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소셜 픽션
발달된 과학 기술은 프랑켄슈타인적 측면과 프로메테우스적 측면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산업 혁명기 공상적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마르크스와 레닌 시대의 공산주의, 그리고 20세기 현실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 과학 기술의 진보는 주로 인간 노동의 해방과 사회적 평등이라는 유토피아적인 충동과 결속되어 있었다.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는 사적 소유의 폐지와 지속 가능한 생산 및 노동의 제도화를 역설했고[1]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과학이 이오니아의 마법에서 그치지 않고 과학적 합리성이 철인 정치와 결합해 유토피아를 사회공학적으로 설계하는 ‘벤 살렘’을 그렸다.[2] 19세기 말 에드워드 벨라미(Edward Bellamy)는 《뒤를 돌아보면서》에서 기술지상주의적 테크노토피아를 그렸고[3],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온 뉴스》에서 장인들의 작업장과 농업 조합을 중심으로 설계된 생태 사회주의 ‘에코토피아’를 상상했다.[4]
기술과 유토피아의 커플링은 때때로 인간을 초월하고자 하는 계몽적 트랜스 휴머니즘의 성격을 띠기도 하는데 이는 주로 H.G.웰스가 저술한 《모던 유토피아》나 《다가올 세상의 모습》 등의 공상적 사회주의 프로그램에서 드러난다. 과학 기술의 효용성을 강력한 사회주의 테크노크라시에 접목해 인류를 문화·윤리·경제·정치·종교 전면에서 개선하는 사회 권력을 유토피아에 내세우는 것이다.
반대로 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파괴적인 결과(산업 혁명이 자아낸 불평등)를 비관한 존 러스킨(John Ruskin)이나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등은 기술적 합리성이 인류의 공동선을 훼손하고, 손과 물질의 감각, 자연과 숭고의 감각, 사랑의 감각, 지금 여기에 대한 감성을 마비시키기 때문에 목가적 유토피아를 상상했다. 과학 기술은 그 자체가 자본주의적 부의 시종이기 때문에 소유와 분배, 자기실현적 노동이 주가 되는 평등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삶의 유용성과 생명을 담지한 노동, 그리고 정직한 상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5] 러스킨은 실제로 세인트 조지 길드를 조직해 대안 경제 운동을 이끌었고, 모리스 또한 장인 조합과 생태주의 공동체를 구상하는 동시에 심미성과 적정성이 결합된 농경·장인 기술의 사회 공학을 역설하였다. 그 외에도 대안 화폐와 생산자 협동조합의 유산을 남긴 로버트 오웬(Robert Owen), 모든 이가 자신의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개발할 수 있는 국민 작업장 민주주의를 꿈꿨던 생 시몽(Henri de Saint-Simon), 가부장제 폐지와 집산화 노동을 골자로 한 공동체 ‘팔랑스테르’를 제시한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 모두 좌파 유토피아에 기술 정치를 결합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면서 이들 에게 ‘공상적 사회주의’라는 명찰을 부여했다. 실현 가능한 해방(계급 관계의 철폐)이 아닌 공상적이고 평화로운 공중누각을 만들기 위한 사회 과학을 찾기 위해 지배자의 박애와 돈주머니에 호소한다(계급 적대 자체의 외면)는 것이다.[6]
그럼에도 프랑스의 생태사회주의자 앙드레 고르(André Gorz)가 지적하듯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는 데 있어 유토피아와 기술 및 제도의 연결은 매우 중요하며 인본주의, 계몽 정신, ‘검소한 풍요’를 누리는 적절한 노동과 여가, 생산물의 공정한 분배, 사적 소유의 철폐와 지속 가능한 지구 생태는 필수적이다.[7] 장구한 유토피아의 역사는 기술에 본원적으로 프로메테우스적 희망이 내재되어 있고, 기술로 무엇을 만드느냐가 아니라 어떤 미래를 상상하느냐가 본질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인간의 상상력과 마음이 지능 기계들에 예속된 오늘날, 이러한 미래를 꿈꾸는 능력 자체가 상실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계급 적대나 개인들의 연합은커녕 유토피아라는 공상조차 부재하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비전은 오늘날 빅테크와 기술 예언자들의 수사학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모순은 응축되는데 전망이 없으니, 전선도 구축되지 못한다.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을 위시한 새로운 제어 혁명은 물질-비물질을 가로지르는 인지 자동화에서 디지털 휴먼에 이르기까지 전 부문에서 유토피아를 후퇴시키고 있다. 유토피아적 상상력은 사라지고, 대신 유토피아 이데올로기만 배회한다. 일론 머스크나 마크 주커버그, 제프 베조스같은 초거대 자산가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신기술의 마법을 읊조리면, 정부는 전전긍긍하며 규제를 풀고 사회 전 분야에 무차별적으로 기술을 도입하는 악순환의 반복이다.
