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죽이기
4화

수신료를 둘러싼 담론 투쟁과 현실

어느 나라든 이야기 주제로서 공영 방송은 항상 시끌벅적하다. 그중에서도 수신료 문제는 으뜸이다. 공영 방송 논쟁은 수신료 인상 또는 폐지를 매개로 발생하거나, 아니면 재원 문제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말해 뭐 하는가. 우리나라도 공영 방송 하면 수신료 문제가 연관 단어로 자연스럽게 떠오를 만큼 수신료 이슈는 공영 방송 담론 투쟁의 핵심 영역이다.

공영 방송 또는 공영 방송 제도를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측은 적정한 수신료 인상을 통해 안정적 재원을 확보해야 공영 방송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공영 방송을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측에서는 공영 방송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작정 수신료를 인상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논쟁이 그렇듯이, 담론 투쟁이 격화되면 본질적인 사안에 대한 진중한 검토보다는 지엽적이고 수사적인 싸움에만 몰두하게 된다. 물신화된 공영 방송 수신료 담론 투쟁은 오히려 공영 방송의 구체적 현실 파악과 개선 과제를 은폐하는 효과를 낳는다. 수신료 관련 각종 담론을 검토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노(No) 시청 노(No) 납부 담론


‘나는 평소에 공영 방송을 시청하지 않는다. 도대체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 서비스에 왜 내가 돈을 내야 하는가.’

공영 방송을 시청하지 않으면 수신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견 맞는 말 같다. 일반적으로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는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만큼 구매해서 사용한다. 수익자 부담 원칙이 적용되는 것이다. 필요성이 없어지면 구매를 중단하면 된다. 대표적으로 케이블, 위성 방송, IPTV 같은 유료 방송 서비스는 보고 싶을 때 사용료를 내고 유료로 구독하는 TV 서비스다. 넷플릭스, 웨이브, 티빙, 디즈니플러스 등 OTT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시청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구독을 중단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유독 공영 방송(KBS, EBS) 수신료만은 시청 여부에 상관없이 납부해야 하는가. 내가 공영 방송을 보고 싶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데, 텔레비전 수상기를 보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왜 달마다 꼬박꼬박 수신료를 내야 하는가 말이다.

정말 공영 방송을 시청하지 않으면 수신료를 내지 않아도 괜찮을까? 그렇지 않다. 공영 방송은 달리 공영 방송이 아니다. 공영 방송은 유료로 구독하는 상업 방송과 차별되는, 공영 방송만의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1] 차별성을 달성하기 위해 재원 조달 방식도 유료 구독이 아닌 국가적·사회적 차원의 공적 지원으로 이뤄진다. 구체적 지원 방식은 정부 지원금, 보조금, 세금 등으로 다양하지만, 공영 방송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국민이 직접 재원을 부담하는 수신료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여전히 납득이 안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청하지도 않는데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당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영 방송 수신료 납부가 부당하다며 위헌 심사 헌법 소원을 청구한 사례가 있었다. 2008년 헌법재판소는 관련 선고에서 현행 수신료 제도의 위헌 여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확한 결정을 내렸다.[2]

수신료는 공영 방송의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한국방송공사가 수행하는 각종 방송문화 활동의 수혜자인 수상기 소지자에게 부과되는 부담금으로서 입법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되고, 공영 방송이 국가나 각종 이익단체에 재정적으로 종속되는 것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공영 방송 스스로 국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자기 책임하에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입법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효과적이고 적절한 수단으로 볼 수 있다.
헌법재판소, 2008. 2. 28. 선고 2006헌바70 결정.


수신료는 시청 여부와 상관없이 수상기 소지자에게 부과하는 특별 부담금이며, 공영 방송의 독립성과 책임성을 확보하기 위해 합목적적인 법률 수단이라는 것이다. 현행 법체계에서 공영 방송 수신료는 ‘안 보니까 안 내도 되는 돈’이 아니다. 국가가 법을 만들어 부과하는 부담금이고 헌법에도 일치한다.

