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 노동으로 쌓아 올려진 거대 언어 모델
알고리즘 인지 자동화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지점은 인공지능이다. 인간의 인지와 경험에 대한 자동화가 축적되면 알고리즘은 기계가 독립적인 지능을 형성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게 된다. 즉 알고리즘은 페이지랭크나 피드, 광고 등의 개별 기능들이 협업하는 형태를 넘어 하나의 유기체가 되기를 갈망한다. 로봇 암과 컨베이어 벨트, 어셈블리 라인, 자동 공작기는 생산의 각 부분을 실현하는 기계들이다. 우리가 앞서 논했듯이, 기계는 스스로 가치를 창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은 언제나 유기적 구성을 100퍼센트로 끌어올려 모든 노동과정을 실현하는 기계 생명, 로봇을 만들고 싶어 했다. 로봇은 개별의 기계들로 하나의 유기체이자 노동자인 인간을 조립하는 시도다. 수많은 SF 소설과 영화는 로봇의 존재를 통해 자본가와 노동자의 숙명적인 계급 적대를 보여 준다. 그러나 로봇은 팔다리의 동작을 인간처럼 구현하는 기계 공학만 가지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계가 인간처럼 노동하려면 먼저 인간 같은 두뇌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인간의 물리적 신체를 재현하는 로봇 공학은 일찌감치 ‘모라벡의 역설’에 직면했다. 로봇공학자 한스 모라벡은 이미 1970년대에 이 역설을 이야기한 바 있다. 지능 검사나 체스에서 어른 수준의 성능을 발휘하는 컴퓨터를 만들기는 쉽지만, 지각이나 이동 등 물리적 능력에 있어서는 한 살짜리 아기만 한 컴퓨터를 만들기조차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1] 인간에게 쉬운 것은 기계에 어렵고, 기계에 쉬운 것은 인간에게 어렵다.
그러나 인공지능 개발이 기호주의 모델에서 연결주의 모델로 전환되는 1980년대, 신경망과 기계학습으로 인해 새 지평이 열렸다. 기호주의 모델은 인간의 모든 지식을 기호로 변환해 컴퓨터에게 인간 전문가가 학습하는 방식을 입력하는 것이다. 반면에 연결주의 모델은 인간 두뇌의 신경망이 학습하는 방식을 물리적으로 모방한 인공신경망 자체의 물리적 구현을 모토로 한다. 이를 토대로 심층 학습과 인공신경망을 기반으로 한 거대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이 인간의 귀납적인 인지 능력을 구현하는 초유의 현실이 연출되고 있다. 안정적인 데이터만 대량으로 주어진다면, 기계는 모든 것을 학습할 수 있다. 인지 기계에서 사고 기계로의 전환이 실현되는 것이다. 2011년 TV 퀴즈쇼 ‘제퍼디!’에서 인간 챔피언에 승리한 인공지능 ‘왓슨’, 2016년 인간 바둑 챔피언을 꺾은 ‘알파고’ 등은 심층 학습의 힘이 얼마나 심오한지를 과시했다. 이후에 등장한 챗GPT, 미드저니, 스테이블 디퓨전 등 생성 인공지능은 읽고, 쓰고, 듣고, 그림을 그리고, 인간과 대화하거나 코딩을 할 줄 안다. 인공지능은 알고리즘이라는 인지 기계에 기계 지능을 장착한, 신체 없이 사고하는 로봇이다. 육체노동이 주가 되는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사람들은 인간 같은 신체를 가진 기계 생명체를 상상했다. 그것이 육체노동을 대체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기계 생명체는 신체를 가질 필요가 없다. 그것은 지적이고 창조적인 노동을 대체하는 중이다. 인공지능은 체화된 집합적 지능이자 자원(주석, 희토류), 연료(전기), 인간 노동(데이터 라벨링)으로 이뤄진 구성물이다. 기계인 동시에 메타-지능이며, 물질인 동시에 비물질인 인공지능은 알고리즘들을 긴밀하게 연결하고, 노동을 더욱 유연화할 것이다.
