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징후
변화: 중국 당국이 자국 기업들에 엔비디아의 AI 칩을 사용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징후: 우리는 AI의 미래를 실리콘밸리에서 읽어내고자 한다. 그러나 그 미래는 만리장성 너머에서도 움트고 있다.
H20 금지령
전 세계가 중국산 티셔츠를 입던 시절이 있었다. 브랜드는 달라도 상품의 국적은 같았다. 풍요의 상징, ‘MADE IN CHINA.’ 세계의 공장은 멈추지 않았다. 중국의 값싼 노동력이 전 세계의 물가를 끌어내렸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다. 세계 경제의 생산량을 끌어올렸던 중국은 이제 미국의 가장 큰 위협이다. 군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렇다. 미국인들은 중국의 이커머스 업체, ‘테무’와 ‘쉬인’에서 쇼핑한다. 낡은 페이스북을 떠나 틱톡에서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낸다. 이미 중국은 미국을 잠식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경쟁자를 용인하지 않는다. 8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무너뜨렸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 미국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보이지 않는 전쟁 중이다.
AI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중국을 미래의 기술로부터 고립시키고자 한다. 현실적인 이유도 충분하다. 지난 2022년 8월 이후 미국 상무부는 중국 군대의 사용 가능성을 이유로 첨단 AI 반도체의 대중국 수출을 금지했다. 이제 중국이 아무리 돈을 싸 들고 줄을 서도 AI 연구 및 개발을 위한 엔비디아의 H100 GPU는 살 수 없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H20 칩이다. H100을 기본으로 설계했으며, 성능을 5분의 1 수준으로 낮췄다. 물론, 중국의 연구자들에게는 성에 차지 않는 성능이다. 중국이 엔비디아의 첨단 AI 칩을 ‘
어둠의 경로’를 통해 밀수하고 있는 이유다.
그런데 중국이 H20 불매운동에 나섰다. 중국 규제 당국이 H20 GPU를 구입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창구 지침’을 하달한 것이다. 창구 지침은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다. 법적 강제력은 없다. 하지만 중국에서 기업을 하는데 공산당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강제력 없는 권고 사항이지만, 강제력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장 엔비디아에는 타격이 불가피하다. 엔비디아는 올해 중국에서 100만 대가 넘는 H20 칩을 공급할 예정이었다. 120억 달러의 매출 규모다. 다만, 더 큰 일 난 것은 중국의 AI 연구자들, 빅테크 기업들이다. 실리콘밸리는 질주하는데 중국만 고립되어 AI 경쟁에서 뒤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국 당국도 상황은 알고 있다. 그런데 그나마 가뭄의 단비라도 되었을 엔비디아의 H20 칩을 금지했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苦盡甘來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제제가 시작된 이후, 중국은 차근차근 반도체 공급망을 내재화하고 있다. 내년까지 반도체 자급률 70퍼센트를 달성하는 것이 목표다. 중국 당국은 천문학적인 보조금도 쏟아붓고 있다. 3440억 위안 규모의 투자 기금을 추가로 조성하기도 했다. 우리 돈으로 약 64조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돈을 쓴 만큼 결실도 보았다. 미국의 제재를 직접적으로 받는 화웨이가 엔비디아의 H100과 견줄 수 있는 성능의 AI 칩, ‘어센트 910C’를 개발한 것이다. 틱톡의 모기업인 바이트댄스, 검색 엔진 대기업 바이두, 국영 통신사인 차이나 모바일 등이 어센트 910C 구매를 위한 논의를 진행 중이다. 어센트 910C의 공급 시점은 빠르면
10월로 예상됐다. 중국 당국이 H20 칩의 불매를 권고한 시점과 겹친다.
중국 AI 반도체 스타트업들에도 좋은 기회다. 특히, 중국 과학원(CAS) 출신의 천재 형제가 설립한 캄브리콘 테크놀로지스사를 주목할 만하다. 자체 개발한 AI 칩을 화웨이나 알리바바의 스마트폰, 클라우드 서버 등에 공급하며 주목받았지만, 2022년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제제와 함께 부침을 겪었다. 그 결과 2023년에는 대규모 해고 사태까지 겪었다. 하지만 중국 당국의 엔비디아 칩 불매 권고 직후 캄브리콘 테크놀로지스사의 주가는 가격 제한폭인 20퍼센트까지 폭등했다. 중국 당국은 창구 지침에서 H20 대신 화웨이와 캄브리콘 테크놀로지스 등의 제품을 더 사용할 것을 직접적으로 권고했다.