유토피아적 열망과 현실 가능한 대안이 잦아들수록, 무기력증과 역설은 더욱 커져만 간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역설은 사변적인 것(the speculative)과 실재적인 것(the real) 사이의 경계가 무너져, 사변이 사회적인 것을 역으로 잠식하는 현실이 도래하는 현상이다. 일례로 우리는 요즘 SF와 현실의 차이를 거의 인지하지 못한다. 상용화를 넘어 사회적 생산력을 잠식하기 시작한 요즘의 플랫폼과 생성 인공지능은 알고리즘 자본주의의 SF적 성격을 잘 보여 준다. 영화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인공지능 HAL-9000이나 〈블레이드 러너〉의 인간 식별 기계 보이트-캄프 테스트,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 〈공각기동대〉의 전자두뇌는 이제 SF가 아니라 현실이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의 전장을 날아다니는 무인기와 드론은 미세 노동자들의 무차별적인 데이터 라벨링 노동과 연결되어 있고, 일론 머스크는 이미 인간 두뇌와 반도체를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뉴럴링크에 대한 임상 시험을 시작했다. 달리와 GPT, 미드저니와 스테이블 디퓨전, 아마존 알렉사는 글쓰기와 그림, 음악, 인간 사유를 대체한다. ‘광대한 네트’나 〈매트릭스〉의 감시 시스템,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범죄 예측 시스템은 이미 여기에 와 있다. 플랫폼과 알고리즘의 신경망 속에서 인간은 이미 주체를 상실한 채 자본과 물신화된 욕망으로 직조된 시뮬라시옹(Simulation)을 살아간다. 표상 단계에서부터 우리가 뭘 욕망하는지 보여 주는 알고리즘들은 우리의 일상 대화, 소비 패턴, 어젯밤 꿈, 선호하는 체위까지 수집해 기업들에 소유권을 넘긴다. ‘안드로이드는 전자 양의 꿈을 꾸는가?’ 아니다. 인간은 이미 전자 양의 꿈을 꾸고 있다.
이러한 신기술 사회 혁신 담론은 이전까지와는 달리 일론 머스크(테슬라), 제프 베조스(아마존), 마크 주커버그(페이스북-메타), 래리 페이지(구글)와 같은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프로젝트가 SF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며, 기술 몽유병이 아니라 기술의 유토피아가 자신들의 야심 찬 기획과 자본력에 의해 실현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인간 두뇌의 복제가 그리 어렵지 않다고 호언장담해 왔던 래리 페이지는 실제로 구글X 연구소를 설립해 세계 과학 기술 인재들을 모으고, 황당한 ‘문샷 프로젝트’들을 하나씩 구체화했다. 실패한 프로젝트도 많지만, 인공지능 비서, 무인 자동차, 웨어러블 컴퓨터 등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실제 시제품으로 나왔다. 페이지는 자신의 담대한 구상이 닐 스티븐슨의 사이버 펑크 소설 《스노크래시》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머스크와 베조스 또한 대단한 SF광으로서, 자신들의 화성 탐사 임무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 더글러스 아담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고 자랑한다. 아마존 회장 베조스는 태양계 곳곳에 원통형 우주 콜로니를 건설해 1조 명 이상의 인류를 수용할 수 있는 은하 제국을 건설하겠다고 공공연히 대중들을 현혹하는 인물이다. 허풍처럼 보이지만 베조스는 2000년에 이미 우주 항공 회사 ‘블루 오리진’을 설립해 20년 넘게 이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으며 유인 로켓 발사를 계속 성공시켰다. 2021년에는 자신이 직접 궤도 로켓 ‘뉴 셰퍼드’에 탑승해 11분간 우주 비행을 다녀왔는데, 그는 단기적으로는 민간 우주 여행, 장기적으로는 인류를 우주 식민지로 이주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스페이스X로 화제를 모은 일론 머스크 또한 2029년까지 화성에 인류를 이주시키겠다고 발표했고, 머스크와 베조스 모두 우주 개척 시대의 토대가 될 초고속 위성 우주 인터넷 망을 구축하기 위해 각각 ‘스타링크’, ‘프로젝트 카이퍼’를 가동하고 있다. 스타링크는 이미 2000개의 궤도 위성을 쏘아 올려 상당한 인프라를 구축한 상태로, 지상 통신망이 파괴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무인 항공기와 드론 전투에 사용되는 중이다. 머스크는 한술 더 떠 뉴럴링크 기술이 범용화되면, 인간의 영혼을 데이터화해 인터넷에 업로드하는 ‘마인드 업로드’가 가능하다고까지 주장한다. 자신의 기억을 저장하고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인공두뇌와 브레인 머신 인터페이스가 갖춰진다면, 인간은 육체를 떠나 영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명백히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의 사이버 인격체 ‘딕시-플래트론’이나, 재패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전자 인격 복제, ‘고스트더빙’ 같은 사이버 펑크 문법들을 참조로 한다.
