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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시장 혹은 광장

디지털을 상상하는 두 가지 방식


디지털 저널리즘의 미래는 손쉽게 예언된다. 상이한 맥락과 조건을 가진 해외 언론사의 성공 사례를 소개하며 한국 사회에서 동일한 시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디지털 저널리즘은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 기술이 저널리즘에 강력한 영향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변화의 방향과 정도는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

기술은 우리 삶에 특정한 힘을 행사하고 거대한 변화를 주도하지만, 그 기술의 힘은 오로지 인간의 선택과 실천에 의해서만 구체화되며 사회적 맥락 속에서 작용한다. 기술은 여러 층위에서 다양한 힘의 개입에 따라 가변적으로 구성된다. 어떤 힘이 더 강하게 개입하느냐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편향된 성격을 갖는 정치적 구성물이다.

그렇다면 디지털 기술은 어떤 사회적 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변화하는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상상력을 발휘하게 된다. 저마다의 관점에서 기술을 정의 내리고, 기술을 통해 성취할 목표를 세우며, 기술이 발전해 나갈 방향을 전망한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폭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기술은 풍부한 가능성을 갖는다. 이처럼 다양한 욕망을 가진 개인과 집단들이 새로운 기술의 기능과 가치, 방향에 대해 내놓는 서로 다른 이해와 해석들이 모여 기술에 대한 사회적 상상(social imaginaries)이 형성된다.

사회적 상상은 사회 구성원들이 스스로에 대해 상상하는 방식, 관계와 실천에 대해 갖는 기대와 그 기대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규범적 관념, 특정한 실천을 의미 있게 만드는 형이상학적 질서관을 말한다.[1] 사회 구성원들 간의 관계를 한 핏줄로 연결된 민족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규정하는 것이 사회적 상상의 예다.

중요한 점은 사회적 상상이 단일한 것이 아니며 저절로 구성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러 사회 세력들은 각자가 설계한 상상을 제시한다. 그리고 다양한 수단과 전략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방향으로 사회적 상상을 수립하고자 애쓴다. 자연히 다양한 종류의 상상들이 서로 경합한다.

디지털 기술에 대한 사회적 상상도 예외가 아니다.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성격을 가진 디지털 기술이 도입되자 여러 사회 세력들은 이 기술의 의미와 역할, 발전 방향에 대한 상이한 해석과 주장을 내놓았다. 이들은 각자 자신에게 유리한 비전, 기획, 프로그램, 정책을 제안하며 자신들의 시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치열한 헤게모니 투쟁을 벌였다.

우리는 디지털 기술과 관련하여 어떤 사회적 상상을 형성하고 공유해 왔을까? 한국 사회에서 디지털 기술의 사회적 상상이 만들어 낸 복잡한 변이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압축할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을 경제적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상업적 수단으로 인식하는 자본 권력의 지배적인 사회적 상상(dominant social imaginary)과 참여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해방적 기술로 인식하는 진보적 시민 사회의 대안적인 사회적 상상(alternative social imaginary)이다.[2]

디지털 기술을 각각 시장과 광장으로 바라보는 이 두 가지 흐름 간의 각축이 디지털 기술의 성격을 결정했다. 그 과정은 곧 한국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역사이기도 하다.

 

위로부터의 정보화 프로젝트


한국에서 디지털 기술이 보급되는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국가와 지배 엘리트 계층이 주도한 위로부터의 정보화다. 국가가 ‘정보 입국’이라는 정책 목표와 의지를 가지고 거시적 발전 계획과 전략을 제시하면, 시장이 국가의 지도를 쫓아가는 방식의 정보화는 1960년대부터 전개된 한국 특유의 개발주의적 산업화 정책과 비슷했다.[3] 권위주의적 방식이라는 문제는 있었지만, 중앙 집중적 통제에 의한 정보화는 분명 일관성과 효율성을 담보할 수 있었다.

국가와 지배 엘리트가 하향식 정보화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이유는 당시 세계 경제가 봉착했던 위기와 관련이 있다.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 성장의 둔화, 생산성과 이윤율의 하락, 인플레이션 압박이 발생하면서 세계 경제는 불황의 늪에 빠져들었고, 한국의 수출 주도 중화학 공업 전략도 선진국의 보호 무역과 후발 국가들의 맹렬한 추격 속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축적의 위기에 직면한 국가 엘리트와 대자본은 기왕의 경제 개발 정책을 정보화 정책으로 대체해 가면서 과잉 중복 투자와 인건비 상승 등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축적 영역을 확보하고자 했다.

