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에 맞선 결사 항전
얼마 전
한 채식주의자가 고깃집에서 벌인 시위로 SNS가 떠들썩했다. 그는 자신을 동물권 활동가라고 소개하면서 식사 중인 사람들을 향해 “육식은 폭력”이라고 외쳤다. 언론은 채식주의자의 극단적인 행동과 그로 인한 피해 사례를 실은 기사를 쏟아냈고, 비난의 댓글이 빗발쳤다.
오늘날 채식주의는 개인적 선택의 문제가 아닌, 채식을 지향하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 간의 갈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채식은 더 이상 단순한 식습관으로 설명될 수 없다. 채식주의자들이 육식과의 전쟁을 불사하는 이유는 단순히 건강이나 미용의 목적이 아닌, 하나의 신념 체계로서 채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채식은 옳고 그름의 문제이고, 개인의 취향이나 입맛을 이유로 양보할 수 없는 이슈다.
채식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사회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채식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윤회(輪迴)를 믿었던 그에게 동물은 인간의 형제와 다름없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학교 내에서 육식을 철저히 금지했고, 채식을 법으로 규정해 도시 전체에 적용하려 했다.
[1] 피타고라스는 시민의 지지를 받는 학자였지만, 그가 주장한 채식주의는 전혀 호응을 얻지 못했다. 지나치게 급진적인 그의 주장은 육식을 선호하는 주류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반 시민이 채식을 실천하기도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오늘날 벌어지는 채식을 둘러싼 갈등도 마찬가지다. 일부 급진적인 채식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진보로 규정하고 주류 문화를 강하게 비판한다. 일반 대중의 실천 가능성은 그들의 관심 밖이다. 인류를 육식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채식주의자들의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육식에 맞선 채식주의의 결사 항전은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채식을 하는 이유
왜 풀만 먹고 살아야 할까? 채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당연하다. 고기를 먹는 것을 하나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현대인에게 육식과의 단절은 낯설다. 채식주의를 타인에게 전파하고 싶다면 먼저 위의 질문에 적절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 채식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득력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일은 채식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의 의무이자 최종 목표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자 중 일부는 건강을 위한 채식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인간의 신체 구조가 육식 동물보다는 초식 동물과 닮았기 때문에 채식이 몸에 이롭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인류의 진화에 기여한 식습관은 채식이 아닌 잡식”이라는 일반론으로 반박된다. 육식을 옹호하는 이들을 설득하기는커녕 채식의 효용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논리다.
또 다른 채식주의자들은 보다 현실적인 근거를 든다. 육식 문화가 전 세계의 경제와 환경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육류 생산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공장식 축산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다. 고기를 대량으로 생산한다는 측면에서는 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공장식 축산은 쇠고기 단백질 1킬로그램을 생산하기 위해 21킬로그램의 식물성 단백질을 소비한다. 가축을 키우기 위해 곡물을 쏟아붓는 것이다. 같은 단위의 공간에서 생산한다고 가정했을 때, 공장식 축산은 곡물 재배보다 5~50배의 에너지를 요한다.
[2] 사료로 쓰일 곡물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면적의 농경지가 필요하다.
[3] 2018년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실린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 세계 농업용 토지의 83퍼센트를 축산 농가가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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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경제적 비효율성은 심각한 환경 문제로 이어진다. 지구에서 식량으로 길러지는 동물의 증가 속도는 그들을 먹어 치우는 인구의 증가 속도를 상회한다. 감당할 수 없는 수의 가축들이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와 메탄은 지구 온난화의 주범 중 하나다.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60퍼센트가 축산 농가에서 나온다. 가축의 배설물은 토양 오염과 수질 오염을 일으키고, 축산 시설을 위해 건설한 댐과 지하수 설비가 추가적인 환경 문제를 초래한다. 원활한 사료 공급을 위해 개발된 공장식 농업에는 엄청난 양의 화석 연료가 사용되고, 이 과정에서 다량의 질소 산화물과 온실가스가 배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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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무수한 근거에도 불구하고, 경제와 환경을 위해 육식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에는 부족하다. 채식주의가 직관적이고 강력한 당위를 지니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이유가 필요하다. 윤리적 채식주의라고 불리는 신념 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채식을 보편화하기 위한 시도는 학문의 영역, 특히 신념의 근간을 마련하는 윤리학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이루어졌다. 특히 현대 윤리학의 거장이자, 채식주의와 관련해 가장 존경받는 학자인 톰 레건(Tom Regan)과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독창적인 윤리 이론을 통해 채식주의의 근거를 제시한다. 특히 레건과 싱어가 각각 주장한 동물 권리론과 동물 복지론은 현대의 채식주의자들이 신념을 구축하는 기본 틀이다.