나는 2008년 이후 한계에 도달한 자본주의가 첨단 과학 기술의 문법에 사회 혁신 담론을 결합한 이데올로기적 수사학을 ‘자본주의 소셜 픽션(Capitalist Social Fiction)’이라고 명명한다. 이와 관련해 처음 언급한 사람은 좌파 비평가인 마크 피셔(Mark Fisher)로, 그는 오늘날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이 삶의 전 영역을 잠식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대중문화·미디어·교육 등에서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자연의 섭리이자 삶의 실재를 이루는 리얼리즘의 감각이 환류하고 있다.[8]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자본주의에 반하는 모든 삶의 감각, 예컨대 기후 위기·성 평등·민주주의 및 노동 계급의 열악한 상태에 대한 개선의 노력이 비정상적이라는 발상이라 느끼게 만든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이데올로기적 구호나 스펙터클과 달리 문화적[9] 재현이나 대중 담론을 통해서 퍼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상호 교류 속에서 만들어진다.[10] 그렇다면 스페이스X, 화성 이주 계획, 뉴럴링크, 솔라시티 등 빅테크가 찬미하는 ‘다가올 미래의 형태’는 어떠한가? 그것은 리얼리즘이 아니라 픽션이다. 픽션 중에서도 과학 기술을 첨가한 픽션, 싸이파이(SF·Science fiction)이다.
빅테크 자본이 전개하는 기술적 및 사회적 혁신은 현실이 아닌 싸이파이, 즉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넘어 자본주의 소셜 픽션에 닿는다. 그것은 현실을 보여 주고자 하는 리얼리즘의 문법이 아닌 SF 설정과 핍진성의 문법을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싸이파이를 뛰어넘어 소셜 픽션, 자본주의 소셜픽션이 된다. 빅테크와 테크노크라트들에 의해 실천된 기술 사회적 혁신은 싸이파이의 상상력을 빌어 우리 삶의 실재적 조건을 테크노토피아의 상상적 조건으로 견인해 가상적 개연성을 불어넣는다. 자본주의 소셜 픽션의 굴절된 테크노토피아 실천은 전방위에서 상품화된 기술 발전 및 윤리·정치·제도의 자본주의적 변형을 가속한다. 그 결과 우리는 도래한 알고리즘 자본주의 현실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수긍해야만 하는 기술혁신을 인지와 마음의 수준에서부터 경험하게 된다.
가속주의(Accelerationism) 비평가 닉 랜드는 이런 미래를 두고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지구는 테크노 자본의 특이점에 포획되었다. 자동으로 정교화하는 기계의 탈주 속에서, 로지스틱스에 의해 가속화되는 기술-경제적 상호 작용은 사회 질서를 뭉그러뜨린다. (…) 이러한 상품화 조건은 임금으로 계산된 인간 활동을 기술로 대체한다. 산업 기계들은 프롤레타리아의 현실을 해체하고, 이를 사이보그 혼종화로 대체하며, 노동력의 가소성을 실현하기 위해 배치된다.” 랜드의 예언은 진단의 측면에서는 맞았지만, 대안의 측면에서는 틀렸다. 그는 기술 혁신을 오히려 가속해, 자본주의의 전자 회로가 과부하를 일으키는 파국을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종류의 파국론을 단단히 경계해야 한다. 내상을 입는 것은 자본주의 전자 회로가 아니라 인간 두뇌의 신피질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소셜 픽션의 아랫면에는 기술에 의해 파편화된 노동의 공동묘지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아마존과 구글, 테슬라 등의 기업이 만들어 낸 우주선·인공위성·인공지능에 들어간 막대한 자본은 저렴하고 유연한 비임금 형태의 노동으로 쌓아 올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부업 활동이라고 선전하지만, 시간당 2달러도 지불되지 않는 품팔이에 불과한 아마존 메카니컬 터크, 플랫폼 서비스를 빙자해 무차별적으로 수집되는 이용자들의 대규모 데이터 생산 활동, 자동화된 알고리즘에 노출되기 위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크리에이터들의 잉여노동, 광고를 무심결에 클릭해 충동 구매하거나 광고를 보지 않기 위해 구독료를 결제하는 이용자, 무어의 법칙을 구현하기 위해 혹사당하는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과 그 생산물을 암호 화폐 채굴 기기로 활용하는 금융 투기꾼들, 한탕주의에 현혹되어 블록체인 풀에 연결된 채 기꺼이 연산 자원을 모으는 현상금 사냥꾼들, 플랫폼에 연결된 채 수수료 수익을 공물로 바쳐야만 하는 자영업자들과 배달자들까지……. 자칭 사이버 프론티어들의 SF적 데탕트는 최첨단 기술로 인해 임금과 고용으로부터 탈거돼, ‘막대한 부를 생산하고도 불안정한 삶에 저당 잡힌 사이버 프롤레타리아(Cyber-Proletariat)’[11]들에 대한 수탈의 결과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재현은 기술 사회 혁신의 영속적인 가속을 자유롭게 만들고자 하지만, 우리는 뇌사 상태에 빠져 국소적인 측면(상품과 잉여)에 한정된 속도 증대를 경험할 뿐 진보는 잉여가치, 노동자 예비군, 부유하는 자본의 틀 안에 결박된다.”[12] 우리는 자본주의 소셜 픽션이 연출하는 광속의 테크노토피아 몽타주를 자본주의 잉여가치 운동의 과속으로 발생한 블랙 아웃이라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소셜 픽션의 핍진성 위에서, 기술은 파괴적으로 진보하고 있지만 이는 사회 문화적 진보를 가속하는 것이 아니라 공황을 유예해 자본주의 지배 질서를 공고화하는 방식에 한정된다.
