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없어진다면
정부가 수신료를 전기 요금과 분리해서 징수하는 시행령을 의결한 후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표면적으로는 수신료를 없애는 게 아니라 징수 방식의 변화를 의미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 변화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사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정부와 집권 여당도 그 목표를 부정하지 않는다. 수신료 분리 징수를 시작으로 KBS 이사회 교체, 사장 교체, KBS 2TV 민영화 등 이미 이뤄졌고 또 앞으로 펼쳐질 것으로 예견되는 사건 등이 목표하는 것 역시 동일하다. 현재 KBS 시스템을 흔들고 무너뜨리는 것. ‘KBS는 노영 방송이다. 권력과 자본이 아닌 노조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정파적 보도를 내는 시스템을 먼저 교정해야 한다’ 등 정부가 하는 말들의 표적 역시 정확히 이 부분을 겨냥하고 있다.
수신료 분리 징수가 어느 정도의 흔들림과 혼돈을 KBS에 가져올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이것이 KBS 이사회, 사장 교체 등 거버넌스 개편, 그리고 KBS 2TV 민영화 등 방송 구조 개편과 맞물려 돌아가면 상당히 큰 혼란을 초래할 것은 분명하다. 이 혼란이 시청자의 권익과 관련 있을까? 그럴 리는 없다.
구체적으로 이 흔들림을 통해 타격을 받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공영 방송 제도가 수행하는 공적 서비스의 퇴보다. 사적 서비스든, 공적 서비스든 그 서비스의 질은 서비스를 만들어 가는 토대로서 자본과 인력의 규모 및 질에 달려 있다. 당장 수신료 분리 징수가 되고 그 결과 수신료 수입이 삐걱거리면, 그리하여 지난 10여 년간 1조 5000억 원에 갇혀 있던 KBS의 매출액 숫자가 아래로 뚝뚝 떨어지게 되면 그만큼 자본과 인력의 양과 질 모두가 나빠질 수밖에 없다. 공적 서비스를 일선에서 수행하는 제작 현장은 줄어든 제작비로 허덕이게 될 것이다. 출연자, 작가, 스태프 등 수많은 제작 인력이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나게 될 것이다.
KBS 내부적으로는 구조 조정의 불안 속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힘이 없는 약한 고리, 지난 정권에 부역했다는 꼬리표가 붙은 집단부터 구조 조정 1순위에 자리 잡을 개연성이 크다. 더불어 2TV 민영화 등 방송 구조 개편과 맞물려 특정 사업 부문 분리 등이 이뤄질 수 있다. 공영 방송의 경우 이 결정 역시 정치적인 영역에 속한다. 작금의 상황은 정부가 무소불위한 전권을 휘두르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합리성이나 시청자 권익에 앞서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다 보니 한국 공영 방송의 미래를 상상할 때 정치권력의 의중, 감정을 눈치 보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정치권력의 의중은 ‘KBS 죽이기’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이유는 하나, 본인들이 볼 때 편파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KBS가 정파적이라는 정치권력의 인식은 대단히 모호하고, 대부분 주관적이다. KBS가 방만하다는 비판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주관적 경험, 자주 만나는 사람의 평가, 살아온 공간의 정치 풍경에 근거해 마주한 KBS의 단면일 뿐 여기에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그렇다고 KBS가 공정하고 윤리적이며 효율적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다만 KBS가 가지고 있는 편향성, 윤리성, 방만성의 문제는 정확히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연장선이지, 이보다 더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적어도 KBS는 한국 사회가 가진 병폐를 내재화하고 있을지언정 적나라하게 전시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편향적이지도, 극단적으로 비윤리적이거나 극단적으로 방만하지 않다는 거다.
그 이유가 바로 수신료다. 수신료의 가치는 KBS에 입사하며 기사를 쓰고,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매 순간 자기 스스로를 규율하는 준거 틀이다. 내가 쓴 기사가 편향적인 것은 아닐까? 우리가 제작한 프로그램이 누군가에게 불편함으로 다가서지는 않을까? 수신료로 받게 되는 나의 월급이, 진행비가, 제작비가 너무 과도한 것은 아닌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런 질문을 하게 되고, 받게 된다. 대단한 직업 윤리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쓴 기사가 송출되지 못하고, 내가 기획한 프로그램이 제작될 수 없는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방송이 끝난 후 감사실이든 방송통신심의위원회든 끌려다니면서 소명해야 하는 괴로운 일들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검열을 하다 보면 때론 자율성과 창의성이 훼손된다는 느낌도 들지만, 평균적으로 다른 여타 언론사나 방송사에 비해 편향성이나 비윤리성이 줄어드는 효과가 나타난다.
물론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KBS의 어떤 기사나 프로그램은 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KBS가 방만하다는 비판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문제들은 어떤 부분에서는 정확히 설명하고 반성하며 책임지고 가야 하는 문제다. 그런데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정치권력이 KBS를 망가뜨리기로 결정한다면? 이건 차원이 다르다.
KBS를 망가뜨리면 우리 사회는 좀 더 건강해질까? 시민들은 좀 더 행복해질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장은 좀 더 넓어지고, 분열과 갈등의 이야기는 좀 더 줄어들까? 내일의 한류 콘텐츠를 이끌어 갈 젊은 인력들은 좀 더 체계적으로 육성되고 키워질까? 프로그램의 질은 높아질까? 프로그램의 다양성은 강화될까? TV가 유일한 삶의 즐거움인 시청자를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과 광고주를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에서 어디에 무게 중심이 쏠릴까?
‘공영 방송이 없어진다면’, ‘KBS를 망가뜨리면’ 뭐가 좋을까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는 공영 방송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역설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상업 방송과 무관하게 이런 방송이 하나쯤 있으면 어떨까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된다.
정부 정책을 사실에 근거하여 비판하고 감시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방송. 대통령이든 정부 여당이든 야당이든 문제가 있다면 의혹을 제기하고 심층적으로 추적하는 방송. 정치인의 발언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발언의 진위를 확인하는 방송.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이 창궐하고 부정확한 정보들이 난무할 때 믿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방송. 지진, 장마, 홍수, 산불 등 재난・재해가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찾아볼 수 있는 방송. 〈차마고도〉, 〈누들로드〉처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고품격 다큐멘터리, PPL에 목매지 않는 대하 역사 드라마,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예능, 나훈아부터 BTS까지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악 프로그램, 〈개그콘서트〉가 처음 선보였을 때처럼 새로운 형식의 코미디. 언제, 어디서나, 어떤 플랫폼에서도, TV든 휴대 전화든 어떤 기기로든 이 모든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방송. 실시간은 기본이고 몇십 년 전 방송이든 어제 한 방송이든 다시 보기가 가능한 방송. 세계 10위권에 들어가는 한국과 한국의 문화,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한국의 대표 방송. 우리 지역과 관련해 가장 많은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우리 지역의 이슈와 지역색을 살린 콘텐츠를 만들어 전국에 내보내는 방송. 유아와 어린이, 청소년에게 보여주고 싶은 방송. 장애인, 노인, 다문화, 외국인 등 다양한 사회 구성원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방송.
이런 방송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공영 방송의 역할이 된다. 공영 방송은 그 사회 구성원들이 필요로 하는 공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 존재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공영 방송은 그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속에 있는 제도다. 즉, 공영 방송을 폐기하지 않고 고쳐 쓰기로 우리가 합의한다면, 공영 방송을 리빌딩하는 것은 정부, 정당, 기업, 사회단체, 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 구성원이 관여해야 하는 일이 된다. 해야 할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허약한 제도적 토대
공영 방송의 텅 빈 정의
우리 사회에서는 공영 방송의 필요성과 역할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부재했다. 현행 방송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현행 방송 관련 법 어디에도 ‘공영 방송’이라는 용어와 법적 정의는 찾아볼 수 없다. ‘공영 방송’의 법적 정의가 없다 보니 ‘공영 방송 사업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국내 법규에서 ‘공영 방송’이란 용어가 나오는 유일한 법령은 공직선거법뿐이다.