고통을 느끼는 존재는 존엄하다
톰 레건은 개체 중심 윤리를 주장한 학자다. 개체 중심 윤리는 생태계와 같이 특정할 수 없는 대상이 아닌, 개별 생명체에 초점을 맞춰 이론을 전개한다. 누군가 “동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면 개체 중심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레건은 동물이 존재 자체로 생명권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동물 권리론을 주장한다.
동물 권리론에 따르면 쾌고(快苦) 감수 능력(sentience)이 생명의 존엄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레건은 개별 생명체가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에 따라 도덕적 지위를 다르게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쾌고 감수 능력은 하나의 내재적 가치
[6]이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모든 생명체는 존엄성과 생명권을 존중받아야 한다. 레건은 돌고래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돌고래를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이유는 인간과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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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건의 동물 권리론은 철학자 칸트의 주장을 적극 수용해 이론적 토대를 정립해 나가고 있다. 각 생명체가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는 발상은 칸트가 말한 ‘목적 그 자체’ 개념에서 비롯했다. 칸트는 “인간이 존중받아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레건이 칸트와 의견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존중받아야 할 대상의 범주다. 그는 무조건적인 존중의 대상을 인간에서 동물로 확대한다. 더 나아가 인간과 동물이 동일한 도덕적 지위를 지닌다고 본다.
레건은 권리를 인간의 소유물로 한정 짓는 칸트를 비판하면서 내재적 가치를 지닌 모든 존재가 권리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8] 삶의 주체(subject-of-a-life)이기 때문에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주체는 믿음, 욕구, 기억, 감정, 미래에 대한 목표 등을 갖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개체나 종(種)을 말한다. 레건의 정의에 따르면 인간이라고 해서 삶의 주체가 되는 것도, 동물이라고 해서 삶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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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나이로 한 살의 정신 연령을 가진 포유류 이상의 동물이라면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만약 특정한 동물이나 종(種)이 삶의 주체로 확인되면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명권을 존중해야 마땅하다. 문제는 레건의 기준에 따르면 인간이 섭취하는 동물의 거의 대부분이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는 점이다. 인간이 자신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 존재를 음식으로 이용하는 일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특히 공장식 축산과 같이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생산되는 동물들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침해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통 없이, 완벽히 쾌락만 느끼도록 조작된 동물을 도살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도 레건은 부정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다. 그는 도덕적 고려의 경계선을 생명체의 쾌락과 고통이 아닌, 권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에게 윤택한 삶과 고통 없는 죽음을 선사한다고 해도, 쾌고 감수 능력을 지닌 존재가 생명권을 박탈당했다는 사실만 중요하다. 이상의 논증을 통해 레건은 도덕적 의무로서의 채식을 주장한다. 그에게 채식을 해야 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권리를 지닌 그 어떤 동물도 우리의 식재료가 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동물 권리론에는 심각한 허점이 존재한다. 그는 동물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삶의 주체이기 때문에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인간 외의 존재가 믿음이나 미래에 대한 목표를 가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10]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인간이 비슷한 경험을 할 것이라고 추론한다. 다른 동물이 어떤 식으로 삶의 주체가 되는지,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나 욕구가 인간과 같은지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레건이 삶의 주체의 기준으로 세운 ‘한 살의 정신 연령을 지닌 포유류’라는 조건도 매우 애매하다.
