 가격으로 상용화할 수 있다. 타인의 NK세포를 사용할 수 있고, CAR-T와 비교할 때 부작용도 훨씬 적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NK세포 치료제는 없다. 혈액 속에 소량의 비율로 존재하고, 증식도 덜 한다. 수명 또한 짧다. 대량으로 배양하고, 장기간 유지하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최근엔 CAR-T와 NK세포의 장점을 결합한 CAR-NK 연구도 진행 중이다. 일본 제약사인 다케다가 가장 앞서 있는데 킴리아처럼 CD19를 타깃으로 한 TAK-007로 글로벌 임상 2상을 진행하고 있다.
NK세포는 최근 대형 사건을 경험하면서 투자 심리가 확 꺾였다. 2021년 미국 제약사 페이트는 글로벌 빅파마 얀센과 31억 달러(4조 원) 규모의 기술 수출 계약을 맺었다. 얀센 입장에선 페이트가 강점을 가진 유도 만능 줄기세포(iPSC·만능 줄기세포에서만 발현하는 특정 유전자를 만능성이 없는 체세포에 넣어 만능성이 있는 세포로 역분화한 세포) 기술을 활용하면 동종 유래 CAR-T와 CAR-NK 치료제 개발이 가능하다고 봤다.
NK세포 관련 계약으론 역대 최대 규모, 빅파마의 공식적인 참전이라는 점에서 시장의 기대가 컸다. 하지만 2023년 1월 두 회사의 동행은 끝났다. 임상에서 만족할 만한 데이터가 나오지 않자 얀센이 협업을 종료하기로 결정했다. 페이트가 개발하던 CAR-NK 치료제 파이프라인은 대부분 중단됐고, 회사는 대규모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한때 100억 달러에 달했던 페이트의 시가 총액은 현재 3억 달러에 불과하다.
2021~2022년과 달리 지난해엔 NK세포 관련 기술 이전 사례가 현저히 줄었다. 관련 기업의 주가도 바이오 지수 대비 하락 폭이 컸다. NK세포 국내 최강자인 지씨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iPSC에 기반을 둔 페이트와 제대혈 중심의 지씨셀은 기술이 다르고, NK세포 치료제에 대한 수요는 여전하다. 무엇보다 지씨셀은 모회사(녹십자)의 든든한 지원을 바탕으로 다양한 파이프라인을 확보하고 있다.
최근 FDA는 지씨셀의 미국 관계사 아티바가 개발 중인 제대혈(탯줄 혈액) 유래 NK세포 치료제 AB-101의 임상 1상 IND를 승인했다. 자가 면역 질환 치료제로 널리 쓰이는 리툭시맙과 병용해 효능을 강화하려는 목적이다. 자가 면역 질환 동종 NK세포 치료제로는 첫 승인이다. 기성품 형태로 개발돼 입원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암세포 표면에서 흔히 발현되는 HER2를 타깃으로 한 CAR-NK 치료제 AB-201도 2022년 1상 IND 승인을 받고, 얼마 전 임상에 착수했다. 지씨셀은 2021년 빅파마 머크와 18억 달러(2조 4000억 원) 규모의 CAR-NK 치료제 기술 이전 계약을 맺었다. 고형암 대상 CAR-NK 치료제 개발이 목표인데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엔케이맥스도 잘 알려져 있다. 불응성 육종암이나 후기 비소세포폐암 환자에게 NK세포 치료제인 SNK01과 면역 항암제로 널리 쓰이는 키트루다를 병용하는 요법이 대표적인 파이프라인이다. 머지않아 미국 임상 1상 최종 결과가 나온다. 중간 데이터에서 나왔던 만족스러운 결과가 최종적으로 확인된다면 순조롭게 2상으로 넘어갈 수 있다. 기술 수출 가능성도 커진다.
