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를 위해 다음과 같이 가정해 보자. 만 0~19세의 아동수당과 기본소득은 이름만 다를 뿐 액수는 같고, 노령 기초연금도 수급 자격을 나누지 않고 모두에게 온전히 지급되는 것으로 바꿔 노인 기본소득과 설계도 금액도 같다. 그렇다면 만 20~64세까지 정기적으로 매월 30만 원씩 지급되는 기본소득을 만 20세에 일시금으로 받는다면 얼마에 해당할까? 월 30만 원씩 비과세 적금을 들고 이자율은 1퍼센트 복리로 계산하면 45년 후 원금은 1억 6200만 원에 이자는 4265만 7000원이 되어 총액 2억 465만 7000원이 된다. 이 돈을 20세에 일시금으로 받는다면 약 1억4100만 원에 해당한다. 쉽게 말해 45년간 월 30만 원씩 지급되는 기본소득을 포기하고 만 20세에 목돈으로 받으면 1억 4100만 원은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3000만 원은 매우 적은 돈이며 피케티가 제시한 액수가 훨씬 그에 근접한다고 볼 수 있다. 월 30만 원이 작아 보이지만 평생 받는다면 사실은 상당히 큰돈인 것이다.
거꾸로 만 20세의 3000만 원 목돈을 45년간 기본소득으로 받는다면 월 얼마에 해당할까? 월 6만 9000원 정도에 해당한다. 쉽게 말해 만 20세에 받는 3000만 원은 45년간 받는 월 6만 9000원과 같다는 얘기이다. 결론적으로 월 30만 원이 일시금 3000만 원보다 훨씬 큰돈이다. 사실 이것은 예산으로 따져보면 너무 당연한 말이다. 2020년 한국의 20~64세 인구 3335만 9625명에게 월 30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면 연간 예산은 약 120조 원 정도가 소요되는 반면에, 만 20세에게 3000만 원을 준다면 2000년 출생자 63만여 명이 2020년에 다 살아있다 하더라도 19조 원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심지어 청년기초자산제는 2021~2025년의 5년간 평균 48만 명 대상 14.5조 원이 소요될 것이라 계산한다. 재원이 크면 그만큼 소득 재분배 효과가 큰 것이고 재원이 작을수록 소득 재분배 효과도 작은 것은 상식이다. 기초자산은 재원이 적기 때문에 쉽게 정책 도입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만큼 세상을 바꾸는 힘도 적다.
소득 불평등 해소 효과가 그렇다면 자산 불평등 해소 효과는 어떨까? 3000만 원이 30만 원보다 크니까 자산 불평등 해소 효과가 크다고 말할 사람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나눠서 줄 돈을 목돈으로 주었다고 자산 불평등이 완화되는 게 아니다. 기본소득 혹은 기초자산의 재원을 형성함에 있어 보유 자산 혹은 자산에서 유래하는 자산 소득에 높은 세율을 적용해 자산의 소득 발생 능력을 제한하는 것만으로도 자산 불평등은 상당히 완화된다. 기초자산의 재원 14.5조 원을 전부 자산 보유세 및 상속·증여세, 배당·이자·임대 등 자산 소득에 대한 과세로만 충당한다고 가정해도, 기본소득 재원 120조 원 중 15조 원 이상의 재원이 자산 과세에서 나온다면 기본소득의 자산 불평등 해소 효과가 더 크다. 실제로 기본소득은 토지 보유세 등 자산 과세에서 많은 재원을 끌어오게끔 설계되어 있다. 보유세가 영구적이라면 그것은 자산의 수익률, 즉 그것이 낳는 미래 현금 흐름의 현재가치를 낮춤으로써 자산의 가치를 즉각적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전통적인 사회주의자들은 자산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국유화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국유화라는 표현 대신 ‘전인민적 소유’와 같은 거창한 말들을 갖다 붙여도, 그 국유화된 재산에 관련된 고위 관료나 이해당사자들이 사실상 그 재산의 소유자로 기능했음을 역사는 보여 주고 있다. ‘국가 사회주의’ 체제의 이러한 문제점을 잘 알고 있는 피케티는 ‘참여 사회주의’를 주장하면서 그 중심에 기초자산의 분배를 놓고 있다. 하지만 이는 매우 공상적인 생각이다. 1억 6000만 원이 일시적으로 탕진되지 않고 청년들에게 ‘자산’으로 남아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소자본의 확산에 불과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수의 개별 소자본들은 격렬한 경쟁에 놓이게 되고[4] 분산된 소자본은 결국 자본주의 시장의 힘에 의해 극소수의 수중에 집적(集積), 집중될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법칙이다. 따라서 기초자산의 방법은 피케티의 주장처럼 꽤 큰 액수가 된다 하더라도 자산 불평등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다.