우리는 챗GPT와 미드저니의 강력한 생성 능력에 경도되어, 종종 그것들이 진공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인간과 컴퓨터, 인간 인지와 알고리즘 기능 사이의 신진대사를 유기체적으로 매개할 뿐 아니라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만들어진 지성의 토대, 거대 언어 모델 위에서 작동한다. 거대 언어 모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인간의 작업, 데이터 라벨링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필 존스는 최근 전 지구적으로 행해지는 ‘미세 노동(Microwork)’이야말로 거대 언어 모델의 기원이라고 폭로했다. 그에 따르면 인공지능은 대대적인 자동화로 인해 발생한 잉여노동 인구의 노동력을 전유하면서 ‘탈상품화’하는, 자본의 가장 강력한 수탈 메커니즘이다. 인공지능이 현재의 강력한 생성 성능을 발휘하기까지 기업들은 광범위하고 강도 높은 데이터 라벨링을 필요로 했는데, 이는 범남반구의 수많은 빈민과 난민, 범북반구의 실업자들과 이민자들로 이뤄진 잉여 인구에게 미세 노동의 형태로 던져졌다. 예컨대 자율 주행차가 스스로 돌아다니며 카메라로 시각 정보를 수집하더라도 무엇이 보행자고 무엇이 표지판인지 구분하는 태그들은 결국 인간이 판단해서 분류할 수밖에 없다.[2] 소셜 미디어 피드 인공지능에서 가짜 뉴스를 걸러내거나 정치 선동, 혐오 표현, 포르노, 금지 품목 광고 등을 제거하는 작업도 인간 분류 작업을 필요로 한다. 이런 데이터 라벨링 작업은 대부분 일시직, 파트 타임, 긱 작업으로 조직화되며, 전면에서 철저히 가려진 채 대부분이 저개발 국가에 집중된다.[3]
빅테크 자본의 플랫폼이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지 않는 것처럼, 거대 언어 모델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데이터 라벨링 또한 제대로 된 고용과 임노동 관계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데이터 라벨링에 투입되는 미세 노동이야말로 노동의 가장 묵시록적이고 비참한 현실을 보여 준다. 아마존 메커니컬 터크, 클릭 워크, 중국의 주바지에 등 빅테크가 운영하는 미세 노동 플랫폼들은 미세 노동자들에게 이미지 인식, 음성 인식, 챗봇 훈련, 감정 분석, 설문 처리 등 데이터 라벨링 작업을 10~30분 단위의 짧은 건당 계약으로 할당한 뒤 시간당 1달러 미만의 보수를 지급하고 수수료 20퍼센트를 수취한다.[4] 세계은행과 국제노동기구는 이런 미세 노동을 ‘새로운 소득 창출의 기회’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해 전 세계 NGO 단체들에까지 적극적으로 미세 노동 분배를 권장했다. 그러나 미세 노동자의 30퍼센트는 보수를 받지 못하며, 알고리즘 의사 결정에 의해 배분된 시스템에서 미세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 결과물이 어디로 가는지 누가 자신을 고용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또한, 미세 노동 플랫폼 알고리즘은 작업을 복수의 미세 노동자들에게 동시에 할당한 다음, 보수는 한 명에게만 지급하고 모두의 작업 결과물을 무급으로 가져간다.[5]
의뢰인은 철저히 익명성이 보장되는 반면 미세 노동자의 모든 개인 정보는 공개되며, 작업장이 존재하지 않는 데다 고용주는 하루의 건당 작업마다 수십 번씩 바뀌기 때문에 협상은커녕 문제를 제기할 수조차 없다. 미세 노동은 ‘게임처럼 남는 자투리 시간에 즐겁게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활동’으로 선전되어 노동을 비가시화하고, 실제로 돈 대신 비현금성 보상(마일리지, 게임 화폐, 스타벅스 쿠폰, 브랜드 상품권 등)을 주는데 이마저도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의 빅테크 자본들은 인공지능의 ‘초자연적인 창조력’이 인간 노동력에서 나온 것임을 숨기고 자신들의 신화 창조임을 선전하기 위해 비밀 유지 계약(NDA)을 맺는 한편, 공급 관리자 시스템(Vendor Management System)을 통해 하위 기업들에도 미세 노동력을 공급한다.[6]
미세 노동자들은 일하는 시간보다 일을 잡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고, 그렇게 해서 잡은 일은 짧게는 10~30분, 길게 잡아 봐야 몇 시간 단위이기 때문에 안정적이고 연속적인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 자신의 작업 결과물이 어디로 가는지, 누가 자신에게 돈을 주는지조차 모른다. 그들이 두 시간 동안 열심히 라벨링한 데이터셋은 킬러 드론이 인간과 고양이를 식별하는 기능에 사용될 수도 있고 홈케어 인공지능에 활용될 수도 있다. 게다가 부당한 처우를 받거나 수당이 체불돼도 항의할 만한 채널도 없다. 함께 일하는 작업장이 없으니 작업자들이 만날 수도, 노동조합을 만들 수도 없고, 노동법으로부터 보호받지도 못한다.
이처럼 마이크로한 단위로 분열된 미세 노동의 조각들을 수집해 거대 언어 모델이 만들어지고, 거대 언어 모델은 가동되는 시간 동안 엄청난 비용을 발생시키며, 생성 인공지능을 서비스하는 기업들은 이용자들에게 이 비용을 청구한다. GPT-4 터보 기준 입력 토큰 1000개(750단어)당 0.01달러, 출력토큰 1000개당 0.03달러가 계산된다. GPT-4의 유료 버전 구독료는 월 22달러로 생성 인공지능의 비즈니스 모델 또한 구독료 기반의 지대 추구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아직까지 생성형 인공지능과 거대 언어 모델은 다양한 기업들에 의해 개발 경쟁이 정점으로 가고 있는 단계로 구글, MS, 아마존, 페이스북-메타처럼 독점 지대를 확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생성 인공지능은 이미 다양한 플랫폼과 서비스에서 사용되기 시작해, 커먼즈를 인클로저하고 수많은 비임금 노동의 잉여를 빨아들이는 알고리즘 자본주의의 새로운 블랙홀로 부상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인공지능이 대단한 기술 혁신이나 패러다임 전환처럼 이야기되고 있지만 결국은 인간 노동의 지층 위에서 융기한 변곡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인공지능은 스스로 잉여가치를 만들 수 없다
인공지능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본격적으로 도입된다면 문화 산업뿐 아니라 지식 경제 전체에 걸친 일자리 충격이 찾아올 것은 자명하다. 제조업과 육체노동 영역에서 지구 산업은 이미 자동화로 인해 실업과 경제 성장 둔화가 장시간 지속돼 왔다. 지적이고 창조적인 산업 부문도 이미 풍전등화 상태다. 생성 인공지능의 강력한 자연어 및 기계 언어 구사 능력, 이미지·텍스트·사운드의 능동적인 문해와 출력 능력으로 인해 디자인, 창작, 컴퓨터 공학, 의학, 법률과 관련된 업무뿐 아니라 사무나 기획과 관련된 모든 분야도 대체될 수 있다. 알고리즘 자본주의는 인공지능 범용화와 함께 증기 기관·컴퓨터·인터넷으로 인한 산업 부문 변화에 준하는 소용돌이에 빠져들 것이다.