현 단계에서 면역 세포 치료제의 기본적인 개념은 CAR+면역 세포 형태다. 최근엔 CAR-대식세포(M·암세포 등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능력을 갖춘 세포), CAR-MIL(골수침윤림프구) 치료제로 아이디어가 확장하고 있다. CAR-T는 한두 개의 종양 항원을 인식하지만, MIL은 다발골수종의 여러 항원을 인식할 수 있어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다. 둘 다 연구는 초기 단계다.
mRNA 암 백신
암 치료 시장에서 최근 부쩍 관심을 모으고 있는 건 암 백신이다. 모더나Moderna와 머크(MSD)가 함께 개발하고 있는 흑색종 암 백신이 기대 이상의 효과를 입증하면서다. 백신은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체의 항원과 유사하지만 병원성이 적거나 없는 의약품을 말한다. 백신을 접종하게 되면 인체의 면역 체계는 병원체에 대한 정보를 기억해 두었다가, 병원체가 인체를 침범하게 되면 기억을 되살려 빠르게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방 접종(Vaccination)은 소를 의미하는 라틴어 Vacca에서 유래한 말이다. 소를 키우는 사람이 우두에 노출되면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착안해 사전에 우두를 접종하여 천연두를 예방하는 방법으로 쓴 게 출발점이다. 이후 파스퇴르가 자신이 개발한 광견병 예방법을 백신Vaccine이라 칭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천연두 이후 다양한 백신이 개발되면서 많은 이의 목숨을 앗아갔던 홍역 같은 전염성 질병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됐다.
최근 이런 백신의 원리를 암 예방과 치료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백신은 우리 몸의 후천성 면역을 이용하는 원리다. 한번 몸 속에 침범했던 병원체를 기억했다가 그 병원체에 감염됐을 때 기억된 정보를 이용해 빠르게 퇴치하는 것이다. 질병에 대한 일종의 가벼운 선행 학습인 셈이다. 이런 원리를 활용해 암을 특징짓는 항원을 만들어 주사한 뒤 암을 예방하거나 치료해 보자는 아이디어가 바로 암 백신이다.
암 백신은 암 특이 항원(암세포에 존재하지만 정상 세포에서는 발현하지 않는 항원을 총칭하는 말)을 암 환자에게 투여해 면역 시스템을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항원에 대한 특정 반응을 유도하는 물질을 말한다. 일단 그 목적에 따라 예방용 암 백신과 치료용 암 백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아직은 예방용 암 백신이 주요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프레시던스 리서치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글로벌 시장 규모는 91억 달러(12조 원) 정도지만 연평균 11.4퍼센트씩 성장해 2032년에는 268억 달러(35조 원)에 이를 전망이다.
접종만으로 암을 예방할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지고, 더 나아가 개인별 암 백신도 만들 수 있다는 꿈이 맞물려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암 백신 개발을 위한 투자와 각국 정부의 투자도 이를 뒷받침한다. 2023년 초 영국 정부는 암 백신 개발을 위해 251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7월에는 바이오엔텍BioNTech과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2030년까지 최대 1만 명의 환자에게 메신저 리보핵산(mRNA) 기반 암 백신을 제공하겠다는 구상이다.
암 백신은 제조 방법에 따라 재조합 암 백신, 핵산 암 백신, 수지상 세포 암 백신 등으로 나뉜다. 재조합 암 백신은 환자의 특이 항원 유전자를 편집한 다음 미생물에 넣어 미생물이 만든 부산물에서 항원 단백질을 추출하는 방식이다. 핵산 암 백신은 인간 DNA나 RNA를 이용해 우리 세포가 직접 항원을 생산하도록 유도한다. 수지상 세포 암 백신은 암 특이 항원을 추출하고 환자의 수지상 세포가 항원을 인식하도록 학습을 유도한 후 다시 환자에 주입하는 식으로 치료가 진행된다. 이렇게 주입된 수지상 세포는 환자의 휴식 T림프구를 자극하여 세포 독성 T세포로 분화시키고, B세포를 활성화하여 암세포를 사멸한다.