정보화 프로젝트를 통해 대자본은 국가 기간 전산망 사업 등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국책 사업에 참여하며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하는 새로운 시장을 제공받았다. 기업들은 정부의 정책적 보호 아래에서 성장의 한계에 봉착한 기존 업종으로부터 첨단 정보 산업으로의 전환 및 구조 개편을 단행하여 위기를 탈출할 수 있었다. 관료 엘리트들은 지배적 지위를 유지하며 새로운 정보 기술을 통해 관리와 통제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 요컨대 정보화 정책은 한국 사회의 과두 지배 연합에게 호혜적인 계급 전략 프로젝트였다.[4]

국가 주도의 정보화가 체계화·본격화된 것은 1980년대부터였다. 정부는 1983년 ‘정보 산업의 해’를 선포하고 같은 해 5월 대통령 직속으로 정보 산업 육성 위원회를 발족시키며 관련 부처를 중심으로 정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각종 시책을 발표했다. 정부는 1985년 2월 ‘정보 산업 10개년 계획’을 발표했고, 1987년부터 국가 기간 전산망 구축 사업, 1988년부터 정보 문화 운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했다.

디지털 기술을 통한 생산성 향상과 경쟁력 확보 전략은 1990년대에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국회 시정 연설에서 직접 “21세기 국가 경쟁력의 척도는 정보화 추진 속도에 달려 있다”고 강조할 정도였다.

1994년에는 체신부(遞信部)를 정보 통신부로 개편했다. 1995년 8월 정보화 촉진 기본법을 제정해 정보화 정책의 범국가적 추진에 나섰고, 9월부터는 단일 사업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인 20년간 45조 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초고속 정보 통신망 구축 사업이 시작되었다. 1996년에는 정보화 촉진 기본 계획을 확정, 발표했고 정보 통신부 정보화 기획실과 청와대 정보화 비서관직이 신설되었으며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정보화 추진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정보화는 기술의 확산에 기여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사회적 상상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관료들과 기업 엘리트들에 의해 창조된 이데올로기가 대중에게 침투하여 사회적 상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부 한정된 분야나 특수 계층의 욕구를 사회적 과제로 정당화하고 사회 전반에 강제하는 계몽의 전략이 필요했다.

1988년부터 정부가 추진한 정보 문화 운동이 대표적 사례였다. 정부는 해마다 6월을 정보 문화의 달로 지정하고 전국적으로 기념행사, 학술 행사, 강연회, 전시회를 집중적으로 열었고 각종 전시관과 홍보관을 상설 운영하기 시작했다. 일반 국민을 정보 기기에 대한 지식을 갖춘 소비자로 만들어 정보 상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운동의 핵심 목적이었다.[5]

언론도 각종 캠페인을 통해 국가 주도의 정보화를 뒷받침하고 저변을 확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일보는 1995년 3월 5일 창간 75주년 사고社告에서 정보화 운동의 시작을 선언했다. 캠페인의 슬로건은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였다.

조선일보는 이듬해인 1996년 ‘어린이에게 인터넷을’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초등학생들에게 인터넷과 컴퓨터를 가르치는 키드넷(KidNet)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97년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공동으로 정보화 캠페인을 펼치며 10회에 걸쳐 기획 시리즈를 연재했다. 경쟁 관계에 있던 양대 신문사가 조직 내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공동으로 진행한 이례적인 기획이었다.

중앙일보 역시 1996년부터 키드넷과 유사한 학교 정보화(Internet in Education·IIE) 운동을 시작했다. 일선 학교에 컴퓨터를 설치하고 인터넷 강좌를 개설해 교사와 학생들에게 인터넷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는 캠페인이었다. 일련의 캠페인들은 디지털 기술에 대한 지배 계급의 인식을 보편적인 사회적 상상으로 확산시키는 첨병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 아니라, 가정과 민간에서 이전까지 사실상 전무한 수준이었던 PC와 정보 기술에 대한 수요를 대대적으로 창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97년 IMF 외환 위기로 디지털 기술의 지배적인 상상은 문화 운동을 넘어 산업 구조를 재편하기에 이른다. 정부는 자본의 위기를 돌파하는 전략적 수단이자 경제 회복의 원동력으로 디지털 기술에 주목했다.

정보화를 고용 창출과 경기 활성화에 적극 활용한다는 정책 방향에 맞춰 한국의 산업 구조는 급격히 재조정되었다. 정보 통신 산업이 선도 산업으로서 집중적인 육성 대상이 되었다. 2002년까지 지식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 원동력이 되는 ‘창조적 지식 기반 국가’를 수립한다는 목표 아래 제2차 정보화 촉진 기본 계획 ‘사이버 코리아(Cyber Korea) 21’ 비전이 수립되었다. 관련 규제가 대폭 완화됐으며 인프라가 빠르게 구축되었다.