신경망의 인력과 신피질의 척력
모든 힘은 인력과 척력, 두 가지 형태로 나뉠 수 있다. 인력의 방향은 수직(세로획)이고, 척력의 방향은 수평(가로획)이다. 이를 노동가치론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의 힘은 인력으로, 노동의 힘은 척력으로 정의될 수 있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힘의 우세종은 인력이다.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 인간은 생존을 위해 자연을 변형시켜야 했고, 그 과정에서 소모된 힘을 가치라는 형태로 다시 변환해 증폭시키는 방법을 발명했다. 시장과 교환, 그리고 화폐와 자본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있을까? 인력은 오로지 끌어당기는 중력으로만 이뤄져 있으며, 인간은 이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진다. 중력은 시공간을 창조했고 이 시공간 속에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진화해 왔다. 그러나 인간 두뇌의 신피질은 인력과 정반대의 힘인 척력을 만들어 낸다. 그 근원은 인간의 정신적 활동이 동반하는 전기력이며, 밀어내는 동시에 옆으로 퍼져 나가고 연결하는 힘이다. 신피질의 척력은 신체의 기관과 세포의 신진대사를 촉진하며, 나아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구성하는 원천이 된다. 인력과 척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지만 지금까지의 힘의 역사는 인력이 지배하고 척력이 투쟁하는 방식으로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플랫폼과 알고리즘, 그리고 인공지능으로 엮인 신경망은 인력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신피질이 만들어 낸 삶 활동의 데이터 — 사유, 기억, 실천, 경험 — 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인력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자본과 노동의 관계로 흡입한다. 이 힘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모든 견고한 것들을 잉여가치의 공기 속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피질‘들’이다. 우리는 미약하기 짝이 없는 개별 두뇌의 전기력을 무수히 연결해 지구 자본의 중력을 밀어내는 복수형의 척력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될 수 있다.
하나는 ‘탈출 속도’에 도달하는 것으로,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중력의 힘을 거슬러 아래에서 위로 가속하는 방법이다. 11.19킬로미터 퍼 세컨드(km/s)로 상승하는 속도를 유지해 라그랑주점에 도달한다면 지구의 중력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인간 노동이 각 점들을 빠르게 마찰시켜 에너지 융합을 일으킨다면 자본이 스스로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중력(자동화)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실재라기보단 사변적인 힘인 ‘반중력’의 생성이다. 만약 중력에 척력을 혼합할 수 있다면 지구 위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한없이 거대한 질량을 마음먹은 대로, 예컨대 《걸리버 여행기》의 전설적인 도시 라퓨타를 공중에 띄우거나 《새로운 아틀란티스》의 벤살렘 섬이 하늘 위에 떠 있는 풍경이 연출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세계, 말 그대로 유토피아로 꿈결에나 그 모습을 잠깐 드러내곤 한다. 전자가 ‘리얼 유토피아’라면, 후자는 규제적 이념이다. 그러나 설령 가능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둘 모두를 지향해야만 한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달성해야 할 미래의 상태가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제 몇 가지 명제를 정리해 보도록 하자. 첫째, 알고리즘을 통해 자본주의는 최고 단계의 자동화(인지 자동화와 인공지능)를 달성하고 있지만, 여느 시대의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그랬듯이 스스로 잉여가치를 만들어 낼 능력은 없다. 이 기계들의 신경망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 신피질의 전기력을 노동력으로 변환해야만 한다. 알고리즘 자본주의가 가치 역학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인간 노동과 비인간노동, 그리고 인간 노동력을 광섬유로 연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플랫폼-알고리즘 신경망과 인공지능은 노동력의 탈상품화를 가속해 사회적 생산력을 증대시킬 뿐 아니라 잉여노동 지분을 크게 늘림으로써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고 있다. 그 상쇄분을 벌충하는 로직은 인클로저와 독점 지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인간의 인지적·지적 노동에 대한 추상화이다. 플랫폼과 알고리즘은 이를 주목의 단위로, 인공지능은 거대 언어 모델의 토큰 단위로 실현하고 있다. 셋째, 알고리즘 자본주의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제3 섹터, 컴퓨터 노드-인간 뉴런 간 하이브리드인 ‘비인간노동’을 출현시키고 있다. 