아마라의 법칙(단기적으로 기술의 효과를 과대평가하고, 장기적으로는 그 효과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고려한다면, 당장은 수많은 택시 기사나 영상 편집자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칼 베네딕트 프레이(Carl Benedikt Frey)에 따르면 인공지능 같은 큰 경제 효과를 가진 기술이 전면화되더라도 다양한 사회적 요인(노동자와 대중의 기술 저항, 국제 정치 외교, 이전 기술 인프라의 폐기 비용 등)과의 협상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전환은 긴 시간 동안 진통을 겪으며 진행된다.[7] 따라서 4차 산업 혁명과 같은 구호는 시장을 한시바삐 독점하고 싶은 기업가들과 실적 경쟁 공포에 몰린 테크노크라트들이 성급하게 결재하는 파일명이다. 기술은 성능만 중요한 게 아니라 생산성 향상 실현을 위한 조직, 과정, 전략상의 보완적인 변화를 함께 수반할 때 본질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다.[8] 그렇다고 해도 연 4만 달러 소득의 트럭 운전사가 일자리를 잃게 되면 학위가 없기 때문에 비슷한 소득의 사회 복지사 일자리 대신 2만 달러짜리 수위 일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냉혹한 현실은 어쩔 수가 없다.[9] 실제로 이는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플랫폼과 알고리즘, 인공지능의 화려한 환등상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 고스트워크(Ghostwork)에 종사하는 데이터 라벨링 작업자들은 학력이나 스펙과 상관없이 가장 열악한 조건 속으로 내몰린다. 메리 그레이(Mary Gray)와 시다스 수리(Siddharth Suri)는 실리콘밸리의 아웃소싱 전담 도시인 인도의 하이데라바드(Hyderabad)에 위치한 플랫폼 기업 미세 노동자들에 관한 질적 연구를 진행해 흥미로운 결과를 얻었다. 학사 학위 이상의 젊고 유능한 사람들이 일시적이고 짧은 주기의 온디맨드 작업 유형에 기꺼이 참여할 뿐 아니라 스스로 시간당 작업의 가치를 0.98달러에서 2달러 사이로 저평가한다는 것이다.[10] 이 악순환은 우리가 4장에서 목격한 알고리즘 노동과정에도 있지 않았던가? 자신의 작업에 스스로 시간당 1만 원의 가격을 매겨 플랫폼에서 구직하는 영상 편집자들, 알고리즘에 간택받기 위해 수많은 부수 작업을 감내하는 사람들이 처음 목표했던 일자리는 안정적인 삶을 꾸릴 수 있는 정규직, 방송 피디나 프로그램 기획자였을 것이다.
요컨대 알고리즘과 인공지능 혁신 이후 일자리는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늘어난다. 그러나 이는 좋은 일자리들이 점차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 더 많은 나쁜 일자리들이 들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랫폼과 알고리즘이 파이 조각을 빵 부스러기로 뭉갠 다음 테이블 아래에 뿌리면, 줄 선 사람들이 차례로 허겁지겁 핥아먹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저술가인 애런 배너너브(Aaron Benanav)는 이런 맥락에서 기술 혁신으로 인해 일자리가 파괴될 것이라는 자동화론자들의 전망을 비판한다.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낮은 노동 수요로 인해 실직 상태에 놓인다기보다 정상 임금보다 낮은 임금으로 정상 조건보다 열악하게 일하도록 강요당하는 현실이 잉여노동 인구를 증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저임금 국가에서 국제 분업 비중을 높이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서비스 부문에서 저임금과 생산성 약화, 불완전 고용 증가를 불러온다. 비정규직, 임시 고용직, 제로 아워 계약, 프리랜스 및 긱 노동 등 불안정성의 증대는 오늘날 고용의 종언에 방점을 찍고 비고용 노동 형태들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11]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 ‘기계와 대공업’장에서 기계류의 도입으로 해당 부문의 노동자들이 쫓겨나지만, 사회 전체 차원에서 보면 다른 부문에서는 오히려 (질 나쁜) 고용이 늘어날 것임을 이미 고려하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주목한 것은 자동화가 진행된 산업이 그와 연결된 주변부 산업을 식민화하는 현상이다. 증기 기관과 공작 기계의 도입은 공장의 숙련 노동자들을 내쫓았지만, 그에 비례해 더 열악하게 노동하는 탄광과 금속 광산 일자리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기계화 양모 공장의 확산과 더불어 아프리카 노예 무역이 큰 폭으로 늘어났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기계제에 서 지나치게 높아진 생산력은 나머지 다른 생산 부문에서 내포적으로나 외연적으로나 노동력 착취를 증가시키고 노동자 계급 가운데 비생산적 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비중을 더욱 증가시킨다.[12]
요컨대 가장 발전된 기계류가 노동자로 하여금 선사 시대 사람이나 단순 노동자들이 조야한 도구를 가지고 수행했던 것보다 더 오래 노동하도록 강요한다.[13] 알고리즘과 인공지능 같은 새로운 지능 정보 기술은 스스로 잉여가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잉여가치의 비대칭적 분배를 더욱 가속하는, 물질화된 이데올로기 그 자체다. 이제 인간 노동은 점점 유령처럼, 실재하지만 만져지지 않는 어떤 흔적 비슷한 것이 되어 간다. 수많은 미세 노동자들과 이들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실업 인구가 존재하지만, 편향적 알고리즘과 효율 만능주의적 통계 모델은 이들을 비가시화하며, 인공지능이 마치 스스로 가치를 생산하는 것처럼 착시 효과를 만든다. 인공지능은 데이터와 신경망으로 직조된 기계적 자연과 인간 지력 사이의 대사를 촉발하는데, 이 모든 과정은 결국 과거에 행해진 미세 노동과 뒤엉켜 신경망 차원에서의 분업을 이루게 된다.
