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뉴스
4화

디지털, 대안적 저널리즘을 상상하다

시민 사회의 폭발적 성장


초기 인터넷의 이용자 대중이 국가와 자본이 마련한 산업적 인프라를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대안적인 사회적 상상을 구현했던 것은 아이러니다. 지배 세력의 전략적 기획을 무색케 했던 역동적 활동의 배경에는 강한 시민 사회라는 한국 사회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나의 사회 구성체는 국가, 시장, 시민 사회라는 세 가지 상이한 질서로 구성된다. 세 개의 축은 각자 고립된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구성된다. 사회 변동은 이처럼 재구성된 관계의 결과다. 어떤 영역이 힘의 우위를 갖느냐에 따라 사회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이다.

한국 사회 구성체의 중요한 특징은 오랜 개발 독재를 거치며 형성된 강한 국가였다. 국가의 주도와 설계에 따라 경제 성장을 이루는 발전주의 국가 모델의 결과였다. 시장은 국가의 배타적 지원과 보호를 통해 성장하며 서서히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해 나갔다. 반면 시민 사회는 권위주의 국가의 억압 속에서 1987년 정치적 민주화 이전까지 저발전 상태에 머물러야 했다.

그런데 1997년 겨울에 벌어진 두 가지 사건이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세 가지 질서 간 상호 관계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하나는 1997년 11월의 국제 통화 기금(IMF) 구제 금융 신청이라는 경제적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달 뒤에 열린 제15대 대선에서 한국 정치 역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정치적 사건이었다.

IMF 외환 위기는 재벌로 대표되는 한국의 자본 권력을 일시적으로나마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업으로서의 생존이 불투명해진 상태에서 재벌 개혁의 요구까지 높아지면서 재벌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민주화 이후 국가의 규율이 느슨해진 틈을 타 영향력을 확장하던 자본 권력은 경제 위기와 새롭게 직면하게 된 시민 사회의 견제 속에서 급격히 위축되고 있었다.

민주개혁 세력으로의 정권 교체는 발전 국가의 퇴조와 함께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한국 특유의 강한 국가가 한층 더 약화하는 계기가 됐다. 야당의 집권은 권위주의 발전 국가 시대에 재벌과 지배 동맹을 구성했던 국가 엘리트들의 실각 내지는 위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안정적이었던 지배 연합 내부 질서와 인적 구성에 변화가 발생하면서 한국 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과두 지배 연합 전체의 헤게모니는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지배 연합은 외부와의 관계에서도 새로운 위기를 맞이했다. 강한 시민 사회와 대면하게 된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빠른 속도로 성장한 한국의 진보적 시민 사회는 2000년 제16대 총선 당시 1000여 개 시민 단체들이 결집한 총선 시민 연대의 낙천·낙선 운동에서 보듯 막강한 영향력과 자율성을 가진 핵심적 사회 질서로 거듭났다.

시민 사회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국가 엘리트 집단과 대자본 중심의 지배 연합이 오랜 권위주의 정권 기간 유지해 온 기득권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재벌 개혁은 재벌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인해 끝내 좌절되었고, 정리 해고제와 파견 근로제 도입 등 IMF 구조 조정 프로그램을 통한 노동 배제 전략은 구(舊)지배 연합의 헤게모니를 상당 부분 회복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진보적 시민 사회 역시 대항 세력으로서 안정적 지위를 겨우 확보했을 뿐, 새로운 지배 연합의 구성을 통한 헤게모니 창출에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었다.

요컨대 이 시기는 과두 지배 연합과 진보적 시민 사회가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한국 사회 전체의 헤게모니가 불안정하게 유동하고 있던 국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 디지털 저널리즘의 초기 형태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양분을 제공했다. 디지털 기술의 성격을 요동치게 만드는 역동적 변이는 어느 사회 세력도 확고한 지배력을 확보하지 못한 정치적 조건이 가져온 결과물이었다.

 

딴지일보부터 오마이뉴스까지


한국 디지털 저널리즘의 역사는 1995년 3월 2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닷컴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후 조선일보(1995년 11월), 한겨레(1996년 4월), 동아일보(1996년 6월) 등의 언론사들이 줄줄이 홈페이지를 구축하고 인터넷 뉴스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른바 닷컴 신문들의 등장이다.