 

수신료 분리 징수 담론


2023년 7월 11일, 정부는 수신료를 전기 요금과 분리하여 고지·징수하도록 하는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하고, 7월 12일부터 공포·시행에 들어갔다. 이전에 수신료 징수는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 전기 요금 고지서와 통합되어 징수되고 있었지만, 이를 금지하고 별도 고지서를 통해서만 징수하도록 법을 바꾼 것이다. 정부는 “수신료와 전기 요금 합산 징수로 수상기가 없는데도 모르고 수신료를 내는 경우가 있었는데, 별도 고지·징수를 통해 잘못 부과된 경우 바로 잡을 수 있다”, “TV가 없는 세대는 수신료 안 낼 권리가 강화되는 등 수신료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권리 의식을 높이고 편익을 증진할 것이다”, “수신료 미납 시 단전 우려가 있었으나 앞으로는 수신료 미납만으로 단전되는 부작용을 차단할 수 있다”는 점을 법 개정 사유로 들었다.

사실 현행법상 수신료 제도나 징수 방식은 일반 국민이 잘 이해하기도 어렵고, 실제 운영 방식에 대한 오해도 많은 편이다. 예를 들어 법으로 수상기 보유자는 KBS나 한전에 등록 신청을 하게 되어 있지만, 등록 신청 의무를 알고 있는 국민은 많지 않다. 더구나 실제로 스스로 등록 신청을 한 국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법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존재한다.[3] 수신료 분리 징수에 대한 일부 국민의 오해는 더더욱 그렇다. ‘수신료 분리 징수 도입으로 이제는 수신료를 내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정말 분리 징수 도입으로 수신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방송법상 수상기 보유자는 수신료를 내게 되어 있고, 내지 않으면 법 위반이다. 한편 수상기 미등록 시는 1년분 수신료를 추징금으로 징수하고, 납부 기간 내 미납 시에는 수신료의 3퍼센트가 가산금으로 부과된다. 심지어 추징금과 가산금은 국세 체납 처분의 예에 따라 징수할 수 있도록 방송법에 명문화되어 있다. 이 말은 수신료를 제때 내지 않는 행위를 법적으로 세금 체납과 동등한 행위로 취급한다는 의미이다.

정당한 저항이라는 수사

사실 수신료 징수 방식이 통합이냐 분리냐는 본질적인 수신료 제도 자체와는 별 상관이 없는 지엽적인 사안이다. 수신료가 막 도입될 당시에는 KBS 징수원들이 일일이 가구를 방문해서 수신료를 받아 갔다. 지금처럼 계좌 이체, 자동 이체, 카드 결제, 은행 지로 등 다양한 징수 방식이 없던 시절의 일이다. 그런데 왜 일부 국민은 수신료 징수 방식에 대해 그토록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왜 전기 요금 통합 징수를 수신료 강제 징수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일까.

사실 그럴 만한 충분한 역사적 이유가 있다. 1980년대 군사 독재 시절,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의 추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이 발생했다. 국민의 민주화 열망과 무관하게 정권 홍보 및 편파 보도에 열중하던 당시 KBS에 대한 시청자 저항 운동이었다. 이후 이것은 야당과 재야 민주화 단체 등이 참여하는 범국민적 운동으로 확산했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5공화국이 막을 내리는 데 기여했다. 6공화국 노태우 정부 들어서도 국민들의 시청료 납부 거부가 이어져 징수율이 낮아지자, 정부는 1990년 방송법 개정으로 시청료의 이름을 수신료로 바꾸고 수상기 등록 및 징수 위탁 제도를 도입했다. 문민정부 시기인 1994년부터는 한전에 위탁해서 전기 요금 고지서 합산 방식으로 청구되면서 현재처럼 징수율이 올라갔다.

이처럼 수신료 징수 위탁, 합산·분리 징수 문제는 한국 사회의 역사적 맥락과 연결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사유에서건 공영 방송을 비판하거나 공격하려는 쪽에서 보면 수신료 분리 징수 문제의 제기는 정당한 시청자 저항이라는 역사적 이미지를 소환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문민정부 이후 몇 번의 정권 교체가 있었지만, 보수 정부든 진보 정부든 수신료 분리 징수를 전가의 보도처럼 공영 방송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수신료 분리 징수는 본질적으로 시청자 국민의 수신료 납부 방식과 절차의 편의성에 대한 사안이지만, 담론적으로는 공영 방송을 공격하는 수사이자 집행검의 역할로 활용되는 것이다.

