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 자본주의
3화

죽은 노동의 사회 ; 플랫폼과 지대

오, 플랫폼, 나의 알고리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사고 실험을 제시한다. 유명한 장면은 학생들을 교실 밖으로 데리고 나와 일렬로 원을 그리며 걷기 수업을 시키는 대목이다. 처음에는 각기 다른 보폭과 리듬으로 걷던 학생들은 어느 순간부터 일정한 속도로 발맞춰 걷기 시작한다. 한 학생이 손뼉을 치자 모두가 최면에 걸린 듯 따라서 손뼉 치며 걷는다. 제각각이던 학생들의 발걸음이 군대 제식 행진이 되어 버리자, 키팅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멈춰 세우고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인용한다. ‘숲 속의 두 갈래 길에서 나는 사람들이 덜 간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이어지는 그의 가르침은 ‘자신만의 보폭과 속도로 걸으며, 그것이 자랑스럽든 바보 같든 자신의 발걸음으로 걸어라.’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실존주의적인 주체 형성을 지지하는 영화다. 키팅 선생이 학생들을 일으켜 책상 위에 올라서게 한 다음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라, 어떤 사실을 안다고 생각할 땐 다른 시각에서 봐라’라고 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에 따르면 의식의 지향성은 공동체를 지향하지만, 획일화를 기각하는 자유, 즉 주체성의 이행이라는 소실점을 향하며 이 과정에서 실존은 인간이라는 상황이 된다. 의식은 공동체를 지향하지만 동시에 모두를 획일화하려는 경향에서 벗어나려는 자유를 향한다. 이때에야 인간은 자신만의 실존을 획득한다. 뭔가를 본다는 것, 주체의 응시란 곧 타자의 시선과의 불일치 속에서 어떤 실존적 쟁투를 발생시키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진정한 자아(다시 말해 영구 혁명의 과정에 진입하는, 반항하는 고유한 개인)가 상황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면서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선택하는 불환원성으로 현상된다. “미래는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이 현상을 초월해 이뤄 나가는 자기 자신의 투기에 불과하다. 인간은 하나의 상황일 따름이다. 상황은 다원적 결정성을 갖고 있으며, 인간이 상황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한 상황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1]

인간의 실존적 상황은 결핍을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현재의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본질적으로 주어진 조건을 거부하고, 바깥으로(대상의 세계로) 스스로를 던지는 인간이 타인·공동체와 관계를 맺는다. 타자는 나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 나가는 또 다른 실존으로, 이들은 서로의 시선을 주고받거나 대화를 주고받으며 양립을 추구하는 존재다. 이 때문에 실존에서 나(주체)는 단수형인 동시에 복수형이다.

오늘날 플랫폼과 알고리즘의 가장 큰 문제는 ‘움직일 수 없는 본질’처럼 여겨지는 소통 기계들의 네트워크가 바로 이 실존의 조건들 속에 침투해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타자를 본다. 몸 바깥쪽을 향해 제스처를 내보내고, 대화를 건넨다. 플랫폼들이 운영하는 알고리즘은 우리의 실존적 조건을 완성하는 시선과 발화를 통제함으로써, 대타 존재(代打存在·l'être-pour-autrui)를 완전히 물화시킨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물적 관계는 우리의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실존의 가능성을 고정불변의 본질로 소구시켜, 우리를 수치스러운 존재(물화된 존재)로 만든다. 우리가 좋아한다(like)고 말하는 ‘친구(friend)’들은 누구이며,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아는가(you may know)? 왜 그들을 따르거나(follow), 그들의 소식을 구독(subscribe)하는가? 우리가 오늘날 플랫폼과 알고리즘을 투과하며 맺는 사회적 관계는 실존에서 본질(자본주의)로 퇴행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알고리즘이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그 실존의 토대가 되는 물적 조건을 먼저 장악해야만 한다. 즉 우리가 보고, 말하고, 듣고, 느끼는 활동들의 경로를 결정하는 가장 원초적인 밑바닥, 다시 말해 노동의 조건과 프로세스를 가장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바꿔 놔야 한다는 뜻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물화된 사회적 관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인간을 실존으로부터 소외시킨다. 하나는 ‘자유로운 의식적 활동’으로서 물질적 조건을 변화시키는 인간 노동이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는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감성적 외부 세계(자연과 사물을 포함한 타자의 실존)가 자신의 육체를 보존할 뿐인 수단으로 사용되는 측면이다.[2] 이처럼 역전된 관계를 두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흡혈귀에 비유하며, “자본은 죽은 노동이며, 이 노동은 오직 흡혈귀처럼 산 노동을 흡수함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다”고 적는다.[3]