공직선거법은 제8조의7 제2항에서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및 시·도 선거 방송 토론 위원회를 구성할 때 공영 방송사가 추천하는 사람도 1명 포함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한국방송공사 KBS와 방송문화진흥회법에 따른 방송문화진흥회가 최다 출자자인 MBC를 공영 방송사로 정의한다.
방송법은 어떨까? 현행 방송법은 제2조(용어의 정의)에서 방송 사업자를 지상파 방송 사업자, 종합 유선 방송 사업자, 위성 방송 사업자, 방송 채널 사용 사업자, 공동체 라디오 방송 사업자, 중계 유선 방송 사업자, 음악 유선 방송 사업자, 전광판 방송 사업자, 전송망 사업자로 구분한다. 그리고 방송법은 모든 방송 사업자에 대해 동일한 방송의 공적 책임(방송법 제5조)[1]과 방송의 공정성과 공익성(제6조)[2] 조항을 적용한다. KBS, MBC, SBS, LG헬로비전, SK브로드밴드, KTSkyLife, TV조선, JTBC, 채널A, MBN, tvN 모두 방송의 공적 책임, 방송의 공정성과 공익성을 준수해야 한다.
물론, KBS를 별도 취급하는 조항도 일부 있다. KBS는 국가 기간 방송으로서(제43조 제1항) 공적 책임을 부여받고(제44조), 시청자가 제작한 프로그램을 의무적으로 편성해야 한다(제69조 제7항). 방송법 제44조에 명시된 공사의 공적 책임은 방송의 목적과 공적 책임, 방송의 공정성과 공익성 실현(제1항), 지역과 주변 여건과 관계없는 양질의 방송 서비스 제공(제2항), 공익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방송 프로그램·방송 서비스 및 방송 기술 연구·개발(제3항), 민족 문화 창달과 민족의 동질성 확보 프로그램 방송(제4항), 지역적 다양성 구현과 지역 사회 균형 발전에 기여하는 프로그램 방송(제5항) 등이다.
그런데 무언가 기시감이 든다. 모든 방송 사업자에게 부여된 방송의 공적 책임(방송법 제5조), 방송의 공정성과 공익성(제6조) 조항에 대부분 포함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굳이 다른 걸 찾자면, 지역과 주변 여건과 관계없이 양질의 방송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즉 난시청 해소에 대한 것만 다른 방송 사업자에게 요구하지 않는 공적 책임이다. 법 조항이 이렇다 보니 이들 조항으로는 공영 방송이 왜 필요한지, 공영 방송이 다른 방송들과 차별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책무는 무엇인지, 이 역할을 해야 하는 방송사는 누구인지, 이러한 책무를 수행하기 위한 지원과 규제의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공영 방송의 현실
공영 방송의 현실적 모습도 혼란스럽다. 공영 방송의 이상적 요건이 공적 소유와 공적 재원, 공적 서비스라고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방송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KBS와 EBS는 공적 소유이면서 수신료를 받지만, 광고도 한다.
MBC는 방송문화진흥회라는 공익 법인이 최대 주주지만 상법상 주식회사로서 재원을 광고에 의존하고 있다. SBS는 민간 기업인 태영건설 지주사 TY홀딩스가 소유하고 광고를 재원으로 하지만 방송의 공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 공영 방송의 범주는 KBS와 EBS에 한정된다는 시각부터 MBC를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 지상파 방송 전체가 공영 방송에 해당한다는 관점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3]
공영 방송으로 분류하는데 가장 이견이 적은 KBS와 EBS의 경우에도 재원 중 수신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2년도 말 기준 KBS가 46.8퍼센트, EBS가 6.9퍼센트 수준에 불과하다.[4] KBS 1TV는 광고를 하지 않지만 KBS 2TV는 광고를 할 뿐 아니라 프로그램과 편성 측면에서도 MBC나 SBS와 차별적이지 않다.
MBC의 성격은 더욱 모호하다. 공적 재단인 방송문화진흥회가 70퍼센트의 지분을 확보한 최대 주주이지만 정수장학회가 30퍼센트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고, 재원은 100퍼센트 광고를 포함한 상업적 수익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MBC의 독특한 소유 구조와 그러한 소유 구조가 가능했던 방송의 정치적 역사, 100퍼센트 상업적 재원 형태 등은 ‘태생적 이중성’[5] 에 기반한 ‘기형적 형태’[6]이면서도 ‘공영적 민영 방송’[7]으로서 MBC의 독특한 위상을 가져왔다.
이러한 현실은 사업자별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때로는 공적 책임을 내세우고 때로는 상업적 이윤 추구를 우선하는 비일관적인 행태를 가능하게 한다. KBS는 수신료와 관련해서는 공영 방송의 공적 책임을 전경화하면서도, KBS 2TV의 상업적 편성과 시청률 경쟁, 지상파 방송 재송신 대가 지급 문제 등에서는 상업 방송 사업자들과 차별화되지 않는다.
MBC는 스스로 공영 방송을 자처하지만[8], 편성과 시청률 경쟁에서 상업 방송과 큰 차이가 없는 행태를 보인다. 상업 방송인 SBS는 재허가 심사를 받을 때마다 지상파 방송으로서 공적 책임을 지속적으로 요구받았다. 공영 방송에 대한 법적 정의가 부재한 대신 지상파 방송 전체의 공공성을 중시해 온 현 방송 체제는 KBS 1TV를 제외한 나머지 상업적 재원에 의존하는 지상파 방송들, 즉 KBS 2TV나 상업 방송인 SBS, 공· 민영 혼합 형태의 MBC, 교육방송인 EBS까지 그 역할과 책무에서 구분되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9]
공영 방송에 대한 법적 정의도, 현실적 규범력도 부재한 상황이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공영 방송의 역할, 이를 수행할 방송 사업자가 누구인지는 더욱 모호해진다. 이런 모호성은 공영 방송에 대한 정책 수립은 물론 공영 방송과 민간 상업 방송에 대한 차별적 규제도 불가능하게 만든다.[10] 공·민영 구분 없이 방송 일반의 임무를 매우 포괄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민영 방송에게는 과도한 규제 가능성을 야기하고, 공영 방송에게는 공적 역할의 수행 여부를 감독할 수 없는 규제의 비효율성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11]
공영 방송은 모든 방송 사업자에게 요구되는 보편적 임무와 구분되고 민영 방송과도 다른 차별적인 공적 책임을 수행하는 데서 존재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차별적 책무 규정이 모호하다 보니 공영 방송의 구체적인 업무 내용과 업무 수행 결과에 대한 평가, 업무 수행에 요구되는 필요 재원의 규모 등을 논의하기 어렵다.
이러한 결함은 우리 사회 공영 방송의 현주소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공영 방송 제도의 토대 자체가 허약한 현실에서, KBS는 공영 방송의 대표 격으로 취급받아 왔다. 그리고 KBS에 대한 대단히 모호하고 주관적인 비판, 가령 KBS는 편향적이고 방만하다는 이미지와 느낌은 공영 방송에 대한 비판의 주된 단골 메뉴가 되었다.
이 오해는 공영 방송 제도의 진화와는 무관한 방식으로 집권층, 주요 언론, 오피니언 리더들에 의해 이야기되고 사라지고 부활하는 양상을 보여 왔다. 그 사이 KBS도, 공영 방송 제도도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국면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떤 혁신인가
공영 방송과 관련한 모든 논의에서 일차적인 당사자는 공영 방송 그 자신이다. 스스로 추진하는 혁신과 변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공영 방송은 누구보다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공영 방송 제도의 재정립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지금까지 공영 방송으로서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공적 책임의 내용을 반성하고 그러한 잘못을 개선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시민에게 공개적으로 약속하고 평가받아야 한다.
너무 많은 과제가 있고, 그 과제 중에는 공영 방송 혼자서 할 수 없는 과제도 적지 않다. 여기서는 공영 방송이 스스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과제들부터 살펴본다.