 

수신료 정상화 담론


공영 방송이 공영 방송다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독립적인 재원 안정성 확보가 필요하다. 공영 방송 제도 교과서에 나오는 언술이다. 앞선 헌법재판소 결정문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공영 방송 재원 안정성 확보는 공영 방송 운영의 핵심 원칙 중 하나다. 이 원칙에 비춰 보면 40여 년 이상 2500원에 결박되어 있는 우리나라 공영 방송 수신료는 누가 봐도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수신료 당위성이 현실 수신료 담론 투쟁 공간을 통과하게 되면 논쟁 지형이 변형되곤 한다. 공영 방송 수신료 정상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공영 방송 재정 위기의 근원은 수신료 수입 동결’ 때문이며, ‘공영 방송의 안정적 재원 확보가 곧 공영성 강화의 수단’이고, ‘선 수신료 인상, 후 공영 방송 거버넌스 개혁을 요구’해야 하며, ‘선 수신료 인상, 후 광고 축소·폐지’가 가능하다는 등의 논리를 수반하고 있다.

KBS 경영의 진짜 문제

첫째, 공영 방송 재정 위기의 근원은 수신료 수입의 동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수신료 수입 동결만으로 공영 방송 재정 위기를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우선, 지난 10년간 수신료 총액은 실질적으로 매년 평균 100억 원 정도 증가해 왔다.[4] 물론 이 인상 규모가 충분했는지는 별개의 사안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수신료 동결이 공영 방송 재정 위기의 근원임을 주장하는 시각이 현 KBS의 경영의 실질적인 문제점, 즉 프로그램 경쟁력의 지속적 약화와 만성화된 무거운 인력 구조 문제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 위험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공영 방송 KBS의 프로그램 경쟁력은 나날이 약화하고 있다. 단순 시청률 하락만으로 프로그램 경쟁력의 모든 측면을 평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지만, 점점 시청자들에게 외면받고 있다는 뼈아픈 현실은 공영 방송의 존립 근거 자체를 침식하는 중요한 문제이며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프로그램 경쟁력 강화를 위한 물적·인적 투자 확대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외부로부터의 비용 절감 압박에 오히려 실질 프로그램 제작비 규모는 정체 또는 퇴보해 오고 있다. 프로그램 경쟁력 강화와는 정반대의 노선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무거운 인력 구조로 인한 인건비 비중 과다 문제는 공영 방송 경영 혁신의 아킬레스건이다. 인건비 비중을 줄이라는 KBS 외부의 압박이나, KBS 내부의 대응이 모두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인건비 비중 축소 문제는 결국 구조 조정의 문제라는 것이다. 구조 조정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누구도 쉽지 않다. 짊어져야 할 사회적 논란과 정치적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설령 제반 이해관계자들이 구조 조정의 대전제에 합의한다고 해도, 구조 조정의 원칙과 방식을 둘러싼 더 큰 논란이 발생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인건비 비중 과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가 더 큰 사회적 논란과 문제를 불러올 것이 우려되고, 그렇다고 문제를 덮어 두면 더 곪아 가는 딜레마가 지속되고 있다.

공영 방송 수신료가 충분히 인상되면 더 많은 재원 투자를 통해 일시적으로 프로그램 경쟁력을 향상하고 경영 압박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근본적인 프로그램 경쟁력 강화, 그 이전에 공영 방송 책무 조정을 근간으로 한 인적 구조 개편이 동반되지 않는 이상 수신료 인상은 임시방편일 수밖에 없다.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그대로 안고 가면 사태가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공영성인가

둘째, 공영 방송의 안정적 재원 확보는 공영성 강화로 이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안정적 재원 확보가 담보된다고 해서 공영성이 저절로 강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수신료 결정론’ 또는 ‘수신료 환원론’ 시각은 공영 방송의 모든 문제를 수신료 탓으로 귀인하고 안정적 재원을 확보하면 공영성이 강화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는 수신료 인상을 통해 ‘어떤’ 공영성이 강화되어야 하느냐는 물음을 가린다.