둘째, ‘보편성’의 문제가 있다. 기본소득은 동일한 액수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지급된다. 하지만 기초자산은 만 20세에게만 지급된다. ‘청년’ 기초자산이라 명명된 제도이니 장년과 노년은 불만을 표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 19세 청년 역시 이듬해에 받을 것이니 불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 21세 청년은 정말 억울할 것이다. 이에 근접하게 연령이 초과한 청년들도 마찬가지다. 이 점을 잘 아는 정의당도 2020년 총선에 1호 공약으로 발표할 때에는 “그 전 세대에 모두 혜택을 주면 정부 재정이 감당하기 어려워”, “청년들과 대화를 통해 제도 시행 이전 세대에도 단계적인 보완 대책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 그 “보완 대책”이 나왔다.
“형평성을 고려해서 기초자산을 받지 못하는 21세부터 29세 청년들의 경우 매년 300만 원씩 20대가 끝날 때까지 한시적으로 기초자산을 지급하겠다.” 즉 기초자산 제도 시행 시에 만 21세인 청년은 매년 300만 원씩 9년간 2700만 원을, 만 29세인 청년은 단 한 번 300만 원을 받는다는 얘기다. 기초자산 수급에서 제외되는 청년을 위한 나름의 자구책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제도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만 29세는 왜 자신이 만 28세보다 300만 원을 덜 받는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제도를 시행할 때 30세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청년’이 아닌가? 그 청년이 실업 상태에 있거나 취업 준비 상태에 있다면 그 박탈감은 훨씬 클 것이다. 부모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자식이 31세, 33세 두 명이 있는 부모라면 이 제도 시행에 반감을 크게 가질 가능성이 높다. 자식이 없다면 더 말할 것이 없다. 찬성하지 않을 인구 비율이 높으면 정치적 실현 가능성이 어두운 정책이다.
셋째, 기초자산은 일시의 목돈 지급이므로 탕진 가능성에 노출된다. 물론 주식 투자를 했다고 하여 탕진이라 말할 수는 없다. 생산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혹은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탕진을 했다 하더라도, 그 탕진이 그의 자유의사에 따른 것이었다면 문제 삼을 수 없다. 기본소득도 당연히 탕진할 수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정기적으로 평생 지급되기 때문에, 인생의 어느 시점에 혹은 어느 시점까지 모두를 탕진하더라도 기본적인 수준의 삶은 계속 영위할 수 있다. 잘못된 선택을 몇 번 했다 하더라도 기본소득은 삶의 최저선 이하로 떨어지지 않을 평생의 ‘사회안전망’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초자산을 탕진한다면 한순간, 그것도 만 20세의 젊은 나이에 내린 선택으로 64세에 이르는 순간까지 거친 시장에서의 노동에 시달리고 그 부산물인 사회 보험 이외에 어떤 사회안전망도 없는 상태에 놓일 수 있다.
“무조건적으로 일생에 걸쳐 기본적인 경제 안정을 보장한다면, 젊은 날의 자유 때문에 평생의 자유가 위협받는 일을 막을 수 있게 된다.”[5]
이 점을 기초자산의 주창자들도 느낄 것이다. 그래서 2020년 버전의 청년기초자산제는 2017년 버전의 청년사회상속제에서 없었던 사용처 제한이 등장했다. 청년기초자산은 주거 비용, 창업 비용 및 취업 준비금, 학자금으로 사용이 제한된다. 사용처 제한은 일회성 목돈으로서의 기초자산이 수급자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현명하게 사용되지 못하거나 탕진될 위험성이 있는 것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대응으로 보인다. 주거와 직업, 학업 등이 우리나라 청년이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이라는 점에서 대응의 방향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이로 인해 ‘무조건성’ 원칙이 훼손되었고 무엇보다 사용처 제한이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기초자산제의 내적 결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기본소득 제도와 그와 ‘동일한 액수의’ 기본재산 제도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만인의 자유를 사명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주저 없이 기본소득 제도를 선택할 것이다.”[6]
넷째, 요새는 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지만 ‘계’라는 제도의 존재는 그 자체로 푼돈보다 목돈이 가치 있음을 잘 보여 주는 예다. 목돈은 특히 청년에게 의미가 크다. 만 20세에 만약 1억 원이 생긴다면 월세 보증금, 대학 등록금이나 유학비, 취업 준비를 위한 학원비 등 요긴하게 쓸 곳은 많다. 하지만 그 1억의 화폐 가치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같은 금액의 돈이라 하더라도 그 돈을 받은 사람의 교육 정도, 지적 배경, 부모의 관심, 사회적 네트워크, 출신 가정의 경제력에 따라 같은 금액임에도 사회적 가치가 달라진다. 또한 기초자산을 통해 ‘기회의 평등’을 부여해도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자산 관리 능력에 따라 더 큰 불평등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부유한 환경에 있는 청년은 그 1억을 자기가 이미 가진 자산에 더하여 더 큰 자산으로 불릴 가능성이 크다. 가난한 환경의 청년은 이미 말했듯 등록금, 유학비 등으로 다 써버리게 된다. 유용하게 사용했지만 1억의 자산이 그에겐 ‘자산’이 아닌 것이다.
