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극화 시대에 한 걸음 더 가까이 왔습니다. 그럼 이제 기존 신냉전 문법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서방, 그리고 소련을 위시한 반서방 진영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경쟁을 벌였죠. 소련 붕괴 이후 많은 구소련 국가들이나 신흥 국가들이 권위주의를 띠며 미국 일극 체제(Unipolar) 시절에 자유민주주의와의 대결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중국의 부상과 미중 갈등의 격화는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을 연상시키며 세계로 하여금 신냉전을 우려케 했죠. 그런데 이 공고했던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는 올해 동시에 흔들렸습니다.
서방을 위시한 민주주의 국가는 반으로 쪼개졌습니다. 특히 유럽 전역에 두드러지던 우파 포퓰리즘은 올해 극에 달했습니다. 포캐스트 〈
우파의 뉴 노멀〉에 잘 드러납니다. 포캐스트 〈
톨레랑스는 죽었다〉는 지난 프랑스 대선을 분석합니다. 극우와 극좌가 대립한 유례없는 선거였습니다. 포캐스트 〈
미국은 깨졌다〉에서는 ‘로 대 웨이드’ 사건의 판결 번복으로 레드·블루로 양분된 미국 사회를 조명했습니다. 사회 통제가 심한 권위주의 국가에선 어땠을까요? 카자흐스탄에선 독재와 민생고를 이유로 기록적인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포캐스트 〈
독재의 가스라이팅〉에서 전해드렸죠. 물샐틈 없던 중국 공산당의 영도력에도 균열이 생겼습니다. 포캐스트 〈
화이트 페이퍼, 블루 웨이브〉에서는 ‘백지 시위’로 불린 중국의 반정부 시위를 조명했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곳은 이슬람 시아파 대장 이란입니다. 히잡 착용 불량을 이유로 경찰 조사 도중 사망한 한 여성의 죽음이 극렬한 반정부 시위로 격화하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포캐스트 〈
히잡을 태워 봄을 그리다〉에서 첫 소식을 전해드렸고 전자책으로 더 깊이 살펴봤습니다.
#12월 28일 전자책 〈그곳에 피가 흐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돈의 힘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볼 차례입니다. 최동훈 감독의 영화 〈타짜〉에 이런 명대사가 있죠. “돈이라는 게 말이야 독기가 세거든.” 빌런 곽철용의 대사입니다. 표독스러운 돈은 지독한 현실을 보여줬습니다. 사계절 내내 금융 시장은 겨울이었습니다. 기축 통화인 달러가 먼저 둑을 막았습니다. 포캐스트 〈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다〉는 연일 화제가 된 미국의 금리 인상을 추적합니다. 돈줄이 막히니 투자 심리가 바뀌었습니다. 가능성과 성장성에서 수익성으로 돌아선 것이죠. 포캐스트 〈
롤러코스터 위의 빅테크〉는 소셜 미디어 '스냅(Snap)'이 흔들리며 와르르 무너진 기술주 폭락 사태를 분석했습니다. 빅테크의 위기는 고용 불안과 해고 바람으로 나타났습니다. 포캐스트 〈
월스트리트 Z세대의 불안〉은 투자 은행과 빅테크에 불어온 고용 한파를 조명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땠을까요? 불안은 채권 시장을 레고 블록처럼 무너뜨렸습니다. 포캐스트 〈
레고랜드 판타지〉는 강원도의 지급 보증 미이행에서 비롯된 나비효과를 다뤘습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성장, 신자유주의는 결국 한계를 드러내고야 말았습니다. 힘의 방향이 바뀌니 돈의 방향도 바뀝니다. 한국인이라면 잊을 수 없는 IMF는 이제 20세기의 유산이 됐습니다.
#11월 30일 전자책 〈신용불량 IMF〉
자본주의에서 돈은 믿음의 증거입니다. 주가는 기대의 증거입니다. 웹 3.0이 새로운 질서가 되나 싶었지만 정작 그 중심에 있는 코인판의 생리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세계 3대 암호 화폐 거래소 FTX의 파산은 레고랜드 사태를 연상케 했습니다. 포캐스트 〈
네트워크의 투자합니다〉는 FTX와 바이낸스의 힘겨루기 과정을 추적하며 크립토윈터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블록체인 생태계의 거품이 꺼지는 가운데 옥석이 가려지기도 했습니다. 유가랩스라는 회사는 ‘BAYC’라는 NFT로 단 1년 만에 전 세계 프로필 사진 NFT(PFP NFT) 시장의 왕좌를 차지했습니다. 전 세계의 많은 셀럽들이 BAYC를 소유하고 있고 다양한 파생 프로젝트가 생겨났습니다. 이들의 주요한 성공 요인은 멤버십에 기반한 커뮤니티 전략이었습니다. 결국 돌고 돌아 믿음과 유대, 혜택입니다. 경영 컨설턴트이자 블록체인 전문가 황의석은 유가랩스의 여정을 책에 담았습니다. #9월 종이책 《
유가랩스, NFT 파워하우스》
웃은 사람은 소수입니다. 코인 열풍은 시들해지다 못해 얼어 붙었습니다. 주식이든 코인이든 폭락할 때마다 인터넷에 자주 보이는 댓글이 있습니다. “투자는 본인 책임입니다.” 반은 맞는 말입니다. 새로운 질서를 믿을 때는 믿음의 대가가 필요한 법이죠.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예견 불가능한 일이었을까요? 우후죽순 늘어난 크립토 생태계가 정리될 것이라는 견해는 늘 있었습니다. “95percent coins are going to die.” 루나·테라 코인의 창시자 권도형(Do Kwon)의 발언입니다. 아이러니하죠. 정작 루나는 99퍼센트 폭락했습니다. 한국인이 만들고 세계가 주목한 이 ‘알고리즘 기반 스테이블 코인’은 암호 화폐 시장에 지옥문을 열었습니다. 그저 코인 투자를 하는 분들에게만 유효한 얘기가 아닐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북저널리즘은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김승주 교수를 인터뷰해 이 사태의 본질을 들여다봤습니다. 세계가 앞다투어 고안하는 가상 자산 보호법에 대한 의견도 담겼습니다.