현재까지 전체 암 백신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 예방용 자궁경부암 백신이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자궁경부암은 여성에게 네 번째로 흔한 암으로 2020년에만 약 60만 명 이상 발병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방 접종에 의해 암을 예방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시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더 큰 관심을 끄는 건 아무래도 치료용 암 백신이다. 치료용 암 백신은 암 병력이 있는 환자의 재발 예방이나 치료를 위해 종양 항원에 특정 반응을 일으키도록 설계된 백신이다. 코로나19 mRNA 백신을 앞장서 개발했던 모더나와 바이오엔텍이 치료용 암 백신 개발에 착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머크와 모더나가 개발한 mRNA-4157은 흑색종 환자 개개인의 항원에 기반해 제작된 치료용 백신이다. mRNA 암 백신은 암세포에서 발생하는 특정 유전자 변이를 치료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일단 정상 세포엔 없는 암세포에서의 DNA 돌연변이를 찾은 뒤 이 단백질을 뽑아 항원으로 만든다. 이를 일종의 단백질 설계도인 mRNA로 제작해 넣으면 면역 세포인 T세포가 이 항원을 가진 암세포를 공격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mRNA-4157은 최대 34개의 항원을 합성하도록 설계됐다.
결과는 놀라웠다. 임상 2b상에서 157명의 고위험 흑색종 환자를 대상으로 면역 항암제 키트루다와 병용하는 테스트였는데 키트루다 단독 대비 암의 재발이나 사망 위험을 감소시키고, 심각한 부작용도 증가하지 않았다는 결과였다. 암 백신과 키트루다를 함께 사용한 환자의 2년 생존율은 77.6퍼센트로 키트루다 단독 사용 때(60퍼센트)보다 월등히 높았다.
이로써 모더나는 mRNA기술이 코로나19 백신에 한정된 기술이 아님을 증명해 보였다. 다른 암종에서도 효과를 입증해야 필요는 있지만 개인화된 암 백신이 꿈이 아님은 입증된 것이다. mRNA-4157은 현재 임상 3상에 돌입했고, 비소세포폐암과 두경부 편평상피세포암 등 다른 적응증에 대한 개발도 진행되고 있다.
치료용 암 백신은 환자 개인별로 접근해야 하기 때문에 개발의 신속성이 상업화의 선결 요건이다. 코로나19 백신 개발이 보여 줬듯이 mRNA는 다른 모달리티 대비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mRNA 기술은 설계와 생산 등을 거쳐 환자에 제공되기까지 리드타임이 가장 짧은 기술이다. 여기에 인공지능이 가세하면서 약물 설계 단계에서 유효 물질 발굴을 위한 시간은 더욱 단축됐다. 모더나는 인공지능 개발 등 디지털화에 2022년 매출의 23퍼센트에 해당하는 45억 달러를 투자했다. 효능이 뛰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항원을 빠른 시간내에 선별할 목적이었다. 아낌없는 투자를 한 결과 4~6주 만에 암 백신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고, 거대 시장을 선점할 기회도 잡았다.
모더나와 함께 치료용 암 백신의 선두 그룹을 달리고 있는 바이오엔텍은 로슈Roche의 계열사인 제넨텍Genentech과 공동으로 mRNA기반 암 백신 임상을 진행하고 있다. 개인 정밀 mRNA 암 백신 후보 물질 오토진 세부메란autogene cevumeran을 수술로 절제된 대장암의 보조 치료제로 쓰는 방안, 진행성 흑색종 1차 치료에서 키트루다와 병용하는 방안, 췌장관세포암 환자를 대상으로 면역 항암제 티센트릭과 병용하는 방안 등 다양한 임상을 진행 중이다.
바이오엔텍은 최근 세포 치료제 CAR-T(BNT211)와 mRNA 백신을 결합해 고형암을 치료하는 임상 결과도 발표했다. mRNA 백신을 환자에 투여해 효과적으로 항체를 형성함으로써 암을 공격하는 CAR-T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44명의 고형암 환자에게 네 단계에 걸쳐 백신을 투여했는데 환자 중 45퍼센트의 종양 크기가 줄어들었고, 74퍼센트의 환자에서 암이 더 이상 성장하지 않았다. 역시 놀라운 결과다.
