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보틀에 다녀왔습니다
3화

단순함은 궁극의 정교함이다

가장 단순한 디자인

 
몇 년 전 신규 브랜드 론칭을 준비하면서 이미지 공유 사이트 핀터레스트(Pinterest)에서 해외 카페 이미지를 찾다가 눈에 확 띄는 디자인을 발견했다. 흥분한 나는 즉시 디자인 책임자를 불러서 “제가 그렇게 말하던 디자인이 바로 이거예요!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인 디자인이요!”라고 외쳤다. 흰색 배경에 푸른색 병 로고만 심플하게 있는 건물이 주는 힘이 굉장히 강렬했는데 그것이 블루보틀과의 첫 만남이었다. 이후 며칠간 블루보틀의 디자인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만 깨닫고 그런 디자인의 카페는 만들어 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블루보틀처럼 완성도가 높은 디자인을 모티브로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면 대부분은 그 브랜드의 카피캣(copycat)으로 보이게 된다. 중국의 샤오미(小米)도 디자인이 탁월한 브랜드이지만, 애플의 ‘짝퉁’이라는 비난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단색 배경에 로고 하나만 들어가는 단순한 디자인은 이미 애플이 가장 높은 완성도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샤오미는 디자인의 수준이 높아서 비웃음을 당할 정도는 아니지만, 너무나 어설픈 디자인 모방으로 비웃음만 산 사례가 있다. 국내에서도 아주 유명한 외식 기업이 2015년 블루보틀과 유사한 커피 브랜드를 론칭한 적이 있다. 레드머그 커피라는 이름의 프랜차이즈 카페다. 푸른색을 붉은색으로, 병을 머그로 바꾸는 수준의 성의 없는 네이밍, 블루보틀과 좌우만 바뀐 거의 동일한 형태의 로고였다. 핸드 드립을 제공하는 콘셉트까지 따라 했지만 그 외에는 블루보틀과 비교할 수 없는 디자인이었다. 결국 레드머그 커피는 조소 속에서 2년 만에 사업을 정리했다.

단순하면서도 아이덴티티가 명확한 디자인을 창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블루보틀은 커피업계 최초로 이 어려운 일을 해냈다. 애플의 맥북을 보았을 때처럼, 흰 바탕에 푸른 병 로고는 한 번만 봐도 잊히지 않는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이런 형태의 디자인이 커피를 파는 곳이라는 이미지와 바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애플의 사과 모양도 컴퓨터라는 제품과 직결되는 이미지는 아니다.

디자인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브랜드인 애플은 역사상 전무한 기업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팬덤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으로 꼽힌다. 아이폰, 아이패드, 맥북 등 몇 종류 안 되는 제품만 취급하고, 폐쇄적인 제품 생태계를 갖고 있는데도 말이다.

애플의 팬들은 이런 폐쇄성을 제품에 대한 자신감으로 인식한다. 애플이 엄선한 최고의 제품과 시스템을 제공받는다고 믿는다. 이러한 고객 경험을 제공하는 데에는 극도로 단순한 디자인이 큰 역할을 한다. 고객들은 불필요한 요소들을 걷어 낸 디자인을 ‘쿨하다’고 인식하고 단순함의 미학을 칭송한다. 첨단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과시하지 않고 단순하고 직관적인 디자인을 고객에게 제시하는 브랜드들은 ‘○○의 애플’이라 불리며 각자의 영역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일본 가전제품의 애플’ 발뮤다(Balmuda), ‘자동차업계의 애플’ 테슬라(Tesla), 그리고 ‘커피업계의 애플’ 블루보틀이 그렇다.