기본소득은 거꾸로 작용한다. 월 30만 원이 부자 청년에게는 아무 돈도 아니다. 그냥 외식이나 술값 한 번으로 소진할 수 있는 돈이다. 하지만 가난한 청년에게는, 아니 청년뿐 아니라 가난한 모든 사람에게 그것은 생과 사, 건강과 질병을 가르는 경계선을 넘어설 소중한 돈이다. 월 30만 원의 가치가 사람에 따라 이렇게 다른 것이다. 더구나 월 97만 원의 완전기본소득이 실현된다면 역시 부자 청년에게는 명품 살 돈도 안 되겠지만, 보통의 청년에게는 삶의 현재와 미래를 바꿀 큰돈이 매월 생기는 격이다.
다섯째, 앞서 말했듯이 우리나라 청년에게 먹는 것을 제외하고 주거와 창업 및 취업, 그리고 학업에 들어가는 돈은 가장 긴요하게 필요한 비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기초자산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주거 비용은 청년 임대 주택과 같은 부동산 정책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창업 및 취업도 일자리 창출과 각종 창업 및 취업 지원 사업이 절실한 영역이다. 학자금은 어떤가? 3000만 원을 줄 테니 학비로 쓰라는 것이 적절한 대책인가? 장학금을 확대하고 무상 교육을 확대하는 방안이 옳지 않은가?
청년기초자산제는 기초자산이란 이름 아래 소득지원책과 사회서비스 강화를 뒤섞어버린다. 사회서비스 강화로 해결해야 할 지점의 의제에 대해, 청년에게 일정한 목돈을 쥐여주고 시장의 경쟁을 혼자의 힘으로 돌파해 나가라고 외치는 셈이다. 더 나아가 그 돈을 종잣돈으로 해서 너의 ‘자산’을 형성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각자의 자산을 형성할 ‘기초’자산이니까 말이다. 기초자산으로 지급한 돈은 이러저러한 경로, 특히 주식과 코인 같은 금융 시장을 통해서 결국 시장 권력자의 손아귀로 다시 모일 것이다.
자산 불평등을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정의당의 3000만 원이건, 피케티의 1억 6000만 원이건 탕진하거나 소비하지 않은 채 잘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일부 부유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청년에게는 고만고만한 목돈일 뿐이다. 의미 있는 자산으로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미 어마어마한 자산의 격차는 ‘분산된 개인이 분산해서 소유한 화폐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자산 불평등을 완화할 방법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 일단 앞서 말한 자산 및 자산 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가 있을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공유지분권’과 ‘공동자산(커먼스, commons) 기금’의 방법을 고려한다.