이런 점에서 레건의 동물 권리론은 채식주의의 완벽한 근거가 되기 어렵다. 그의 연구는 철학적으로 유의미하지만, 윤리적 채식주의에 대한 현실적인 근거로는 부족하다. 레건 자신도 육식의 윤리성과 비윤리성을 가늠할 기준을 세우는 과정에서 “채식주의자가 책임져야 할 문제는 오직 우리가 먹는 동물이 삶의 주체인 경우에만 생긴다”고 일축했다.
[11] 결국 레건은 채식주의를 선택한 개개인에게 동물이 삶의 주체인지 아닌지를 입증해야 할 부담을 안겨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하라
피터 싱어는 레건과 마찬가지로 개체 중심 윤리를 주장한다. 영향력 있는 윤리학자 중 하나인 싱어는 현대 동물 보호 운동의 체계적인 근거와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싱어의 모든 이론은 공리주의에 뿌리를 둔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는 개인의 쾌락과 고통을 도덕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공리주의에서 좋은 행위는 쾌락을 생산하는 것, 나쁜 행위는 고통을 생산하는 것이다.
싱어는 동물이 인간에게 받은 고통을 흑인이 백인에게 당한 핍박에 비유하며 공감한다.
[12] 단순한 감정 이입이 아닌 철저한 이성적 판단에 따라 불평등이라는 거대한 문제에서 시작해 동물의 고통으로 관심사를 확장한 결과다. 그는 저서 《실천윤리학》에서 불평등이 가장 해결하기 힘든 문제라고 지적한다. 세계 대전 이후 대중의 윤리 의식이 성장하면서 다양한 가치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평등의 원칙 또한 이런 흐름 속에서 필요성을 인정받았다.
[13] 문제는 평등의 근거가 무엇인지 밝혀야 했다는 점이다.
이익 동등 고려의 원칙(The principle of equal consideration of interests)은 싱어가 제시한 평등의 기본 원리다.
[14] 여타의 조건과는 별개로 이익, 즉 쾌락과 고통의 생산 여부만 고려해 도덕과 비도덕을 판단하는 것이다. 싱어는 차이가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타인에게 고통을 주면 안 되는 이유는 상대방의 용모가 준수해서도, 지적 능력이 뛰어나서도, 부유해서도 아니다. 그저 내가 고통을 피하고 싶듯 상대도 고통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익 동등 고려의 원칙에 의한 판단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익 동등 고려의 원칙을 도덕 원리로 내세웠지만, 대부분 인간에 국한해 적용했다. 하지만 싱어에게 종(種)은 인종이나 성별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차이일 뿐이다. 싱어 또한 쾌고 감수 능력을 지닌 모든 존재를 도덕적으로 평등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이익 동등 고려의 원칙이 보편적 윤리를 실천하는 데 필요한 전제라면, 쾌고 감수 능력은 평등의 범주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15] 그는 저서 《동물 해방》에서 “어떤 존재가 고통이나 즐거움, 행복을 누릴 수 없다면 그 무엇도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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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는 생명의 평등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 인격체(person) 개념을 도입한다. 인간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첫째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의 구성원으로서의 생물학적 인간, 둘째는 인격체로서의 인간이다. 그는 《옥스퍼드 사전》의 정의를 차용해, 인격체의 의미를 ‘자의식적이거나 합리적인 존재’로 규정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 이외의 존재도 얼마든지 인격체로 간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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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한정해 사용하던 용어를 그 외의 종으로 확대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동물과 인간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싱어는 대우의 평등이 아닌 고려의 평등을 이야기한다. 생명체의 능력, 그중에서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평등하게 고려하자는 것이다.
[18] 그는 각 생명체가 갖는 능력의 우위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로 인해 다르게 대우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개가 쾌고 감수 능력을 지닌다고 해서 인간과 같은 옷을 입고, 식탁에서 함께 식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생명권의 마지노선을 인간이라는 종의 경계에 정확히 일치시킨다면, 인종 차별과 다름없는 종 차별이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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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복지론이라고 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싱어는 고통이 그저 고통이기 때문에 최소화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생명의 가치나 권리와는 별개의 문제다. 동물 보호 윤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동물이 받는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원칙에만 관심을 둔다. 레건의 동물 권리론과 차별화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공리주의 관점에서 채식의 유일한 목적은 동물 복지의 향상이다. 싱어는 동물이 삶의 주체로서 권리를 갖는지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저 생명체의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 그가 채식주의를 주장하는 이유이자, 현대의 많은 채식주의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하는 근거다.