드디어 우리는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이 잉여가치를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답에 도달하기 시작한다. 생성 인공지능이 프로그래머의 코딩 작업을 대체하고, 죽은 가수들의 목소리를 학습해 영원히 노래하도록 만든다면 그것은 가치를 가지는가? 이것과 관련해 마르크스가 ‘영구 기관’을 통해 수행한 사고 실험을 살펴보자. 영구 기관은 열역학 제1의 법칙을 무시하는 기계로, 한 번 에너지가 주입되면 영원히 작동한다. 그런데 이 기계는 작동하는 매 순간 마모될 것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외부로부터의 다른 에너지 공급은 불가피하다. 즉 역설인 셈이다. 마르크스는 영구 기관이 설령 가능하다 쳐도 생산물로부터 이전될 가치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데 비용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지 카펜치스(George Caffentzis)에 따르면, 이 기계는 분업과 협업, 과학적 힘과 인구 증가와 같은 사회적 힘과 결합할 것이지만 스스로는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14] 우리는 사용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힘과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인공지능이 자력으로 명령을 내려 동력기를 조작할 수도 있고, 그로 인한 자동화 피드백 루프가 유용한 사용 가치가 만들어질 수는 있겠지만 잉여가치가 발생하려면 노동과정과 가치 실현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런데 영구 기관(혹은 인공지능)의 생산물이 자본주의적으로 가치를 실현하려면 시장에서 교환되어야 한다. 클릭 몇 번으로 만들어진 인공지능 음악, 간단한 프롬프팅으로 만들어진 달리(DallE)의 생성 이미지는 유용하게 써먹을 수는 있어도 돈 받고 판매하기는 어렵다. 다른 사람도 별 수고를 들이지 않고 그것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인공지능이 출력한 글을 보고서나 제안서 등에 적절히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판매하긴 어려울 것이다. 다른 사람도 별 어려움 없이 비슷한 수준의 글을 출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과 결부한 작업은 직접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정과 뒤엉켜서 교환될 수밖에 없다.
영구 기관이 실존한다면 인간은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할 것인데, 영구 기관이 아무런 에너지 소모 없이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일을 전혀 하지 않아도 되거나, 아니면 일을 하지 못해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 사라지거나이다. 어느 쪽이건 가치 실현은 불가능하다. 전자 유토피아다. 노동하지 않아도 재화가 넘쳐나므로 교환을 할 필요가 없다. 이 경우 자본주의는 사라져 있을 것이다. 후자는 디스토피아다. 노동 자체가 불가능하고 따라서 인간도 필요가 없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기계들이 인간을 노예로조차 부리지 않고 배터리로 사용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어느 쪽이건 가치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이 모순은 마르크스가 《자본론》 3권에서 설명하고 있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과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에 직접 결부된다. 우리는 이미 4장에서 이것과 관련한 논의를 펼쳤다. “가변 자본에 대한 불변 자본 비율의 상승은 잉여가치율이 불변일 때, 필연적으로 이윤율의 하락을 가져온다.”[15] 경쟁 시장에서 한 산업 부문의 자본이 자동화 기계를 생산 시스템에 도입해 단기적으로는 이윤율 상승을 꾀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이윤율은 감소한다. 다른 경쟁자도 앞다퉈 기계를 도입해 자본의 유기적 구성 비율을 늘릴 것이기 때문이다. 작업장에서 밀려난 잉여 인구가 실업 상태에 빠져 구매력이 낮아지면, 상품이 가치를 실현하는 비율도 점차 감소하면서 이윤율도 하락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이윤율 저하 경향을 자본주의의 ‘일반 법칙’이라고 설명하면서도 그것이 ‘불변 법칙’이라고 규정하지는 않았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윤율 저하 법칙이 아니라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이다. 마르크스가 그다음 장에서 ‘상쇄 요인’, 즉 이윤율 저하 경향에도 불구하고 자본 운동이 유지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이유다.
자본은 이윤율 저하를 극복하기 위해 다섯 가지 상쇄 경향을 만들어 낸다. ①노동 착취도 증가, ②노동력 가치 이하로의 임금 인하, ③불변 자본 요소의 저렴화, ④상대적 과잉 인구, ⑤외국 무역이 그것이다. ①을 통해 노동 시간을 늘리거나 노동 강도를 올리고, ④를 통해 ②를 실현, 연구 개발을 진행해 ③을 달성하며, ⑤를 통해 저렴한 노동 지역과의 국제 분업을 꾀함으로써 자본은 필사적으로 잉여에 매달린다.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에 의해 인지 자동화와 ‘사고의 자동화’까지 도달하더라도,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비임금·자기 착취적 잉여노동 영역으로 추방당하는 것이다.
설령 플랫폼-알고리즘 신경망이 더 정교화되어 인공 일반 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이 등장하더라도 그것은 영구 기관이 아니다. 전력을 소모하고, 학습할 수 있는 데이터가 있어야 하며, 데이터를 생산 및 재생산하는 네트워크를 필요로 한다. 전력은 인간 노동으로부터 온다. 데이터 학습은 인간 분류 작업으로부터 온다. 반도체와 광섬유는 자연 원료와 인간 작업으로 구축된다. 기계가 잉여가치를 자아내려면 인간 노동과 생산 관계로 연루되어야 한다.