현행 방송법에는 공영 방송이 추구해야 할 공영성이 명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 평가, KBS의 자체 경영 평가, 국회 KBS 결산 승인 심사 과정 어디에도 공영 방송만이 추구해야 할 공적 목표나 구체적 책무가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재원 부담의 주체인 국민 역시 공영 방송이 자신들에게 어떠한 공적 가치를 가져다주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명확한 공영성 책무가 부재한 상황에서 공영 방송에 대한 이야기는 논의 자체가 현실에 정박하지 못한 채 추상적으로 부유할 운명에 처한다.

공영 방송 재원 안정성이란 공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충분한 재원 수준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공영성 달성에 필요한 재원 수준을 결정하는 작업이 선결되어야만 비로소 ‘안정성’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결국 수신료 인상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공영성 수준과의 정합성을 맞추는 문제다. 수신료 인상 자체가 공영성 강화를 가져오는 만능열쇠는 아니다.

정파적 공방을 이끄는 수신료 선결론

셋째, 선 수신료 인상, 후 공영 방송 거버넌스 개혁을 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 이 언술은 일견 수신료 인상 문제를 공영 방송 거버넌스 문제와 분리해서 사고해야 한다는 주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두 사안을 강고하게 결합해 정파적 공방을 확산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수신료 문제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공영성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사안이다. 반면 거버넌스 문제는 공영 방송의 사회적 운영 방식에 대한 사안이다. 두 사안이 완전 별개의 문제가 아니고 당연히 상관성은 지니고 있겠지만, 그렇다고 인과성을 지니는 선후 관계의 문제는 아니다. 수신료를 인상하든 또는 인하하든 공영 방송 거버넌스 문제는 별도로 남는다.

이 둘을 선후로 연계하는 사고방식은 공영 방송의 정치적 독립과 공정성을 담보하는 거버넌스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수신료 인상이 필요하다고 전제한다. 이로써 자연스럽게 정치적 독립과 공정성 문제를 수신료 논의에 끌어들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선 수신료 인상, 후 공영 방송 거버넌스 개혁이라는 수신료 선결론은 오히려 공영 방송 제도 개선 논의 과정이 정파적 공방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질곡으로 작용한다. 공영 방송 책무 설정, 적정 수신료 수준 결정 같은 구체적 논의에 들어가기도 전에 스스로 손과 발을 묶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KBS2를 민영화하자는 주장

넷째, 선 수신료 인상, 후 광고 축소·폐지가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 공영 방송 정체성에 관한 논의에서 광고를 축소하는 문제는 단골 주제였다. 높은 광고 비중은 수신료 인상 반대 논리 중 하나로서, 과도한 상업적 정체성을 지닌 KBS에게 수신료 인상을 해 줄 수 없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이에 대한 대응 논리로 수신료 인상이 이뤄지면 광고 축소 또는 폐지가 가능하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수신료 인상 후 광고 축소·폐지 주장은 의미를 상실했다. 2010년 KBS 전체 매출에서 가장 큰 비중인 40.6퍼센트를 차지했던 광고 매출액은 2022년에 17.3퍼센트까지 떨어졌다. KBS 광고 매출의 급격한 하락이 역설적으로 KBS의 상업적 정체성 문제를 불식시키는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KBS의 상업적 정체성 문제는 오히려 다른 데서 불씨를 키우고 있다. 상업적 행위를 이유로 KBS2 채널 민영화를 주장하는 담론이 등장하는 것이다.