블루보틀의 성공에서 디자인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브랜드에 대한 첫인상은 시각적인 디자인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가전이나 제품이 아닌 소매점 브랜드에서 블루보틀처럼 단순화한 디자인을 제시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의 애플’이라 불리는 브랜드들의 대부분이 가전제품인 이유다. 맥도날드가 유럽과 홍콩 일부 매장에서 M자 로고만 세운 심플한 디자인의 간판과 단순화한 인테리어를 테스트하고는 있지만, 오픈형 주방으로 식재료를 더 돋보이게 하려는 전략에 그치고 있다. 전 세계 매장으로 확산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음식을 취급하는 소매점에서는 심플하고 예쁜 디자인보다 식욕을 불러일으키고 다양한 재료를 보여 줄 수 있는 화려한 디자인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블루보틀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단순한 디자인은 아니었다. 로고는 푸른 병에 굵은 글씨로 ‘blue bottle coffee co.’라는 브랜드명이 크게 적혀 있는 평범한 형태였다.
블루보틀 초창기 로고
블루보틀의 디자인이 한 단계 도약한 계기는 2015년 일본 진출이었다. 로고에서 영문이 빠진 것도 이때쯤이다. 커다란 하얀색 건물 외벽에 푸른 병 로고만 넣은 기요스미 시라카와 매장이 이 해에 문을 열었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디자인 철학이라고 하는 ‘가장 단순한 것이 최고의 디자인이다’를 소매점의 형태로 구현한 것 같은 인테리어 디자인이었다. 단순한 디자인은 이해하기 쉽고 직관적이며 확장성이 뛰어나다. 프리먼은 과감하게 커피 브랜드에 이러한 디자인 철학을 적용했고 매우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파란 병 로고만으로는 평범하지만, 이 로고가 배경과 어우러지면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 블루보틀 매장은 흰색 또는 크라프트 재질의 갈색에 푸른색 로고만 얹어 놓고 그 이외의 수식이 없다. 매장에 사용된 컬러가 몇 종류 되지 않는다. 흰색 배경에 커피색인 갈색과 로고 컬러인 터키 블루, 이렇게 세 가지 색 이외에 다른 색을 찾아보기 힘들다. 매장 내에서 판매하는 음식인 쿠키, 그래놀라 등은 물론 MD 제품인 원두, 머그, 커피 필터, 드리퍼, 에코백도 모두 이 컬러 안에서 해결이 된다. 공간 디자인은 색감 이상으로 절제되어 있다. 절제를 통해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블루보틀 매장은 인테리어뿐 아니라 공간 전체를 디자인하는 최고의 디자이너들과 함께 작업을 한다.

붉은 벽돌과 우드를 사용해 아날로그 감성을 전달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사우스파크점과 워싱턴 조지타운점 등을 설계한 보린 사이윈스키 잭슨(Bohlin Cywinski Jackson)은 뉴욕 5번가 애플 스토어와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등을 디자인한 미국 최고의 공간 디자이너이다. 일본에서는 스키마타(Schemata) 건축사무소 대표 나가사카 조(長坂常)가 블루보틀 매장을 도맡아 디자인했다. 화장품 브랜드 이솝(Aesop)의 도쿄 아오야마점, 의류 브랜드 데상트 블랑 교토(京都)점 등을 디자인한 촉망받는 공간 디자이너이다. 국내에서는 서울 삼성동 코엑스몰의 리빙 브랜드 자주(JAJU) 매장을 설계했다.

그는 특히 비움으로 채움을 완성하는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건물을 부수고 새로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개조해서 새롭게 해석하되 많은 공간을 비워 두는 방식을 선호한다. 미완성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공간을 통해 브랜드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사람이 빈 공간을 채울 수 있도록 한다. 나가사카 조의 디자인 철학은 블루보틀의 철학과 일치한다. 그래서인지 일본 매장의 디자인은 미국에 비해 구조와 컬러가 더욱 정제되어 있다. 일본에서 블루보틀의 단순한 미학이 완성되는 느낌마저 든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블루보틀커피 본사 건물 ⓒflickr
블루보틀의 디자인이 탁월한 이유는 고객이 경험하게 될 모든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블루보틀은 매장을 연극 무대처럼 꾸미고 바리스타를 배우로 생각한다. 모든 매장은 커피 바를 허리 높이 아래로 낮춰 바리스타, 고객, 커피라는 세 가지 요소가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만든다. 주연 배우인 바리스타를 중심으로 설계된 커피 바는 바리스타가 원두 그라인딩, 핸드 드립, 도구 세척 등 커피를 제공하기 위한 모든 과정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빠르게 완수할 수 있도록 돕는다. 바 앞쪽에 저울이 있고 그 위에 바로 드립 용기를 얹을 수 있으며 저울 아래쪽에는 개수대를 배치해 남은 물을 버리고 세척을 할 수 있다. 세심하게 만들어진 이 바는 물을 끓이고 원두를 갈아서 넣고 커피를 내리고 용기를 헹구는 과정까지 한 자리에 서서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바리스타의 동선을 최적화한 디자인은 작업 효율을 끌어올리고 고객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