제3 섹터 비인간노동은 자본가-노동자 간의 적대를 비가시화하고, 노동자들이 서로 연대할 수도, 자본가와 직접 협상할 수도 없도록 만든다. 알고리즘의 강력한 힘은 빅테크 플랫폼의 실질적인 경작자인 크리에이터, 배달 라이더, 물류 노동자와 모빌리티 노동자가 서로 결속할 가능성을 빼앗아,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수분해하도록 만든다. 서로가 서로에게 작업을 외주하고 스스로 착취하도록 고무하며 그로써 계급투쟁의 유기적 구성을 차단한다. 이제 인간 노동은 배회하는 유령처럼 느낌만 있을 뿐 만져지지도 보이지도 않게 되며, 비인간노동이 남긴 어렴풋한 발자국은 신기루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제3 섹터로 들어가 연대와 적대의 고리들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주체의 정치학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은 인간과 대화하거나 외교를 하지 않는다.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행위자의 정치학이다. 행위자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인간 노동과 비인간노동 할 것 없이 노동의 무늬들이 좀 더 뚜렷한 윤곽으로 드러난다. 컴퓨터와 네트워크 안에서 대상은 두 프로토콜 사이의 교집합으로 정의되며, 해석학적 접근뿐 아니라 기계적인 읽기 모델이 적용돼야만 한다.[13] 데이터는 분석되며, 전통적 의미의 읽기와는 전혀 달라지고, 정보는 의미 대신 패턴을 포함하기 때문이다.[14]
요컨대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이 추동하는 인지 자동화 시대에 블랙박스가 되어 가는 제3 섹터를 읽어 내고자 한다면 비인간의 정치학 혹은 비인간의 기술 정치가 요청된다. 보편적 기본소득이나 디지털세와 같은 인간주의 정치의 해결법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법과 규범, 사회 계약은 인간들 간의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지만,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은 프로토콜, 비기표적 기호계의 영역이다. 이 비인간의 층위에서 작동하는 제3 섹터 기술의 기하학에 직접 개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실낱같은 투쟁 주기의 기회들이 마련될 것이다. 기술과 사회는 서로를 구성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기술은 곧 제도이자 시스템이고 여기에 직접 개입해 들어가야 한다. 랭던 위너(Langdon Winner)가 지적하듯이, 기술은 인간 행위의 보조 기구가 아니라 그 행위와 행위의 의미를 새로 형성하는 강력한 권력이다.[15] 새로운 기술의 발명은 생산 과정, 노동의 의미, 의사소통에 걸친 사회적 구조를 바꾸며 확산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술 속으로 들어가 “개인 일상의 창조와 재창조, 생산과 재생산 과정에의 능동적 개입을 통해 사회 노동 배치와 상품 제작과 소비, 행위를 인공물의 물적 조건에 적응시켜 나가는”[16] ‘삶의 양식으로서의 기술’[17]을 구원해야 인간 존재의 조건 또한 재구성할 수 있게 된다.
커먼즈 신경망을 향하여
알고리즘 자본주의의 폭주를 감속시키기 위해 우리가 가장 시급히 고찰해야 하는 것은 탈중앙화 데이터 관리 기술이다. 현재 빅테크가 독점적으로 운영하는 플랫폼들은 서비스 제공이라는 미명하에 개인의 생애 주기와 생체 데이터를 무단으로 포식해 왔다. 전 지구적인 데이터 자원과 노동력을 몇몇 거대 기업이 중앙집중화 시스템으로 관리하는 것은 극도로 위험하다. 이들은 사람들의 어떤 데이터를 어느 목적으로 활용하는지 전혀 공개하지 않는다. 이른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처럼 비밀스러운 특권은 오로지 빅테크에만 주어져 있다. 다시 말해 거대 자본과 결부한 플랫폼과 알고리즘은 현대판 생명 관리 정치이자 독점 자본 그 자체다. 이들이 틀어쥐고 있는 유기체적이고 전체주의적 데이터 매트릭스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분산해서 관리할 수 있는 탈중앙화 데이터 관리 체계를 만들어 내야 한다.
과거 중앙 집중형 산업이 운영하는 기계제와 분업에 맞서 노동자 계급 역시 중앙집중화된 저항의 시스템인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전선을 만들었다. 자본이 탈중앙화되었다면, 전선 또한 탈중앙화되어야 한다. 전자가 두 세력이 펼치는 참호전이었다면 후자는 리좀(Rhizome)의 전투다. 이는 조합의 종말이나 점조직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리좀은 어떤 형태가 되었건 과거의 싸움들이 축적한 인프라 위에서 펼쳐져야 한다. 불만이 있다면 알고리즘에 직접 따지라는 플랫폼 사업자에 맞서, 라이더유니온은 알고리즘을 법정에 세워 성과를 얻었고 우리는 여기에 주목해야 한다. 조직적인 공방을 위해서도 탈중앙화 데이터 관리를 위해서도 조합은 필수불가결하다. 또한 조합을 포함해 시민 사회 진영 전체가 빅테크가 포식하는 데이터를 열람하고, 모니터링하며, 반대로 기업들은 이를 마음대로 상품화할 수 없도록 제재할 수 있어야 한다. 물신화된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의 실체는 노동력의 탈상품화의 가속해 ‘비인간노동’ 제3 섹터를 만들고, 자본의 운동에 방해되는 허들들을 상쇄하는 것이다. 데이터 흐름의 통제권을 수복해야 여기에 제동을 걸 수 있다. 실낱같은 투쟁 주기를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감속의 차원과 가속의 차원, 두 가지 실천이 전제되어야 한다.