산 노동은 노동자의 육체적·정신적 활동에 의해 실질적으로 행해지는 노동으로, 가치를 생성하는 근원이다. 반면 죽은 노동은 기계류·시스템 등 생산 수단에 해당하는 것으로 가치를 이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죽은 노동은 무엇보다 시스템을 만든다. 인간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임금 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사적 소유)을 만들고, 이후에는 시스템이 운영되는 방식(분업, 교환, 축적)을 사회 전체에 퍼뜨린다. 알고리즘 자본주의는 요컨대 ‘죽은 시인(실존)’의 사회를 ‘죽은 노동(기계류와 생산 수단)’의 사회로 전화시키고자 하는 새로운 기획이다. 알고리즘은 이전에는 여전히 산 노동에 속해 있던 인간의 시선, 그리고 친구와 공동체를 만들고자 교류하는 방식(커뮤니케이션)을 식민화하는 기계, 새로운 죽은 노동의 출현을 야기한다. 지금까지 전혀 보지 못한 형식의 죽은 노동을 자아내는 이 새로운 기계는 인간의 현시와 소통을 대량으로 증대하고 실존을 이루는 다양한 조건들을 상품적 가치로 인수분해해, 자본주의 축적의 네트워크로 편류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기계를 단순히 만들어 내는 것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기계를 만들어 내고, 그 기계들이 효율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체계인 공장을 만들어야 실질적으로 가치를 이전시키는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계 자체가 아니라 기계의 도입을 통해 자본가-노동자 간 비등가 교환의 관계, 다시 말해 생산 관계를 만들어 내야만 자본주의는 팽창할 수 있다. 19세기 기계와 산업 공장이 산 노동이 만들어 낸 가치를 기업과 부자로 이전시키고자 그 기능을 배치했듯이, 21세기에도 알고리즘을 적절히 배치해 가치를 체계적으로 이전시키는 장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계류는 곧 사회적 관계이다. 알고리즘은 21세기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다. 자본주의 사회적 관계는 노동이 만들어 낸 가치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게 아닌 자본가 쪽으로 최대한 밀어 넣는 관계다. 이 비등가 교환은 19세기와 20세기에는 공장에서 이뤄졌고, 공장의 가치 이전 체계가 곧 사회 체계가 됐다.

그렇다면 21세기 빅테크 자본이 알고리즘으로 가치를 이전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체계와 공간은 무엇이 될까? 공장과 노동자, 그리고 그들을 매개하는 임금은 구시대의 산물일 뿐이다. 알고리즘이 필요로 하는 건 무엇보다 플랫폼이다. 수많은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고 수많은 문화적 소비·창조가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교차하는 장, 그리고 그 무수한 방점들 사이에서 가치들을 보이지 않게 이전시키는 시스템, 플랫폼은 알고리즘이 가장 효과적으로 기능하도록 만들어 주는 장이다. 따라서 플랫폼과 알고리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유기체적 연결이면서, 산 노동과 죽은 노동이 이전의 공장 사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립하는 전선이라 할 수 있다.

 