상업용 디자인은 단순히 예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작업의 효율을 생각하는 디자인이 중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블루보틀의 매장 디자인은 최적의 상업용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블루보틀 매장은 쓰레기통의 위치와 모양까지 고려해 최고의 효율을 이끌어 내도록 설계되어 있다. 대기업의 해외 주재원으로 5년간 중국과 대만에서 근무한 뒤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카페 루고(Café Lugo)를 론칭한 김회중 대표의 블루보틀 매장에 대한 평가를 소개하고 싶다. 2015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찾아 스페셜티 커피로 유명한 브랜드들을 둘러보고 연구한 그는 인텔리젠시아(Intelligentsia), 필즈 커피(Philz Coffee) 등 유명 스페셜티 커피 체인과 블루보틀이 다른 점은 바리스타의 동선과 도구에 대한 지식이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블루보틀은 핸드 드립을 할 때 물을 끓여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0.1도 단위로 온도 조절이 가능한 기계를 사용한다. 저울은 중량뿐 아니라 초 단위 시간이 같이 표기되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의 물을 넣어 정확한 맛을 내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최고의 커피를 제공하기 위한 방법을 집요하게 연구해서 도구를 개발하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철저한 매뉴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유로운 힙스터(hipster) 느낌으로 알려진 블루보틀이 실제로는 스타벅스와 같은 고도의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말한다. 블루보틀의 비교 대상으로 자주 거론되는 애플의 창업자 잡스를 떠올린다면, 블루보틀은 자유분방한 히피였던 20대의 잡스가 아니라 아이폰을 만들어 전 세계인의 삶을 바꿔 놓은 50대의 잡스와 닮았다는 것이다.

바리스타의 동선을 최적화하는 효율적 요소 외에도 훌륭한 디자인의 효과는 또 있다. 바로 이런 디자인 덕에 SNS가 급성장할 때 블루보틀이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 단순한 배경은 인물인 나를 더 돋보이게 해준다. 사진 어딘가에 보이는 작은 파란 병 로고는 내가 지금 가장 ‘핫’한 공간에 와 있음을 알려 주는 신호다. 방문객들이 SNS에 사진을 올리면 자연스럽게 홍보가 이루어진다. 블루보틀이 구글 벤처스의 투자를 받으며 온라인 사업을 강화하고, 페이스북 등 SNS 맞춤 전략을 세워 마케팅을 시작한 것은 2012년이다. 공교롭게도 페이스북이 인스타그램을 인수한 시기도 2012년이다. 2013년에는 영국 옥스퍼드 사전이 우리 표현의 셀카와 같은 ‘셀피(selfie)’를 올해의 단어로 꼽을 정도였다. SNS와 셀카가 전 세계적인 메가 트렌드가 된 것이다. 2012년 가입자 1000만 명이던 인스타그램은 빠르게 성장해 2017년 가입자 7억 명을 돌파했다. 세계 최고의 IT 기업을 투자자로 확보한 블루보틀은 자연스럽게 한발 먼저 SNS의 성장을 예측하고 그에 맞춘 브랜드 전략을 구사했다. 그 결과가 바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블루보틀이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SNS를 통해서 블루보틀을 처음 접하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매장에 방문한 고객이 커피를 마시고 머그잔과 원두를 구매하는 것은 물론, 사진을 찍어서 홍보까지 해주니 이보다 이상적인 사업 모델이 있을까. 이것이 바로 잘 만들어진 브랜드의 힘이다.

블루보틀에는 입소문을 일으키는 흥미로운 스토리도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상대방이 살아온 과정을 알게 되면 더 친근감을 느낀다. 브랜드 역시 고객과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스토리가 많을수록 좋다. 네이밍의 유래는 이야기하기 좋은 스토리 중 하나다. 스타벅스가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일등 항해사의 이름이며 로고에 그려진 여성은 노래로 선원을 유혹하는 인어 사이렌이라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블루보틀의 파란 병 역시 400년 넘게 이어져 온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블루보틀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1600년대 후반 오스만튀르크(오늘날의 터키) 군대가 거의 모든 유럽을 점령했을 때였다. 동부와 중부 유럽의 많은 지역을 휩쓴 오스만튀르크군은 1683년 오스트리아 빈까지 진격했다. 포위된 오스트리아군은 고립된 상황에서 감시망을 뚫고 인근 폴란드 군대에 도움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다. 폴란드 외교관 출신으로 아랍어에 능했던 게오르그 콜쉬츠키(Georg Kolschitzky)가 발탁돼 오스만튀르크 병사로 위장하고 폴란드에 도움을 요청하는 데 성공한다. 치열한 전투 끝에 오스만튀르크군이 빈에서 물러났을 때, 그들이 남기고 간 물건 중에 낙타 사료 같은 콩 주머니가 있었다. 아랍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콜쉬츠키는 그것이 커피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쓸모없어 버렸던 커피 자루를 모아서 커피 가게를 차렸다. 그 가게의 이름이 바로 ‘푸른 병 밑의 집(Hof zur Blauen Flasche)’이다. 블루보틀이라는 브랜드는 여기에서 나왔다. 블루보틀의 심벌인 병의 색채가 단순한 블루가 아닌 터키 블루인 이유다.[1]