독보적인 저널리즘
첫째, 독보적인 저널리즘을 구현해야 한다. 공영 방송은 정부와 정당 등 정치권력, 기업, 이익 집단 등 모든 이해관계 집단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모든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며 비판하고 사회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공론장으로서의 저널리즘을 실현하는 데 존재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에서 현재의 공영 방송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 소위 ‘땡전 뉴스’부터 이명박 대통령의 주례 라디오 연설 방송에 이르기까지, 정권의 홍보 수단으로 활용된 기억은 선명한 반면 세월호 참사 당시에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도 공영 방송은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키지 못했다. 재난・재해 발생 시 국가 거점 재난 방송이라고 하면서도, 고성 산불 당시에는 고성 현장에 가지도 않고 뉴스를 방송했다. 이태원 참사 당시에도 타 방송사와 다른 공영 방송만의 차별적인 뉴스를 내보내지 못했다.
공영 방송은 사회적인 이슈가 발생했을 때, 가장 신속하면서도 정확하고, 심층적이면서도 다양한 의견을 제공할 수 있는 보도를 해야 한다. 불확실하고 논란이 되는 사안에 대해 사람들이 “KBS 틀어 봐”, “KBS에서는 뭐래?”, “KBS에서 그렇게 보도했으면 그게 맞을 거야”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기레기’라는 말이 일상어가 될 정도로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낮고, 언론마다 뚜렷한 정치색을 가지고 있다는 걸 대부분이 인식할 정도로 정파성이 강하다. 게다가 정치적 양극화도 매우 심화되어 있어 나와 입장이 같은 언론을 중심으로 뉴스를 소비하고,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해 불리한 보도는 ‘가짜 뉴스’라고 이름 붙이는 경향도 심각하다. 이런 현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정치인들이 가장 ‘가짜 뉴스’라는 표현을 많이 써가며 자신에게 비판적인 보도를 한 언론을 공격하는 양상도 나타난다. 이런 현실에서 공영 방송은 내가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이 누구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독보적 저널리즘을 구현해야 한다.
보수든 진보든, 여당 지지자이든 야당 지지자이든 수긍할 수밖에 없는 보도는 기본적으로 사실에 충실한 보도다. 진실을 추구하고, 사실 관계에 집착하며,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전문가의 의견을 제공하면서 깊이 있는 뉴스를 만드는 것은 공영 방송이 포기할 수 없는 공적 책임이다.
공영 방송 보도의 공정성에 대한 논란은 앞서 살펴본 공영 방송의 지배 구조와 연결되면서 일정 부분 정치 과잉화되어 있는 측면도 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대처하는 공영 방송의 태도다.
BBC 역시 보도의 공정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BBC는 보도의 공정성 논란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개선하려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KBS와 차이를 보인다. 2021년 BBC는 임원, 기자, 직원, 방송 진행자 등 100여 명이 넘는 직원 인터뷰를 통해 제작 체계와 문화를 분석한 〈세로타 보고서〉를 만들었다.[12] 이를 바탕으로 방송 공정성 확보를 위한 10가지 실행 계획 〈BBC 공정성과 제작 기준〉을 발표했다.[13] 이 기준으로 2022년에는 정부의 공공 지출과 관련한 BBC 보도의 공정성을 평가해 결과를 발표했고[14], 올해는 이주 Migration를 소재로 한 BBC 프로그램에서 방송 공정성이 확보되었는지를 평가할 계획이다.[15]
지금 KBS는 대내외적인 공정성 논란, 정파적 공격에 정면 돌파할 수 있는 내부 역량과 당당함, 자신감이 있는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객관성과 공정성에 대한 의심과 비판을 넘어서는 길은 투명성과 설명 책임을 강화하는 것뿐이다.
가장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콘텐츠
둘째, 가장 창의적인 콘텐츠와 서비스로 인정받아야 한다. 상업 방송이 하지 않는 콘텐츠, 소수자와 사회문화적 다양성을 반영하는 콘텐츠, 역사 대하드라마, 수년의 제작 기간과 제작비가 들어가는 다큐멘터리, 수준 높은 드라마,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예능, 다양한 장르의 음악 콘텐츠 등 공영 방송이 제공해야 하는 프로그램들은 매우 폭넓게 걸쳐져 있다. 〈아침마당〉, 〈6시 내고향〉 같은 장수 프로그램들, 〈인간극장〉, 〈가요무대〉, 〈전국 노래자랑〉 같은 프로그램들도 공영 방송의 몫이다.
대작만이 아니라 저비용 저예산으로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창의성이 필요하다. KBS의 영상 아카이브를 재구성해서 대한민국의 오늘을 돌아보는 다큐멘터리 〈모던코리아〉가 그 예가 될 수 있다. 또한 지역별, 연령별, 계층별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집단에 필요한 콘텐츠를 제공해야 한다. 공영 방송은 상업 방송과 차별적이면서도 동시에 많은 사람이 봐야 하는 대중성도 겸비해야 한다. 쉽지 않은 과제다. 다수가 보는 차별적이면서도 공익적인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공영 방송의 숙명이다.
이를 위해 창의적 인력을 양성하고, 과감하고 실험적인 콘텐츠를 시도할 수 있는 조직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사내에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선의의 경쟁을 독려하고, 좋은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인센티브와 같은 성과 보상을 통해 평가하며, 우수한 제작 인력이 유출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콘텐츠 영역뿐 아니라 서비스 영역에서도 공영 방송은 변화해야 한다. 미디어 이용의 중심축이 온라인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공영 방송의 중심축 역시 온라인으로 이동해야 한다. 앞으로 인터넷이 더욱 지배적인 소통 공간이 될 것이라 예측한다면, 공영 방송은 그 공간에서 주도적이며 압도적인 위상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조직의 비전을 설정해야 한다. 방송을 넘어 디지털 플랫폼에서 그 가치를 인식시킬 수 있는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최근 KBS가 출시한 무료 OTT 서비스 ‘KBS+’는 그 전략적 사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KBS+는 기존 모바일 앱인 ‘my K(마이K)’를 리브랜딩하여 KBS 1·2TV 및 KBSN의 5개 채널(드라마·조이·스토리·키즈·라이프) 실시간 방송과 다시 보기, 5만여 건의 드라마·예능·시사교양 콘텐츠 등을 이용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다. KBS가 제작, 보유하고 있는 〈차마고도〉, 〈누들로드〉, 〈요리인류〉 등 고품격 다큐멘터리와 〈불멸의 이순신〉, 〈태종 이방원〉, 〈해신〉 등 대하 역사 드라마도 제공한다. 어린이 이용자를 위한 키즈 모드, 디지털 소외 계층을 위한 간편 모드 등을 도입했고 재난·재해 발생 시 KBS 편성시스템과 연계하여 실시간 상황을 알려 준다. KBS가 공영 방송을 넘어 공영 미디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KBS+와 같은 디지털 플랫폼을 확대 강화하고 이를 통해 대다수의 국민이 보편적으로 KBS의 모든 콘텐츠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수신료, 어떻게 쓸 것인가
셋째, 강도 높은 자구 노력과 경영 혁신을 해내야 한다. 지금까지 공영 방송에는 방만 경영과 고액 연봉 논란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경영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그러나 국민이 지불하는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 방송은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운영돼야 한다. 경영에 대한 비판 일부는 공영 방송을 압박하는 수사일 수도 있지만, 수신료를 재원으로 하는 공영 방송의 비용 집행 내역과 경영 성과는 상시적인 감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공영 방송의 특성을 고려하면 민간 기업에 요구되는 경영 효율성의 잣대만으로 공영 방송을 평가할 수 없다. 공영 방송의 일차적 목표는 공적 책무의 수행이고, 경영의 성과는 공영 방송이 이행해야 하는 공적 책무의 연장선상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공영 방송의 경영 효율성은 단순한 이윤이나 적자 규모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공영 방송의 이윤이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 필요한 비용을 줄이면서 공영 방송의 공적 책무를 소홀히 한 결과 발생한 것일 수 있고, 공익적이면서도 시장 경쟁력이 있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어 손실이 발생할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16]
그러나 이것이 국민이 낸 수신료를 흥청망청 써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영 방송이 자신의 공적 책임을 달성하기 위해 재원을 어떻게 배분했는지, 구체적인 집행 내역이 공영 방송의 역할에 부합하는지, 얼마나 효과적으로 집행했는지 등에 대해 자체적인 평가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며 외부 규제 기구로부터 검증받아야 한다.