정부의 노력에 힘입어 정보 통신 기술ICT 부문 생산액은 1999년 113조 3695억 원에서 2003년 214조 9016억 원으로 가파르게 상승했다.[6] 2001년 정보 통신 산업 부가 가치의 연평균 증가율은 16.4퍼센트로 같은 기간 경제 성장률 4.0퍼센트를 크게 웃돌았다. IT 산업 수출 실적은 411억 달러로 전체 산업 수출 실적 1506억 달러의 27퍼센트를 차지했다.[7]

생산량과 부가 가치의 증대 못지않게 중요한 변화가 일상에서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는 대중의 등장이었다. 1998년 7퍼센트에 불과했던 인터넷 이용자는 1999년 21퍼센트로 증가했으며, 2000년에는 43퍼센트에 달했다.[8] 2002년 12월 국내 인터넷 이용 인구는 이미 2600만 명을 넘어섰고, 6~19세의 91.4퍼센트, 20대의 89.8퍼센트, 30대의 69.4퍼센트가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었다.[9] 인터넷은 빠르게 대중의 일상 속으로 들어왔다.

 

자유와 해방의 사이버 공간


그러나 급격히 늘어난 이용자들이 새롭게 보급된 인터넷을 통해 욕망했던 것은 지배적인 사회적 상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디지털 기술을 참여 민주주의와 사회 변혁을 앞당길 획기적 수단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이용자 대중의 지향은 오히려 대안적인 사회적 상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배 엘리트에 저항하는 시민 사회가 내놓은 대안적 사회적 상상에서 디지털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정보를 공유하여 민주주의와 사회 변혁을 가져오는 기술로 표상되었다.

1990년 11월 4일 케텔(KETEL, 하이텔의 전신)에서 조직된 한국 최초의 진보적 온라인 동호회 바른 통신을 위한 모임(바통모)의 창립 선언문에는 대안적인 사회적 상상에 기초한 기술관이 엿보인다. 바통모는 “일상의 정보를 제공하는 데이터베이스가 일정한 정치적 입장에 의해 편향되어 있고, 그것은 교정 불가능한 하나의 상품으로서만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수동적인 정보 취득자에 안주하지 않고 올바른 정보 통신의 발전을 위해 사용자들의 단결력을 높여 나가려” 하며 “통신인의 민주적 역량의 증대와 민주주의의 훈련장으로서 모두에게 개방된 통신 공간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바통모는 조회 수를 알려 주는 시스템이 자극적인 문화를 부추겨 통신 공간의 담론을 왜곡시킨다는 이유로 조회 수 철폐 운동을 벌이는 등 대안적 커뮤니케이션을 형성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했다. 1992년 제14대 대선 때는 여당이 PC 통신에 허위 ID를 개설하여 여론 조작과 사찰 활동을 전개한 사실을 폭로했으며, 대선 투표일에 부정 개표를 막기 위해 전국 개표소에 회원들을 파견하고 각 지역을 PC 통신으로 연결하여 실제 개표 현황과 공식 발표 내용을 실시간으로 비교하는 감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디지털의 역사 초기에 정보가 자유롭게 공유되는 수평적인 쌍방향 인터넷 공간의 창조는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기보다는 현실 사회 운동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인터넷은 “조직의 도구, 사회 변혁의 도구, 혁명의 도구, 문명 전환의 도구”이며 “사회 운동이나 변혁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도구”였다.[10]

한국의 사회 운동 진영은 1988년경부터 이미 사설 BBS(Bulletin Board System)를 이용한 독립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다. 권력과 자본에 편향된 기존 미디어를 우회하기 위한 시도였다. 1990년대 중반 PC 통신이 인기를 끌면서 하이텔의 바통모 외에도 천리안의 희망터와 현대 철학 동호회, 나우누리의 찬우물 같은 동호회가 진보 진영의 소통 공간이 되었다. 진보 정당 민중당은 1992년 천리안에 진보광장이라는 폐쇄 이용자 그룹(Closed User Group·CUG)을 만들어 조직 관리와 선거 준비에 활용했다. 전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경제 정의 실천 시민 연합, 환경 운동 연합 등 진보적 시민 사회 단체들도 온라인 공간을 적극 활용했다.

