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가둔 병
4화

정신 질환 혐오의 역학

그들은 어쩌다 잠재적 범죄자가 되었나


국가인권위원회의 실태 조사에 따르면 정신 질환자에 대한 편견의 원인으로 ‘대중 매체를 통해 영향을 받았다.’가 가장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이를 통해 대중 매체가 정신 질환에 대한 편견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1]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간 국내 6대 신문사의 정신 질환자에 대한 1662건의 기사를 분석해 100대 주요 키워드를 추출했다. 자료에 의하면 ‘치료’, ‘정신 질환’, ‘조현병’, ‘입원’, ‘경찰’, ‘정신 병원’, ‘사회’, ‘범죄’, ‘사건’, ‘증상’ ‘흉기’, ‘살인’, ‘여성’, ‘관리’ 등이 상위권을 차지하였으며 ‘정신건강복지법’, ‘지원’, ‘상담’, ‘보호’, ‘정신 건강 의학과’ 등의 키워드는 하위권에 머물렀다.[2] 이는 우리 사회가 정신 질환자에 대해 적절한 치료, 지원, 보호의 개념보다는 사건 및 사고 유발자이자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필요한 사회 문제로 인식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

정신 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이들이 사회 속에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빼앗는다. 정신 질환자의 범죄율은 전체 인구 범죄율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 [3]와 정신 질환자의 폭력 행동은 증상보다 인격의 영향이 훨씬 더 크다는 연구 결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언론과 대중은 조현병과 범죄를 연결 짓고 정신 질환자를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다. 조현병 당사자・가족 단체인 ‘한국조현병회복협회(심지회)’가 언론 모니터링을 통해 꼽은 대표적인 혐오 표현으로 ‘조현병 환자 사이코패스 성향 막으려면(헬스조선)’, ‘시한폭탄이 되어버린 조현병 환자(MBN)’, ‘조현병 범죄 일상화(KBS)’, ‘강제 입원 주저하다 결국 조현병 범죄(JTBC)’ 등이다. 해당 표현은 조현병 환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신 질환자가 된다는 건 일시적으로 정신적 고통을 경험하는 상태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배척당할 수 있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자리가 지워질 수 있으며, 어쩌면 원래 있던 자리로 평생 돌아갈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서구에서는 정신 질환에 대한 미디어의 영향력을 강조하며 국가적인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민간 차원에서는 2007년부터 ‘변화할 시간(Time to Change)’라는 범국민 인식 개선 캠페인을 추진하고 있다. 대중 매체 언론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배포하고, 공익 광고를 제작하며, 지역 사회에서 정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만남을 주선함으로써 정신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편견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22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정신 질환자 편견 해소 및 인식 증진을 위한 정책을 권고했다. 정신건강복지법에 인식 개선 조항을 신설하고, 대중 매체를 활용한 공익 광고, 캠페인, 언론 모니터링, 언론인 대상 교육 등의 사업을 활성화하도록 권고했다. 같은 해 서울시정신건강복지사업지원단은 한국의학바이오기자협회 등과 함께 〈정신 질환자 보도 가이드라인 1.0〉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으로는 정신 질환과 관련된 용어 사용에 유의할 것, 기사 제목에 정신 질환 관련 언급을 최소화할 것, 정신 질환과 범죄의 인과 관계를 임의로 확정 짓지 말 것, 당사자 등 관련자의 의견을 포함하기 위해 노력할 것 등이 담겨있다.