오프라인 종합 일간지를 모회사로 둔 온라인 신문들은 대중적 지명도나 페이지 뷰 면에서 분명 초기 디지털 저널리즘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종속형 인터넷 언론이라 불리는 이들은 종이 신문의 콘텐츠를 인터넷 공간에 그대로 옮겨 놓았을 뿐 상호 작용성, 멀티미디어성, 속보성 등 인터넷의 특수성을 조금도 살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1]

진정한 한국 디지털 저널리즘의 효시는 1990년대 후반 인터넷 공간의 주변부에서 이루어진 실험들이다. 저널리즘의 도덕과 규범으로부터 이탈한 기성 언론의 행태를 불쏘시개 삼아 등장한 다양한 형태의 대안적 언론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종이 신문을 모회사로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을 독립형 인터넷 언론이라고도 부른다.

실험은 패러디 저널리즘으로 시작되었다. 전통적 언론사가 아닌 개인이 디지털 공간에서 발간한 최초의 정기 간행물로 알려진 보테저널은 PC 통신 천리안의 게시판 ‘고워드(go word)’에서 보테아저씨(ID vote1997)라는 닉네임을 썼던 최진훈이 창간한 매체로, 1997년 11월 23일부터 1998년 4월까지 발행되었다. 이 매체는 비속어를 자유롭게 활용하고 사회를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패러디를 선보여 인기를 끌었다. 열성 독자들은 직접 글을 기고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상호 작용적 생산 시스템은 시민 참여 저널리즘의 원류로 평가받기도 한다.

보테저널 외에도 망치일보, 백수신문, 보일아동 등 다양한 패러디 저널리즘이 등장했지만, 가장 인기를 끌었던 패러디 뉴스 미디어는 1998년 김어준이 창간한 딴지일보였다. 딴지일보는 엄숙주의에 갇혀 있던 기성 저널리즘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도발적인 패러디와 독설, 조롱으로 정치 정보를 전달해 인기를 모았다. 보수 정당과 조선일보 등 기득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젊은 독자들의 적극적 호응을 끌어내, 창간 1년도 되기 전에 조회 수 1000만을 돌파했다. 딴지일보의 창간 사설은 이들이 추구한 가치가 대안적인 사회적 상상과 접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테네가 다시 오고 있다. 누구나 미디어의 주체가 되어 동일 공간에서 동일 순간을 공유하며 그 속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교감하던 아테네가 이제 다시 오고 있다. (…)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공간에 전 세계인이 모여들고 스스로들 미디어의 주체가 되어 저마다 목소리를 내고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이제 새로운 디지털 아테네의 시대가 열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어떤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은 분명할 것 같다. 아테네에서 발언권 없이 침묵했던 것은 노예밖에 없었듯이 이 도래할 신시대의 시민이 되려거든 자신의 디지털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PC 통신 출신 논객들이 1999년 1월 창간한 칼럼형 뉴스 사이트 대자보는 PC 통신 게시판의 치열한 토론과 논평 문화를 웹 공간으로 옮겨 와 진화시킨 사례라 할 수 있다. 대자보는 심층 비평 기사를 통해 가벼운 패러디 저널과의 차별화를 꾀했으며, 권력화된 기존 언론을 비판하며 대안 언론의 정체성을 전면에 내걸었다. 대자보는 창간사에서 “인터넷의 고유한 특성인 쌍방향성에 입각해 이 땅의 정보 공유를 앞당기고 전자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밖에 PC 통신 천리안에서 활동하던 사이버 논객이 1999년 6월 창간한 사회 비판 웹진 더럽지는 주류 언론이 외면했던 동국합섬 생산직 노동자의 직업병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루면서 주목을 받았고, 1999년 6월 창간한 한국 최초의 문화 비평 웹진 스키조는 섹슈얼리티, 소수자 문화 등 기존 미디어에서 다루지 않았던 논쟁적 의제들을 제기하며 하루 방문자가 10만 명에 이를 만큼 주목을 끌기도 했다.

기성 언론이 보도한 사실을 재료로 삼아 풍자나 논평을 제시하는 형태를 벗어나 자체적 취재를 통해 획득한 정보를 보도하는 인터넷 언론들도 등장했다. 1999년 10월 18일 창간된 뉴스보이는 시민 기자 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했다는 점에서 전통적 언론사들과 달랐다. 오프라인에서 벌어진 일을 보도하는 ‘명예 기자’와 웹서핑 과정에서 발견한 특이한 소식을 전하는 ‘뉴스보이 서퍼’ 등이 시민 기자 역할을 수행하고 전업 상근 기자들이 이를 뒷받침하는 구조였다.