감속의 차원에서 데이터 주권(Data sovereignty) 기반의 탈중앙화 거버넌스는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탈중앙화 분산 처리와 데이터 암호화, 트랜잭션 무결성에 기반한 P2P 네트워크를 구축해 신뢰받는 제3 자(정부, 은행, 기업)를 거치지 않고 개인이 직접 관리하는 자기 주권 신원 증명(Self-sovereign Identity)이 관리의 시발점이 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블록체인 기술로도 가능하며, 구글이나 네이버 등 플랫폼 기업에 불필요하게 생체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고도 결제, 검색, 등록 등의 활동을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내가 어떤 데이터를 제공했는지, 제공할 것인지 설정할 수 있고 원한다면 제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핵심은 개인이 생산한 데이터를 중앙 서버에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P2P 탈중앙화 네트워크에 분산 배치한 뒤, 기업들이 허가·인증·지불 절차를 거친 후에 이 데이터를 활용하거나 혹은 그 여부를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신피질들’이 결정하는 데 있다. 신피질들은 P2P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최소 단위인 노드들로 구성된 집합 지성이다. 이 자유로운 신경망이 데이터 주권을 단단히 거머쥔 채, 공동선을 위해서는 커먼즈로 활용하면서 빅테크가 데이터를 마구잡이로 남용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나는 알고리즘 자본주의가 심화하면 정부의 테크노크라트들조차도 이 대안을 고려하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기계 신경망이 특이점에 도달하거나(인공 일반 지능의 등장) 심각한 아노미를 발생시킬 경우(디지털 휴먼, 할루시네이션, 탈진실 등) 신피질에 대한 자본의 인력도 덩달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인력이 발생시키는 정부·관료제의 힘, 구심력도 약화된다. 왜 그럴까? 권력은 누가 주권의 대상인지 누가 노동 인구인지 정확하게 식별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감시 권력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가치의 순환을 공고히 하고자 작업장에서 운영하는 규율·통제의 메커니즘을 사회화할 뿐 아니라, 주체를 식별하고, 적절하게 모양 짓기(rendering)를 하기 위해 기술을 ‘행동 수정 수단’으로 도입하게 되어 있다.[18]
그런데 알고리즘 자본주의는 과거와 달리 정치 권력과 공유했던 이 기술의 메커니즘을 더 이상 보여 주지 않으면서 은밀한 축적의 개구멍으로 활용한다. 구글을 비롯한 무수한 빅테크 기업들이 알고리즘을 (정부에게조차) 블랙박스화하고, 글로벌 서비스라는 핑계로 각국에서 조세 회피를 하고 있는 현실은 이 갈등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인공지능에 있어서는 특히 이 복잡한 대결 구도가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 블랙박스화가 심화되어 인공지능의 폭주를 조절하지 못하게 될 시 자본은 결국 본연의 생산 기능을 일부 포기하고 정부에 일임했던 감시 기능을 합쳐, 더욱 폭력적인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지배하려 들 것이다.
따라서 진보 시민 사회와 노동자 계급의 연대가 앞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은 첫째, 데이터 분산 처리 기술을 커먼즈로 만드는 것이고 둘째, 분산된 데이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의사 결정 권한을 분산하는 탈중앙화 조직(Decentralised Organisation·DO) 기반 거버넌스다. 탈중앙화 조직은 중앙 조직 없이 P2P에 연결된 노드들로 하여금 민주적 투표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으며 이 모델이 데이터 분산 관리에 적용된다면 참여자가 자신이 공유하는 데이터에 대한 의결권을 스스로 행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데이터 사용 내역에 대한 투명한 공개가 가능하다. DO 모델은 개인을 넘어 조합과 시민 조직에 의해 개발되어야 한다. 이는 블록체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암호 화폐를 완전히 배제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알고리즘의 아키텍처, 거대 언어 모델의 공통재적 사용, 데이터의 사용처와 방법, 이를 둘러싼 프로토콜 등을 DO에 연결된 노드들이 투표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DO는 보통 이더리움과 비트코인 등의 암호 화폐 투자에서 DAO(Decentralised Autonomous Organisation)으로 변주되는데 이는 토큰을 구매해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주주 총회식 자산 메커니즘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주주 중심주의는 51퍼센트의 독점 자산가들이 의사 결정을 독점하는 구조로, 1인 1표를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 시스템과 결이 맞지 않는다. 