WHO는 정신 건강을 단순히 정신 질환이 없는 상태 이상임을 강조한다. 정신 건강은 ‘한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실현하고 일상적인 삶의 스트레스에 대처하고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으며, 자신이 속한 지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안녕 상태’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개인 수준의 생물학적, 심리적 요인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빈곤, 교육 수준, 경제적 수준, 가족 관계, 학교나 직장 생활, 지역 사회 환경 등이 영향을 미친다.[4] 소득 불평등[5] 혹은 사회적 불평등[6]이 심화할수록 정신 건강 악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들이 있으며, 경기 침체에 따른 긴축과 복지 정책의 변화가 국민의 정신 건강 문제를 늘리고, 정신 건강 문제는 실직의 문제에 영향을 미치면서 불평등 확대를 가져왔다는 연구도 있다.[7] 열악한 주거 환경이 정신 건강을 위협한다는 결과가 보고되기도 했으나[8], 아직까지 정신 건강을 현실의 구조적 문제와는 동떨어진 개인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정신 질환의 원인을 한 개인의 생물학적 문제로만 치환하여 바라보고, 치료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을 ‘의료 모델(medical model)’이라고 칭한다. 정신 건강의 문제가 의료 모델 깔때기를 거치는 순간, 정신 질환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요인들은 배제되고 오로지 개인의 생물학적 문제로만 귀결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사회・경제적 박탈이 클수록 우울이 심각하다는 연구들이 이뤄졌지만[9], 정신 질환에 대한 사회・환경적 요인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부재하다. 의료 모델에 입각한 협소한 시각은 자살의 문제를 개인의 우울 문제로 치환하거나, 경쟁적인 입시 압박 속에서 늘어나는 청소년 정신 건강의 문제를 상담과 약물 치료로만 대응하게 한다. 2014년 발생한 세월호 참사와 같은 재난 희생자들에 대한 접근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애도 과정을 쉽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로 규정해 버린다. 심지어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한 분노를 정신과 치료의 대상으로만 접근하기도 한다. 피해자들의 의견, 지역의 정서와는 상관없이 외부에서 쏟아지는 치료적 접근은 오히려 피해자들의 고통을 가중했다. 정신 질환을 개인의 문제로만 바라보게 되면, 이는 특정한 개인의 무능력과 비정상의 문제가 되고, 손쉬운 차별의 근거가 된다. 우리 사회에서 정신 질환에 대한 편견이 심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실태조사 결과 정신 장애인 가족들은 10년 전보다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더 심해졌다고 느끼고 있으며, ‘복지 지원 확대(70.7퍼센트)’보다 ‘편견 해소(71.2퍼센트)’에 대한 국가 지원이 더 절실하다고 답했다.[10]

 

광장으로 나선 ‘미친 자’들


정신 의료 전문가들이 증상에 초점을 맞추고 사람보다 증상을 들여다보던 1970년대부터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정신 장애인 당사자 운동이 시작됐다. 흑인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에 영향을 받아,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핵심은 의료 모델에 대한 저항이었다. 정신 질환을 진단받은 이에게 강요되는 해로운 치료에 저항했으며, 스스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사회적 변화를 주도했다. 여기에는 정신 질환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고, 정신 병원의 실상을 대중에게 알리면서 정신 질환과 치료에 대한 논쟁을 담장 밖으로 이끌어 낸 사람들의 노력이 토대가 됐다.

스코틀랜드의 정신과 의사였던 로널드 데이비드 랭(R. D. Laing)은 1960년 출간한 책 《분열된 자기》에서 정신과적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을 단순히 정상에서 벗어난 비정상이나 환자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자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서 불화와 분열을 경험한 사람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반정신의학 운동(Anti-Psychiatry Movement)에 불을 지폈다. 1962년에는 일 년 동안 정신 병원에서 보조원으로 일했던 미국의 작가 켄 키지(Ken Kesey)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출간됐다. 책 출간 이후 치료와 치유의 공간이 아닌 감금과 격리의 공간이 돼버린 정신 병원과 정신 질환자들의 인권 문제에 사회적 관심이 고조됐다. 여기에 당시의 여성 운동, 성소수자 운동 등 인권 운동의 영향이 더해지면서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들도 빼앗겼던 목소리를 찾고 말하기 시작했다.