플랫폼의 다섯 왕국


플랫폼은 일상적인 용어다. 우리는 숨을 쉬듯 끊임없이 플랫폼과 접촉한다. 그러나 각 플랫폼이 제공하는 서비스와 그 안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형식은 제각각이며 그에 따라 알고리즘의 세부적인 기능도 조금씩 달라진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플랫폼이 과거 공장이 수행하던 역할을 일부 재구성하긴 했지만 ‘공장’은 아니라는 점이다. 알고리즘이 단순히 ‘생산 수단’이 아님을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왜냐하면 알고리즘과 플랫폼이 산 노동과 매개되는 방식은 임금이 아니라 지대에 더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공장의 의미를 사전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생산 과정과 산 노동을 조직·통제하는 시스템이라는 광의의 의미로 보자면, 플랫폼-알고리즘은 시공간을 초월해 노동과 기계 및 인프라를 지휘하는 기관이자 원리로 봐야 한다.[4] 플랫폼은 시스템이긴 하지만 디지털 공장이 아니고, 알고리즘은 기계이긴 하지만 말 그대로 추상 기계 또는 문화 기계이지 생산 수단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플랫폼은 산 노동을 죽은 노동으로 만드는 물리적 층위인 공장과 기계의 시공간을 초월하고자 고안된 영혼의 인프라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플랫폼들이 있는가? 각 플랫폼에서 행해지는 노동과정의 형태와 내용을 중심으로 보자면, 크게 다섯 가지 형태의 플랫폼이 있다. ①태스크 플랫폼(배달, 모빌리티, 돌봄, 클리닝)은 기존에 이미 주변부에 있었던 서비스 노동을 디지털화된 방식으로 외주화하며, 배달의민족·쿠팡이츠·우버·딜리버루·그랩·숨고·핸디 등의 플랫폼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②이커머스 플랫폼(물류, 유통, 배송, 스마트 결제)은 상품 구매와 배송을 통해 기존의 마케팅·유통· 물류와 관련된 이른바 제어 영역에서 노동 착취를 가속화하는 플랫폼으로, 여기에는 아마존·이베이·쿠팡·무신사·네이버쇼핑·카카오커머스 등이 포함된다. ③콘텐츠 플랫폼(웹 기반 콘텐츠 서비스)은 기존의 문화 산업에 해당하는 문화 콘텐츠 제작 및 서비스, 유통과 관련된 플랫폼으로 OTT, 음원, 웹툰, 웹소설 서비스 등이 여기에 포함되며 창작·예술 활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④생산성 플랫폼(클라우드, 소프트웨어, 운영 체제, 애플리케이션)은 우리의 사회적 삶에 필수적인 생산성 서비스 및 디지털 인프라 접근에 대한 독점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강요하는데 구글 드라이브, MS 원드라이브, 각종 오피스 프로그램, 애플 클라우드, 그 외 구독료 서비스로 전환한 시각·디자인·영상 편집·문서 작성 소프트웨어 및 애플리케이션을 관리하는 플랫폼들이 핵심이다. ⑤커뮤니케이션 플랫폼(유튜브, 소셜 미디어, 1인 방송)은 개인의 문화적 취향과 일상을 연결하고 사회·정치적 발화 및 담론 형성의 기능을 맡으며, 소비와 관련된 기호·소통을 사회 관계망에 전달해 광고 수수료 기반 수익을 쌓는다. 마지막으로 구글의 검색 엔진과 애드센스(광고 매칭 알고리즘), 각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 등)에 탑재된 추천 광고 알고리즘은 그 자체가 하나의 플랫폼이자 알고리즘이면서 플랫폼들 사이의 경제적 흐름을 촉진하는 기술 장치로 기능한다.

이들 다섯 플랫폼 왕국은 단순히 ‘디지털 노동 중개’만 하지 않는다. 플랫폼-알고리즘은 무엇보다 해당 영역에서 제공하는 가치의 변환 과정, 즉 산 노동의 프로세스와 그로 인한 사회적 배치 자체, 실존의 조건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플랫폼에서 행해지는 모든 노동과정은 우리가 이전에 알던 고용 형태를 해체해 삶을 ‘불안정성(precarity)’의 영역으로 몰아넣는다. 플랫폼-알고리즘 안에서는 아홉 시에 출근해 일곱 시에 퇴근하고, 달마다 월급을 받고 퇴직금과 보험을 적용받는 고용 형태가 사라진다. 사실 이런 경향은 이미 사이버네틱스의 사회적 도입에 따라 진행되는 중이었다.
스페인의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Manuel Castells)에 따르면, 지구적 규모의 정보 기술 혁신과 컴퓨팅의 도입에 따른 정보주의(informationalism)는 자본, 노동 및 생산 환경, 사회 시스템, 권력 등 기존 사회의 물적 토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데, 그 핵심은 고용과 일자리 구조의 패러다임 전환에 있다. 특히 네트 노동자(networker), 실업(jobless), 유연 시간 노동(flex-timers)의 증대가 두드러지며, 기존 자본주의 작업장의 노동과정이 기술과 관계 맺는 방식 자체를 전면적으로 변화시켜 사회 전체의 재조직화로 이어진다.[5] 노동과정, 노동 형태와 내용뿐 아니라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적 회로도가 크게 변하는 것이다. 물리적인 자동화 기계류가 집적된 공장에 노동자를 대량으로 고용하는 시대에서, 비물리적인 자동화 기계류로 디지털적 자연을 만들어 놓고, 자율적으로 경작하는 작업자들로부터 세금을 받는 시대로 진입했다. 이제 외주, 하청, 프리랜스가 이 시대의 기본적인 인간 노동의 조건이다.