공유지분권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제임스 미드(James Meade)가 제안한 것이다. 그는 기업이 가진 사회 전체의 주식 50퍼센트를 국가가 소유하되 국가는 경영권을 행사하지 않고 배당권만 행사하는 방법을 구상했다. 국민 모두가 ‘공동으로’ 기업의 ‘우선주’를 50퍼센트씩 보유하는 셈인데, 그 보유 지분에 의거해 사회 전체 기업 배당액의 50퍼센트를 기본소득으로 지급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사회 배당(Social Dividend)’이라고 불렀다. 기업의 주식을 소유한 주주가 ‘사적’ 배당을 받듯이, 사회 구성원 전체가 공동으로 기업의 주식 지분을 가지고 공동으로 ‘사회적’ 배당을 받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기업 주식 50퍼센트를 국가에 법적으로 배당한다는 것은 쉽게 수긍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기업의 수익이 기업의 능력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기업 활동이 이루어지는 사회 인프라와 환경의 터전 위에서 가능한 것임을 생각해 보자. 그 기업 활동의 결과인 이윤에 대해 사회가 배당권을 가진다는 생각은 그렇게 무리한 것이 아니다. 제임스 미드의 ‘공유지분권’ 아이디어를 좀 더 실질적인 근거를 가진 것으로 수정해 보자. 예를 들어 그린 뉴딜이나 디지털 뉴딜의 과정에서 연구 개발비 등으로 국가가 기업에 지원해 주는 공적 자금의 액수를 기업의 지분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 공적 자금은 말 그대로 국민이 낸 세금이므로 그 액수만큼 국민의 집합적인 지분이 되는 게 당연하다. 예컨대 지원받은 기업의 주식 시가 총액이 800억 원이라 할 때 200억 원의 공적 자금을 투입했다면 그 회사의 지분 20퍼센트를 우선주로 국민에게 내놓는 것이다.
‘IMF 위기’ 때 국민들은 국가의 외채를 갚기 위해 반지와 목걸이를 내놓았다. 그뿐이 아니다. 공적 자금이 막대하게 투입되어 수많은 대기업을 회생시키거나 인수·합병하는데 쓰였다. 그렇게 해서 살아난 기업들은 국민에게 무엇을 돌려주었나. 미미한 고용 창출 기능 외에는 갚은 것이 없다. ‘손실의 사회화, 이익의 사유화’란 말이 있듯이, 어려울 때는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받고 이익을 내면 경영진의 월급과 보너스, 주주들의 배당액을 올려 자신의 잇속만을 차리는 것을 국민들은 목격해 왔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재벌과 대기업에 대한 반감이 늘었다. 만약 ‘공유지분권’ 제도가 시행된다면 국민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업을 살리는 데에 국민의 돈을 쓰고 그 기업이 살아나 이익을 내면 국민에게 ‘사회 배당’을 하게 되므로, 국민들은 그 기업에 ‘진심’이 될 것이다. 자신이 그 기업의 실질적 주인이기 때문이다.
‘커먼스 기금’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속한 집단적 부, 공동자산에 대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정당한 몫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정신에 기초한다. 이에 커먼스 기금을 조성하여 그것을 재원으로 기본소득 배당을 하자는 개념이다.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 지급하는 것이다. 자연자원, 지식 재산, 빅데이터, 금융 인프라, 주파수 등이 모두 커먼스이므로 그 커먼스로 수익을 내는 기업에 부담금(levy)을 물려 그것을 기금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커먼스 기금에 가장 유사한 것으로는 앞에서 살펴봤던 알래스카 영구기금을 들 수 있다. 현재 60여 개 이상의 나라에 있는 ‘국부 펀드’도 국민에게 배당을 하기 시작한다면 이러한 커먼스 기금의 하나로 여겨질 것이다.
“근본적으로 기본소득은 사회 정의의 문제이다. 우리의 부와 소득은 우리 자신이 하는 어떤 것보다 우리 공동의 선조들이 했던 노력 및 성취와 훨씬 더 많이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사적 상속을 허용한다면 사회적 상속도 받아들여야 하며, 기본소득을 우리의 집단적 부에 근거한 사회 배당으로 간주해야 한다.”[7]
이렇게 공유지분권 혹은 커먼스 기금을 통해 기본소득을 지급하게 되면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조세 외에도 기본소득의 안정적 재원이 확보된다. 둘째, 민간 자본의 비중이 줄어들고 기업 내 공공 자본의 비중이 늘어남으로써 자산 불평등이 구조적으로 완화될 것이다. 공유지분권과 커먼스 기금을 통한 기본소득은 기초자산과 같은 ‘분산된 개인 자산’ 설계보다 사회적 이상에도 훨씬 적합한 방안일 것이다.