1970년 미국에서는 ‘오리건 정신 질환자 해방 전선(Oregon Insane Liberation Front)’이 최초의 당사자 단체로 설립됐다. 이후 다양한 지역에서도 모임이 만들어졌다. 1972년에는 ‘정신 질환자 네트워크 뉴스 (Madness Network News)’라는 뉴스레터가 발간되면서 당사자 운동이 보편적 방향으로 확장됐다. 초기의 당사자 운동은 정신 의학을 반대하고 ‘매드 프라이드(Mad pride)’를 내세우며, 사회가 자신들의 독특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당사자가 자신의 삶과 치료에 통제력을 가지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매드 프라이드 운동은 정신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낙인에 저항했다. 정신 장애인 단체들은 자신들이 병든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매드(mad)’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내세웠다. 정신적 고통을 경험한 당사자들에게는 정신과 진단명과 같은 꼬리표가 붙고, 그들의 목소리와 경험, 지식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무효화된다. 대중들은 정신 질환자를 ‘미쳤다’고 비하한다. 매드는 이러한 관행과 패러다임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당사자들은 경멸과 비하의 의미로 사용되는 매드를 새롭게 쟁취해 정신 질환자를 향한 억압과 차별에 맞선 저항의 정체성으로 내세웠다. 매드 정체성은 ‘퀴어(Queer)’라는 용어가 성소수자 운동의 맥락에서 재탄생한 것과 유사하다. 퀴어는 ‘괴상한’이라는 의미로 과거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멸시적인 속어였으나, 1980년대 미국의 급진적인 동성애자 인권 운동에서 이 용어를 전복적인 방식으로 사용했다. 오늘날 퀴어에 덧씌워진 부정적 의미는 사라졌다. 매드 또한 전문가의 의료적 담론과 사회적 낙인에 저항하며 당사자 중심의 서사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다.

정신 질환 당사자들은 매드 프라이드를 통해 혐오에 맞서 광장으로 나섰다. 매드 프라이드는 당사자 스스로 목소리를 내 자신들의 권리와 가치 있는 경험을 대중에게 알리고, 광기를 경험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을 알리는 것에 중점을 뒀다. 이 퍼레이드는 1993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처음 시작돼, 현재는 호주, 남아공, 미국, 영국, 가나, 브라질, 독일, 프랑스 등 다양한 국가에서 진행되고 있다. 매드 프라이드는 다양한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한다. 같은 정신 질환자이더라도 정신병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표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물로 정신병을 치료할 필요가 없다며 의료 체제가 제공하는 치료를 대체할 방법을 모색하는 사람도 있다. 매드 프라이드의 의의는 정신적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한 가지 접근법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데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영국의 연구자인 패트릭 브래컨(Patrick Bracken)과 필립 토마스(Philip Thomas)는 매드 프라이드가 정신 의학을 개선하거나 강제성에 대항하는 것을 넘어서, ‘광기’와 ‘정상성’의 인식에 대한 사회적・문화적 변화를 도모하는 광범위한 목표를 갖는다고 말했다.[11] 광기는 정신 질환에 대한 사회적 신념, 가치, 자아감, 합리성에 관한 생각, 개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매드 프라이드의 핵심적 담론은 광기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것에 있다. 즉, 질환으로서 광기를 바라보는 관습적인 이해에서, 광기가 정체성과 문화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인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2010년대에 들어서 ‘정신장애인권연대(Korean Alliance for Mobilizing Inclusion · KAMI)’와 같은 당사자 활동이 시작됐다. 당사자가 주도하는 운동은 크게 두 흐름으로 본격화됐다. 하나는 정신 건강 기관에서 시작된 당사자 중심 활동의 일환이다. 2006년 이후 몇몇 정신 건강 기관은 정신 질환자를 대상으로 한 리더십 훈련 프로그램과 동료 지원 활동 등을 시작했다. 여기에 참여한 정신 질환 당사자들이 모이고, 연대하며, 역량을 강화하는 과정을 통해 조직화됐다. 또 다른 흐름은 2000년대 중반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온라인 활동이다. 당사자들은 인터넷 카페로 시작해 점차 오프라인으로도 정기적인 모임을 갖게 됐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며 단체로 발전했다.