뉴스보이보다 한 발 늦게 출발했지만 더 큰 성공을 거둔 시민 참여형 매체가 오마이뉴스다. 오마이뉴스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2000년 2월 22일 정식 창간호를 발행했다. ‘뉴스 게릴라’라 불리는 시민 기자의 수는 창간 당시 727명이었으나 한 해가 채 지나기도 전에 5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마이뉴스는 기사 한 건당 2만 원 정도의 원고료를 줬지만, 독자가 좋은 기사라 판단해 기사 하단의 아이콘을 클릭할 경우 추가로 후원금을 제공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오마이뉴스에서 꽃을 피운 시민 참여 저널리즘은 이후 인터넷한겨레의 하니리포터, 조인스닷컴의 사이버리포터, 동아일보의 넷포터 등으로 전통적 언론사들에서도 도입되었다.

오마이뉴스는 기사에 댓글을 달 수 있게 해 기사 내에서 쌍방향 소통 구조를 구축한 댓글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2000년 10월 13일부터 14일 새벽까지 김영삼 전 대통령의 특강에 반대하는 고려대 학생들이 정문을 막고 농성을 벌인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오마이뉴스는 열일곱 시간 동안 스물다섯 개의 속보를 현장 생중계하며 네티즌의 주목을 끌었다. 이 기사에는 1000개에 가까운 댓글이 달렸고, 한 독자가 댓글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이 화장실에는 갔다 왔는지 취재해 주면 좋겠다”는 의견을 올리자 편집국 데스크가 이를 현장의 기자에게 지시해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 주는 등 독자와의 쌍방향 대화가 활발히 진행되기도 했다.[2]

기성의 틀을 깨는 뉴스 미디어들은 분명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벌어진 실험적 시도들이 오프라인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한국 사회의 보수 헤게모니는 여전히 강고했고, 디지털 대안 언론의 인기와 영향력은 아직 인터넷이라는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했다. 헤게모니와 언론 지형의 급격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2002년이라는 중대한 역사적 변곡점에 이르러서였다.

 

2002년, 디지털 저널리즘과 진보적 시민 사회의 결합


2002년 제16대 대선은 많은 이들의 운명이 걸린 한판 승부였다. 빼앗긴 정권을 되찾음으로써 지배 헤게모니와 구체제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던 보수적 지배 연합과 새로운 사회 질서의 수립을 통해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도모하고자 했던 진보적 시민 사회 간의 갈등과 적대가 응축된 선거였기 때문이다. 이 선거는 한국의 정치 질서뿐 아니라 디지털 저널리즘의 초기 형성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파란만장한 대선 드라마는 2002년 3월 9일 막이 오른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시작됐다. 일반 국민들이 투표로 대선 후보를 결정하는 국민 참여 경선에서 당내 소수파였던 노무현은 ‘노풍(盧風)’을 일으키며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이변을 연출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주체가 바로 오마이뉴스였다.

오마이뉴스는 3월부터 시작된 민주당 국민 경선을 오마이TV 동영상으로 생중계하며 네티즌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경선을 거치며 오마이뉴스는 시민들의 지지와 참여를 재생산하는 플랫폼으로 부상했고, 중요한 도약의 기회를 얻었다. 2002년 초 100만 건 수준이던 오마이뉴스의 페이지 뷰는 경선 중계를 거치며 300~400만까지 불어났다.

노무현의 폭발적 인기가 보수 지배 연합에 위협적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보수 언론은 노무현의 과거 발언, 장인의 좌익 활동 경력 등을 소재 삼아 이데올로기 공세를 벌이며 노풍을 잠재우고자 했다. 노무현이 “집권하면 메이저 신문을 국유화하겠다”는 발언을 했다는 보도가 보수 언론의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오마이뉴스는 보수 언론의 ‘색깔론’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노무현을 방어했고, 이후 보수 대 진보의 선명한 이념 대립 구도로 진행된 선거전에서 진보 진영의 선봉에 서며 노무현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 주었다.

인터넷 여론의 견제 속에서 보수 언론은 예전처럼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노무현은 끝내 여당의 대통령 후보 자리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강고했던 언론 권력이 일거에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노무현 특유의 직설적 화법과 좌충우돌 스타일에 대한 보수 언론의 집요한 담론 공세는 결국 5월 이후 지지도의 급속한 하강 곡선을 만들어 냈다.