플랫폼-알고리즘은 여기에 접속된 사람들의 일상을 재조직해 하나의 수행성을 만들어 내며, 인간 삶 활동은 데이터의 교환이나 알고리즘의 기능, 앱과 스크린에 표시되는 위치와 경로, 역할 등으로 환원된다.[6] 상징적이고 수행적인 인간 능력들은 이제 신호나 기계 작동 등으로 흡수되는데, 이 프로세스는 철저히 초과 이익을 발생시키는 노동 행위성으로 짜인다. ‘좋아요’와 ‘구독’을 위해 만들어진 제스처와 발화, 리액션을 유발하기 위한 이모티콘과 후원금, 더 빠른 배달을 위해 혹은 페널티를 부과받지 않기 위해 신호를 무시하는 배달 라이더, 높은 평점을 위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식업자와 서비스를 위해 평점을 매기는 이용자 등이 이런 행위성의 자장 안에 포섭된다.

임금 노동이 기존의 기계류와 공장 시스템 가치의 출발점이었다면, 플랫폼-알고리즘은 외주화되고 탈숙련화된 ‘비임금’ 노동, 즉 불안정 노동을 가치의 재료로 삼는다. 배달 노동자, 물류 노동자, 돌봄 노동자, 일용 서비스 노동자, 자영업자 모두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태스크 플랫폼과 이커머스 플랫폼은 이들과 이용자를 초과 연결하고, 새로운 물류 관리· 유통·결제 시스템을 도입해 평판 관리와 서비스 평가 등 기존의 기업에서 수행되던 관리 영역을 ‘소비 패턴’, ‘소비 문화’와 결부해 규모의 경제를 만든다. 플랫폼과 빅테크는 건마다 매칭 수수료를 뜯어가는 방식으로 수익을 챙긴다.

주목할 것은 그 과정에서 엄연히 노동인 활동을 ‘긱’, ‘과업’, ‘승차’, ‘부업’, ‘인간 지능 작업’, ‘호의’ 같은 용어로 포장하는 데 있다.[7] 그로써 우리는 노동하는 주체가 아니라 ‘공유’, ‘협력’, ‘호의’ 등을 제공하는 개인 사업자나 파트너 등으로 변형된다. 노동의 대가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책임을 지는 존재로 교묘히 호명되는 것이다.

영국의 영화감독 켄 로치의 사회적 리얼리즘 영화 〈미안해요, 리키〉는 이를 두고 매우 정확한 용어를 제공한다. 플랫폼 사업자들은 노동자들을 고용(employ)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노동자들이 사업 공동체이며, 노동자들은 여기에 승차한다(on board)라고 표현한다. 택배 플랫폼에 ‘승차한’ 주인공 리키는 물류, 운송, 배달까지 엄청난 강도의 노동을 수행하지만, 그는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라 ‘승차했기’ 때문에 모든 리스크를 혼자 감당한다, 운송 차량은 비싼 돈을 주고 직접 준비해야 하며, 다쳤을 때 보험을 제공받지 못하고, 업무용 기기를 파손하는 바람에 엄청난 손해 배상까지 문다. ‘승차’란 결국 노동자들에게는 비싼 티켓값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플랫폼 입장에서는 무임승차다. 노동과정에서 동반되는 육체적·정신적 위험, 각종 사고나 재해 등은 플랫폼 책임이 아니다. 플랫폼은 이처럼 교묘한 수사학을 동원해 ‘노동하는 주체라는 환각’을 심어 주고 장막 뒤에서는 온갖 방식으로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긴다.

이러한 환각은 콘텐츠 플랫폼, 생산성 플랫폼,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에서는 특별히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태스크· 이커머스 플랫폼이 과업(task)과 제어(control)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콘텐츠·생산성·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의 핵심적인 기능은 문화의 창조(creation)와 영향력(influence)의 행사이다. 플랫폼-알고리즘의 그물망은 사실 후자에 훨씬 광범위하게, 촘촘히 퍼져 있다. 태스크·이커머스 플랫폼이 야기하는 사회적 문제는 비록 그 영향력이 막강하고 문제가 전혀 개선되고 있진 않더라도 미디어를 통해 어느 정도 널리 알려져 있다. 매일같이 물류 노동자들의 과로사와 배달 라이더의 사고사가 보도되고 있어 이들 서비스직 노동자들을 경계로 내몰고 사회 안전망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도록 만드는 방식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형성된 상태다. 관련된 연구도 비교적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문화 창조 및 영향에 관한 플랫폼-알고리즘의 착취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방송·영화·만화·음악 등 문화 산업 영역에서 행해지던 창의 노동을 포함해, ‘크리에이터’ 또는 ‘인플루언서’ 등 전에 없이 새롭게 대두된 노동 영역도 플랫폼과 알고리즘에 엄청난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수행되는 노동과정에 대한 이해는 극도로 부족한 상태다. 우리가 주로 접하는 것은 100만 유튜버의 성공 신화, 넷플릭스 진출에 성공한 웹툰 등 현실을 애써 긍정하는 소식들뿐이기 때문이다.