조직화한 당사자 단체들은 강제 입원을 폐지하기 위해 헌법 소원을 청구했다. 이후 정신보건법 폐지 운동, 정신보건법 전부개정법률 반대 운동을 거쳐 정신 건강 정책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또한 정신 장애 전문 언론인 《마인드포스트》는 정신 질환을 비하하거나 편견을 조장하는 미디어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마인드포스트》는 2018년, “우리를 빼고 우리를 이야기하지 말라”는 선언과 함께 정신 질환 당사자 기자들이 모여 창간한 대안 언론이다. 정신 질환자들은 그동안 진단명 밖의 삶을 이야기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 《마인드포스트》는 정신 질환자들의 삶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를 그대로 전하고자 한다. 《마인드포스트》는 2021년 개봉한 영화 〈F20〉이 정신 질환자를 예비 범죄자로 보는 편견을 조장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공영 방송인 KBS에서 〈F20〉을 방영하려 하자 항의 방문과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를 취소시켰다. 누군가에겐 흥미진진한 스릴러일 수 있지만, 조현병 당사자와 가족에게는 사회적 편견의 칼날이 될 수 있음을, 당사자들 스스로 목소리를 냈다. 그 외에도 당사자 단체들은 제도적 개선과 동료 지원 등 직접적 서비스 제공에 참여했고, 문화 예술 활동을 통한 사회적 인식 개선 활동 등을 진행했다. 장애나 여성 운동과 마찬가지로 정신 질환자들도 이제 당사자가 정책, 서비스, 그리고 담론의 주체가 되어 당사자 관점에서의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정신적 고난을 경험한 많은 당사자들이 자신의 경험과 서사를 공유하고 있다. 양극성 정신 장애를 경험한 당사자의 이야기인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부터 거식증을 경험한 당사자의 《삼키기 연습》, 조현병 당사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질병과 함께 춤을》까지 다양한 경험이 공유됐다. 당사자의 목소리는 분명히 존재했다. 지금까지 쉽게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는 다양한 당사자의 목소리가 사회를 향해 표출되고 있다. 이들은 정신 질환을 드러내는 것에서 나아가 정신 질환이 삶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드러내기도 한다.

정신 건강 서비스 소비자 운동을 펼치고 있는 기업 ‘멘탈헬스코리아’의 장은하 부대표는 우울증으로 소중한 것들을 잃었지만, 끝없는 밑바닥에서 애써 외면했던 삶의 진실을 마주했다고 말했다.[12]

“우울은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의문을 품게 했고,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잡아 목표를 다시 세우게 했다. 분노와 복수심은 자신과 타인을 해치는 부정적인 에너지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성공을 향한 강한 열망의 에너지로 바뀌어 긍정적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우울에도 에너지가 있다. 우울은 사람의 에너지를 깡그리 앗아가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개척하는 영감과 통찰을 제공하기도 한다.”

정신 질환자들은 막다른 길에서 만난 ‘나’라는 존재를 보듬고, 발병 이전이 아닌 새로운 삶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고 있다. 이들은 그 치열한 여정에 우리 사회가 아주 조금만 더 곁을 내주어주기를 바란다.

 

치료를 넘어 회복으로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대니얼 피셔(Daniel Fisher) 박사는 의료 모델과 사회적 편견에 맞서 정신 질환자의 권익 옹호 활동을 전개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20대 초반 미국 위스콘신대학교에서 생화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원(NIMH)’에서 세로토닌과 같은 신경 전달 물질을 연구하며 정신 질환의 화학적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정신 질환이 사람의 뇌에 있는 생화학적 불균형 때문에 발생한다고 확신하던 화학자였다. 전문가가 처방한 약물만이 조현병 진단을 받은 사람의 뇌를 고칠 수 있고, 환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기계가 스스로를 고칠 수는 없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다.