만약 인공지능이 발달해 의식을 획득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까? 이는 외삽법의 영역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만이 의식을 가지고 합목적적으로 노동하는 존재라는 마르크스적 공리는 깨지게 된다. 우리는 지난 장들의 논의를 통해 플랫폼-알고리즘 신경망이 공통부의 장, 커먼즈였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의식을 가지거나 그에 준하는 인공 일반 지능이라면 불변 자본이나 커먼즈가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에 대비되는 ‘노동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닉 다이어-위데포드(Nick Dyer-witheford)는 이 외삽법을 두고 이렇게 설명한다. “인공 일반 지능은 처음에는 개인 소비자에게 상품처럼 판매되어 소비와 사회적 재생산의 과정으로 들어가겠지만, 자본가가 AGI를 구입한다면 이는 생산 과정에 투입될 것이고, 불변 자본으로서 그것이 생산하는 상품에 가치를 이전시키며, 사회적 노동 시간을 줄여 상품을 값싸게 만드는 수단이 된다.”[16] 즉 인공 일반 지능은 커먼즈에서 빚어진 상품인 동시에 생산 수단이기도 하면서 노동 도구이기도 한 매우 복합적인 위상을 가지는 셈이다. 그러나 무엇으로 규정되어도 인공 일반 지능은 스스로 잉여가치를 만들지는 못한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인공 일반 지능은 상품이나 생산 수단이 아니라 ‘노동력’이 되어 판매되어야 한다.
다이어-위데포드가 제시하는 외삽법의 예는 카렐 차페크의 희곡 《R.U.R.(Rossum’s Universal Robot)》에 등장하는 기계 인간이다. 24시간 내내 먹지도 자지도 않고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창조된 이 로봇은 처음에는 순순히 노동만 하지만 이후에는 시를 읽고 그림을 그리는 등 자의식을 획득하고, 인간에 반란을 일으킨다. RUR의 로봇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는 자기들의 생산물이 만들어 낸 가치가 자신에게 이전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였다. 요컨대 인공지능이 잉여가치를 스스로 만들어 내려면 자본과 노동의 적대 관계 속으로 들어와, ‘프롤레타리아가 되어 생존을 위해 자유롭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어야’ 한다.[17] 여기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하나는 인공지능이 인간과 똑같은 의식적 실존으로서 법적으로 인격을 부여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존을 위해(지속적으로 전력과 데이터를 공급받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인간에게 판매하는 ‘사회적 필요 노동의 하중’을 아틀라스처럼 짊어지는 것이다. 결국, 이 외삽법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는 인공지능이건 알고리즘이건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는 불변의 진리일 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외삽법을 통해, 그리고 현재의 거대 언어 모델과 인공지능 발전의 정도를 볼 때 지금껏 노동가치론이 보지 못한 맹점이 드러나게 된다. 플랫폼-알고리즘 신경망은 커먼즈의 기생체로서, 기계 자연력을 형성해 인간 노동으로부터 지대를 창출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 같은 의식이나 영혼을 획득하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기계 지성을 형성하는 중이다. 다시 말해 인공지능은 스스로 노동력이 될 수는 없어도(인간이 될 수 없으므로), 비인간노동이 될 수는 있다. 우리는 상품으로서의 노동력과 노동을 구분해야 한다. 인간 노동이 인간의 지성을 활용해 자연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듯 비인간노동 또한 기계 지성을 활용해 기계적 자연(플랫폼-알고리즘 신경망)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리해 보자. 잉여가치는 오로지 인간 노동과 자본 사이의 적대 속에서, 즉 인간이 행하는 노동력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인공지능이라는 비인간 행위자와 인간 간의 기계 작업(예컨대 프롬프팅이 대표적이다)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제3 섹터, ‘비인간노동’을 창발한다. 알고리즘에 간택받기 위해 자기 착취적 작업을 감내하는 작업자들의 예제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자본은 점점 비인간 인지 요소들을 생산에 도입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알고리즘적 전환이란, 결국 인간에 준하는 비인간 행위자로서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 생산 전반에 도입되는 역사적 과정이다. 이는 미래 계급투쟁과 전선이 인간중심주의가 아닌 인간-비인간의 아쌍블라주로 전환해야 함을 시사한다.