공영 방송은 상업적 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가? 그렇지 않다. 공영 방송 재원 구조는 국가마다 다르지만 공적 재원을 근간으로 하고 상업적 행위를 보조 재원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영국 BBC가 대표적이다. 공적 재원을 근간으로 하는 활동과 상업적 수익 활동을 명확히 분리하는 선에서 오히려 상업적 수익 활동의 성과를 장려한다. 공적 재원 기반의 활동이 다른 상업 활동 사업자와의 경쟁을 왜곡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공영 방송 광고 축소나 폐지 문제는 본질적으로 수신료 인상이나 반대 논리와는 관련 없는 사안이다. 오히려 다른 사업자와의 경쟁이나 이해관계 상충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맞다. 예를 들어 KBS 광고 축소나 폐지는 다른 방송 사업자나 신문 사업자의 광고 매출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KBS 광고 축소·폐지는 공영 방송 보조 재원 확보 수단으로써 KBS 상업 활동을 허용할 것인가, 허용한다면 어느 수준까지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판단의 문제일 뿐이다.

 

방만 경영 해소 담론


수신료 인상 이전에 공영 방송의 방만한 경영을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는 방만 경영 해소 담론은 ‘공영 방송 독립성과 공정성을 훼손하는 정권 친화적인 경영진’을 방만 경영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과도한 고위직 비중과 높은 인건비 비중을 해소하고 과도한 복리 후생을 축소하는 등 비용 절감 자구책이 필요하며, 그 후에 수신료 인상 같은 재원 확보 문제를 다룰 수 있다는 주장이다.

첫째, 방만 경영의 원인이 독립성과 공정성을 훼손하는 정권 친화적 경영진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방만한 경영의 사례로 제시되는 고위직 인력 구조, 과도한 인건비 비중과 복리 후생 문제는 경영진의 정파적 성향과는 별개의 사안이다. 정권 교체기마다 KBS 경영진도 따라 변동이 있었지만, 이른바 방만 경영의 문제가 해소된 적은 없다. 설령 공정하고 독립적인 경영진 선임과 감독 기구 구축이 이뤄진다 해도 방만 경영 문제는 여전히 상존한다. 이는 KBS에 요구되는 방만하고 추상적인 공적 책무와도 밀접하게 연계된다. 과도한 고위직 인력 구조나 인건비 비중 문제는 한국 공영 방송에 요구하는 공적 책무에 대한 근본적인 구조 조정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사안이다.

방만 경영의 문제를 경영진이나 거버넌스 문제와 연계하는 시각은 이를 상대 정파에 대한 정치적 공격의 소재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방만 경영 담론은 오히려 방만 경영 상태를 유지하고 존속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방만 경영 상황을 해소하라고 요구할 뿐 실질적으로 어떤 해법으로 그 문제를 해소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논의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되는 방만 경영 담론은 경영진이 바뀌면 자연스레 공수가 바뀌어 제기된다. 되돌이표처럼 문제를 제기하지만 실제는 방만 경영 상태를 만성화할 뿐이다.

둘째, 과도한 고위직 인력 구조와 인건비 비중 문제를 먼저 해소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고위직 인력과 인건비 비중 축소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수신료 재원 인상이나 공영 방송 제도 개선 논의를 위한 선결 조건일 필요는 없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수신료 재원 확보 문제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공영성의 수준을 결정하는 문제이며, 인력 구조나 인건비 비중 문제는 공영성의 수준에 따라 결정될 종속 변수다. 종속 변수를 독립 변수로 다룬다는 점에서 선 방만 경영 해소 담론은 선 수신료 인상 담론과 동일한 정치적 효과를 가져온다. 실질적 논의보다는 정치적 공방을 위한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론, 과도한 고위직 인력 구조 문제와 인건비 비중 과다 문제는 해소해야 한다. 이 문제는 비용 압박의 상수로 작용하며 실질 제작비 축소로 이어져 프로그램 경쟁력에 영향을 미친다. 아무도 인건비 문제 해소의 필요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KBS 내부에서도 경영 혁신의 최우선 과제로 인건비 문제 해소가 자주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이 문제를 선후의 관점에서 다뤄서는 안 된다. 질문을 바꿀 필요가 있다. 먼저 해소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로.