노풍의 퇴조 속에 치러진 6.13 지방 선거는 민주당의 참패로 끝났다. 전무후무한 4강 신화를 이룬 월드컵이 막을 내린 뒤에는 대한 축구 협회장을 맡고 있던 재벌 2세 출신의 보수 정치인 정몽준의 인기가 치솟았다. 정몽준이 대선 가도에 뛰어들면서 노무현의 지지도는 10퍼센트 초반까지 추락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시민 참여 확산과 디지털 저널리즘이 성장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했다. 시민들은 인터넷에 들어와 목소리를 높이고 대항 논리를 적극적으로 계발해 나갔다. 디지털 대안 언론들은 시민들을 위한 플랫폼을 제공했다. 구심점은 역시 오마이뉴스였다. 미국에서 언론학을 공부하는 한 시민 기자는 조선일보가 외신 기사를 어떻게 왜곡하여 인용하는지를 분석하는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올렸다. 보수 지배 연합이 내세운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 비리 의혹이 제기되자 550여 명의 시민 기자들이 직접 두 아들의 병적 기록부를 검토하여 56개의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오마이뉴스의 페이지 뷰는 8월에 650만에 이르렀고, 노무현과 정몽준이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11월 22일에는 하루 1000만 페이지 뷰를 돌파했다.[3] 시민 기자 수는 2만 명을 넘어섰고, 광고 매출액도 월 1억 원을 돌파했다.[4] 보수 헤게모니의 재작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민 참여 저널리즘이 활성화된 것이다.

시민들의 참여 열기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결정적 계기는 미군 장갑차에 의해 두 여중생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에서 미군 장갑차에 깔려 14세 여중생 두 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주한 미군 지위 협정(SOFA)에 따라 과실 치사로 기소된 장갑차 운전병과 관제병에 대한 재판권을 미군이 가져가고 그해 11월 이들이 무죄를 선고받자 시민들은 분노했다.

분노의 진원지는 인터넷이었다. 참사 발생 직후인 2002년 6월 14일 오마이뉴스 시민 기자가 〈미군 장갑차에 치여 여중생 두 명 즉사〉라는 제목의 기사로 사건을 세상에 알렸다. 오마이뉴스와 일부 인터넷 언론사들은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시기에도 주류 언론들의 외면 속에서 지속적으로 사안을 취재·보도했다.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고 비판 여론으로 이어진 것은 기성 언론이 아닌 인터넷 대안 언론들의 의제 설정 덕분이었다.

네티즌들은 저마다 다양한 방식의 실천을 통해 여중생들을 추모하고 미국에 굴종적인 권력자들을 비판했다. 11월에는 인터넷 메신저 대화명 앞에 검은 리본(▶◀) 모양의 기호를 달자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후 흰 리본(▷◁) 달기 운동, 삼베 천을 나타내는 기호(▩)로 바꿔 달기 운동이 차례로 확산되었다. 이밖에도 사건을 고발하는 인터넷 만화, 플래시 애니메이션, 노래 파일을 업로드하고 퍼 나르는 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시민들의 분노는 촛불 집회로 발전했다. 인터넷 한겨레 자유 토론방에 ‘앙마’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이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 집회를 열자고 제안했고, 이에 호응한 1500여 명의 시민들이 11월 30일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모이면서 최초의 촛불 집회가 열렸다. 시민들은 무죄 판결에 항의하며 미국 대통령의 사과와 불평등한 SOFA 전면 개정을 요구했다.

이후 70여 개 인터넷 모임과 다수의 네티즌들이 참여한 ‘사이버 범국민 대책위’가 구성되었다. 이들은 게시판을 통해 촛불 집회 일정을 알리고 시위에 대한 평가와 토론을 벌였으며, 서명, 모금 운동, 백악관 사이버 시위 등을 기획했다. 네티즌들의 쌍방향 소통과 자기 조직화에 힘입어 촛불 집회는 빠른 속도로 확산됐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12월 14일 3차 집회에는 서울에서만 10만 명, 전국에서 30만 명이 참여했다.

촛불 집회의 열기가 고조될수록 오마이뉴스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11월 25일 한 차례 서버를 증설했으나 계속 늘어나는 독자들로 인해 홈페이지 접속이 원활하지 않을 정도였다. 12월 3일 오마이뉴스의 페이지 뷰는 1351만을 기록했다. 12월 9일 오후 1시 10분 또다시 20분간 서버가 다운되어 긴급히 서버를 증설하기도 했다.[5]

12월 19일 투표일을 목전에 두고 드라마틱한 선거전의 화룡점정이 된 마지막 사건이 발생했다. 후보 단일화의 한 축이었던 정몽준이 투표 전날 밤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이다. 투표 개시를 불과 일곱 시간 남겨 둔 한밤중에 충격적 소식이 전해지면서 유권자들은 밤잠을 잊은 채 인터넷으로 몰려들었다.