KBS는 2021년 7월 수신료 조정안을 제출하면서 인력 감축과 경영 계획을 제시한 바 있다.[17] 2026년까지 920명을 단계적으로 감축하고 2024년까지 인건비 비중을 30퍼센트 이하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며, 특별 명예퇴직을 실시하면서 직무 재설계를 통한 효율적 인력 운영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초긴축 예산 운영을 통해 경비를 절감하고 콘텐츠 경쟁력을 제고하여 콘텐츠 판매 수입을 확대하며, 2026년까지 폐소된 송·중계소 등 유휴 자산을 매각하겠다고 했다.
이와 같은 자구 노력과 함께 조직 혁신도 약속했다. 직종별, 본부별, 장르별 조직을 원점에서 재설계하여 제작 시스템과 제작비 예산 규정을 정비하고 고호봉, 고연령, 연공서열형 인력 구조를 개선하며 계열사 통폐합을 추진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계획 발표에 이어 중요한 것은 이러한 약속을 얼마나 이행했는지, 그 성과는 어떠한지 주기적으로 공개하고 시청자들과 소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 책임만이 공영 방송의 경영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는 길이다. 이러한 노력이 성과를 거두어야 공영 방송 재원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 과정의 핵심은 단순한 인력 축소나 구조 조정, 경비 절감만이 아니라 공영 방송의 책무 재설계라는 명확한 목적의식 아래 진행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유휴 자산 매각, 유료 방송 플랫폼이나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를 대상으로 한 콘텐츠 판매 수입 확대, 광고나 기타 수입 등 상업적 수입을 확장하는 것이 공영 방송의 핵심적 방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영 방송이 경영 혁신을 이유로 상업적 활동을 확대하고 그것에 의존해 생존하려는 순간, 민간 상업 방송과 차별성이 사라지고 공영 방송의 정체성은 흔들린다. 그렇다고 해서 공영 방송의 공적 책무를 재난 방송, 지역 방송, 국제 방송과 같은 특정 역무를 중심으로 한정하거나 강조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접근은 공영 방송을 게토화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민간 상업 방송보다 수월한 창의성과 흥미로운 콘텐츠를 제작하고 시청률과 성과로 입증하는 것은 공영 방송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에 해당하고, 이러한 책무를 다하면서 재난 방송이나 국제 방송도 공적 책무로 이행해야 하기 때문에 공영 방송이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즉, 상업 방송과 경쟁할 수 있는 콘텐츠와 서비스를 바탕으로 상업 방송이 하지 못하는 공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상업적 수입과 공적 재원의 균형을 도모하는 어려운 과제를 풀어가야 한다.
보도의 공정성 확보, 창의적인 콘텐츠와 서비스 개발, 강도 높은 자구 노력 외에도 공영 방송은 자신의 모든 영역에서 혁신을 추구해야 한다. 이 모든 노력을 관통하는 핵심은 끊임없는 자기 규율과 평가, 그 결과에 대한 설명 책임이다.
공영 방송은 설명 책임을 통해 자신이 수행한 공적 책임의 이행 결과를 수신료 납부자인 시민에게 공개하고 성과와 미진한 부분에 대해 설득해야 한다. 이는 설명 책임의 주체를 명확히 하고 설명 내용과 평가 방식에 대한 절차적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구현된다. 형식적인 경영 평가나 방송 평가, 재허가 심사 위원회를 대상으로 한 청문의 형태가 아니라 상시적인 시민과의 소통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시청자 불만 내용과 처리 결과에 대한 공개, 공정성 이슈에 대한 자기 평가와 보고, 수신료에 대한 수치 중심의 근거 제시와 설득, 조직 개편과 혁신에 대한 계획, 기술 개발과 성과에 대한 발표 등 공영 방송에 관한 모든 이슈에 대해 투명하고 구체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KBS가 과거에는 적극적으로 수행하지 않았던 일들이다. 특히 KBS 자회사들을 포함하여 KBS가 수행하는 상업적 활동에 대한 계획과 성과 평가는 경영 평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재허가 심사에서도 논의되지 않는 사안이다.
이와 같은 설명 책임은 지금 당장 시작되어야 하는 일이지만 아래 절에서 소개하는 협약 제도의 도입과 함께 더욱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독립할 것인가
공영 방송의 리빌딩을 위해서는 공영 방송이 가장 많이 혁신하고 변화해야 하지만, 공영 방송 재정립은 공영 방송사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공영 방송의 근간이 되는 법 제도 개선이 필수적이며, 법 제도 개선은 정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법 제도 개선은 공영 방송 거버넌스 개선부터 공영 방송의 책임과 의무를 부여하고 그 실행 정도를 평가하는 규제 체계의 변화, 규제 체계를 운영하는 내외부 규제 기구의 변화까지 전방위에 걸쳐 있다.
거버넌스 개선
먼저 공영 방송 거버넌스 개선 문제다. 공영 방송에 제기되는 비판 중 하나가 보도의 공정성 문제다. KBS 뉴스를 매일 보지 않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공영 방송 뉴스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뿌리 깊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과거에 공영 방송이 보여준 기억 때문이기도 하고, 정치인들이 서로에게 유불리를 따져 편파적이라고 공격하는 탓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앞서 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공영 방송의 거버넌스로부터 비롯된다. 대통령-정부·여당-방송통신위원회-공영 방송 이사회-공영 방송 사장으로 이어지는 인적 연결 고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장 임명과 해임을 두고 정치적 공방으로 점철되었다. 정치권력에 독립적이어야 할 공영 방송의 수장이 정치권력에 의해 임명되고 해임되는 일이 반복되면 공영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오랜 관행으로 굳어진 공영 방송과 정치권의 연결 고리를 끊어내는 법 제도 개선이 필요한 이유다.
여야가 추천하는 공영 방송 이사회 구성과 이사회가 선임하는 사장 임명 방식의 개선에 대한 논의는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여야가 비슷한 안을 바꿔 가며 발의할 만큼 구체적인 법 개정안도 적지 않게 발의되었다. 문제는 수렴 가능한 법 개정안을 두고도 여야가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여당일 때와 야당일 때 입장을 바꾸며 현행 제도를 유지해 왔다는 점이다.
결국 이 문제는 국회가 법 개정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정당 차원의 결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결단을 이끌어 내는 것은 공영 방송의 노력과 함께 여론의 압박이다. 여야 정치권은 공영 방송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경로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 경로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시민이 끊임없이 공영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을 감시하고, 국회와 정치권이 인사를 통해 공영 방송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비판하면서,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공영 방송 거버넌스를 만들어 내도록 추동해 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공영 방송은 시민과 함께 소통해야 한다. 시민이 거버넌스에 참여하는 통로를 확대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지난 2018년 KBS는 150명의 시민 자문단을 모집해 KBS 사장 후보자를 평가하고 선출하는 정책 발표회를 열고 시민 자문단의 평가 결과를 사장 선출에 40퍼센트 반영했다. 2021년에도 KBS 사장 후보자가 시청자에게 경영 계획을 직접 설명하는 비전 발표회를 열고, 총 204명의 시민참여단 질의에 답변하는 시간을 가졌다. MBC 역시 2022년 156명의 시민평가단이 참여하여 사장 후보 정책 발표회를 열고 후보 3인에게 직접 질문을 던져 구체적인 공약과 이행 방안에 대한 질의응답을 마친 뒤 후보 2인을 투표하는 절차를 거쳤다.
이와 같은 시민 평가 방식은 법적으로 보장된 절차가 아니고, 당시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임의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공영 방송이 스스로 마련한 이와 같은 시민 참여 방식은 앞으로 더욱 확대하고, 나아가 법적 근거를 갖는 절차로 명시할 필요가 있다. 이로써 시민이 참여하는 공영 방송 거버넌스를 확립하는 것이다.
