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사각지대
2000년 장애인복지법이 개정되면서 장애 유형에 ‘정신 장애’가 포함되었다. 조현병, 반복성 우울 장애, 양극성 정동 장애 등의 진단을 받고, 일 년 이상의 지속적인 치료 후에도 일상생활 혹은 사회생활에 장애가 있는 경우 장애 등록이 가능하다. 2021년에는 강박 장애, 뚜렛 장애, 기면증으로 인한 정신 장애도 정신 장애 기준에 추가됐다. 정신과 진단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단기 치료를 통해 일상을 회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상생활의 기능 장애로 인해 사회적 지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장애 등록을 통해 장애인 복지 제도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물론 지속적인 기능 장애가 있다 해도 스스로를 ‘장애’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치료되어야 할 일시적 증상’으로 받아들일 뿐, 영구적인 손상으로서의 ‘장애’로 인식하는 것에는 거부감을 표한다. 실제로 정신 장애인의 등록률은 2017년 기준 86.2퍼센트다. 이는 전체 장애인의 등록률인 94.1퍼센트보다 낮은 수준이다. 그럼에도 정신 질환 당사자들은 스스로를 ‘정신 장애’로 정의하기를 원한다. 이는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적 모델에 근거한다.
장애는 일반적으로 비정상적인 신체적・정신적 손상 또는 무능력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한다. 이는 의료 모델의 관점이다. 하지만 학문으로서의 장애학
[1]은 이러한 장애의 일상적 의미를 전복한다. 장애학은 사회 활동을 수행하는 데 있어 손상을 지닌 사람들의 무능력이 다수자인 비장애인에 의해 구축된 장벽의 결과라고 역설한다. 즉, 장애를 가져오는 것은 시설 수용, 노동 시장으로부터의 배제, 접근할 수 없는 물리적 환경 등 장벽을 만들고 제약을 가하는 사회・문화・물리적 구조다.
[2] 이를 장애의 사회적 모델이라 칭한다.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3] 의료 모델에서 장애인의 이동권은 손상된 신체를 치료해 이동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기능을 향상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반면 사회적 모델은 장애인이 사회적 활동을 수행할 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환경에 주목한다. 사회적 모델 관점에서는 장애인의 이동권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로막는 턱이나 계단 등의 사회적 장벽을 허무는 것에 초점을 둔다.
정신 장애 또한 의료 모델로 바라보게 되면 모든 어려움은 ‘개인’에게 귀결된다. 이는 정신 장애인 개개인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여기서 정신 질환자의 ‘개인의 노력’은 정신과 약물을 복용하는 것, 치료를 받는 것을 포함한다. 정신 질환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바라본다면 ‘노력도 내 몫, 책임도 내 몫, 그에 따른 결과도 내 몫’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사회적 모델은 여기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다면 사회는 도대체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가?’ 사회적 모델은 사회가 개인의 손상에 장애의 책임을 돌리면서, 배제와 차별을 전제하는 시스템은 방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중요한 것은 증상에 대한 치료만이 아니다. 장벽을 만들고 제약을 가하는 사회 제도를 함께 개선하기 위한 정당한 편의 제공과 사회적 지원 등이 수반돼야 한다.
장애에 대한 사회적 모델은 2001년 WHO가 채택한 ‘국제장애분류(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Function · ICF)’에 반영되었다. 장애는 개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활동과 사회 참여를 제약하는 사회·환경적 문제로 규정됐다. 이에 따라 장애에 대한 접근에 치료와 재활 서비스를 넘어 사회 제도 개선까지 포함됐다. 이후 2006년 채택된 UN 장애인권리협약은 인권 모델 관점을 취했다. 인권 모델은 사회적 모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장애인 당사자의 의사와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며, 장애인을 위한 최선의 원칙이 아닌, 당사자의 의사와 선호를 우선시하고 있다. 장애인권리협약을 논의하는 과정에는 국제 정신 장애 당사자 단체인 ‘세계정신과생존자네트워크(The World Network of User and Survivors of Psychiatry · WNUSP)’도 함께 참여해 정신 장애인의 인권 이슈를 반영할 수 있었다. 장애에 대한 국제적 기준이 발전하는 만큼 한국의 장애인 정책 또한 빠르게 변해왔다. 1981년 심신장애자복지법 제정, 1989년과 1999년 장애인복지법 전면개정, 1990년 장애인고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 제정, 2007년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제정, 2011년 장애인활동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 그리고 1998년부터 2022년까지의 다섯 차례에 걸친 장애인정책종합계획 시행까지 진행됐다. 한국 사회 역시 장애인의 복지, 고용, 권리 옹호, 사회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와 서비스를 발전시켜 왔다.
정신 장애는 2000년 장애인복지법 개정으로 장애 유형에 포함됐지만 장애인 복지 체계 내에서도 여전히 차별받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2022년에서야 삭제된 장애인복지법 제15조다. 이 조항은 정신 장애인에 대한 복지 서비스를 정신건강복지법에 위임하고 있다. 하지만 정신건강복지법은 사실상 치료와 재활에 대한 법으로, 복지 지원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정신 장애인의 복지는 장애인복지법과 정신건강복지법 모두로부터 배제된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던 셈이다. 정신 장애 당사자 단체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장애인복지법 제15조는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장애인 복지 체계에서 정신 장애에 대한 지원은 실체적인 내용이 부재하다. 대표적으로 활동 지원 서비스를 예시로 들 수 있다. 활동 지원 서비스는 장애인의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활동지원사가 보조함으로써 장애인의 실제적인 사회 참여를 보장하는 서비스다. 정신 장애의 경우 이 서비스를 제공받기 어렵다. 그 이유는 활동 지원 서비스의 자격 요건 때문이다. 자격 요건을 판정하는 종합 조사표는 기능 제한, 사회 활동, 가구 환경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정신 장애인에게 중요한 인지 행동 특성 영역 점수는 최고점이 94점으로 전체 기능 제한 총점 532점 중 매우 일부분에 해당한다. 사실상 정신 장애로 인해 활동 지원 서비스를 받기는 매우 제한적인 셈이다. 신체가 불편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운 것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만, 환청과 망상, 공포로 인해 버스를 탈 수 없는 정신 장애는 인정하지 않는다. 신체 장애에 대해서는 의료적 치료와 재활 외에 휠체어, 활동 지원, 이동 지원, 편의 시설 설치 등의 사회적 지원이 이루어지는 반면, 정신 장애에 대해서는 여전히 치료와 재활이라는 개인의 회복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신 장애에 대한 사회적 지원의 부재는 정신 장애인의 삶에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2020년 보건복지부의 장애인 실태 조사 결과는 참담한 수준이다.
[4] 정신 장애인은 전체 장애에 비하여 기초 생활 수급권자 비율은 세 배가 많고, 취업률은 5분의 1 수준이며, 장애로 인해 차별받고 있다고 느끼는 경우는 두 배 가까이 된다. 정신 장애를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인 결과, 정신 장애인의 삶은 여타 장애에 비해서도 훨씬 열악한 상황이다. 개인화된 치료 과정 속에서 잊히는 것은 정신 장애인의 평범한 삶이다. 살고 싶은 곳에서 살아가고, 원하는 직장을 얻고, 의미 있는 사회생활에 참여하며, 다양한 이들과 관계를 맺는 평범한 일상의 권리가 사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