BBC의 방만 경영 해소

영국 BBC는 방만 경영 논란이 일 때마다 고위직 인력을 포함한 구조 조정을 단행하고 직급별 인원 제한과 임금 수준을 공개하는 행보로 논란에 대처했다. 이러한 BBC의 자구 노력과 경영 투명성 제고 활동은 국민들의 BBC에 대한 신뢰를 굳건히 하는 원동력 중 하나다. KBS가 그동안 인원 감축과 인건비 비중 축소를 위한 자구 노력을 일부 시행해 왔지만 근원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방만 경영을 둘러싼 담론 투쟁과는 별개로 KBS 내부의 뼈를 깎는 자성과 조치가 필요한 이유다.

셋째, 과도한 복리 후생을 축소하고 비용 절감 자구책 시행이 필요한가? 그렇지 않다. 과도한 복리 후생 축소와 비용 절감 자구책의 당위성은 인정되지만, KBS는 할 만큼 해왔고 현실적인 한계점에 도달했다. 지난 10여 년간 KBS 비용 절감을 위한 자구책 마련은 끊임없이 요구됐다. 자체 경영 평가에서도, 국회의 결산 심사 과정에서도 비용 절감 요구는 거의 매번 등장했다. KBS는 각 사업 단위 부문 예산을 일괄 축소하거나 유휴 재산을 처분하고, 복지 제도를 축소하는 등 자구 노력을 실시해 왔다. 단순히 외부의 요구 때문만은 아니다. 광고 매출 감소로 인한 경영 수지 악화가 내부로부터의 예산 긴축 압박으로도 작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구책 노력도 거의 한계에 이른 상황이다. 더 이상 인건비 부문 이외의 추가적인 비용 절감 방안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마른빨래를 쥐어짜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과도한 절감 압박은 프로그램 제작비 축소나 우수 인력 유출과 같은 경쟁력 약화 요인이 될 수 있다.

 

공영 방송 수신료 폐지 대세론


영국은 2028년 이후 BBC 수신료를 폐지할 예정이다. 프랑스는 2022년 이미 공영 방송 수신료를 폐지했다. 일본 NHK도 2020년 수신료를 인하했다. 공영 방송 수신료 폐지와 축소는 세계적 추세다.

외신을 인용해 국내 일부 언론들이 보도하는 해외 공영 방송 수신료 동향이다. 미디어 이용의 중심축이 전통적인 실시간 TV 시청에서 비실시간 주문형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로 옮겨 가는 상황에서 이제 수신료 기반의 전통적인 공영 방송 서비스는 정당성을 잃고 조종을 울릴 기세처럼 보인다.

과연 공영 방송 수신료 폐지와 축소는 세계적 추세인가? 그렇지 않다. 공영 방송 수신료를 둘러싼 해외 각국 고유의 논의 지형을 고려하지 않고, 수신료 폐지나 축소라는 현상만 자의적으로 인용하는 방식의 탈맥락적 보도는 오히려 세계적 추세를 가리는 효과를 가져온다. 팩트 체크가 필요한 까닭이다.

총선 결과가 변수, 영국  BBC

영국은 2028년 이후 BBC 수신료를 폐지하는가? 그렇지 않다. 현 보수당 정부 기조가 기존 수신료 징수 모델을 폐지하고 새로운 대안적 재원 모델을 모색하는 입장인 것은 사실이다.

보수당 정부는 이미 2015년에도 BBC의 법적 의무와 권한을 명시하는 법률과 같은 성격을 지닌 칙허장을 갱신하는 과정에서 수신료 제도 현대화라는 의제를 검토했다. 수신료 모델 대안으로 구독료 모델, 광고 수익 모델, 소득세 모델 등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보도처럼 BBC 수신료 폐지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우선 2028년부터 적용될 새로운 BBC 칙허장은 2024년 총선에서 승리한 집권당과 BBC 간의 협상을 통해 결정된다. 총선 결과가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한편, BBC 칙허장과 협약 갱신은 집권당의 일방적인 정책 결정으로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이 과정에는 영국 특유의 타협적 정치 문화가 작동한다. 칙허장 갱신은 협약의 주체인 BBC와 정부(문화매체체육부), 그뿐만 아니라 상원과 하원, 시민단체, 사업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 사이의 논쟁과 타협, 조정을 통해서 이뤄진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BBC 수신료 제도와 관련하여 어떤 정책 결정도 내려진 것이 없다고 봐야 한다.