규제 체계 개편
두 번째로, 공영 방송 규제 체계의 전면적인 개편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공영 방송 제도 자체가 법적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법 개정은 필수적 과제다. 공영 방송이 추구해야 할 차별화된 공적 목적과 필수적으로 제공해야 할 역무, 이 역무를 수행할 공영 방송사를 법에 명시해야 한다.
법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공영 방송은 법에 명시된 공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서비스와 기술 개발, 조직 혁신을 수행하는 자기 규율적 책임을 부여받게 된다. 공영 방송이 약속한 자기 규율적 책임이 지켜질 수 있도록 성과에 대해 내외부적인 평가·점검·환류 시스템을 마련하고 그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최근 제기되고 있는 것이 공영 방송 협약 제도다.[18]
공영 방송 협약 제도는 문재인 정부 시기 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제도개선추진반이 공영 방송의 공적 책무 및 평가 방안으로 제시했던 안이다.[19] 2022년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면서 공영 방송 재허가 제도를 폐지하고, 대신 협약 제도를 도입하며 공영 방송 경영 평가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재까지 정부 차원에서 더 진척된 논의 내용은 없는 상태다.
협약 제도의 대표적인 사례는 영국 BBC다. BBC 칙허장과 협약 제도는 영국 특유의 고유한 정치 문화를 배경으로 성립한 역사적 산물이다. 칙허장은 왕실이 발행하지만 칙허장 갱신은 협약 주체인 BBC와 문화매체체육부뿐 아니라 의회(상·하원), 시민단체, 사업자 등을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논쟁과 타협, 조정을 통해 이뤄진다. BBC와 정부 부처는 각각 별도의 의견 청취 절차와 입장을 담은 문서를 공개적으로 발표하며 논쟁을 주도한다. 합의된 협약은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지 않지만, 통상적으로 하원과 상원의 별도 검토 보고를 통해 조정되는 과정을 거쳐 확정된다. 칙허장과 협약에 근거하여 설정되는 BBC의 운영 면허 규제 조건 역시 규제 당국과 BBC 간 상호 의견 교환과 합의를 통해 마련되고, 환경 변화 등을 반영하여 수정하거나 변경될 수 있다.
아무리 모범적인 사례라 해도 영국의 협약 제도를 한국에 그대로 이식할 수는 없다. 정부와 의회를 포함하여 정치 체제가 다르고, 사회·문화·역사적 배경도 상이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특성과 상황에 부합하는 한국식 협약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
한국식 협약 제도
협약 제도 도입의 출발점은 무엇보다 협약 제도의 이념적 근거로서 우리 사회 공영 방송이 추구해야 할 차별화된 공적 목적을 설정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도출된 공영 방송의 공적 목적에 근거하여 이를 구현하기 위한 공영 방송 사업자의 활동 범위를 정하고, 공영 방송 사업자가 준수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의 내용을 구체화해야 한다. 의무와 책임, 평가 지표가 제시되면 투명한 평가 방식 및 환류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공영 방송 협약 제도는 기존 방송 평가 및 재허가 제도를 단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공영 방송의 질서를 새로 세우는 것이다. 오랫동안 한국 방송법과 방송 정책에서 비어 있던 공영 방송의 차별성이 무엇인지를 성립하고, 공영 방송이 스스로 이행 가능한 목표를 수립하여 이행하도록 견인하는 것이다. 그로써 공영 방송은 자율성을 강화하고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하여 구조적으로 변동할 수 있다.
또한 협약 제도는 공영 방송 스스로 존립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제도로 기능해야 한다. 공개적이고 합리적인 평가가 기반이 된다면 공영 방송은 이를 기반으로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 동시에 협약 제도는 전체 미디어 생태계에도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돼야 한다.
이때 공영 방송의 차별화된 의무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여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최소한의 규제 근거를 설정하는 방식으로 제시되고, 자임한 책임은 공영 방송이 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 설정하고 약속하는 구체적인 활동들로 구성된다.
의무와 책임의 예를 들어보자. 공영 방송이 수행해야 하는 차별적인 역할 중 하나로 창의적인 콘텐츠와 서비스 개발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 법적으로 부여하는 최소한의 의무는 국내 제작 오리지널 콘텐츠 비율, 국내 제작 오리지널 콘텐츠 초방 비율, UHD 프로그램 편성 비율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규정이 법적 의무라면, 공영 방송은 스스로 창의적 콘텐츠 제공을 위해 다수의 자임한 책임을 설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정 비율 이상의 계층별 도달률 및 시청률 목표, 세계적 수준의 고품격 다큐 제작, 정통 대하 역사 드라마 제작, 케이팝 공연 및 해외 송출, 자체 프로그램 질 평가 위원회 운영, 대국민 프로그램 만족도 조사와 같은 것들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의무와 책임에 대한 약속은 이행 여부로 평가받아야 한다. 평가는 경영진과 이사회의 책임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재원 마련과도 반드시 연동되어야 한다. 애초 설정한 협약의 내용을 이행했다 하더라도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했으므로 정해진 재원의 보장 조건이 되지 못한다거나, 협약의 이행 결과에 따라 협약 기간 내에 수신료를 삭감하는 등 KBS의 공적 재원을 압박하는 식으로 협약 제도가 악용될 가능성을 차단해야 한다. 공영 방송 재원은 경영 성과에 대한 대가성 보상이 아니라 공영 방송 협약 기간 동안 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행해야 하는 모든 활동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보장으로 기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무와 책임에 대한 약속은 이행 여부로 평가받아야 한다. 평가는 경영진과 이사회의 책임뿐만 아니라 안정적협약 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공영 방송사와 정부, 규제 기구, 경쟁 사업자, 전문가 집단, 시민 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상호 소통과 의견 교환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논의 과정 없이 형식적 차원의 협약 제도 도입에 그친다면 구체적인 협약의 내용과 그 이행 방식을 두고 또다시 정치적인 공방만을 반복할 공산이 크다. 자칫하면 협약 제도가 공영 방송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행정부에 예속시키는 장치로 활용될 우려도 존재한다.
규제 기구 개선
이와 같은 공영 방송 규제 체계 전반의 재편을 위해서는 법적 토대 마련과 함께 공영 방송 이사회의 구성과 기능, 공영 방송 외부 규제 기구의 위상과 역할 등에도 과감한 변화와 개선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규제 기구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 공영 방송 규제 기구에는 공영 방송 제도 운영에 있어 고도의 전문적 역량이 필요하다. 시민, 내부 종사자, 외주 제작사, 경쟁 사업자, 정부 부처, 전문가 집단, 국회 등 다수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해 상충을 조정하며 공적 목적에 복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규제 기구는 단순히 의무를 준수했는지 여부를 중심으로 한 규제와 평가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공영 방송이 공적 목적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정책을 마련하고 환경을 조성하는 생산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정부와 정당, 국회 등 정치 세력뿐 아니라 사업자와 민간의 모든 이해집단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파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미디어 규제 기구의 역사와 현행 방송통신위원회 구성 방식을 감안할 때, 칙허장을 기반으로 하는 영국의 문화매체체육부, 오프컴, BBC와 같은 관계 정립이 한국에서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을 여야가 추천하여 대통령이 임명하는 현실에서 독립성을 보장받기 힘들고, 공영 방송 인사에 개입하거나 규제를 강화하는 등 행정적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영 방송 제도는 미디어 규제 체계의 혁신과도 연결된다.
