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이란 무엇인가
이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공영 방송이란 무엇인가. 기존의 논의에서 공통으로 제시되는 공영 방송의 요인들은 공적 소유, 공적 재원, 공적 서비스 등이다.[1]
공적 소유란 무엇인가? 국가의 것도 아니고 민간 사기업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가 소유하는 방송, 즉 국영방송은 국가 정책을 널리 알리는 데는 효율적일 수 있지만, 정부와 정책을 비판하기는 어렵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CCTV가 중국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거나 시진핑 주석을 비판하는 보도를 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진 않는다. 민간 사기업의 방송이라면, 그 소유주가 누구든 소유주에게 부정적인 보도를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공적 재원이란 무엇인가? 방송을 만들고 내보내는 데 들어가는 큰 비용을 시민에게서 충당하는 것이다. 방송사가 수입을 얻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광고다. 광고주가 광고를 하고 싶은 방송은 시청률이 잘 나오는 방송이고, 광고를 많이 판매하기 위해서는 시청률이 잘 나오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시청률이 잘 나오지 않을 프로그램은 만들기 어렵다.
그런데 시청률이 낮아도 사회적으로 필요한 프로그램들이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같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들, 예를 들어 세대·지역·젠더 간 갈등처럼 의견이 나뉘는 문제에 대한 토론 프로그램은 누구도 선뜻 만들려고 나서지 않는다. 어느 쪽에서도 박수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음악 프로그램을 예를 들어 보자. 케이팝 외에도 수많은 인디 뮤지션들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음악, 인류의 뛰어난 문화적 성취물인 클래식 음악, 우리 고유의 국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잘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광고 없이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으려면 광고가 아닌 다른 재원을 찾아야 한다. 드라마 장르를 떠올려 보자. 〈오징어 게임〉 같은 블록버스터급 K-드라마도 필요하지만, K-드라마의 토대로서 신진 작가, 연출자, 배우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장도 필요하다. 그런데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는 시청률을 보장할 수 없다. 광고주들이 눈독을 들일 이유도 없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광고가 아닌 다른 재원을 찾아야 한다. 그러한 공적 재원의 대표적 방식이 시민이 직접 납부하는 수신료다.
마지막으로 공적 서비스란 무엇인가? 앞서 제시한,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도 우리 사회에 필요한 프로그램이 대표적인 공적 서비스에 해당한다. 공적 서비스에 해당하는 영역은 매우 다양하다. 영유아와 어린이를 위한 콘텐츠 제작부터, 재난·재해 관련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 장애인이 보다 편리하게 방송 콘텐츠를 볼 수 있도록 수어와 자막, 화면 해설 방송을 지원하는 것, 지역이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것, 해외에 우리 문화와 콘텐츠를 알리는 것, 혁신적인 방송 기술을 개발하고 전파하는 것, 한국의 영상 콘텐츠를 주도할 창의적 인력을 육성하는 것, 국가가 하지 못하고, 민간 기업도 할 수 없는, 혹은 할 생각이 없는 서비스들이지만 우리 사회의 영상 콘텐츠 문화 수준을 제고하는 데 필요한 일들이라면 모두 공적 서비스에 해당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를 종합해 보면 공영 방송이란 공적인 소유, 공적인 재원, 공적인 서비스를 토대로 삼는데, 이 세 가지 차원이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공영 방송의 모습은 달라진다. 공적 소유, 공적 재원, 공적 서비스의 양태가 정해져 있지도 않다. 공적 소유는 공사의 형태일 수 있고, 공익 법인이 소유한 주식회사 형태일 수도 있다. 공적 재원은 세금일 수도 있고 수신료와 같이 국민이 내는 부담금일 수도 있다. 100퍼센트 공적 재원으로만 운영할 수도 있고, 공적 재원과 함께 광고 재원을 활용할 수도 있다. 공적 재원과 광고 재원의 비중이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공적 서비스의 내용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회에서는 뉴스 보도만 공적 서비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고, 어떤 사회에서는 각 지역 내 방송만 공적 서비스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공영 방송이 어떠한 모습으로 구체화하는가 하는 것은 결국 공영 방송이 속한 그 사회의 합의에 기반한다. 태생적으로 사회적 기구인 공영 방송은 해당 사회가 수용 가능한 공적 소유의 형태, 공적 재원의 조달 방식, 공적 서비스의 범위로 구체화된다. 중요한 것은 ‘소유 구조는 이러해야 하고 재원은 저러해야 하며, 어떤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공영 방송이다’라는 개념적 정의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공영 방송은 왜 필요하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그 역할을 해야 할 방송사는 누구로 할 것인지, 공영 방송을 운영하는 데 재원은 얼마나 필요하며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것이다.