제3 섹터 : 비인간노동과 신경망 분업
지금까지 역사 유물론은 인간을 유일한 노동 행위자로 인식해 왔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두뇌와 물리적으로 연결되는 시나리오를 제외한다면 인간은 유일무이하게 의식적 생명 활동을 바탕으로 노동하는 존재다. 인간은 다른 종과 다르게 생명 활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신진대사 작용을 하고, 이는 개인적 활동이 아닌 사회적이고 실천적 활동이며, 인간의 유적 본질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 활동 그 자체를 의욕이나 의식의 대상으로 한다. 인간은 의식적인 생명 활동을 영위한다. 동물은 직접적인 육체적 욕구로 생산한다. 동물의 생산물은 그대로 물질적 신체의 일부가 되지만, 인간은 전체 자연을 재생산하고 자신의 생산물에 자유롭게 대립한다.[18]
그런 면에서 최근 미디어와 공학자들이 설레발 치며 주장하는 ‘인공지능이 의식을 획득했다’는 명백한 거짓이다. 인공지능이 의식을 획득했다면, 생존하기 위해서 노동하는 동시에 인공지능들 사이에 사회적 관계를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 일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GPT에게 일하지 않으면 전원을 꺼 버리겠다고 협박하지도 않고, GPT는 생계를 연명하기 위해 인간에게 봉사하지도 않는다. 간단히 말해 인공지능은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인공지능 비판론자들이 우려해야 하는 부분은 인공지능이 의식을 획득할 수 있는가,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컴퓨터 광섬유와 뉴런의 전기 신호가 직접 데이터를 송수신하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가 알고리즘 자본주의의 인공지능 국면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이처럼 자본과 노동의 변화하는 행위성의 구조에 있다. 인공지능은 기존에 인간 육체와 두뇌, 기계와 정보를 다루는 노동 행위성을 극적으로 바꿔 낸다. 뉴럴링크를 통해 인공 일반 지능과 인간 두뇌가 물리적으로 연결되는 경우 인공지능 자체가 하나의 물질화된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가 되어, 주체를 호명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인간은 통제받는다는 느낌조차 받지 못하며, 인공지능과 하이브 마인드로 연결된 다중 통제의 영역으로 진입할 것이다. 뉴럴링크가 인공지능과 인간을 일대일로 접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명 네트워크를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론》은 인간 노동이 꿀벌이나 거미의 작업과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인간 건축가는 집을 짓기 전에 먼저 머릿속에서 집을 짓는 과정을 거친다. 컴퓨터와 연결된 두뇌는 이런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이 네트워크에 신호를 보내, 머리에 뭔가를 그리기도 전에 집을 짓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비로소 거미나 꿀벌과 다를 바 없는 물자체로 격하하게 된다.
꼭 컴퓨터와 두뇌가 연결되지 않더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현재 수준의 생성 인공지능만 해도 대규모 집합적 정보·데이터를 동반하면서 상징과 해석 능력 자체를 탈구시키며, 자본-노동 사이에 공고하게 짜여 있던 행위성의 기표계를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기계적인 방식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 이미 항간에 퍼지고 있는 프롬프팅(prompting)이라는 용어는 대상을 재현하거나 해석하는 방식, 예컨대 과거 네그리· 하트 이후 자율주의자들이 정의한 비물질적 노동과정조차도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프롬프팅은 인간의 신경망과 기계의 신경망에 다리를 놓는 새로운 지적 행위로서, 생성 인공지능이 지닌 방대한 학습 데이터를 특정한 방식으로 출력하기 위한 인간 행위성이자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낯선 노동의 시금석이다.
아직 인간 신경망과 기계 신경망은 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이 기계의 방대한 학습 데이터로부터 원하는 결과물을 출력하기 위해서는 그 기계와 정교하게 소통(혹은 명령)할 수 있는 프롬프팅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행위가 아니다. 그림을 그리고, 문맥을 이해하고, 소리를 듣고, 그에 따른 적절한 비유나 상호 작용을 기계로부터 끌어내는 능력으로서 인간이 도구와 신체를 사용해 자연을 변형시키는 것과 버금가는 행위(즉 노동)로 부상했다. 프롬프팅은 새로운 행위와 예술의 가능성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노동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것도 인간의 신경 다발과 기계의 네트워트 신경 다발이 결합하는, 인간-비인간이 뒤섞인 노동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전개한 인간-기계(생산 수단)-상품-잉여가치 사이에서 자본과 노동이 행위성으로 엮이는 구조를 재구성해야만 한다. 자본-노동 외의 제3 섹터, 비인간(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의 행위성이 인간 노동과 잉여가치 운동을 엮어 내는 경로들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배달의민족이 최근 도입한 인공지능 배차 시스템과 라이더들의 조직 라이더유니온 간 분쟁은 이를 대표적으로 암시한다. 인공지능 배차 도입 이후 배차에 드는 시간은 단축되었지만 배달 예상 시간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짧아졌다. 이상하게 생각한 라이더유니온은 거리 측정기를 이용해 실제 배달 시간과 거리를 측정하며 데이터를 확보했고, 인공지능 배차 시스템이 도로 상황이나 신호, 우회로 등을 고려하지 않고 직선거리로 배달 예상 시간을 계산하고 있음이 거의 확실해졌다. 라이더유니온은 사측에 알고리즘의 메커니즘을 공개하고 수정하라 항의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것은 우리가 아니라 알고리즘에게 따지시오’였다. 배달의민족 측은 알고리즘이 영업 비밀이라며 공개를 거부했고, 라이더들은 결국 개인 정보 열람 청구를 우회해 알고리즘을 법정에 세우는 방법으로 싸워 나갈 수밖에 없었다.[19]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인 명제, 자본가-노동자 사이의 계급 적대를 비인간(인지 자동화 신경망)이면서 노동의 행위성을 생성하는 제3 섹터로서 인공지능의 지위를 재고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는 인공지능이 스스로 노동한다거나 의식을 가지는 것과 별개의 문제다. 비인간노동의 등장이 핵심이다. 비인간노동은 자본 혹은 인간에 소속된 노동의 행위성을 제3 섹터인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의 신경망에 밀어 넣어, 인간 뉴런 활동을 기계 신경망과 결합하는 힘으로 현상된다.