영상 클립을 제작·편집하거나, 1인 방송을 운영하거나,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거나 음식을 먹고 명품 옷과 셀피를 제작하는 활동은 이윤 추구 활동으로는 인식되더라도 그 과정이 노동으로 인식되지는 않는다. 노동의 결과물이 문화 창조 또는 예술의 생산, 미적 재현 등 창의성과 연결되는 경우, 그 자아실현적이고 심미적인 성격 때문에 ‘좋은 노동’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다반사다.[8] 이는 자연스럽게 열정 페이 및 자기 착취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이어진다. 창의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노동과정을 통제하는 자율적인 주체라고 여기지만, 사실상 여기에는 노동 소외와 노동 지배의 현실이 숨어 있다.[9] 현실적으로는 창의적인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 중 극소수만 자율성과 소유권을 누리며, 대부분이 임금 노동자들보다 더 나쁜 조건에서 생활하면서도 이를 자기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착취를 내면화한다. 이는 OTT나 음원 등 새로운 플랫폼 기반 문화 콘텐츠 서비스 국면에서 더욱 강화되며, 각국의 문화 산업을 지구적인 네트워크 환경 규모에서 재편한다.

특히 유튜브, 소셜 미디어 등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에서 이윤 활동을 하는 크리에이터·인플루언서·프리랜서들은 더 큰 구속에 직면한다. 먼저 이들은 자신의 노동 결과물을 경제적 이익으로 연결하기 위해 영상 및 이미지 편집·디자인·문서·클라우드·운영 체계 등 생산성 플랫폼을 사용하면서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정동·친밀성을 자본화하면서도 스스로를 ‘생산자’로 위치시킴으로써[10] 주체라는 환각 효과를 더욱 강하게 내면화한다. 이런 의미에서 플랫폼과 알고리즘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는 ‘정동 경제’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11]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의 경우 알고리즘에 의해 창의 노동, 자아실현, 자율성, 그리고 정동에 이르기까지 다중 사이의 가장 복잡하고 내밀한 영역까지 노동으로 전화시키고, 초연결을 이룬다는 점에서 다른 플랫폼들과 차별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지대 : 디지털 지주와 소작농, 혹은 건물주와 세입자


플랫폼의 다섯 왕국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형식과 노동의 내용은 제각각이지만, 그 비즈니스 모델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모든 플랫폼이 지대 형식으로 부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태스크 플랫폼과 이커머스 플랫폼의 경우 매칭 수수료를 기반으로, 그리고 콘텐츠 플랫폼과 생산성 플랫폼은 구독료를 기반으로 부가 집적된다. 광고는 이들 네 플랫폼에서 부수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요소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우리 삶에 가장 광범위하게 침투해 있는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으로, 그 매출은 절대적으로 광고 수수료에 의존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을 지배하는 경제 논리는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다. 사르트르가 강조했던 주체의 타자를 향하는 시선, 대타 존재의 현시는 여기서 가장 경제적인 것으로 바뀐다. 물화된 주목, 그 안을 흐르는 광고 기반 수익의 비대칭성은 타자에게 건네는 대화와 응시를 상품 교환의 로직으로 용도 변경한다.

그렇다면 왜 지대(rent)일까? 지대는 사르트르의 작품 《구토》에 등장하는 주인공, 로캉탱이 자기 존재의 무상함을 깨닫고 타인을 마주할 때마다 구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른 살에 불과하지만 이자 생활을 하며 놀고먹는 로캉탱은 노동하지도 않고, 근면이나 인생의 목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삶에 억류된 인간이다. 타자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며, 모험과 갈등이 사라진 인간, 로캉탱은 구토증으로부터 공허와 자기혐오를 느끼지만 자진해서 노동이 있는 삶으로 걸어 들어가지는 않는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모두가 로캉탱이 되기를 염원하고, 그 삶이 가져오게 될 존재의 무에 대해서는 일말의 울렁증도 느끼지 않는 사회이다. 다들 건물주나 주식 부자가 되어 빨리 현실의 노동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21세기의 지대는 실존에 관한 물음이 아니라 임금과 노동의 한계를 넘어선 생존이 가능하냐에 관한 즉물적인 질문이 돼버렸다.