이 모든 논의는 우리 사회의 정치·사회·문화·역사적 특수성을 배경으로 할 수밖에 없다. 보편적인 공영 방송의 모습은 개념적으로만 정의할 수 있을 뿐이며, 현실의 공영 방송은 그 제도를 택한 나라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2]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과 우리나라의 공영 방송은 각기 다른 형태, 재원, 서비스 내용으로 구현되는 것이 당연하다. 무정형의 공영 방송은 그 사회의 합의를 기반으로 해당 사회에 부합하는 양태를 지니게 되며, 법 제도적 근거를 갖춤으로써 사회적 지원과 사회적 책무 부여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한 번도 이런 논의를 해본 적이 없다. TV에서 볼 수 있는 채널이 KBS, MBC, SBS, EBS 4개 채널뿐이었을 때는 이러한 논의가 필요하지 않았을 수 있다. 1995년 케이블TV가 등장하고 채널 수가 많아지기 시작했지만, 프로그램 수준이 지상파 방송사들과 현격한 차이가 났던 시기에도 이러한 논의가 필요하지 않았을 수 있다.
지금은 다르다. 시청자들은 지상파 방송 외에도 TV조선, JTBC, 채널A, MBN을 통해 뉴스를 볼 수 있고, tvN과 다수의 채널을 통해 지상파 방송보다 재미있는 예능과 드라마를 본다. TV뿐 아니라 핸드폰을 통해 수만, 수십만 편의 콘텐츠를 넷플릭스와 유튜브로 본다. 이런 미디어 환경에서도 공영 방송은 필요한가? 왜 필요한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가? 그 역할을 하려면 얼마나 재원이 필요한가? 그 재원은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우리 사회에서 공영 방송은 막연히 KBS로 인식되어 왔다. 그리고 KBS에 대해 다분히 정치적인 비판과 문제가 제기되어 왔고, 이 비판은 당대의 집권자와 집권 세력의 주관적 인식을 반영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공영 방송에 대한 논의는 변화된 미디어 환경이라든지, 수신료를 납부하는 시청자의 목소리라든지, 그런 차원이 아니라 집권 세력과의 관계 속에서만 앞날을 예비하는 불안정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새로운 가치를 찾아서
이 불안한 공영 방송의 미래 가치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앞서, KBS의 리빌딩을 위한 과제로 공영 방송 스스로의 혁신과 거버넌스를 포함한 법 제도 개선, 공영 방송 규제 체계의 전면적인 개편, 내외부 규제 기구의 변화, 재원 안정성 확보를 위한 논의 등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시했다. 이를 보다 구체적인 실천의 영역에서 풀어 보자.
KBS의 존재 이유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지금과 같은 미디어 환경에서도 공영 방송이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정치권력이나 집권층이 하는 것이 아니고, 시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영 방송의 필요성과 역할에 대한 답은 공영 방송의 일차적 이해 당사자인 시민에게 물어야 한다. 즉, 공영 방송의 새로운 가치 정립은 우리 사회에서 KBS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공적 목적이다. 공영 방송만의 차별화된 공적 목적은 공영 방송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출발점이다.
BBC의 2016년 칙허장은 검토 과정에서 19만 2564개의 의견이 공개적으로 수집되고 4000여 명의 영국 국민이 직접 설문에 참여했으며 300명 이상의 자문 위원과 단체가 참여한 대대적인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었다.[3] 이러한 논의를 거쳐 2016년 칙허장에 명시된 BBC의 공적 목적은 ① 편파적이지 않은 뉴스와 정보의 제공, ② 아동과 청소년을 포함한 모든 연령의 학습 지원(support learning), ③ 창의적이며 고품질의 차별적인 내용물과 서비스 제공, ④ 다양한 공동체의 반영
(reflect/represent), ⑤ 영국의 문화와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다.[4]
우리 사회의 공적 목적을 찾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회적 논의 과정이 필요하다. 여기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시민의 관점이다. 시민은 공영 방송 재원의 일차적 담지자이며, 공영 방송 역무가 제공하는 내용과 편성 면에서도 최대 이해관계자이기 때문이다.[5] 시민의 관점에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공영 방송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즉 공영 방송의 공적 목적에 대한 공개적이고 기탄없는 논의다.
공영 방송 제도 자체가 그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적 배경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고, 따라서 각 사회가 요구하는 공영 방송의 공적 목적도 상이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BBC의 경우 아동과 청소년을 포함한 모든 연령의 학습 지원을 공적 목적 중 하나로 제시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EBS의 존재를 생각하면 아동과 청소년의 학습 지원이 KBS의 공적 목적으로 포함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공영 방송의 새로운 가치로서 우리 사회 공영 방송의 공적 목적을 도출하기 위해, KBS는 독자적으로 그리고 필요하다면 규제 당국과 함께 공영 방송의 공적 목적에 대한 사회적 합의 도출을 해야 한다. 대규모 국민 인식 조사부터 공론화위원회와 같은 심층적 논의, 시장 내 사업자들과 전문가, 학계 및 연구기관이 참여하는 포럼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KBS의 활동 범위
공영 방송의 공적 목적이 정해지면,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공영 방송 사업자가 수행하는 활동의 범위를 설정해야 한다. 아래 표는 현재 KBS가 수행하고 있는 서비스 내용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