동물 복지론의 결론은 완전 채식주의다. 완전 채식주의는 쾌고 감수 능력을 지닌 모든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에 반대하며, 달걀과 유제품, 동물 실험을 거친 제품의 소비를 거부한다. 가축 공장에서 생산된 달걀은 닭이 겪은 고통의 산물이고, 시중의 다양한 유제품은 소와 송아지의 고통을 대가로 생산된 것이기 때문이다.
[20] 싱어의 궁극적인 목표는 동물 복지의 향상이자 고통의 종식이며, 완전 채식주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21]
한편 싱어는 육식이 예외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세 가지 경우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우선, 통각이 없는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은 가능하다. 그에게 쾌고 감수 능력이 없는 존재는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을 느끼는 존재라도 육류 생산 과정에서 일말의 고통 없이 도축되었다면 그 고기를 먹는 것도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육식으로 얻는 인간의 이익이 동물의 손해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면 육식을 허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지들이 실현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완전 채식주의가 보다 합리적인 행위라고 결론짓는다.
얼핏 보기에는 육식의 허용 가능성과 관련해 동물 중심적인 주장을 펴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의 이익과 동물의 이익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싱어는 오히려 전자를 우선한다. 동물의 생명권이 아닌 고통의 감소에만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당한 대안이 마련된다면 육식을 부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저명한 동물 해방론자인 싱어조차 인간의 쾌락과 고통을 최우선시하는 인간 중심적 공리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완전한 채식만이 옳은 길일까?
레건의 동물 권리론과 싱어의 동물 복지론을 살피면 현대 채식주의의 방어 논리가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건은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을 입증할 근거가 부족해 보이고, 싱어는 동물의 복지를 향상하는 데 더 적합한 방법이 있다면 얼마든지 후퇴 가능하다. 그렇다면 현대의 채식주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싱어의 스승인 리처드 헤어(Richard Hare)의 주장을 통해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다.
헤어는 전후 시대의 규범 윤리를 정립하는 데 공헌한 공리주의자다. 싱어가 발표한 이론 중 다수가 그의 영향을 받았다. 헤어는 싱어의 완전 채식주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면서, 오히려 절제된 육식을 허용하는 부분 채식주의를 제안한다.
[22] 그가 처음부터 부분 채식주의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완전 채식주의에 대한 도덕적 논증이 완벽하다면 육식을 전적으로 포기해야 한다고 여겼다.
동물의 이익을 존중할 의무와 관련한 도덕적 논증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레건의 동물 권리론처럼 동물 살생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음을 밝히는 논증이고, 다른 하나는 싱어의 동물 복지론처럼 동물의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 비윤리적임을 밝히는 논증이다. 첫 번째 논증은 모든 육류의 섭취를 반대하지만, 동물의 고통 발생 여부와 무관하다. 반면 두 번째 논증은 동물의 양육과 살생의 과정에서 고통이 발생되지 않는다면 육류 섭취를 허용하지만, 생산 과정에서 고통이 가해졌다면 우유나 달걀 등 부산물의 섭취까지 반대한다.
살생은 그릇된 일이기 때문에 채식을 해야 한다는 논증에 대해 헤어는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무조건 좋기 때문에 어떤 존재를 없애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말한다.
[23] 하지만 이런 논리가 공리주의의 전체적 견해(total view)에 근거한 대체 가능성 논증(the replaceability argument)으로 반박될 수 있다고 본다. 공리주의의 전체적 견해는 쾌락의 총량을 늘리고, 고통의 총량을 줄이는 데만 관심을 둔다.
[24] 이때 현존하는 개체 각각의 쾌락이 증가하든, 쾌락을 느끼는 개체의 수가 증가하든 상관없다. 전체적 견해에 따르면 육식은 동물 개체의 죽음을 야기하지만, 육류를 공급하기 위해 더 많은 동물을 태어나게 한다. 완전 채식주의가 보편화되면 오히려 동물의 수가 감소해, 쾌락의 총량이 줄어들 수 있다.