따라서 주주 중심주의 아키텍처가 아닌 조합식 아키텍처를 기본으로 하는 DO의 개발은 필수적이다. 프로토콜은 구성원들이 시작 단계에서 합의해 정할 수 있다. 토큰을 배제한 조직, 비화폐적 토큰과 같은 규약의 도입으로 참여도를 끌어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1인 1표제와 같은 조합 중심 원칙을 정할 수도 있다. 제품 품질 관리, 서비스 등 상품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협동조합의 경우를 제외하고, 노동조합과 시민 사회 수준에서 DO의 도입을 통해 데이터·알고리즘·플랫폼·인공지능 관리통제 권한을 주도할 수 있다면 제3섹터 비인간노동의 편류에 대처하는 ‘비인간 쟁투’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신경망의 통제를 전유해 신피질‘들’의 연합을 창출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이는 피어와 피어의 연결이 아니라 결국 그를 통해 인민과 인민의 연결을 이뤄내는 제3 섹터 비인간 ‘코뮨(commune)’의 행위성을 재구성하는 문제로 직결된다. 혹자는 탈중앙화 네트워크의 처리 속도와 효율성을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남긴 의제, ‘자유로운 개인들의 평등한 연합’은 기술적 합리성을 모토로 하지 않았음을 상기해야 한다. ‘각자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는 민주주의의 결과적 평등의 문제이지 시스템적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다. 효율성과 속도는 유기체적 전체주의 사회에서 강조되는 것이며, 민주적이고 코뮨적인 연합에서 이는 부수적인 요소다. 우리는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이야말로 가장 광기 어린 시스템이었음을 역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가속의 차원에서는 어떤 실천이 동반돼야 할까? 우리는 플랫폼과 인공지능을 커먼즈로 수복할 필요가 있다. ‘플랫폼 사회주의(Platform Socialism)’을 주창한 연구자 제임스 멀둔James Muldoon에 따르면, 플랫폼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이거나 착취적이지 않기 때문에 플랫폼을 사회적 소유로 만들고, 민주적 통제를 통해 플랫폼에서 창출되는 자원을 모두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사용해야만 한다.[19] 피터 라인보우(Peter Linebaugh)는 커먼즈가 공동 경작을 관습으로 하는 커먼즈주의(commonism)와 원시적 공산주의의 연결 속에서 맹아를 싹틔웠으며, 공동 경작은 지구에서 사유화되지 않고 인클로저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모든 장소들, 상품이 아니면서 인간의 상호성의 다양한 가치들의 지주로 남아 있는 모든 곳을 포괄함을 역설한다.[20]
이러한 논의들은 플랫폼-알고리즘 신경망이 인간 원료로 수탈하는 메타데이터, 그리고 무주공산의 데이터와 미세 노동을 포식해 만들어진 거대 언어 모델에도 적용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플랫폼과 거대 언어 모델을 만든 것은 지구 신경망이지 구글이나 오픈AI의 엘리트 프로그래머들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그토록 사랑하는 지적 재산권(copyright)은 생성 인공지능을 만드는 과정에서 지켜졌는가? 미드저니와 달리2는 이미 여러분이 어딘가에 올린 사진, 글, 문체를 모조리 집어 삼켰지만 사용료는 한 푼도 내지 않았다. 위신 있는 작가들, 예술가들의 작품과 지적 재산권이 걸린 수많은 그림, 글귀, 음악에 관한 데이터 학습에서 지적 재산권 문제는 지켜지지 않았다.
빅테크는 거꾸로 여러분들로부터 구독료를 받는 중이다. 심층 학습에 있어 지적 재산권에 해당하는 데이터와 그렇지 않은 데이터들을 식별하는 작업은 현재 인공지능의 가장 큰 도전으로 떠오르고 있다. 인간의 모든 경험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 인공지능은 지난 반세기 지식 경제의 핵심적인 가치 사슬인 저작권 생태계를 스스로 위협한다. 여기서 우리는 발상을 전환해 플랫폼과 인공지능이 빠진 자가당착, 즉 지적 재산권 생태계를 커먼즈로 전환하는 시나리오를 그려 내야 한다. 작업장 민주주의와 중세 길드의 호혜적 운영 방식을 결합한 길드 사회주의(Guild socialism), 플랫폼을 공공 수단(public utilities)으로 규정해 인터넷 망이나 전파와 똑같이 규제하는 법안의 도입, 시민 플랫폼과 글로벌 디지털 펀드의 구축 등은 여기에 대한 좋은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21]
최근 한국의 콘텐츠 플랫폼 네이버웹툰과 카카오엔터테인먼트는 생성 인공지능으로 만들어진 콘텐츠를 표시하도록 하는 저작권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있다. 이보다 인공지능의 역설을 더 잘 표현해 주는 예는 없을 것이다. 이는 잉여가치와 합치된 식별의 감시 권력과 연관되어 있다. 무엇이 인간 작업물인지 아닌지 식별한다는 것은 인공지능이나 마스터 알고리즘이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도입되는 상황에서도 결국 인간 노동력이 가치의 원천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다. 이는 창조적·인지적 문화 생산물을 이루는 유기적 구성 비율을 따져 더 낮은 가격표를 노동자에게 제출하겠다는 자본의 의지이기도 하다.