공영 방송의 역할을 제시하는 오프컴
영국 BBC에 대한 외부 관리 감독은 오프컴이 총괄하고 감사는 감사원에 위탁하여 진행하는 간결한 규제 질서를 갖추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 공영 방송에 대한 외부 규제는 방송통신위원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문화체육관광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기획재정부, 감사원 등 다수의 정부 부처가 복잡하고도 때로 중복된 형태로 관여한다. 공영 방송이 공표하고 공개, 제출하는 모든 계획과 이행 내역에 대한 결과 보고, 그에 대한 평가는 공영 방송을 관리·감독하는 규제 당국이 총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공영 방송의 모든 서비스에 대해 공적 목적을 고려하여 일관된 원칙과 기준으로 규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규제 기구가 공영 방송에 대한 평가와 규제 기능만 수행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영국 오프컴은 BBC에 대해 규제와 성과 평가를 수행하지만,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 부합하는 공영 방송의 역할을 선제적으로 제안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오프컴은 넷플릭스 등 글로벌 주문형 비디오(SVoD)의 등장에 따른 영국 내 미디어 시장 재편과 소비자들의 이용 행태 변화에 직면하여 공영 매체의 미래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위해 2020년 초 ‘작은 스크린, 큰 논쟁(Small Screen Big Debate)’이라는 제목의 웹사이트를 개설했다. 오프컴은 약 1년 5개월에 걸쳐 산업 및 학계 전문가, 100여 명의 이해관계자, 4000명 이상의 설문 응답자, 영국 17개 지역에서 이루어진 워크숍 결과와 해외 사례 분석 결과 등을 종합하여 ‘공영미디어의 미래에 대한 대정부 권고안(recommendations to government on the future of public service media)’을 정부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 오프컴은 영국 공영 방송(public service broadcasting)이 공영 미디어(public service media)로 변모할 수 있도록 영국 정부가 입법을 통해 개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2003년 매체법에 규정된 공영 방송의 운영 목적에 ‘보편적 온라인 역무 제공’을 추가하여 공영 방송의 방송 프로그램 쿼터를 온라인 서비스까지 확대 적용하고 디지털 플랫폼에서 공영 방송이 제공하는 채널이 우선 노출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20] 한국의 방송통신위원회가 이와 같이 공영 방송 제도 전반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주도적으로 수행하고 미래지향적 법 개정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전문성을 확보하고 있는가 살펴볼 일이다.
경영 전략을 제시하는 영국 감사원
감사원의 역할도 변화해야 한다. BBC의 재정과 예산 집행은 영국 감사원이 감독한다. 감사원장은 BBC와 BBC의 유관 자회사가 자원을 얼마나 경제적, 효율적, 효과적으로 사용했는지에 대한 조사를 실시할 수 있다. 그러나 감사원이 BBC 또는 유관 자회사의 정책 목표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BBC 또는 유관 자회사의 편집상 판단 또는 창작적 판단을 문제 삼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저널리즘적 판단과 편집상의 판단 또는 창작적 결정의 의미에 관해 문제가 제기되는 경우, 감사원장은 BBC 또는 유관 자회사와 협의해야 한다.
감사원은 BBC의 임금 체계에 대한 감사를 비롯하여 BBC의 재정 현황에 대한 심층 분석을 수행하고 향후 전망과 경영 전략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감사원은 BBC가 2017년에 발표한 5개년 비용 절감 계획에 대해 성과와 한계를 검토하여 2021년 12월 〈BBC 비용 절감 및 개혁(BBC Savings and Reform)〉 보고서를 발간했다. 감사원은 BBC가 그동안 생산성 향상, 내용물 및 역무의 축소, 편성 변화, 제3의 수익 창출 등 4가지 방식을 통해 비용 절감을 추진해 왔으며, 생산성 향상을 통한 비용 절감 방식에서 최근에는 내용물 및 역무를 축소하는 방식으로 비용 절감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감사원은 이 같은 비용 절감 방식에 대해 시청자들의 시청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 단기적인 비용 절감 효과 대비 장기적인 지적 자산의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21]
또한, 2021년 1월 발간한 보고서(The BBC’s strategic financial management)에서는 수신료 수익에 의존하고 있는 BBC 재정 구조로 인해 수익의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감사원은 BBC 이사회 이사들과 고위급 간부(Senior Manager) 인터뷰를 통해 BBC 재정 관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위협 요인과 핵심 이슈 12개를 제시했다. 스트리밍 및 SVoD 서비스와의 경쟁(Streaming, SVoD Competition), 코로나19 발생, 예산 절감 및 관리 문제(Savings, Managing finances), BBC의 재원 모형(Funding models)에 대한 부정적 여론, 규제(Regulation) 측면, 정부 선호 인사가 임명되는 BBC의 지배 구조(Governance), 시청자 가치(Audience value) 관련 역할, 내외부 커뮤니케이션 문제, 전략의 중요성 등을 언급하며 BBC의 미래 전략 수립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22]
영국 감사원의 보고서들은 감사원이 BBC를 비판하거나 징계를 주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감사원은 BBC의 재정 현황에 대해 수익과 지출 내용을 분석하고 BBC를 둘러싼 내외부 환경을 고려하여 중장기 재무 전략을 권고하는 고도의 전문가적 판단을 제공한다. 재무제표상의 수치에 대한 ‘검사’를 수행하거나 불필요한 ‘감사’를 수행하는 데 주된 목적을 두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영국 감사원의 활동에 비하면 한국의 감사원 활동은 매우 정치적이고 정파적이다. 방송법 제59조에서 감사원은 KBS가 방송통신위원회에 제출한 결산서를 검사하고 그 결과를 방송통신위원회에 송부하도록 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감사원은 KBS에 대한 정기 감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발표해 왔다. 그 내용은 주로 직원의 외부 행사 참여 문제, 연차 수당 과다 지급, 자녀 학자금을 비롯한 직원 복리 후생 제도, 계약 대금 지연 지급과 같은 사항들이었다.
최근에도 감사원은 KBS 노동조합과 보수 성향 단체들의 국민 감사 청구에 대해 2022년 10월부터 세 차례 감사 기간을 연장해 감사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23] 감사원은 ‘한국방송공사 KBS의 위법·부당 행위 관련’ 감사 보고서에서 국민감사청구심사위원회가 의결한 다섯 개 감사 항목, ‘KBS 이사회의 사장 후보자 검증 태만 의혹’, ‘이사회가 KBS의 계열사인 몬스터유니온에 400억 원 증자를 의결한 것이 배임에 해당한다는 청구 항목’, ‘방송용 사옥 신축계획 무단 중단 의혹’, ‘직원의 해외여행 시 병가 처리 및 사후 조작 의혹’, ‘제20대 대선 직후 증거인멸 목적의 문서 폐기 의혹’에 대해 모두 청구인이 주장하는 위법 사항이 없다고 밝혔다. 다만, 청구 항목과 관련한 업무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일부 절차적 문제가 확인된바, KBS 이사장에게 정당 가입 여부 등 사장 후보자 결격 사유를 조회·확인하는 절차를 마련해 운영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KBS 사장이 몬스터유니온을 적정하게 관리하는 방안을 마련하라는 등 2건의 통보 등을 결정했다.
지금까지 감사원의 감사 결과는 KBS 방만 경영 담론의 근거로 활용되고, KBS 이사회 및 경영진과 관련한 정치적 논쟁의 원인이 되면서 공영 방송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감사는 공영 방송이 그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재원의 적정 규모와 수익 창출의 방식, 비용 절감의 방향성, 중장기적 경영 전략에 대한 가이드를 제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의 감사원이 영국의 감사원과 같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매체 환경 변화를 고려하여 공영 방송 재정 현황을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공적 목적 달성에 필요한 재원 규모를 산정하며 장단기 경영 전략을 권고할 수 있는 전문적인 외부 기관의 참여나 협업 방식을 검토할 수 있다.
이사회와 경영진의 위상 정립
외부 규제 기관의 변화와 함께 공영 방송의 설명 책임 주체인 내부 기관으로서 이사회와 경영진의 위상 정립도 필수적이다. 여야 추천으로 구성된 공영 방송 이사회가 공영 방송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기구로서 역할을 충분히 담당하지 못한다는 오랜 난제는 차치하고라도 현행법상 이사회의 기능은 주로 자산과 관련된 경영 활동을 중심으로 열거되어 있다.[24]
이사회가 임명 제청하는 사장과 감사, 임명 동의를 하는 부사장은 KBS의 집행 기관이다. 방송법 제51조에서 사장은 공사를 대표하고, 공사의 업무를 총괄하며, 경영 성과에 대하여 책임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감사는 공사의 업무 및 회계에 관한 사항을 감사하며, 사장과 감사는 이사회에 출석하여 의견을 진술할 수 있다.