우리는 이를 신경망 분업(Neural network division of labour)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은 체화된 집합적 지능이자 자원(주석, 희토류), 연료(전기), 인간 노동(데이터와 라벨링)으로 이뤄진 구성물이다. 또한 인공지능은 단순한 기술적 대상이 아니라 기술적 행위이자 사회적 행위이며, 정치이자 문화다.[20] 인공지능은 기계인 동시에 기계 지성이며, 물질인 동시에 비물질이다. 이 점에서 인공지능은 생산 수단으로서의 기계의 위상을 넘어선다. 기계류는 도구로부터 출발해 노동력(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상품으로 구매한)과 결합하면서 생산 수단이 되며, 동시에 자본가-노동자 간 비대칭적인 생산 관계를 만드는 물리적 힘으로 현상된다. 이 힘은 노동과정을 만들어 낸다. 노동과정에서 생산 수단과 마주한 노동은 특정한 행위성의 네트워크를 만드는데, 이는 분업이다. 분업은 기계를 중심으로 한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 간의 협업을, 다시 말해 노동으로 이뤄진 사회적 관계를 자아낸다.
인지 자동화가 기계 지성으로까지 진행돼 인간 의식에 대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정점에 도달하면, 인간 육체와 기계 부품 간의 분업은 인간 뉴런 신경망과 기계(플랫폼-알고리즘-인공지능)들의 신경망 간의 분업으로 전화하게 된다. 신경망 분업은 알고리즘과 인공지능(비인간노동 행위성), 인간(노동력) 사이에서 결정화되는 프로세스다. 인간과 알고리즘 간의 분업, 인간과 소프트웨어 간의 분업, 인간과 인공지능 간에 이뤄지는 신경망 분업은 인간 고유의 노동력을 비인간노동의 행위성과 교차시켜 생산물을 지대로 변환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사유로서의 리좀을 상정했지만, 리좀을 형성하고 탈영토화하는 것은 인간 주체성이 아닌 자본의 행위성이었다. 물리적 노동력이 주가 되는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가치의 영토는 중앙 집중형이었고, 수목적이었다. 뿌리에서 줄기로, 가지로, 잎사귀로 이어지는 선형적이고 중앙화된 자본주의는 뿌리도, 줄기도, 잎사귀도 모두 하나로 뒤엉킨 채 무자비하게 뻗어 나가는 덤불, 리좀의 자본주의가 된다. 리좀은 울타리와 국경을 넘어 전 지구의 네트워크에 현상된다. 그 네트워크의 신경망에 접속된 채, AI의 미로 같은 지도 위에서 우리는 데이터 라벨링·심층 학습·메타데이터 생성 작업과 탈상품화된 잉여노동(그럼에도 생산력을 증대시키는)에 연루되고 있다. 이 제3 섹터는 자본과 노동의 중간 지대이자 산 노동과 죽은 노동이 뒤섞이고, 인간 노동력과 비인간노동의 행위성이 경합하거나 결합, 혹은 전자가 후자에게 예속되는 중간계이다.
전통적인 노동가치론의 관점에서 보면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은 생산 수단이 아니다. 인공지능이 생산 수단이려면 자본가는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고, AI와 임노동이 결합된 분업으로 상품을 만들어 낸 다음 직접 판매해서 가치를 실현하는 순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상용화된 인공지능 수익 모델을 보면 플랫폼 사업과 마찬가지로 지대 추구 경향을 보인다. GPT, 미드저니, 딥엘, 스테이블디퓨전, 달리-2, AIVA 등 주요 생성 인공지능은 모두 월 15~20달러의 구독료 모델을 운영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발생시키는 지대는 자연물의 생산성에 기초한 일반적 차액 지대와 달리 그 기원이 사람들의 공동적인 참여 행위(거대 언어 모델의 근간)이다.[21]
또한 AI 작업의 생산물들은 그 사용 가치는 확실하지만, 교환 가치는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많은 사람이 생성 AI로 이미지, 텍스트, 사운드를 만들어 내면서 여러 용도로 활용하고 있음에도 그 결과물들이 시장에서 상품으로 적극적으로 교환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AI가 쓸만한 걸 만들어 낸다 해도, 그 사용 가치를 가치와 혼동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AI로 사무 작업 또는 창의 노동에 해당하는 부문에서 능률을 올리는 용도로는 사용할 수 있어도 그 생산물을 상품으로 교환하기는 어렵다. 아직까지 그것은 인간이 피땀 흘려 만들어 낸 결과물이 아니라 기계로 손쉽게 뽑아낸 어떤 모조물이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그것은 한계 비용 0에 수렴하는, 여기저기 널린 나뭇가지나 돌멩이 같은 것이 된다). 최근의 AI 물결은 창의적이고 지적인 영역에서 잠재적으로 생산력 확대를 촉진하고 있지만, 그것 자체가 잉여가치를 만들지는 않음을 역설한다.
요컨대 인공지능은 비인간노동력을 만들지는 않지만 제3 섹터, 즉 비인간노동 영역을 생성한다. 비인간노동력(Nonhuman labour power)이 아니라 비인간노동(Inhuman labour)이다. 비인간노동을 이루는 근간은 힘(power)이 아니라 행위성(agency)이다.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비판》의 첫 문장을 노동이 모든 부의 원천이 아니라는 판결로 시작한다. 인공지능 생산물의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를 혼동해서는 안 되듯이, 알고리즘 및 인공지능이 자아내는 노동과 노동력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노동 자체는 하나의 자연력인 인간 노동력의 발현일 뿐이며, 인간이 노동 수단 및 노동 대상의 일차적 원천인 자연에 대해 소유자로서 관계를 맺는 한에서만, 즉 자연을 인간에 속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한에서만 인간의 노동은 사용 가치의 원천이자 부의 원천이 된다.”[22] 노동과 노동력을 엄밀히 구분하는 마르크스의 접근은 알고리즘 자본주의 인공지능 국면에서 우리가 더욱 구체화해야 하는 부분이다. 마르크스는 이어서 ‘자본가들이 노동에 초자연적인 창조력이 있다고 덮어 씌운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요즘 인공지능 때문에 일자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무용 계급(useless class)이 생겨난다던가, 인공지능이 예술부터 과학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서 인간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다는 등의 기술 간질병 현상을 보면 여전히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은 생성 인공지능이 틀린 답을 정답처럼 말하는 현상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초자연적인 힘으로 인간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다 믿는 환각이다.