피셔가 25살이 되던 해, 그는 조현병 증상으로 인해 첫 번째 입원을 했다. 정신 질환을 고칠 것이라고 그토록 확신하던 약물을 직접 복용한 후에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 “우리의 정신은 우리 뇌의 물질적 요소로 단순히 환원될 수 없다. 우리 정신을 분자로 환원하는 행위는 인간을 로봇 같은 객체로 바꾸는 것이며 우리를 죽이는 일이다. 약물은 타인과 관계 맺기를 하고, 치유하고, 삶을 회복하는 자신의 역량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13] 이후 피셔는 두 차례의 입원을 더 거쳤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회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만나고, 자신을 더욱 잘 알아가며, 존중받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피셔는 정신과 의사가 되어 회복은 약이 아니라 관계에서 온다는 것을 알리고, 그런 치료 환경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치료와 치유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엄연히 별개다. 치료는 의료 전문가가 병이나 상처의 완화나 제거를 위해 개입하는 행위로서, 특정한 증상이나 질병의 치료법을 찾아 시행하는 것이다. 정확한 정의와 분류, 엄밀한 측정과 엄격한 통제를 통해 치료제를 찾아내고 처방하는 것으로, 감염병을 비롯한 급성 질환에 매우 효과적이다. 반면 치유는 섬세하고 개인적인 과정이다. 치유는 잘 살고 있다는 느낌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한 증상이나 질병의 치료법을 찾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쁨과 만족감을 주는 활동을 찾아내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14] 치유를 위해서는 육체·행동· 관계·영적 차원으로 구성된 전인적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모든 것이 통합적으로 균형을 이룰 때 인간은 온전함을 경험할 수 있다. 온전함을 찾아가는 개별적인 치유 과정의 주체는 의료 전문가가 아닌 당사자일 수밖에 없다. 정신 약물은 정신 질환 치료의 일부로서 매우 유용하지만, 약만으로 온전한 정신을 얻을 수는 없다.

정신 질환에서는 치유를 회복(recovery)이라 칭한다. 이때 회복은 환청, 망상 같은 증상의 회복을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삶의 회복과 가깝다. 정신 질환자는 정신 질환만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개인의 성장 배경, 가족과 교우 관계, 성격, 교육 수준과 사회적 능력, 고유한 가치관과 영성에 정신 질환이 더해져 살아갈 뿐이다. 정신 질환이 생긴다고 해서 개인의 상황과 가치관이 사라질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가리고 오로지 정신 질환만으로 개인을 설명해서도 안 된다. ‘증상’과 ‘증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도 같을 수 없다. 증상이 매우 심각한 짧은 순간의 급성기를 제외하면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항상 증상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증상을 통제하고 관리하며 살아가는 주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사회는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을 보기보다는 증상을 먼저 살피고, 증상과 사람을 동일시하기까지 한다.

당사자 운동은 정신 질환자를 단순한 ‘조현병, 조울증 환자’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바라본다. 이를 통해 당사자의 살아있는 목소리를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러한 목소리가 오가는 공간은 다양한 억압과 차별 속에서 삭제되고 외면받던 당사자의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곳이다. 자율, 유능, 관계, 안전이 없으면 인간은 정신적으로 건강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가려두고 약으로 정신적 안정을 얻기를 바란다면 그건 인간을 영적이고 유기적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고장 난 기계로 바라보는 것이다.

2013년 WHO는 〈정신건강행동계획(2013~2020)〉에서 지역 사회에 기반을 둔 정신 건강 서비스의 핵심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지역 사회 기반의 정신 건강 서비스는 회복 지향의 접근이어야 하며, 이는 정신 장애를 가진 당사자의 열망과 목표를 성취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15] 이제 정신 건강 정책과 서비스는 ‘어떻게 치료해서 병을 낫게 할 것인가’에서 ‘정신 질환자가 지역 사회 안에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으로 초점을 바꿔야 한다. 증상의 제거를 우선하는 치료가 아닌 당사자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돕는 치료, 그리고 치료에 삶이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한 치료가 되는 것이 진정한 회복이다. 언제나 증상이 아니라 삶이 중요하다.