 오마이뉴스는 심야의 긴박한 상황을 실시간 중계했다. 정몽준이 지지를 철회했다는 속보는 이날 밤 약 열 시간 동안 57만 건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오마이뉴스 창간 이래 단일 기사 최대 조회 수였다.[6] 12월 18일 페이지 뷰는 2002년 초와 비교해 스무 배 늘어난 수치인 1910만을 찍으며 또 한 번 서버를 다운시켰다.[7] 조선일보가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라는 제목으로 다음 날 조간에 실릴 사설을 새로 쓰고 있던 그 시각에 네티즌들은 이미 인터넷에서 토론을 벌이며 행동 지침을 공유하고 있었다.

12월 19일 치러진 선거에서 노무현은 1201만 4277표(48.9퍼센트)를 얻어 1144만 3297표(46.6퍼센트)를 얻은 이회창을 57만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노무현의 당선은 낡은 보수 기득권과 엘리트 중심의 권위주의적 정치 질서를 혁파하고자 했던 시민들의 열망이 지배 연합의 총력 공세를 꺾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는 2002년 대선이 이회창과 노무현 개인 간의 대결이 아니라 올드 미디어와 뉴 미디어의 대결이었으며, 구세력과 신세력 간의 갈등이었다고 분석했다.[8] 그의 분석에 따르면, 승리는 후자 쪽에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디지털 저널리즘은 참여 민주주의적 속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면서 기성 저널리즘의 형식, 관행, 문화에 파격을 가져왔고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줬다. 이용자들은 더 많이 연결되었고, 더 많이 참여했으며, 더 많이 토론했다. 생산 과정은 투명해졌고, 주변부는 중심부에 끊임없이 도전했다. 저널리즘은 그야말로 혁신을 이루었다. 이 시기 디지털 저널리즘이 보여 준 진취적 혁신은 이후 한국 디지털 저널리즘에서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9]

하지만 이러한 혁신이 완벽하고 최종적인 승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올드 미디어와 구세력의 독점적 영향력이 쇠퇴하며 일격을 당한 것은 분명했지만, 그것은 기존의 일방적 질서가 상호 긴장하는 세력 간의 치열한 각축으로 변모한 것일 뿐이었다. 뉴 미디어와 진보적 시민 사회 연합의 승리는 과도기 단계에서 벌어진 잠정적이고 예외적인 것이었다.
[1]
예컨대 종속형 인터넷 언론의 기사들은 취재가 완료되는 즉시 게재된 것이 아니라 종이 신문의 기사 마감 시점에서야 함께 게재가 이루어졌으며,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분량과 내용이 제한되었던 종이 신문의 콘텐츠를 복사해 붙여 놓았다는 점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인터넷 미디어의 특수성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석종훈, 〈뉴스 포털 사이트의 파급력〉, 《관훈저널》, 91, 2004, 34-42쪽.
[2]
오연호, 《대한민국 특산품 오마이뉴스》, 휴머니스트, 2004.
[3]
[4]
오마이뉴스, 〈20~40대가 87%...한국을 움직이는 ‘젊은 여론 주도층’〉, 《오마이뉴스》, 2003. 12. 11.
[6]
오연호, 《대한민국 특산품 오마이뉴스》, 휴머니스트, 2004.
[8]
오연호, 《대한민국 특산품 오마이뉴스》, 휴머니스트, 2004.
[9]
물론 당시 인터넷 뉴스 미디어들의 성공과 시민들의 참여적 실천이 대안적인 사회적 상상의 원형을 이상적으로 구현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초기 디지털 저널리즘 혁신이 대안적 상상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참여와 해방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남김없이 실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대안적인 상상이 역사적 과정 속에서 타협하고 변형된 결과물에 가깝다. 따라서 2002년을 전후해 벌어진 디지털 저널리즘 사례들을 이상화하는 접근은 곤란하다. 일례로 오마이뉴스만 하더라도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개혁적 자유주의 진영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정파주의에 매몰되어 정파 간 갈등 구도 속에 수렴되지 않는 시민 사회의 다원화된 가치들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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