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은 눈에 보인다. 진물이 나는 상처 부위를 보고 피를 닦을 수 있다. 점차 환부에 딱지가 앉는 것을 보며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병이 있다. 보이는 건 돌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증상뿐이다. 갑작스레 소리를 지를 수도, 환청을 들을 수도 있다. 몇몇은 보이지 않는 병을 보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고 ‘개운하다’는 감각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외상 역시 보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세상은 그들의 상처를 꼬리표로 덮었고, 비좁고 외진 곳에 가뒀다. 정신 질환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언제나 예외였다.
보이지 않는다는 서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정신 질환은 사회에 뿌리내렸다. 환자는 자신의 병을 숨기기 시작했고, 사회는 정신 질환을 점차 잊었다. 잊힌 정신 질환은 파편적인 단어 안에 갇히기 시작했다. 강력 범죄, 살인, 망상, 약, 입원 등이다. 개별 단어들이 정신 질환으로 귀결되자 사회는 이들을 격리해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적대적인 세상을 마주하며 환자는 자신의 병을 부인하거나 숨겼다. 악순환의 시작이다. 약물은 분명 정신 질환으로 인한 증상을 완화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병이 만든 삶의 빈자리에는 약과 병원만이 들어섰다. 약을 먹지 않으면 움직이기도 어려워하는 이들은 자신이 약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약이 빠져나가면 삶이 텅 비어버린다. 그렇게 정신 질환을 앓는 이들은 다시 병원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빠른 속도의 회전문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채 회전문 사이를 빙빙 도는 것처럼 말이다. 누구도 그 회전문의 속도를 낮추거나 좁은 틈새 안에 갇힌 사람을 바라보지 않았다.
“어느 순간 X는 문밖을 나서기 어려웠고, 긴 시간 휴학할 수밖에 없었다. 과제를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출석조차 쉽지 않았다. X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침대에서 보냈다. 끼니를 챙겨 먹거나 주변을 치우거나 Y와 연락을 하지도 않았다. X 주변에서는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몇 년 전 대학 입시를 위해 다닌 학원의 선생 Z의 목소리였다. X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듣는 자기 자신이 싫었다. X는 정신 병원을 찾았고, 입원 치료를 받았다. 폐쇄 병동에 입원하기 위해서 그간 모아두었던 돈을 다 쓸 수밖에 없었다. 잔고가 바닥날 무렵, X는 어쩌면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친구 Y는 X가 전한 복학 소식을 듣고 좋아했다. 한 학기가 채 끝나기 전이었다. Y는 다시 X를 볼 수 없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Y는 생각했다. X가 다시 입원한 걸까? X가 다시 침대에 갇혀 버린 걸까? X는 환청을 좇아 지금 이곳에서 멀어진 걸까? 학교는 놀랍도록 조용했다.”
짧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X지만, 보이지 않는 Z는 한 명이 아니다. 사회 전체, 구조 전반, 치밀한 역학까지, 모든 것이 Z가 될 수 있다. X의 고통과 Y의 좌절감을 호르몬의 이상 반응과 약물의 부재로 단순화할 수 있을까? 하나의 질병을 개인의 잘못과 불운으로 돌리거나 나약한 의지 탓으로 돌리는 것은 간편하다. 그런 구조는 다루기 쉽다 못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나의 의지만 강하다면, 내가 잘못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X도, Y도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안도감은 환상이다. 환상은 생각보다 더 두껍고 견고해서 빠르게 돌아가는 회전문 앞에 암막 천 정도는 가볍게 칠 수 있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기에 원인을 해결한다는 논리의 의료 모델은 근대의 산물이다. 완벽한 인과 관계는 있을 수 없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불러올 수 있다고 태풍의 원인을 나비의 날갯짓으로 돌리는 건 이상하다. 소설 속, 영화 속의 우연하고도 완벽한 마주침이 비현실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현실을 완벽한 인과 구조와 논리 관계로 바라보면 많은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치료’가 가능하다고들 말하는 약이 존재하는 지금도 조현병 환자의 75퍼센트는 완전한 회복을 이루지 못한다. 그 연쇄 안에 무언가 놓친 것이 있다는 증거다.
비현실이 완벽한 인과율로 작동한다면 현실이 내세울 수 있는 건 새로운 구조를 상상하는 능력이다. 가능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현실에 침입하면 어찌 됐든 둥지를 튼다. 프랑코 바자리아의 정신 병원 폐쇄 계획은 ‘이탈리아의 미친 법(Italy’s mad law)’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0년 12월 31일, 이탈리아의 모든 공공 정신 병원이 폐쇄됐다. 바자리아법이 시행된 지 20여 년이 흐른 이후다. 바자리아는 병원 밖에서 정신 질환자들이 더 나은 삶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상상이 현실이 되자 정신 질환은 ‘보이는 병’이 되었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수많은 질문과 우려에 부딪히며 경로를 바꿔야 할 때도 있다. 누군가는 정신 질환자를 위해 그 많은 자본을 어떻게 쏟을 수 있겠냐며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언젠가 X였고, Y였고, Z였다. 장벽을 인식하고 그 뒤를 상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장벽 뒤에 누가 살아 숨 쉬는지 볼 수 없다. 혹은 내 앞에 이미 놓여 있을 수 있는 장벽도 볼 수 없다. 누군가에게 세상은 무한하지만, X에게 세상은 병원으로 향하는 길과 비좁은 병동 하나다.
《사회가 가둔 병》은 우리 사회가 어떻게 정신 질환을 다뤄왔고, 무엇이 정신 질환을 가뒀는지 말한다. 행정적으로 부과되는 실질적인 차별부터 몇 가지 단어들이 모여 만드는 꼬리표까지, 정신 질환자의 삶은 삶의 것이 아닌 것들로 가득하다. 사회는 더 나은 방향을 상상하고, 만들어 낼 책무가 있다. 다시 질문할 때가 왔다. 정신 질환자들의 삶은 어디 있는지, 왜 이들은 평생을 비좁은 병동 안에 갇혀 살아야 하는지, 이들이 노동을 하거나 유의미한 삶의 궤적을 만들어 갈 수는 없는 건지.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답은 나올 수 없다.
김혜림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