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맨이라는 이름은 사람 형상을 한 조형물(man)을 불태우는(burn) 의식에서 나왔다. 해가 가장 긴 하지에 모닥불을 피워 태양을 찬양하는 유럽과 미국의 전통 의식에서 유래했다. 버닝맨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버너(Burner)라 불린다. 그들은 세상을 둘로 나눠 구분하는 세계관을 갖고 있다.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속한 세상, 즉 내가 선택하지 않았으나 저절로 일원이 되어 살아가는 세상인 ‘디폴트 월드(Default World)’와 내가 스스로 선택해 진짜 나로 살아가는 세상 ‘리얼 월드(Real World)’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든다면 영화 〈매트릭스〉 때문이리라.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빨간 약과 파란 약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파란 약을 먹으면 지금껏 살아온 대로 매트릭스 안에서 꿈으로 이뤄진 가짜 삶을 살게 되고, 빨간 약을 먹으면 매트릭스를 벗어나 진짜 내가 존재하는 세상을 살게 된다고 말한다. 결국 네오는 빨간 약을 선택한다. 버너들에게 영화 속 디폴트 월드는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성공하기 위해 애쓰고, 승진하기 위해 경쟁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돈을 버는, 그러나 실상은 꿈만 꾸면서 매트릭스 안에 갇힌 세상이다. 반면 있는 그대로 존재하며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 리얼 월드다.
그래서 버너들은 버닝맨 축제가 열리는 블랙 록(Black Rock) 사막을 ‘홈(Home)’이라 부른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디폴트 월드에 살다가 사막의 리얼 월드로 돌아와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산다고 여긴다. 디폴트 월드에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이해관계를 따지고, 속마음을 숨긴다. 정작 자신이 원하는 모습은 마음속이나 요원한 미래에 있다. 그러나 버닝맨에서는 그 어떤 것이라도 표현할 수 있고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 버너에게 블랙 록 사막은 리얼 월드이자 홈이기 때문이다.
홈에서는 거의 완벽한 자유를 보장받는다. 게임이나 영화 캐릭터 복장을 하든, 아무것도 입지 않고 돌아다니든, 무엇을 표현하든 상관없다. 참가자는 수동적인 관객이 아닌 적극적인 행위자가 된다. 다른 사람 또한 무엇을 하든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당연하게 인정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며 표현할 자유가 있듯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동은 허용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은 기다림이라는 인내의 과정이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초월적 존재가 되기까지 자기 부정과 깨달음의 시간을 가졌듯 버닝맨 참가자도 시행착오와 숙고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축제 참가만으로 모두가 깨달음을 얻는 것도 아니며 주체적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혼돈을 느끼거나 디폴트 월드와의 괴리로 방향성을 잃을 수도 있다.
모피어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문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문을 통해 온전한 존재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스스로 겪어 내야 한다.” 버닝맨 또한 그렇다. 다양성이 존재하는, 모든 실험이 용인되는 장일 뿐 진정한 리얼 월드를 인지하고 살아 나가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Admission for one polymath.’
버닝맨 티켓에서 낯선 단어를 하나 발견한다. 폴리매스(polymath)란 르네상스맨처럼 다방면에 박식하고 전문적인 깊이가 있는 사람을 뜻한다. 버닝맨은 매년 달라지는 주제에 맞춰 참가자를 칭하는 단어를 티켓에 표기한다. 2016년의 주제는 ‘다 빈치의 작업실(Da vinci’s Workshop)’이었고 참가자들은 다 빈치와 같은 폴리매스로 불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다양성을 기반으로 혁신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사막으로 오는 걸까? 궁금하면서도 의심스러웠다. 누가 전문가냐는 논쟁이 자주 생길 정도로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도 힘든 세상에 다재다능한 사람이 수만 명이나 모일 수 있을까?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도대체 본업이 무엇이냐?” 삼성에서 일한 10년 동안은 한 번도 받아 보지 않았던 질문이다. 하드웨어인지 소프트웨어인지, 가전제품인지 반도체인지 정도의 분류만 있었을 뿐 삼성전자 연구원이라는 타이틀은 너무도 확고했다. 삼성이라는 견고한 울타리를 나온 지금은 몇 개의 회사를 설립했고, 사물인터넷 솔루션을 개발하고, 아시아 혁신가들을 연결하며 혁신을 추구하는 콘텐츠와 프로그램, 그리고 플랫폼을 만들고 있다. 동시에 강연, 방송, 투자, 자문 등 다양한 일을 하다 보니 사람들은 내 일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도대체 넌 누구냐고 묻는다. 그래서 흔들릴 때가 있다. 제대로 살고 있는가, 이렇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어떤 이는 잘하려면 하나에 집중하라 조언하고, 어떤 이는 정체성이 혼란스럽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다. 하나만 잘하는 전문가를 바라는 세상에서 다양한 것에 호기심이 있는 사람,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사람, 다재다능한 사람은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지 말이다.
명함에 적힌 타이틀 하나로 자기소개가 압축되는 현대 사회에서 나는 무엇이어야 할까. 이 고민의 답을 찾기 위해 사막으로 떠나는 길을 선택했다. 예술가이자 과학자, 철학자이자 작가였던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는 한 단어로 대체할 수 없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그해 여름 사막에서 나는 현대의 수많은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만났다.
“가서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절대 본질을 알 수 없다.”
버닝맨에 참가했던 일론 머스크가 남긴 말이다. 허허벌판인 사막에 열흘간 도시가 생기고 모두의 욕망을 담았다 완전히 사라지는 일이 30년간 반복되고 있다. 매년 7만 명의 인파가 몰린다. 버닝맨은 그저 단순한 축제의 장이 아니다. 괴짜들만의 축제도 아니다. 사람들이 만나 깊이 있는 관계가 형성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아이디어와 실험, 그리고 비즈니스가 시작되는 장이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한다. 새로운 일과 영역을 창조하는 사람, 변화와 혁신을 꿈꾸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