그러나 사장이 경영 성과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지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고, 사장과 감사가 이사회에 출석하여 의견을 진술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명료하지 않다. 이사회는 KBS의 기본 운영 계획을 최종적으로 승인하며 그 결과에 대한 평가와 대외적 보고를 수행하는 설명 책임 주체로서 역할을 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KBS 사장이 국회에 출석하고 방송통신위원회에 가서 설명한다.
공영 방송 경영진은 매년 연차 계획서를 작성하고, 이사회는 그 계획서를 승인·의결하며 집행 과정을 관리·감독하는 주체로 정립되어야 한다. 계획을 이행하지 못한 경우 경영진은 그 이유를 이사진에 설명하고, 이사회는 그 적절성과 타당성을 검토하여 대외적으로 설명하는 주체가 됨으로써 공영 방송의 독립성과 공공성을 보장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경영진은 이사회에게, 이사회는 방송통신위원회와 국회, 그리고 시민을 대상으로 책임 있게 보고하고 해명하는 설명 책임 수행의 절차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사회적 제도로서의 총체적인 공영 방송 거버넌스 개편, 법과 자율적 책임으로써 공영 방송의 차별적 역할을 구성하고 약속하며 평가받는 협약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공영 방송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입법자인 국회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건강한 미디어 생태계를 형성하고 촉진시키는 정책 수립의 주체인 행정부, 공영 방송 재원의 담지자인 시민에 이르기까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의견을 수렴하고 협업해야 하는 공동의 과제인 것이다.
안정적인 재원 확보
공영 방송이 자신에게 주어진 공적 책임을 수행하는 데는 재원이 필요하다. 공영 방송 재원 규모는 공영 방송의 책임 범위에 따라 달라진다. 즉, 재원은 공적 책무의 범위와 유형을 규율하는 기준이다.[25] 이는 공영 방송의 공적 책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영 방송의 책무를 설정하고 그에 필요한 재원을 추산하여,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논의해야 하는 것이다. 재원 마련과 집행 이후에 그 재원이 효율적으로 집행되었는지 평가하고 환류하는 체계는 당연히 뒤따라야 한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공영 방송의 공적 책무를 구체화하고 재설정하는 작업 없이 미시적인 경영 수지 개선 작업에 초점이 맞춰진다면 공영 방송 경영과 관련해 결코 유효한 해결책을 마련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공영 방송의 공적 책무 재설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그에 필요한 재원 마련 방안을 논의한다.
공영 방송은 공적 재원을 기반으로 한다. 광고와 같은 상업적 재원에 대한 의존도가 커질수록 공영 방송이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커지기 때문이다. 수신료는 오랫동안 공영 방송의 가장 대표적인 공적 재원으로서 기능해 왔다. 시민이 부담하는 수신료는 공영 방송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시장으로부터의 영향력을 축소하며, 공영 방송이 수신료를 지불하는 시민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는 주요한 토대가 된다. 또한 수신료를 납부하는 시민에게도 주인 의식을 바탕으로 공영 방송의 역할과 운영에 관여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수신료 산정과 인상은 어느 나라나 쉽지 않은 과제다. 이로 인해 공영 방송 제도를 운영하는 국가마다 수신료 산정과 인상 방식이 상이하고, 수신료를 둘러싼 진통도 적지 않다.[26]
정부가 주도하는 영국
영국 BBC의 수신료 산정은 문화매체체육부가 주도하여 BBC와 협상을 통해 결정한다. 최대 5년 주기로 정기적 조정이 이루어지며, 물가 상승률과 연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산정 당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이나 BBC에 대한 평가에 따라 다양한 요인들을 고려하여 최종 결정한다. 정부가 수신료 산정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영국의 특징이며, 의회는 형식적인 승인 역할만 수행할 뿐 직접적인 영향력은 없다.
영국 BBC의 수신료 산정은 문화매체체육부가 주도하여 BBC와 협상을 통해 결정한다. 최대 5년 주기로 정기적 조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국에서는 2019년 이후 수신료 모델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확대되고 있다. 2016년 BBC 칙허장에 근거하여 2027년까지 수신료 모델이 보장되어 있으나 2019년 취임한 보수당 보리스 존슨 총리가 BBC 수신료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지속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2022년 1월에는 영국 문화매체체육부 장관 나딘 도리스(Nadine Dorries)가 본인의 트위터 계정에 “이번 수신료 발표가 마지막이 될 것(This licence fee announcement will be the last)”이며 “이제 새로운 자금조달 방법에 대해 논의할 때가 되었다(Time now to discuss and debate new ways of funding)”고 언급하여 수신료 폐지 논란이 새롭게 점화되었다.
신규 칙허장은 2028년부터 적용된다. 수신료 폐지는 이때부터 가능하며 2024년 영국 총선에서 승리한 집권당과 BBC 간의 협상을 통해 결정될 전망이다. 영국 정부는 수년 전부터 수신료 모델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 왔으나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어 향후 논의가 주목된다.
연방 국가의 원리를 적용한 독일
독일은 2013년부터 공영 방송 수신료를 가구 세에 해당하는 방송 분담금으로 개칭했다. 독일에서 수신료는 특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징수하는 준조세로 가구당 징수하며, 연방 16개 주가 설치한 방송 재원 수요 조정 결정 위원회(KEF)에서 공영 방송의 재정 수요를 조사, 산정한 뒤 인상·인하 금액을 결정하여 16개 주 주지사 회의에 통보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조정 주기는 3년이다.
KEF는 공영 방송의 재정 상태와 수신료 책정을 위해 독일 16개 주 정부가 1975년에 설치한 독립 기관이다. KEF의 설립 목적은 수신료 산정에 있어 객관적인 기준 마련에 있다. 이를 위해 KEF는 공영 방송사들이 제출한 장기 재정 소요 계획안을 심의하고, 새로운 수신료 산정의 기준이 되는 보고서를 16개 주 정부에 제출한다.
KEF는 최소한 2년에 한 번씩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이 보고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수신료를 언제, 얼마 정도 책정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항이다. 또한, 공영 방송사 간에 실시되는 재정 조정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 밝히며, 독일 공영 방송사 ARD와 ZDF, DR 간의 수신료 분배에 관한 비율과 액수를 제안한다.
KEF 위원은 연방 16개 주에서 각각 한 명씩 추천하여 총 16명으로 구성한다. 유럽연합, 독일연방 및 16개 주 헌법 기관(입법부·행정부)의 의원이나 공무원, ARD 회원사와 ZDF, DR, ARTE, 민영 방송의 이사 및 직원, 방송 관계 유관 기업 관계자는 위원으로 선출될 수 없고, KEF 업무를 수행하는 데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연관된 사람은 위원이 될 자격이 없도록 규정하는 등 KEF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있다.
수신료의 대안을 찾는 프랑스
프랑스 공영 방송 수신료(2009년 공영 방송 기여금(Contribution à l‘audiovisuel public)으로 변경)는 2003년 개정된 국가재정법 제63조에 의해 국가 재정 수입의 한 항목으로서 정식 조세의 일종으로 명확히 규정되었다. 조세 성격의 수신료는 의회의 심의를 거쳐 정부가 결정하며, 매년 물가 인상률을 일괄적으로 적용한다.