2023년 미국임상종양학회(ASCO)에서는 암 백신 관련 임상 초록이 50여 개나 공개됐다. 향후 5년 내에 흑색종·췌장암·유방암·폐암 등 주요 고형암을 치료하는 치료용 암 백신이 규제 기관의 승인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mRNA 기반 치료용 암 백신이 타깃하는 적응증은 1위가 흑색종이고 비소세포폐암과 두경부암이 뒤를 잇는다. 보다 강력한 항암 효과를 유도하기 위해 대부분 기존 면역 항암제와 병용하는 임상을 진행하고 있다. 난치성 고형암은 환자가 매우 많지만 확실한 치료제가 없는 영역이다. 임상 결과가 좋다면 확실한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
유전자 치료제 ; 신약 개발의 열쇠
바이오 공부에서 빅파마의 움직임을 살피는 것만큼 중요한 건 신기술의 발전 과정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신약의 중심이 합성 의약품에서 바이오 의약품으로 이동한 건 이미 옛말이다. 바이오 의약품 중에서도 항체 치료제와 면역 세포 치료제가 현재 연구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핵산(유전자) 치료제의 발전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게 분명하다.
우리는 저마다 지닌 고유한 특성인 유전 물질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야 할 사명이 있다. 이 유전 물질이 바로 유전자다.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세포의 핵 속에는 2만 3000개의 유전자가 DNA(Deoxyribo Nucleic Acid)라는 저장 형태에 담겨 있다. 군데군데 색깔이 칠해져 있는 긴 끈을 상상해 보자. 긴 끈이 DNA, 끈에 칠해진 특정 색의 구간들이 유전자다.
태아로 성장하기 위한 첫 세포 속에는 엄마와 아빠로부터 물려받은 2만 3000개의 유전자가 담겨 있다. 유전자를 똑같이 복제한 뒤 세포 분열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세포는 같은 DNA와 유전자를 공유하게 된다. 이렇게 분열을 거듭해 8주가 지나면 비로소 태아가 되고, 모든 세포에는 각각 똑같은 2만 3000개의 유전자가 들어 있게 된다.
핵산 치료제를 이해하려면 대전제 성격인 중심 이론(Central dogma)을 먼저 알아야 한다. 생명체의 고유한 유전 정보는 DNA, 즉 유전자에 담겨 있고 DNA의 정보를 복사한 RNA(Ribo Nucleic Acid)라는 중간 단계를 거친다. 이후 우리 몸을 구성하는 물질을 만들거나 생리 기능을 조절하는 단백질의 형태로 최종 전달된다. 이 과정을 중심 이론이라고 한다. 단백질을 만드는 방법이 적혀 있는 원본이 DNA고, 복사한 사본이 RNA인 셈이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DNA에 담겨 있는 2만 3000개의 유전자가 mRNA(messenger RNA)로 다듬어져(전사), 최종적으로 10만 종류 이상의 단백질이 생산(번역)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백질이 제 기능을 해야 인간이 생존할 수 있다.
단백질을 우리 사회에 빗대어 표현하면 다양한 직업을 갖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과 같다. 교사나 요리사 등이 특정한 기술을 갖고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며 살아가듯, 10만 종류 이상의 단백질도 저마다 다른 모양의 3차원 구조로 합성돼 주어진 역할을 해낸다. 한마디로 단백질은 인체의 일꾼이다. 만일 단백질 생산의 원본인 DNA에 돌연변이가 생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돌연변이 DNA 정보가 전달돼 mRNA(전 단계인 pre-mRNA 포함)가 정상적으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유전 정보의 최종 목적물인 단백질도 불량품이 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질병이 생겼을 때 DNA나 DNA의 복사본인 mRNA를 제거·편집·절단·삽입하는 방식으로 치료하는 기술을 핵산 치료제라고 한다. 현재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항체 치료제는 이미 만들어진 질병 단백질을 제거하거나 기능하지 못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와 달리 핵산 치료제는 단백질이 만들어지기 전 단계에서 차단하는 게 목표다.