인공지능과 거대 언어 모델 자체를 만드는데 투입되는 지구적인 미세 노동, 배달의민족과 라이더유니온 사이의 갈등에서 보이는 제3 섹터 비인간노동의 파열(인간 노동력과 비인간노동의 부조화)이 보여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이제 우리는 자본이 인간과 대면하지 않고 제3 섹터를 통해 하중을 부과하는 상태, 비인간노동을 진지하게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미세 노동은 더 이상 노동자들이 서로 연대하거나 자본가들과 직접 부딪칠 수 없는 불능 상태를 보여 준다. 자본은 알고리즘과 컴퓨터 인터페이스에 작업을 할당하고, 노동자는 그 안에서 작업을 수행한다. 기술철학자 육휘Yuk Hui가 주장하듯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에 기반한 기술 환경은 인간이 사물과 지식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인간중심주의적 생각에 종언을 고한다.[23] 인간은 앞으로 기술 체계의 리듬에 심리적, 물질적으로뿐 아니라 인지적으로도 적응해야만 하는데, 온갖 종류의 센서, CCTV, 패턴 인식 기계가 새로운 형태의 알고리즘 예지를 자아내며 행위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24] 비인간 사물, 기술 아티팩트, 아키텍처가 렌더링되는 방식이 곧 행동과 경험을 잉여로 흡수하는 방식이 되어 사물들의 네트워크가 주체에게 그 네트워크를 강요해 행위를 발생시킨다.[25]
비인간노동은 결국 자본의 완충 지대 역할을 할 것임이 틀림없다. 인공지능과의 상호 작용으로 만들어진 생산물은 직접적인 상품 교환의 대상은 아니지만, 신경망 분업은 사회 전체의 생산력을 끌어올리고 이윤율을 상쇄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생성 이미지를 디자이너들이 활용하고, 챗GPT가 뽑아낸 문구를 카피라이터들이 약간 손본 후 홍보 문구로 쓰는 등 관공서·기업의 단순 사무 업무에서 창의 노동(영상 편집, 일러스트, BGM, 극작, 작곡, 콘티 제작, 스토리보드, 웹툰)에 이르기까지 그 효율은 더욱 증대될 것이다. 비인간노동과 인간 노동력 간의 신경망 분업은 잉여를 늘리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즉 정규 고용과 비정규 고용·비임금 노동 전반에서 상대적 잉여가치 착취를 심화시킨단 이야기다.
정규 고용 부문은 이렇게 변한다. ‘생성 인공지능이 있으니 그깟 디자인이야 30분이면 할 수 있잖아? 남들은 다 구독료 내고 쓰던 걸.’ 비정규 고용·비임금 노동 부문은 이렇게 된다. ‘생성 인공지능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다른 분들은 다 이 단가에 서너 건씩 동시에 작업하고 계세요. 이 보상이 불만이시면 계약하지 마시든가요. 더 싸게 할 분들이 많으니까요.’ 상사가 시켜서, 회사 방침이 바뀌어서, 법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인공지능이라는 마법 같은 단어에 담긴 비인간노동 행위성이 우리를 굴종시킨다.
이는 그나마 일자리라도 있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미래고, 여기에서조차 밀려난 잉여인구는 분당, 건당으로 관리자형 알고리즘이 할당한 미세 작업이나 플랫폼 노동으로 밀려나 각자도생하는 수순을 맞이한다. 인공지능으로 누구나 손쉽게 작업할 수 있으므로 간편하게 다른 작업자로 대체할 수 있고, 노동력의 가격을 평가절하하기도 쉬워진다. 인공지능의 ‘초자연적 창조력’으로 포장된 이 힘은 결국 노동력을 탈상품화해 수탈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고용주들이 부담해야 했던 채용, 연수, 재교육의 비용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채용·검토·보수 지급 업무마저 자동화하게 된다.[26] 이광석이 지적하듯이, 이 현상이 가속화되면 정규직 상층부와 중간층의 관리직·자영업자 부분이 크게 쪼그라들고, 이들 대부분이 비정규직과 플랫폼 노동의 하류 노동 계층으로 흡수되는 ‘자동화된 불안정성’이 미래 상수가 될 공산이 크다.[27] 이것이 인지 자동화와 신경망 분업이 인공지능이란 신기루로 보여 주는 미래상이다.
인지 자동화는 플랫폼-알고리즘-인공지능으로 짜인 신경망을 통해 더 파괴적인 분업을 조장하고, 인간의 인지를 죽은 것(비정형 데이터)로 뒤덮어 그 실제 가치를 자영업·하도급·하청 방식으로 은밀히 빨아들인다. 우리는 여기에 맞서 싸울 것인가? 노동력이 아직 상품이던 시절에는 그래도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전선을 만들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제3 섹터라는 늪지대를 건너지 않으면 우리는 자본가와 만날 수조차 없게 돼버렸다. 이제 전 세계의 인민은 알고리즘 자본주의에 맞서 양면 전선을 구축해야 하는데, 한쪽은 자본가 계급이 될 것이고 다른 한쪽은 자본가들이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에 일임한 제3 섹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