기본소득과 기초자산은 양립 불가한가
기초자산이 기본소득에 비해 여러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 해소가 시대적인 과제라는 점에 둘의 생각은 같다. 그렇다면 기초자산과 기본소득은 양립할 수 없는가? 기초자산은 틀렸고 기본소득만이 정답인가? 세계 정치의 현주소를 들여다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
피케티의 말처럼 사적 소유권을 사회 안정에 있어 필수 불가결의 요소로 신성시하는 ‘소유자 사회’에선 신분이 아니라 부가 세습되고 자본가가 영웅이 된다. 게다가 그 불평등 체제는 고학력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라는 ‘다중 엘리트 연합’이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정치를 장악함으로써 고착화하고 강화된다. 피케티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후 계급주의 유형의 좌우 정당 체계가 고학력자들을 빨아들이는 ‘브라만 좌파(Brahmin Left)’와 상위소득 및 자산을 빨아들이는 ‘상인 우파(Merchant Right)’로 구성된 ‘다중 엘리트 체계’로 점차 대체되고 있다 ...... ‘브라만 좌파’는 친재분배와 친시장 분파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상인우파’는 민족주의적이고 사회 토착주의적인 노선을 따르는 분파(극우파-김찬휘 주)와 친기업 및 친시장을 견지하려는 분파 사이에서 역시 갈팡질팡한다.”[8]
과거 노동자와 서민의 정당이었던 유럽의 사회당, 사회민주당, 노동당, 그리고 미국의 민주당 등이 고학력·고소득의 중상층 정당으로 변모하고, 전통적으로 자산 보유자들의 세력인 보수당, 공화당 등 중도 우파 정당이 극우 민족주의 세력의 발호 이후 그 눈치를 보면서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유인하는 정당 정치 현실은 유럽과 미국만의 모습이 아니다. 우리나라 현실에도 쉽게 브라만 좌파, 상인 우파, 사회 토착주의 분파에 각각의 정치 세력을 대입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피케티는 특히 좌파 정당이 불평등 체제를 혁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탓에 불평등에 분노한 대중의 불만이 선동적인 극우 세력으로 몰려가고 있다고 비판한다. 우리나라에서 국민혁명당 허경영 후보의 지지가 높아지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촛불혁명 세력을 자처하는 정당과 촛불혁명으로 탄핵을 당했던 정당이 ‘적대적 공생관계’를 형성하여 기득권 체제가 공고화되는 이 시점에 기본소득과 기초자산은 그 차이점만을 부각해 서로를 배제할 수 없다. 두 제도는 세부적으로는 다르지만 소득·자산 불평등 체제를 혁파하고자 하며 방법은 다르지만 소득·자산의 재분배를 목적으로 한다. 특히 일자리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계획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생산 과정 내부에서 ‘잉여 가치’에 대한 수취가 발생했던 산업 자본주의 시대[9]와는 달리 생산 체계 외부에서 ‘지대(地代)’ 수취가 대규모로 발생하는 금융 자본주의 및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에는 일자리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다. ‘경제학적 지대’를 과세 등을 통해 다시 전유하고 소득 보장의 방식으로 원래의 주인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기초자산 설계의 정치적 난점으로 인해 기초자산은 액수가 크면 클수록 실행이 어려울 것이다. 3000만 원은 어찌어찌 가능할 수 있겠으나 피케티가 제시하는 1억 6000만 원은 실행이 쉽지 않다. 기초자산의 액수에 따른 불평등 해소 효과와 정책 실현 가능성은 반비례한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기초자산은 작은 액수라 하더라도 기본소득과 함께 실행한다면 세대 간 갈등도 피하고 그 효능감이 극대화될 것이다. 기초자산의 탕진 문제도 20세 전과 20세 후의 기본소득이 쿠션 작용을 하여 사회적 충격을 완화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기본재산 제도가 의미 있는 수준의 기본소득이 지속 가능하도록 재원을 위태롭게 하지 않을 정도의 크기이기만 하다면”[10] 기본소득과 기초자산 제도를 함께 시행할 수 있다.
다만 두 제도를 함께 시행하는 것으로도 청년이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미국의 보수 싱크 탱크인 ‘맨하탄인스티튜트(The Manhattan Institute)’는 2020년에 발간한 보고서 <The Cost-of-thriving Index: Reevaluating the Prosperity of The American Family>에서 경제가 호황이 되어도 일반 대중들의 체감 경기가 나아지지 않은 이유로 임금 수준의 상승이 주거, 의료, 교통, 대학 교육이라는 4대 가계 지출의 상승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1985~2018년 사이에 미국의 4대 지출 평균은 4.11배가 증가했는데 같은 기간에 중위 임금 수준은 2.46배 상승하는 데 그쳤다는 것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기본소득과 기초자산 등의 현금 지급 정책과 함께 주거, 의료, 교통, 통신, 교육 등 삶의 기본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공공의 사회서비스로 제공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