핵산 치료제는 크게 유전자 치료제, 유전자 편집 치료제, pre-mRNA 치료제, mRNA 백신, RNAi(RNA interference)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유전자 치료제
유전자 치료제에서도 앞서 언급한 중심 이론이 중요하다. 우리 몸에 필요한 단백질은 닭고기나 돼지고기 등 음식물을 통해 바로 얻을 수 없다. 고기를 먹고 몸 안에서 단백질을 분해해 다양한 아미노산 형태로 각 세포에 공급하면, 세포는 중심 이론에 따라 DNA로부터 전사된 mRNA를 순차적으로 번역하면서 세포 안의 다양한 아미노산을 불러들여 단백질을 합성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유전자 결함으로 근육에 쓰이는 단백질이 생산되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근육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중대한 질병을 일으키고,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다. 단백질이 합성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그 원형인 유전자가 잘못됐다는 뜻이다. 즉 유전자 돌연변이다.
이처럼 특정 단백질이 생산되지 않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해당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를 설계한 뒤, 전달체(벡터)에 넣어 전달하는 걸 유전자 치료제라 한다. 유전자 치료제는 한번 투여해 질병을 치료한다. 세포 속 핵 안으로 전달된 유전자는 평생 기능하기 때문이다.
② 유전자 가위
유전자 편집 치료제는 유전자 가위(가이드 RNA+Cas9)를 사용한다.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하면 엉뚱한 mRNA가 생산되고, 그러면 전혀 다른 모양의 단백질로 번역된다. 이렇게 변형된 단백질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서로 엉켜 중대한 질병의 원인이 된다.
치료제로서 인체의 조직에 전달된 유전자 가위는 가이드 RNA의 인도에 따라 세포의 핵으로 들어가 타깃으로 하는 유전자 부위와 결합한 후 Cas9 단백질로 유전자 두 줄을 절단한다. 절단된 유전자는 더는 기능할 수 없게 돼 변성된 단백질 생산을 멈추게 된다.
2023년 12월 최근 미국의 크리스퍼 테라퓨틱스CRISPR Therapeutics와 버텍스Vertex가 특정 유전 질환인 겸상 적혈구 빈혈, 지중해성 빈혈 등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한 사상 첫 유전자 편집 치료제 엑사셀Exa-cel이 현재 미국 식품의약국의 승인을 받았다. 이 분야에서 FDA로부터 합격증을 받은 건 엑사셀이 처음이다. 시장 조사 기관 BCC리서치의 보고서에 따르면 유전자 편집 치료제 시장 규모는 2022년 33억 달러에서 2027년 92억 달러로 성장한다. 연평균 22.3퍼센트씩 가파르게 성장하는 시장에서 엑사셀 승인은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만한 사건이다. 향후 망막색소변성증, B세포 림프종, 다발성 골수종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연구의 속도를 낼 전망이다.
③ pre-mRNA 치료제
pre-mRNA 단계에서의 문제를 교정하는 방법도 있다. DNA에서 Pre-mRNA로 진행될 때는 유전자의 모든 정보를 포함하게 된다. 단백질 합성에 꼭 필요한 엑손exon도 복사되지만, 필요 없는 인트론intron도 따라온다. 엑손만으로 이루어진 mRNA로 만들기 위해 인트론을 제거하는 과정을 스플라이싱splicing이라고 한다. 그런데 스플라이싱 과정에서도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일종의 배달 사고다. 원형인 DNA 유전 정보를 중간 단계에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잘못된 단백질을 생산한다. Pre-mRNA 단계의 스플라이싱 오류를 조절하는 약물이 바로 ASO(antisense oligonucleotide)다.
④ mRNA 백신
코로나19 확산 이후 우리에게 익숙해진 mRNA 백신도 있다. 대부분이 mRNA 백신을 접종한 경험이 있을 텐데, 이 백신은 우리 몸속에서 어떻게 기능하는 것일까.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항체를 부모에게 받지 못했으니, 인공적으로 만든 항체를 넣어 우리 면역 체계가 대비하도록 만드는 원리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캡시드capsid라는 외투 속에 유전 물질을 담고 있는 단순한 형태다. 이 캡시드에 돌기 형태로 발현된 단백질의 원형 DNA를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설계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DNA는 중심 원리에 의해 mRNA를 전사하게 되는데 이것이 코로나19 mRNA 백신이다. mRNA 백신 주사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항원의 등장을 의미한다. 새 단백질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면역 세포를 자극하고, 항체를 만드는 동시에 전투에 능한 T세포를 활성화한다. 앞서 언급한 키트루다와 같은 mRNA 암 백신은 요즘 가장 높은 관심을 받는 기술이다. 개발 속도에서 비교 우위를 갖는 만큼, 다른 모달리티와는 차별화한 기동력을 무기로 mRNA 기술은 다양한 백신으로 개발될 가능성이 높다.