 

8가지 메뉴만 판매합니다

 
블루보틀은 여덟 가지 메뉴만 판매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모든 매장에서 여덟 가지가 넘는 메뉴를 판매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렇게 알려져 있다. 로스팅한 지 48시간 이내의 원두를 사용하는 것 역시 4일 이내로 바뀌었지만 이를 굳이 적극적으로 알리지는 않고 있다. 이 역시 의도적인 브랜딩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블루보틀이 창업 초기 ‘로스팅 48시간 이내의 원두로 여덟 가지 메뉴만 판매합니다’라는 짧은 문구를 반복적으로 활용해 홍보하면서 1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고객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산술적으로 여덟 가지 메뉴를 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엄선된 메뉴만 판매하는 전문점이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브랜딩이 중요하다.

프리먼이 초창기에 선별해서 판매했던 여덟 가지 메뉴는 드립 커피, 에스프레소, 카푸치노, 카페라테, 카페모카, 마키아토, 뉴올리언스 커피, 핫초코였다.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고객을 위한 배려로 포함된 핫초코를 빼면 모두 커피 메뉴다. 아메리카노는 없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갖춘 매장이지만 에스프레소에 물을 넣어 만드는 아메리카노 대신 정성껏 핸드드립으로 내린 커피만 판매하겠다는 고집이다.

아메리카노는 한 잔 만드는 데에 1분이면 충분한 경제적인 메뉴다. 원두 역시 12온스 분량 기준으로 핸드 드립의 절반인 15그램이면 충분하다. 아메리카노는 탬핑(tamping) 후 머신에서 추출한 에스프레소에 물만 부으면 되지만 핸드 드립은 한 명이 10분간 집중해서 제조해야 한다. 심지어 커피를 내린 뒤 드리퍼와 보틀도 씻어야 한다.

사업장에서 이 둘의 효율에 대한 비교는 무의미할 정도다. 제공 시간, 인건비, 원가 모든 측면에서 아메리카노가 월등히 높은 수익을 낸다.

게다가 일반적인 카페에서는 아메리카노의 점유율이 가장 높다. 그만큼 고객이 많이 찾는 메뉴라는 이야기다. 익숙한 메뉴를 취급하지 않으면 고객의 불만이 발생하기 마련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설득과 설명의 시간까지 필요하다. 이처럼 아메리카노를 팔아야 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럼에도 프리먼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가장 대중적인 메뉴를 취급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철학과 제품에 대한 자부심을 고객에게 전달하는 길을 택했다. 고객과의 대화를 즐겼다는 프리먼의 성향으로 미루어 보면, 그는 아마도 아메리카노를 찾는 고객에게 왜 아메리카노를 취급하지 않는지, 로스팅한 원두를 핸드 드립으로 내려 주는 커피가 얼마나 환상적인지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좋은 식재료, 정성, 스토리가 담긴 요리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시간에 쫓기는 사람을 빼고 말이다. 프리먼은 시간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성이 담긴 커피를 원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고객으로 정했다. 그들은 대부분 커피를 사랑하는 마니아들이었을 것이다. 블루보틀은 얼핏 보기에는 상업적으로는 형편없는 결정을 했지만 그로 인해 소수의 커피 마니아들을 팬덤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렇게 고객군을 명확히 구별하여 공략하는 방법은 애플이 초창기 고사양 퍼스널 컴퓨터로 컴퓨터 마니아들만을 겨냥했던 마케팅 전략과도 유사하다.