1996년 12월 김영삼 정권이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시키자 노동자들은 이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벌였다. 정보 통신 운동 활동가들은 ‘노동 악법·안기부법 전면 철회를 위한 총파업 통신 지원단’을 결성해 주류 언론으로부터 독립적인 여론을 조직하고 주도했다. 이들은 총파업 속보를 각 통신망의 자유 게시판에 전달하고 매일 뉴스레터를 발송했으며, ‘파업 지지’ 말머리 달기 캠페인을 벌였다. 해외 단체·활동가들과 교류하는 국제 연대를 통해 한국 정부에 항의하기도 했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창구를 통해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정보를 왜곡 없이 전파하는 데 집중하는 ‘통신을 통한 운동’은 차츰 표현의 자유와 검열 철폐를 통한 평등한 정보 접근, 자유로운 정보 공유 등 온라인 공간의 고유한 이슈들을 다루는 ‘통신을 위한 운동’으로 지평을 넓혀 나갔다.

단초를 제공한 것은 국가였다. 정부가 1992년 ‘불건전 정보’의 유통을 막는다며 정보 통신 윤리 위원회를 구성하고 단속에 나서면서 사이버 공안 파동이 줄을 이었다. 1993년 9월 7일 반국가 단체로 규정된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 동맹(사노맹)의 유인물이 올라왔다는 혐의로 천리안의 현대 철학 동호회 회장이 구속되었다. 1994년 2월에는 천리안 동호회 희망터 회장 등 4명의 동호인이 김일성 신년사 등을 게재한 혐의로 구속되었고, 같은 해 3월에는 현대 철학 동호회 회원이 《공산당 선언》 등의 글을 올린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95년 PC 통신의 진보적 동호회들이 ‘진보 통신 단체 연대 모임’을 결성했다. 이 모임은 1996년 7월 23개 단체가 참여한 ‘정보 통신 검열 철폐를 위한 시민 연대’로 확대 개편되며 〈정보 통신 검열 백서〉를 제작·발간하는 등 본격적인 검열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정보 통신 검열 백서〉는 “정보 통신 혁명은 단지 산업이나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만 논의될 것이 아니”라며 디지털 네트워크가 “정보의 공유를 통한 ‘전자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열어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정보화 사회를 진보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정보 통신 기술 활용과 논의 개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보편적 서비스, 표현의 자유,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장 등 정보 기본권을 위한 시민운동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1995년 출범한 단체 ‘정보연대 SING(Social Information Networking Group)’도 국가 권력이나 영리를 추구하는 자본에 의해 정보가 독점 또는 상품화되는 것에 반대해 민주적인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정보의 완전한 공개, 평등한 접근, 자유로운 소통을 보장하는 정보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정보에 대한 평등한 접근”이 “기존의 독점적 권력을 네트워크화된 주체들의 수평적 권력으로 재편시키는 문제”라고 주장했다.

디지털 공간에 존재했던 새로운 놀이 문화도 대안적 상상의 형성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PC 통신 시절부터 이용자들은 능동적인 실천으로 함께 즐기는 쌍방향적·참여적 온라인 커뮤니티 문화를 만들어 냈다. 디지털 이전의 일방향적·수동적 소비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행위였다. 대형 상용 BBS에 만족하지 않거나 이들의 취지에 동의하지 않았던 이용자들이 사설 BBS를 만들어 동호회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활동에 나선 것이 시작이다. 1996년에 이미 1000개를 넘긴 PC 통신 동호회들은 대부분 작은 규모였지만 접속자 간 유대감이 강한 편이었고, 대개 음악, 영화, 컴퓨터 등 특화된 주제와 목적을 가지고 비영리적으로 운영되었다.

PC 통신 시절의 독특한 경험은 인터넷 초기의 이용자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용자들은 디지털이 참여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기술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PC 통신에서 웹으로 옮겨간 이용자들은 PC 통신 동호회나 게시판에서의 수평적 소통을 통해 정보를 교환하고 공유했던 경험과 기억을 인터넷 커뮤니티로 복원했다. 이들에게는 인터넷도 단순히 콘텐츠를 소비하는 곳이 아니라 직접 콘텐츠를 생산하는 곳이 되어야 했다.

디지털 저널리즘의 시대가 시작된 직후 참여 저널리즘을 열성적으로 만들어 간 시민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PC 통신과 인터넷 초기의 참여적 생산을 경험한 능동적 이용자들이 바로 시민 참여 저널리즘의 주인공이었다.