⑤ RNAi
마지막 핵산 치료제는 RNAi 기술이다. 다시 중심 이론을 떠올려 보자. DNA, 즉 유전자는 mRNA로 다듬어진 뒤 단백질로 번역된다. 만일 원형인 DNA에 변이가 생긴다면 처음부터 잘못된 유전 정보가 발현돼 결국 제 기능을 못 하는 단백질로 합성된다. 역시 심각한 질병의 원인이다.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기술이 RNAi이다.
타깃 mRNA와 결합하도록 설계된 RNAi는 병원 mRNA를 제거해 단백질 생산을 조절할 수 있다. 유전자 가위는 핵 속의 유전자를 직접 다루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위험이 크지만 RNAi는 DNA의 복사본인 mRNA를 조절하므로 단백질 생산을 억제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이론상 모든 단백질을 타깃할 수 있어 적용 분야도 넓다. 미국 앨나일람 파마슈티컬즈Alnylam Pharmaceuticals가 여러 희귀 질환 RNAi 치료제를 상업화했고, 만성 질환 치료제로도 적응증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올릭스는 RNA 간섭 기술로 잘 알려진 바이오테크다. 보통의 약은 이미 만들어진 단백질의 활동을 억제하거나 없애는 게 목적이지만 RNAi는 단백질이 만들어지기 전 단계에서 mRNA를 제거하는 걸 말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게 작은 간섭 RNA(small interfering RNA·siRNA)다. siRNA는 세포 내의 RNA 간섭 현상을 통해 mRNA를 분해하고, 이를 통해 표적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한다.
다만 siRNA를 원하는 세포로 보내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멀쩡한 유전자를 억제하는 등 부작용도 있는데 올릭스는 이를 변형한 비대칭 siRNA(asiRNA)로 기존 siRNA의 여러 한계를 개선했다. RNAi 방식은 이론상 모든 단백질을 타깃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질병에 적용할 수 있다. 올릭스 역시 규모 대비 폭넓은 파이프라인을 보유한 게 강점이다.
AI 신약 ; 엔비디아의 AI 바이오 전략
“15년 전 인공지능 컴퓨팅 혁명을 믿었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죠. 오늘 결과는 여러분들이 보시는 대로입니다. 신약 개발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AI를 활용한 생명공학 기술은 이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망한 산업 중 하나가 될 겁니다.”
지난 1월 엔비디아와 바이오 AI 스타트업 리커전이 공동 주최한 비공개 만찬에 등장한 젠슨 황 엔비디아 창업자가 한 말이다. 이 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현재 엔비디아의 압도적인 위상 때문이다. 엔비디아는 전 세계 그래픽 처리 장치(GPU) 시장의 90퍼센트를 독점 중인 이 분야 최강자다. PC와 모바일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사세도 커졌지만 진짜 날개를 단 건 최근의 생성형 AI 열풍 덕이다. GPU는 원래 게임용으로 개발된 것이지만 지금은 AI의 학습과 추론을 위한 필수 칩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 2~3년 사이 빅테크를 중심으로 AI 설비 투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런데 이 수요를 감당할 능력을 갖춘 건 사실상 엔비디아가 유일하다. 시장은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엔비디아 주가는 2024년 2월 820달러를 돌파했는데, 2023년 1월엔 150달러 수준이었다. 이 정도 덩치의 회사 주가가 불과 1년 사이 다섯 배 이상 뛴 것이다. 반도체 업체의 시가 총액이 1조 달러를 넘어선 것도 엔비디아가 최초였는데 이젠 2조 달러까지 넘어섰다. 단기간 급상승에 대한 피로감이 없지 않으나 골드만삭스나 뱅크오브아메리카 같은 유력 투자은행은 앞다퉈 목표 주가를 끌어올리고 있다. 엔비다아 주가 급등은 과열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그 성장성에 초점을 맞춘 셈이다.