[25] 헤어가 보기에 인간이 동물을 사육하고 도축하는 과정이 이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육식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다.
육식이 동물의 고통을 야기하기 때문에 비윤리적이라는 두 번째 논증과 관련해서는 헤어도 현재의 축산 방식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여전히 완전 채식주의를 수용하기를 주저한다. 육식 금지가 곧바로 축산 방식의 개선으로 이어질지 미지수이고, 동물의 복지를 향상시킬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헤어는 동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모든 사람이 완전 채식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그 대신, 제한적인 육식을 통해 동물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개체 수를 유지시키는 부분 채식주의가 바람직하다고 결론 내린다.
[26]
싱어와 헤어는 동물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완전 채식주의와 부분 채식주의라는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싱어 또한 헤어의 논증을 전부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부분 채식주의가 동물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부인하지 않는다. 싱어는 둘 중 어느 쪽이 옳은가를 가릴 필요 없이, 각자의 판단에 따를 것을 제안한다.
[27] 동물의 행복을 증진하려는 의도가 확실하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바람직한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착한 육식의 가능성을 말하다
채식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채식주의가 지금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나아가 많은 이들이 윤리적 채식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다만 육식을 죄악시하면서 채식을 강권하는 것이 윤리적 채식주의가 추구하는 목적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다. 현대의 채식주의가 근거로 삼는 동물의 고통 감소라는 명분은 합리적이고 매력적이지만, 우리의 삶에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었는지 묻는다면 긍정적으로 답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채식을 꺼린다. 채식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조차 완전한 채식으로 전환하지 못하는 이유는 채식주의자의 불편한 일상을 목격했거나, 본인이 육식 문화를 깊이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채식을 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돌연 육식을 끊고 완전 채식주의로 돌아서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선택적으로 육식을 즐기는 연습을 통해 채식의 행복이 무엇인지 점차 깨닫게 하는 것이다.
싱어는 세계의 많은 공리주의자들과 함께 효과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라는 실천 운동을 펼치고 있다. 효과적 이타주의는 도덕적 행위를 통해 행위자 자신부터 충분한 행복을 느껴야 한다고 강조한다. 행위자 자신의 쾌락을 그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윤리적 움직임과 차별화된다. 만약 생계를 간신히 유지할 정도의 자산을 뺀 나머지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다면 최고로 선한 행위일까? 효과적 이타주의에 따르면 그런 사람은 높은 확률로 망가진 이타주의자가 된다.
[28] 세상의 행복에 기여했지만, 정작 자신은 전혀 행복하지 않은 존재 말이다. 결국 선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을 극대화해 타인이 자발적으로 동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현대의 채식주의 또한 효과적 이타주의의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채식주의가 왜 필요한지 이성적으로 고찰하고, 자신의 행복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헤어의 부분 채식주의는 그러한 방향 전환의 결과로 선택된 것이다. 만약 절제된 육식을 통한 부분 채식주의가 효과를 거둔다면 윤리적 육식주의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실제로 경제, 교육, 종교 등 분야에서 윤리적 육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윤리적 육식주의의 근본 취지는 말 그대로 ‘착한 육식’을 통해 육식이라는 행위의 죄의식으로부터 탈피하고, 고기를 자유롭게 소비하는 것이다.
윤리적 육식주의는 채식주의와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선택되어야 한다. 또 행위자 자신의 행복 증진과 동물의 고통 감소를 함께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실제로 동물 복지 인증을 받은 축산품이 시중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살충제 달걀과 같은 위험 식품의 대안으로 주목받기는 했지만, 인류의 소비가 친환경을 넘어 동물 복지를 향해 나아가는 초석은 마련된 것이다.
윤리적 채식과 윤리적 육식은 세상을 보다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물론 사람들의 태도가 한 번에 바뀌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윤리적 육식에는 아직 많은 비용과 수고가 따르기 때문에, 보통의 육식보다 훨씬 큰 기회비용이 요구된다. 채식주의가 그랬듯, 윤리적 육식이 본래의 목적을 잊고 표류하거나 특이한 소비 행태로 전락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윤리적 육식을 하나의 선택지로 자리 잡게 만드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