물론, 어센트 910C가 엔비디아의 H100과 견줄만한 성능이라는 것은 화웨이 측의 주장이다. 실제 제품이 풀리고, 성능 테스트를 해봐야 실제 수치를 알 수 있다. 캄브리콘 테크놀로지스 또한 아직은 신생 기업에 불과하다. 하지만, 미국의 제재를 받으며 성능이 좋지도 않은 칩을 수입해야 하는 상황을 감내할 이유는 사라졌다고, 적어도 H20을 수입해 와야 할 이유는 사라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미국의 반도체 제제는 중국을 고립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중국이 독자적인 반도체 기술을 키워야 할 계기를 만들어줬다.
우리는 모르는 중국의 오픈AI
중국은 반도체 기술만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AI 모델 자체의 효율화도 꾀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빅테크들이 돈가방을 들고 엔비디아 앞에 줄을 서는 동안, 중국은 제한된 컴퓨팅 파워로도 더 나은 성능, 더 나은 결과물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몰두한다. 알리바바와 샤오미의 지원을 받는 AI 유니콘 스타트업, ‘01.AI’가 대표적인 사례다. 01.AI의 설립자 카이푸 리는 대만 출신으로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 차이나 사장을 역임했다. 경영자의 시각을 갖춘 만큼 AI 개발에서도 실용적인 노선을 선택했다. 생성형 AI 모델을 개발하는 데에 집중하는 대부분은 AI 스타트업과는 달리, 실용적인 AI 서비스를 함께 만드는 전략이다. 그 결과가 지난 5월 런칭한, 자칭 ‘MS Office의 AI-First 버전’인 ‘Wanzhi’이다. 중국이 AI 경쟁에서 미국을 따라잡으려면 ‘연구’가 아니라 ‘실용’에 전략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 카이푸 리의 주장이다.
오픈소스 LLM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는 중국의 AI 스타트업 ‘DeepSeek’은 최고의 효율로 최적의 성능을 내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오픈소스 모델 DeepSeek-V2는 MoE (Mixture-of-Experts) 아키텍처를 사용한다. 다양한 문제에 맞춰 개발된 여러 개의 ‘전문가 모듈’을 사용해 적은 매개 변수를 사용해 결과를 낼 수 있도록 했다. 또, MLA (Multi-Head Latent Attention) 구조를 통해 입력 데이터를 압축해 추론 속도를 높였다. DeepSeek의 AI 모델은 품질 대비 비용 경쟁력에서
최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더 창의적인 방법으로 효율을 추구하기도 한다. 최고의 칩으로 데이터센터를 구축할 수 없으니, 여러 개의 데이터센터를 연결해 하나의 생성형 AI 모델을 구축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심지어 다양한 브랜드의 GPU를 하나의 학습 클러스터로 결합할 수도 있다. 이미 바이두도 저성능 중국산 GPU를 여러 개 결합하여 엔비디아 칩과 같은 성능을 끌어내 독자적인 LLM을 훈련하고 있다. 과학의 상상력은 국경과 세관을 쉽사리 뛰어넘는다.
사유
중국은 지난 2017년 ‘중국 제조 2025’라는 이름의 산업 고도화 전략을 발표했다. 그 전략안에 AI에 대한 막대한 지원이 이미 약속되어 있었다. 당시 중국의 차세대 AI 개발 계획에 따르면, 2030년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전 세계 AI 리더에 오르게 된다. 캄브리콘 테크놀로지스 등이 그러한 목표하에 성장하고 기술을 차곡차곡 쌓아온 기업이다. 중국의 전략은 현실화하고 있다. 미국의 견제에도, 영어로 세계를 읽고 듣는 우리는 알아채지도 못하는 새에 중국의 AI 수준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서 각각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 있다. 전 세계에서 활동 중인 1500여 개의 AI 기업 중 750여 개가 중국에 기반을
두고 있다. 생성형 AI 업계의 판을 읽는 우리의 시각은 너무 서구화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