가속의 차원이란 커먼즈를 확대해 자본이 그 자체로 교환 가능한 인간 노동력의 결과물과 ‘그 자체로는 사용만 가능한’ 비인간노동의 결과물을 뒤섞어 식별을 교란하는 실천으로 만들어진다. 디지털 데이터·정보를 배타적 소유권으로 한계짓고자 하는 지식 경제는 이미 파산을 선고받았다. 우리는 지적 재산권과 지식이라는 ‘자산’ 개념을 폐기함으로써 제3 섹터를 교란하거나, 혹은 백지화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는 모든 창작물이 공통의 소유라는 뜻이 아니다. 저자의 인격적, 정신적 이익을 보호하는 저작인격권은 탈중앙화 네트워크에서 더 잘 지켜지도록 새 규약을 맺는 동시에 모든 이에게 인류의 문화 창조 노하우가 축적된 거대 언어 모델을 조건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탈중앙화 P2P 네트워크를 전유해 저작 인격권은 강화하고, 저작권 경제는 해체하는 미러링이 필요한 것이다.
플랫폼의 수수료 기반 이윤과 생성 인공지능의 구독료 모델이 보여 주듯, 알고리즘에 의한 인지의 상품화는 결국 지대 기반의 잉여와 재생산이다. 자본주의가 지대를 추구한다면, 인민은 거꾸로 지대를 해체해 커먼즈로 돌아가고자 한다. 탈중앙화 P2P 신경망에 의한 데이터 주권의 통제, 길드-작업장 기반 시민 플랫폼에 이어 우리는 새로운 소유의 개념을 필요로 한다. 알고리즘 아키텍처에 대한 공통의 소유권, 생성 인공지능을 다루는 인간 프롬프팅 작업 결과물에 대한 개방된 라이센스 개념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미 리눅스, 위키피디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reative Commons License), 자유 소프트웨어와 오픈 소스라는 유산을 가지고 있다. 커먼즈에 기생하는 빅테크의 독점 신경망을 떼어 내고, ‘자유로운 커먼즈 신경망’을 구축하는 것은 당면 과제다. 마르크스 이후의 진보 운동은 과거와 관련된 모든 미신을 벗어 버리고서야 비로소 사회 혁명이 시작될 수 있음을 알려 준다.
실리콘밸리가 전파하는 자본주의 소셜 픽션에는 지구를 돌보고, 노동을 존중하고자 했던 역사적 유토피아의 전망이 부재하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어떠한 인간 조건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문화의 양상이다.[22] 유토피아는 당파적 열망을 드러내는 특정 집단의 형태로 구체화하는 비판적인 태도의 필수적인 요소인 동시에, 사회 주요 이익 집단들을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도록 드러내며, 역사의 현 단계에서 사회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들을 철저히 검토하도록 만들어 계급적 본질을 폭로하게 만든다.[23] 이 책에서 제기하는 알고리즘 자본주의 문제들은 단순한 사회학적 검토로 끝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유토피아를 떠올릴 수 있고, ‘사회주의 픽션(Socialist Fiction)’을 그리며 희망의 원리들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희망은 단순한 백일몽이거나 형이상학이 아니다. 희망이라는 낮꿈은 비판적이고 냉정한 시각을 생성하는 하나의 신진대사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 서문에서 이렇게 적는다. “낮꿈을 충만케 하는 행위는 사물이 어떻게 더 낫게 변화될 수 있는가? 와 같이, 사물에 직접 참여하며 능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것은 인간 오성이 보다 밝고, 잘 인식되며, 사물의 변화 과정을 중개할 수 있고 개념화할 수 있음을 뜻한다.”[24] 블로흐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희망의 원리를 통해 비판적으로 재구성된 유토피아에서 초월적인 물질대사 변혁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치열하게 고찰했던 논의, ‘인간 감성적 활동’은 관념인가, 아니면 물질인가? 에 대한 물음과도 연결된다. 마르크스는 전 저작에 걸쳐 도덕·윤리·온정·이데올로기 등의 비역사적 성격을 일관되게 비판하지만, “인간의 감성적 노동과 창조 및 생산에 해당하는 ‘감성적 활동’”은 관념의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25] 마르크스는 자연과학적 인식이 인간의 감성적 활동에 기반하고 있으며, 인간을 감각의 대상으로 보는 관념론과 달리 ‘감성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개인들의 총체적이고 살아 숨 쉬는 감성적 활동’으로 인간의 생명 과정이 구성된다고 규정한다.[26] 이 생명 과정은 “환상에 고립되고 고정된 인간이 아니라, 일정한 조건 아래서 현실적인, 경험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발전 과정에 있는 인간”[27]으로 그려진다. 사물의 변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인간의 유적 삶을 가변적으로 만드는 상상력의 토대인 유토피아적 열망은 감성적 활동의 맨틀이다. 요컨대 희망은 물질과 역사의 작은 입자 단위이다. ‘지금 여기’ 그리고 주객이 전도된 자본주의 과학 기술과 소셜 픽션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유토피아 청사진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 책은 알고리즘 자본주의에 대한 해부도를 그리고, 대안이 가능할 뿐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꿈꿔야 할 수 있음을 역설하기 위해 쓰였다.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에 대한 대안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상상력이 창발돼야 하는 시점이다. 다가올 새로운 자본주의적 수탈과 노예화에 맞서, 민주적 기술의 발명을 위해 우리가 사회적 대화를 시작해야만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