다른 재원을 모색하는, 프랑스 FTV

프랑스는 2022년 공영 방송 수신료를 폐지했는가? 사실이다. 이전까지 프랑스 공영 방송 수신료는 TV 수상기 보유 가구에 부과하는 조세(가구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실제 징수도 조세 당국이 주민세와 통합해 부과해
왔다. 그러나 2022년 조세 성격의 수신료를 폐지했다.

이제 프랑스 공영 방송 재원은 사라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 2025년까지 새로운 자금 조달 계획을 마련할 예정이다. 그때까지는 한시적으로 부가 가치세 수입 중에서 기존 수신료 총액 규모만큼을 전용해서 사용한다.

이러한 프랑스 공영 방송 수신료 폐지 결정 이면에는 공영 방송 독립성과 거버넌스 논란[5], 방만 경영 논란, 일부 정치권의 민영화 주장 등 복잡한 정치 맥락 속에서 프랑스 정부의 선제 대응이 자리하고 있다. 프랑스가 공영 방송 수신료를 폐지하고 다른 재원을 모색하는 것을 두고 단순히 공영 방송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오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때그때 바뀌는, 일본 NHK

일본 NHK는 수신료를 인하했는가? 사실이다. NHK는 2020년 10월 기존 수신료에서 2.5퍼센트를 인하했고, 2023년 10월 이후에 다시 10퍼센트를 인하한다.[6]

그러나 NHK 수신료 인하는 공영 방송 수신료 제도 폐지나 개혁 논쟁과는 상관이 없는 사안이다. NHK 수신료 산정은 총괄 원가 방식으로 이뤄진다. 예상되는 총지출 경비를 산정하고 그에 맞춰 수입(수신료 수입+이월 금액) 규모를 설계하는 방식이다. 적자가 나면 수신료를 인상할 수 있고, 반대로 흑자가 나면 수신료를 인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작용한다.

실제로 2020년에는 흑자로 인해 이월금 규모가 커지면서 총무성과 자민당이 수신료 인하를 요구했고 NHK는 2.5퍼센트를 인하했다. 2023년에는 위성 2개 채널을 1개 채널로 통합[7]하는 방식의 경비 절감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반영하여 수신료 인하를 결정한 것이다.

이처럼 해외 각국의 공영 방송은 서로 다른 제도적 맥락에서 서로 다른 재원 모델을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수신료 폐지나 규모 축소를 단순하게 공영 방송 정당성의 탈각이나 민영화 추진으로 생각하는 것은 특정 목적에 따른 자의적 해석에 그칠 뿐이다.
[1]
여기서 공영 방송이 실제로 상업 방송과 다른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고 있는가는 별도의 문제이다. 정말 차별성도 없고 더 이상 필요성이 없다고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다면 공영 방송 제도 자체를 없애도 된다. 실제로 미국은 국가 단위 차원의 기간 공영 방송이 없는 대표적인 국가다.
[2]
헌법재판소, 2008. 2. 28. 선고 2006헌바70 결정.
[3]
통계청 ‘2022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공동 주택의 거주 비율은 79퍼센트에 달한다. 현실적으로 현재 TV 수상기 등록이나 징수 업무는 공동 주택 관리 사무소와 징수 대행 기관인 한전 사이에서 처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이 인지하기 어렵다.
[4]
수신료 납부 가구 수의 증가가 수신료 총액 증가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5]
프랑스 공영 방송은 정부 소유 방송사 형태로 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는 거버넌스 구조를 지니고 있다.
[6]
2023년 10월 이후 인하한 월 수신료 금액은 지상파 계약은 1100엔, 위성 계약은 1590엔이다.
[7]
2023년 12월부터 위성채널인 BS1과 BS프리미엄을 통합해 NHK BS로 방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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