AI 시장에서 가장 앞서 있는 빅테크 수장이 꼽은 다음 목표가 바로 AI발發 생명 공학 혁신인 것이다. 저 발언의 장소도 의미가 컸다. 당시 젠슨 황은 JP모건 헬스 케어 콘퍼런스(JPMHC)에 참석하려 샌프란시스코를 찾았는데 같은 시각 라스베이거스에선 세계 최대 테크 전시회인 CES 2024가 열리고 있었다. 현재가 아닌 미래를 말하려 온 셈인데 그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AI와 바이오의 만남은 무엇보다 신약 개발 기간에 큰 영향을 미친다. 현재까지 신약 개발이 로또에 비견되는 건 꼭 알맞은 약물이나 기술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다. 후보 물질을 선별하고, 효능과 부작용을 검증해 가는 과정이 매우 지난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10년 이상 쏟아붓고도 최종 관문(승인)을 통과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세포 수준에서 반응을 학습한 AI가 나타나면 신약 후보 물질 탐색은 물론, 임상까지 걸리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신약 개발에 드는 엄청난 비용을 줄이는 건 물론이고, 동시에 더 많은 검증과 도전을 진행할 수 있어 효율성도 높아진다. 신약 개발의 핵심이라 할 만한 데이터 분석과 시뮬레이션이야말로 AI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의료 데이터의 90퍼센트 이상은 이미지 형태로 저장돼 있는데 그래픽 처리 기술에 강한 엔비디아가 이 분야에 진출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사실 젠슨 황의 구상은 단순히 신약 개발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DNA 구조와 수술실 데이터까지 모두 AI와 만나게 될 것이라 전망했는데 이는 생명체의 모든 활동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 하는 게 가능하다는 자신감이다.
같은 날 엔비디아는 AI 신약 개발 플랫폼 바이오니모BioNeMo를 공개했다. 쉽게 설명하면 AI에 인간 유전자와 단백질 구조·세포 반응을 학습시키는 형태다. 빠르면 1~2년 내 바이오니모의 구체적인 적용 사례가 나올 전망이다. 이와 맞물려 자금력이 출중한 엔비디아는 최근 비상장 바이오테크에 과감하게 투자하고 있다. 대부분 AI와 연계한 신약 개발 기술을 보유한 곳이다. 예컨대 엔비디아가 2023년 7월 5000만 달러를 투자한 리커전은 현미경으로 본 세포 이미지에서 유용한 특징을 AI로 추출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특정 후보 약물에 대한 세포의 반응을 빠르게 학습할 수 있다는 의미다.
엔비디아뿐만 아니다. AI를 활용하려는 글로벌 빅파마와 빅테크의 합종연횡은 앞으로 바이오 투자자가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할 핵심 포인트 중 하나다. 구글의 움직임만 봐도 그렇다. 구글은 딥마인드 등 자회사를 통해 AI를 활용한 생명 공학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알파고의 아버지 데미스 하사비스 딥마인드 CEO는 예전 이세돌과의 대국으로 AI의 상업화 가능성을 확인한 후 미래 먹거리로 바이오를 꼽았다.
연구 개발에 힘을 쏟던 하사비스는 2021년 신약 개발에 매진할 전문업체 아이소모픽Isomophic을 설립하고 직접 CEO를 맡았다. 아이소모픽은 최근 일라이 릴리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최대 17억 달러에 이르는 마일스톤을 받는 계약이다. 비만 치료제로 세계 1위 제약 회사에 등극한 일라이 릴리의 선택을 받은 셈이다. 아이소모픽은 또다른 빅파마 노바티스와도 로열티를 제외하고 12억 달러를 받는 계약을 맺었다. AI 활용법에 대한 빅파마의 관심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2022년 6억1000만 달러 수준이던 글로벌 AI 신약 시장 규모는 2027년 40억 달러로 커진다. 연평균 성장률이 무려 45.7퍼센트에 이른다. 돈 있는 기업이 돈을 싸 들고 몰려든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