 

연결에서 시작되는 회복의 여정


정신 질환을 회복한 많은 당사자들은 회복의 출발을 ‘관계’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을 믿고, 지지하며, 기다려 주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회복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정신 질환로서의 내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하는 친구, 치료의 과정을 함께 견뎌주는 가족, 마음의 상처까지 들여다보고 공감해 주는 전문가가 있을 때 비로소 치료가 아닌 회복이 시작된다. 일본의 정신과 의사 나쓰카리 이쿠코는 조현병을 가진 엄마의 딸로 태어나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의과 대학 재학 시절 정신 병원에서 여러 차례 입원 치료를 받으면서 어렵게 정신과 의사가 되어 평생을 정신 질환자를 치료해 왔다. 이러한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녀는 저서 《사람은 사람으로 사람이 된다》 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신과 의사로서 말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그 정답은 약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경험한 기억과 감정까지 완전히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약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사람에게 받은 슬픔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미움과 허무함도, 결국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회복되었다. 사람은 사람으로 사람이 된다.”[16]

조현병을 가진 박목우 작가는 망상으로 스스로를 방에 가둔 지 5년이 흘렀을 때 훌쩍 한진 중공업 파업에 참여하기 위한 ‘희망버스’를 탔다. 삶을 이어가는 힘이 알고 싶어 무작정 오른 길이었다.[17] 박목우 작가는 그곳에서 혼자 희망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을 챙겨주던 이들과 크레인에서 손을 흔들어주는 김진숙 노동운동가를 만났다. 모르는 사람들과 나눈 대화 속에 웃음이 오갔고, 그곳에서 마셨던 따듯한 커피의 온기는 아주 오랫동안 남았다. 5년 만에 처음으로 마주친 환대였다. 약 부작용으로 35킬로그램이 넘게 살이 쪘지만 그런 사실이 부끄럽지 않았다. 단지 그들 가운데 하나이고 싶었다. 박목우 작가는 그곳에서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소개 받았다. 센터에서 자신과 같이 정신적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 속에서 환청과 망상이 더 이상 증상이나 낙인이 아닌 소통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증상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각자에게는 존중받아야 할 현실임을 깨달았다. 같은 정신적 고통을 안고, 사회 속에서 같은 경험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위안과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회복은 사람들과 의미 있는 사회적 관계를 다시 만드는 과정이다. 섬처럼 고립된 상태에서 회복은 일어날 수 없다. 회복의 여정은 사람들과 다시 연결되는 과정이다. 결국 회복 지원에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정신 질환자들이 고립에서 벗어나 다시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 맺기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동료 지원가다. 동료 지원가는 정신 질환으로 인한 치료와 회복의 경험을 가진 당사자가 공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료에게 상호 간의 지지를 제공하는 전문가다. 동료 지원가는 이미 상처를 입고 치유하는 과정을 겪었다. 이들은 유사한 고통을 겪는 정신 질환자에게 동료로 다가간다. 치유의 경험을 공유하는, 상처 입은 치유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오랜 시간 우리 사회는 정신 질환을 감추거나 고치거나 교정되어야 할 상태로만 바라봤다. 정신 질환의 경험이 다른 사람을 돕는 치유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신 질환을 가지고 잘 살아가는 데 최고의 전문가는 이미 그렇게 살아본 사람이다. 같은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을 돕는 동료 지원가는 증상, 치료, 회복이라는 삶의 과정에서 경험의 전문가가 된다. 미국 등 서구에서는 이미 2000년대 이후 동료 지원가 전문 자격 과정을 만들고, 정신 의료 기관 및 지역 사회 기관에서 이들을 정식으로 고용한다. 우리나라도 2010년 이후 일부 정신 건강 기관에서 시작하여, 2021년에는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표준화된 동료 지원가 양성 과정을 개발했다. 훈련받은 동료 지원가가 정신 건강 기관에서 실제로 역할을 할 수 있는 제도화의 첫걸음을 뗀 셈이다.
[1]
국가인권위원회, 〈정신장애인 인권 보고서(2021)〉, 2021년, 40쪽.
[2]
양옥경 외, 〈정신장애인 국가보고서 이행상황 점검을 위한 실태조사〉, 2019년, 344-351쪽.
[3]
박성민, 〈정신질환 범죄자의 재범…법무부-복지부, 책임은 누가 더 클까[박성민의 더블케어]〉, 《동아일보》, 2020년 12월 11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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