#5월 24일 톡스 〈루나 사태는 예견된 재앙이다〉
이해와 전환
확산하는 믿음과 무너진 믿음의 대비는 극적입니다. 안보 불안과 금융 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옥석을 가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재편되는 세계에서 먼저 던져야 하는 질문은 과연 “새로운 질서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렇다면 세계 질서를 바꾼 변인을 봐야 합니다. 먼저 지정학이 설명하지 못했던 역사의 과오를 봐야 합니다. 제국주의가 갈라놓은 사람들, 양차 세계 대전 종식과 함께 서두르게 그어진 국경은 민족주의라는 망령을 낳았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 중 하나이자 현대의 중동, 아프리카의 내전을 관통하는 키워드입니다. 유럽 등지에 피어나는 우파 포퓰리즘은 민족주의와 쉽게 결합하고 국가주의와 결탁합니다. 국경 안팎의 갈등이 피어납니다. 피아식별의 정서로 수렴합니다.
세계화 역시 들여다 봐야 합니다. 세계화는 많은 재화를 저렴하게 하고 수많은 빈곤을 퇴치했지만 그 수혜가 편중되며 저개발 국가와 기후를 병들게 했습니다. 무역과 에너지, 원자재의 높은 의존도가 가지는 리스크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2022년입니다. 그간 세계 경제는 끊임없이 몸집을 불리려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습니다.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식사가 제공되지 않자 세계는 이를 ‘위기’라 표현합니다. 성장주의에 대한 회의는 이름도 비슷한 ‘성장주’의 폭락과 오버랩됩니다. 신자유주의가 폭주한 근 몇십 년 동안 많은 국가는 분배를 더 큰 성장에 기댔습니다. 트러스 총리는 영국의 인플레이션 해결을 위해 ‘성장, 성장, 성장’을 외쳤죠. 화무십일홍의 총리직이 준 교훈은 기존의 경제 문법의 한계입니다.
새로운 세계 질서는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를 넘어설 것을 요구합니다. 색깔론과 블록화로 대표되는 구시대적 문법은 오늘날 국제 사회에 외교적 언어 장벽을 쌓았습니다. 국제적 갈등의 본질은 역사 속에 있을 수도, 국가 구성원 간 인식 차이에 있을 수도, 단순히 상대국의 팽창에 대한 불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본질을 회피하고 호도할수록 평화와 실용은 멀어집니다. 국제 사회의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현실주의가 국제 사회를 더 아프게 파고들지만 그 결과가 과거처럼 안보 딜레마로 이어져선 안 됩니다. 갈등 회피에 꼭 세계화로 대표되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전 지구적 공감대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인구 대책일 수도, 자원의 공공성일 수도, 기후 위기일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 질서는 전환을 요구합니다. 자연 환경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국민은, 소비자는 정의의 회복을 국가와 기업에 요구합니다. 독일은 유럽 가운데서도 선도적으로 에너지 전환에 앞장선 국가입니다. 독일 북부부터 스위스까지 이어지는 셰일가스를 포기하고 독일이 브릿지 연료로서 천연가스에 의존한 이유는 전환에의 의지 때문입니다. 서론에 언급한 기고문에서 숄츠 총리는 2030년까지 독일이 사용하는 전기의 최소 80퍼센트를 재생 에너지로 생산하고 2045년까지 넷제로 상태인 “기후 중립(climate neutrality)”를 달성하겠다고 말합니다. 신냉전의 문법을 깨고 중국과의 활로를 모색하면서도 남중국해 및 대만 해협 분쟁, 인권 문제에 대한 언급을 잊지 않습니다. 신흥국은 어떤가요? 그린워싱으로 비판받긴 했지만 이집트는 COP를 유치하고자 노력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네옴 시티는 친환경 도시를 표방합니다.
신흥국의 거버넌스는 지금의 선진국들이 한때 뜻을 같이했던 의제들입니다. 식량과 기후, 에너지 위기는 치세에서만 논할 것이 아닙니다. 지금과 같은 난세에서 더욱 가혹하기 때문입니다. 성장주의의 열매가 겨울에 맺힐 리 없습니다. 산업 구조의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지금, 전환에 앞장서야 많은 나라와 친구가 됩니다.
마지막 하나의 질문이 남았습니다. 2023년, 새로운 세계 질서는 누가 만들어 나가게 될까요? 한국이 그 주인공이 되길 바라 봅니다.
글
이현구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