앞 장에서 프랑스의 공영 방송 수신료 폐지 결정을 살펴보았다. 그 자세한 과정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에서 공영 방송 제도 개편에 논의가 급물살을 탄 것은 2022년 대통령 선거 때였다. 여러 대통령 후보들이 공영 방송 수신료 폐지를 주장했고, 현직 대통령인 에마뉘엘 마크롱은 2022년 3월, 국가재정법 개혁을 공약하면서 특별히 공영 방송에 대한 수신료를 폐지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마크롱이 당선된 후 2022년 7월, 방송 및 새로운 공영 텔레비전에 관한 법률안(Projet de loi relatif à la communication audiovisuelle et au nouveau service public de la télévision)이 제출되었고, 2022년 8월 프랑스 상원 표결로 법안이 통과되었다. 최종적으로 8월 4일 프랑스 헌법위원회로부터 합헌 판정을 받음으로써 수신료 제도는 도입 90년 만에 폐지되었다. 수신료가 폐지됨에 따라 공영 방송 재원은 임시적으로 부가 가치세 수입 중에서 수신료에 해당하는 금액을 전용하여 활용하게 된다. 구체적인 재원 구조 개편은 헌법위원회의 판결에 따라 오는 2025년 이전까지 확정되어야 한다.
재차 강조하는 것은, 프랑스의 수신료 폐지가 공영 방송의 독립성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재원 문제를 포함한 공영 방송의 독립성 보장은 유럽연합 및 유럽평의회 차원에서 보장되는 사안이다. 프랑스 정부 역시 공영 방송 자금 조달 개혁의 원칙으로 ‘공영 방송 임무 수행에 적절한 재원 규모’와 ‘재원의 예측 가능성’ 등을 고려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27] 이처럼 프랑스 정부의 수신료 폐지 결정은 공영 방송을 약화하려는 의도와는 상관없다. 오히려 공영 방송을 정치적 수신료 논란에서 벗어나게 하고 안정적인 다른 재원 모델로 공영 방송 제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기조에서 시행된 것이다.
인상할 수도 인하할 수도 있는 일본
일본 NHK의 수신료는 세금이나 시청의 대가가 아니다. 공영 방송 NHK가 사회적 사명을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국민 시청자 전체에 공평하게 부담하도록 하는 특수한 부담금의 성격을 지닌다. 수신료 산정 주체는 NHK이며, 수신료 조정 주기는 일정하지 않다.
역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NHK는 ‘총괄 원가 방식’으로 수신료를 산정한다. 총괄 원가 방식은 총수입을 사업 운영에 필요한 총경비에 맞도록 설계한다는 것이다. 주로 전기나 가스 등 공공요금을 결정할 때 이용되는 방식이다.
3년이나 5년간 필요한 자본 지출을 포함한 총지출이 이월금을 포함한 총수입과 일치하도록 설정한 뒤, 개별 부담자의 납부액을 산출한다. 총괄 원가 방식으로 결정된 수신료 액수는 국회의 승인 과정을 거쳐 확정된다. 이러한 수신료 결정 과정에서 총무성과 국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이로 인해 NHK 회장 자문 기관인 수신료 전문 조사회는 수신료 산정이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고 일정한 절차를 확보하여 결정 당사자로부터 독립된 기관의 심의를 거쳐 결정되는 수신료 산정 위원회의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 일본은 최근 온라인 동시 전송도 수신료를 징수하는 온라인 수신료 도입을 검토하고 있으며, 이월 잉여금이 늘어나자 그 일부를 수신료 인하 재원으로 활용하도록 방송법을 개정했다.
우리나라의 수신료, 어떻게 정할까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의 수신료는 KBS 이사회가 수신료 액수를 산정하여 방송통신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국회가 승인하는 절차를 밟는다. 공영 방송의 수신료는 국회 승인 과정에서 공영 방송을 둘러싼 여야 정당 간 정쟁의 대상이 되었을 뿐, 우리 사회 공영 방송의 공적 책임을 이행하는 데 적합한 금액인지, 나아가 공영 방송 제도의 재원 구조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
제도 개선 방안의 하나로 수신료 산정 위원회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수신료 산정 위원회는 공영 방송이 필요한 재원 수요를 신청하면 이러한 재원 규모가 적정한지 판단하여 인상이나 동결을 결정하고 공영 방송별로 적정 수신료를 배분하며 수신료가 목적에 맞게 집행되었는지 검수하고 차기 수신료 산정에 반영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KBS 이사회가 수신료를 산정하고 집행하는 것보다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수신료 산정과 배분, 집행에 대한 검수가 가능할 것이라 보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수신료 산정 위원회가 독일의 KEF처럼 독립성과 전문성을 보장받기 어렵고 공영 방송을 통제하는 또 다른 수단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현행 공영 방송 수신료 제도는 금액, 결정 절차, 배분 및 징수 방식 등 다양한 측면에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28] 그 해결 방안으로는 수신료 위원회 설치, 물가 연동제 도입, 배분 시스템 개선, 시민 참여 확대 등이 제시된다.[29]
시민 참여 확대는 공영 방송 제도 재정립에 있어 모든 사안을 관통한다. 2021년 KBS는 수신료 공론화 위원회를 통해 209명의 국민참여단을 대상으로 공영 방송의 공적 책무별 필요성과 수신료 인상 필요성 등에 대한 공론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숙의를 통한 공론 조사 결과 월 2500원의 수신료 인상에 찬성한다는 의견이 79.9퍼센트인 것으로 나타났다. 인상에 찬성하는 이유로는 공정한 뉴스 제작과 독립적인 운영을 위해서라는 응답이 28.1퍼센트로 가장 높았다. 인상에 찬성한 응답자들은 적정한 인상 금액으로 평균 3830원을 제시했다. 숙의 토론이 공영 방송의 역할과 수신료 문제에 대해 인식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회였다.[30]
공론 조사 결과는 공영 방송이 수신료 문제에 있어서도 시민과 직접 소통해야 할 필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 것으로서,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 것이 아니라 공영 방송이 시민과 소통하고 시민의 참여를 확대하는 정례화된 제도로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나아가, 공영 방송의 재원 구조에 대한 보다 확대된 논의가 필요하다. 주지하다시피 2023년 7월 방송법 시행령 개정으로 수신료 징수 방식이 변경되었다. 분리 징수 조치에 따라 공영 방송의 수신료 규모는 축소될 전망이다. 실제로 2023년 8월 KBS의 수신료 수입은 22억 원 가까이 감소했다.[31] 수신료 분리 징수는 단순한 징수 방식의 변경 차원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공영 방송 제도 전반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우리 사회에 여전히 공영 방송이 필요한지, 공영 방송이 필요하다면 어떤 공적 책임을 수행해야 하는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데 소요되는 재원 규모는 어느 정도이며 이를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 등 공영 방송에 대한 본원적 질문을 제기하며,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재원 마련 방안과 관련하여,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접근도 검토해야 한다. 공영 방송이 수행해야 하는 공적 책임의 범위를 고려하여 필요한 재원 규모가 산출되면 이에 대해 지금과 같이 수신료와 광고를 포함한 상업적 활동을 통해 조달할 것인지, 수신료를 인상할 것인지, 혹은 또 다른 공적 재원으로 세금을 지원할 것인지 등과 같은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이 경우 수신료와 세금, 광고와 같은 상업적 재원을 어느 정도 규모로 가져갈 것인지, 재원 전체에서 수신료와 세금, 광고의 구성 비율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해야 한다. 정부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세금 지원의 문제, 광고와 같은 상업적 재원이 갖는 문제 등에 대해서도 심층적으로 논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시민의 의견은 필수적이다.
그동안 공영 방송 경영 문제는 방만 경영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마치 공영 방송사 스스로가 바로 잡으면 저절로 해소되는 문제처럼 여겨져 왔다.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영 방송의 역할을 정의하고, 그에 필요한 업무를 구체적으로 설정하며, 업무 이행에 적절한 재원 규모 및 조달 방식을 결정하고, 성과 평가 방식을 마련하며, 이 과정을 총괄하는 거버넌스 및 법제 개편 등 근본적이고 사회적인 문제 해결 과정 없이 KBS에게만 재원 조달 방안을 마련하라고 하거나 경영 효율성 달성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답이 없는 문제를 풀라는 요구와 마찬가지이다. 논의의 출발점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KBS의 재정적 위기는 KBS의 자구적인 노력만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공영 방송의 재원 문제는 국회로 대표되는 정치 세력 간 합의의 문제이자, 미디어 시장 내 참여자, 이익 집단, 시민들 간의 합의가 요구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