 

시그니처 메뉴

 
전문가가 엄선한 메뉴, 정성이 가득 담긴 핸드 드립 방식만으로 성공하기는 어렵다.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핸드 드립 커피를 제공하는 곳은 이전에도 있었으니 말이다. 외식 브랜드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그니처(signature) 메뉴가 필요하다.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그 가게만의 독특한 대표 메뉴가 있어야 바이럴(viral, 입소문)이 일어난다. 브랜드의 바이럴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경험한 고객이 주변에 이야기를 전파해야 하는데, 가장 좋은 소재가 바로 시그니처 메뉴다. 국내의 예를 들자면 평범한 커피 브랜드였던 탐앤탐스는 즉석에서 구워 주는 프레첼을 메뉴에 추가하며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서울 천호동 골목의 작은 카페였던 카페베네도 와플과 젤라토를 메뉴에 넣으며 초창기엔 와플 카페로 널리 알려졌었다. 아쉬운 점은 카페 브랜드임에도 시그니처 메뉴는 커피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블루보틀은 커피를 언제나 주인공의 자리에 앉힌다. 블루보틀에 가면 꼭 먹어 봐야 한다는 시그니처 커피 메뉴 두 가지를 살펴보자.
뉴올리언스 아이스커피 MD제품
뉴올리언스 아이스커피

뉴올리언스 아이스커피(New Orleans iced coffee)는 구운 치커리가 들어간 커피다. 구운 치커리라니, 처음 이 메뉴를 접했을 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에 꽤 놀랐다. 이후 자료를 찾아보니 치커리의 맛이 커피와 유사해서 1800년대 유럽에서 커피가 수입되지 못할 때 야생 치커리의 뿌리를 로스팅해 커피 대용으로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치커리 커피로 유명한 곳이 미국의 뉴올리언스 지역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뉴올리언스 아이스커피에는 콜드 브루(cold brew) 커피, 우유, 유기농 사탕수수, 구운 치커리가 들어간다. 한 입 마시면 시럽을 넣은 진한 아이스 카페라테에 치커리의 씁쓸한 향이 얹어진 맛이 난다. 블루보틀 홈페이지에는 뉴올리언스 커피의 제조법이 나와 있는데 콜드 브루 커피와 유기농 사탕수수, 구운 치커리를 섞어서 12시간 동안 재우고 체로 거른 뒤 마시면 된다고 설명한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메뉴이고 치커리가 들어간다는 것도 독특해서 바이럴을 유도하는 시그니처 메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미국 현지에서는 종이 팩에 담긴 형태의 MD 제품으로 슈퍼마켓에서도 판매되고 있다.

지브롤터

메뉴판에는 없는 시크릿 메뉴다(일본 블루보틀 메뉴판에는 있다). 원래 직원들이 마시던 것인데 고객들이 궁금해해서 출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에스프레소 더블샷에 에스프레소 양의 두 배 정도만 스팀 밀크를 넣는 메뉴로 스타벅스의 숏 사이즈보다 적은 양이다. 지브롤터(Gibraltar)라는 이름의 작은 유리잔을 사용하는데 일반 라테보다 조금 낮은 온도로 곱게 거품 낸 우유로 라테 아트를 그려서 제공한다. 지브롤터는 추출하자마자 바로 마시는 음료라서 테이크아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 커피를 제대로 즐기려면 받자마자 1분 안에 빠르게 마시는 것이 좋다.

디저트 메뉴

블루보틀에 가면 종류가 많지는 않지만 커피와 잘 어울리는 쿠키, 그래놀라 등을 맛볼 수 있다. 디저트 부문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프리먼의 부인 케이틀린 프리먼(Caitlin Freeman)이다. 블루보틀의 디저트도 커피와 같이 다양한 종류보다는 엄선된 몇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매장별로 취급하는 메뉴는 차이가 있지만 그 종류가 10개를 넘지 않는다. 대부분 커피와 간단히 곁들이기 좋은 메뉴로 퀄리티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

커피와 빵은 따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어울리는 메뉴다. 블루보틀은 베이커리 부문을 강화하기 위해 2015년 4월 미국 유명 베이커리인 타르틴 베이커리와의 합병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합병 계획은 무산되었다. 첫 해외 매장으로 일본을 지목했던 타르틴 베이커리는 2018년 일본이 아닌 한국의 서울 한남동에 단독 건물로 해외 첫 매장을 열었다. 강추위가 몰아치던 한겨울에 문을 열었는데도 빵을 사기 위해 한두 시간씩 줄을 서는 고객들의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
Julia Flynn Siler, 〈Coffee Beyond the Same Old Grind〉, 《The Wall Street Journal》, 2013.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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