2000년 전후 인터넷망이 전국적으로 확충되자, 네티즌 인구가 급증하면서 대안적 상상이 대대적으로 확산됐다. 언론 권력으로 군림하며 여론을 왜곡해 온 올드 미디어를 우회하여 새로운 의제를 제기하고 토론하는 수단으로 인터넷 공론장을 활용하려는 기획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상호 의사소통 기회를 거의 가질 수 없었던 수용자들은 교류하는 가운데 정치적 의견을 형성하게 되었다.[11]

2000년 4월 대전의 한 PC방에서 결성된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자유롭고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기성 정치 질서를 바꾸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온라인은 오프라인 활동을 보조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았다. 회칙의 개정, 대표자의 선출부터 티셔츠 디자인, 책자 표지와 관련된 온갖 의사 결정이 온라인 투표로 이루어졌고, 회의도 온라인 채팅으로 진행했다. 취미, 연령, 지역별 다양한 게시판을 통한 소모임 활동과 토론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개혁국민정당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결성돼 실제 제도권 정치에 도전한 정당이었다. 2002년 8월 시사  평론가 유시민이 제안한 이 정당은 3주 만에 2만 1000명의 발기인을 모았고, 11월 창당 대회 때 참여자 3만 2000명을 넘어서며 성공적으로 출발했다. 당헌에 참여 민주주의와 인터넷 기반 정당 정치의 실현을 명시한 개혁국민정당은 당명의 결정, 지구당 위원장과 중앙당 지도부의 선출,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 결의, 이후 당 해산 등의 의사 결정을 모두 인터넷에서 진행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안티 조선’ 운동도 온라인을 거점으로 이루어졌다. 각종 인터넷 게시판과 ‘인물과 사상’ 웹사이트를 통해 벌어지던 시민들의 연대적 활동은 1999년 창설된 사이트 ‘안티 조선 우리 모두’로 수렴되었다. PC 통신 출신의 논객들을 중심으로 한 이 사이트의 접속자들은 강력한 소속감과 결속력을 기반으로 온라인상에서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이것이 2000년 41개 시민 단체의 ‘조선일보 반대 시민 연대’의 출범, 1500여 명의 지식인이 참여한 조선일보 반대 서명 등 오프라인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밖에도 자퇴 청소년들의 커뮤니티 아이노스쿨넷(www.inoschool.net)을 비롯해 동성애 커뮤니티, 양심적 병역 거부 사이트, 아나키스트 커뮤니티 등 소수자 인권을 다루거나 기성 공론 영역에서 소외되었던 급진적 이슈를 제기하는 커뮤니티들이 인터넷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담론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이 시기의 사이버 스페이스는 말 그대로 진보의 해방구였다. 네트워크와 시티즌을 합성한 ‘네티즌’이라는 신조어처럼, 인터넷은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보수 성향의 올드 미디어 신문과 달리 뉴 미디어인 인터넷은 본질적으로 진보 정치에 기여하는 미디어인 것처럼 여겨졌다.

당시 ‘인터넷은 진보’라는 인식이 일종의 상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에서 수익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아 이윤 추구 활동이 많지 않았던 탓도 컸다. 한국에서 흑자 전환에 성공한 인터넷 기업이 출현하기 시작한 시점은 2002년이었다. 다음커뮤니케이션, NHN엔터테인먼트, 네오위즈, 옥션 등 주요 닷컴 기업들조차 2001년까지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디지털은 어디까지나 미래의 유망 산업이었을 뿐, 당장 수익을 노리고 뛰어들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1]
Charles Taylor, 《Modern Social Imaginaries》, Duke University Press, 2004.
[2]
Robin Mansell, 《Imagining the Internet: Communication, Innovation, and Governance》,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3]
강상현, 《정보 통신 혁명과 한국 사회: 뉴미디어 패러독스》, 한나래, 1996.
[4]
강상현, 《정보 통신 혁명과 한국 사회: 뉴미디어 패러독스》, 한나래, 1996.
[5]
강상현, 《정보 통신 혁명과 한국 사회: 뉴미디어 패러독스》, 한나래, 1996.
[6]
과학기술정보통신부, 〈ICT 실태 조사〉, 2003.
[7]
한국 인터넷 정보 센터·전자 신문사 공편, 《인터넷 연감 2001》, 전자신문사, 2002.
[8]
백욱인, 〈한국 정보 자본주의의 전개와 정보 자본주의 비판〉, 《문화과학》, 75, 2013, 23-44쪽.
[9]
한국 인터넷 정보 센터·전자신문사 공편, 《인터넷 연감 2002》, 전자신문사, 2003.
[10]
송희식, 〈인터넷은 사회 진보의 도구〉, 《월간 말》, 1996. 7.
[11]
김동민, 《노무현과 안티 조선》, 시와 사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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