재벌가에서 태어나거나 투기로 대박이 나지 않는 이상 이런 꿈을 실현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빅테크가 운영하는 플랫폼은 대중들이 창조한 사회적 생산력을 무상으로 활용해 검색 엔진·알고리즘을 만들고, 독점적인 서비스를 운용하며 광고 수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12] 21세기 디지털 지주나 건물주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초연결 기술은 네트워크에 더 많은 대중이 몰려들도록 만들고, 그에 따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사회적 생산력을 사적으로 점유해 수수료로 돈을 번다. 임금을 주고 노동력을 착취해 잉여를 만들어 내는 자본주의와 달리, 강탈(dispossession)을 통해 축적을 하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이는 더 이상 값싸고 많은 자원·노동력을 대량으로 동원할 수 없게 된 자본이, 고용도 상품 생산도 없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다중의 삶 활동에 올라타(on board)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는 국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설명하듯이, 지대와 이윤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지대는 자연력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데서 나오는 초과 수익인 반면, 이윤은 노동력과 생산 수단을 통해 만들어진 상품과 그 판매로로부터 나온 초과 수익으로 이뤄진다. 이윤은 노동력을 착취해서 잉여가치를 뽑아내지만, 지대는 자연력에 의해 고유하게 주어진 희소가치를 독점한 결과 얻어지는 불로 소득이다. 토지와 건물 등의 소유는 소유주에게 독점력을 안겨 주는데, 시장에서는 같은 상품을 두고 다른 생산자들이 경쟁할 수 있는 반면, 토지나 건물은 배타적인 점유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은 터빈이나 동력 기술을 도입해 수력을 더 뽑아낼 수는 있겠지만 수력 그 자체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따라서 수력의 이용으로부터 발생하는 초과 수익은 자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력을 자본이 독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나오며, 이 초과 수익은 지대로 전화한다.[13] 마르크스가 정확히 봤듯이, 지대는 실질적으로 아무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대상화된 노동이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 자연력 자체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지만, 자연력의 가격을 상품 가격에 멋대로 포함하는 것[14]이 지대의 독특한 성격이다.

그런데 유튜브·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 커뮤니케이션 플랫폼뿐 아니라 넷플릭스·디즈니 플러스·애플TV 등 콘텐츠 플랫폼, MS와 애플의 생산성 애플리케이션, 구독료, 검색 엔진, 심지어는 광고를 매칭시켜 주는 알고리즘까지 빅테크 자본은 ‘희소가치를 가진 디지털 자연’을 스스로 창조해 냈다. 플랫폼-알고리즘은 우리가 살아 있음 자체가 곧 데이터와 정보가 되는 인터넷에 숨어들어 삶 자체를 교환 가치로 만들고 그것들을 배타적으로 소유해 지대로 부를 긁어모은다. 우리가 사회적 삶을 살기 위해 페이스북과 유튜브의 사용을 피할 수 있을까? 그것들 사이에 촘촘히 자리 잡은 광고들을 피해 다닐 수 있을까? 플랫폼-알고리즘은 이제 하나의 거대한 지대의 신경망이 되었다.

구글이 직접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21년 구글은 한화로 약 348조 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중 순이익만 102조 원에 달한다. 페이스북-메타는 2021년 매출 159조 원, 순이익 53조 원을 기록했다. 닉 서르닉이 주장하듯 주요 플랫폼 기업들의 수익의 9할은 광고 수익에 의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광고 기반의 플랫폼 환경은 네트워크 효과를 스스로 생산하도록 필연적으로 자동화 알고리즘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 데이터는 저수익 상품을 고수익 서비스로 전환하고, 데이터 분석은 그 자체로 데이터 생산을 촉진하며 서로는 서로를 더욱 강화한다. 플랫폼 서비스 → 이용자 삶 활동 데이터 분석 → 알고리즘 개선 및 데이터 상품화 → 향상된 플랫폼 서비스 → 이용자 삶 활동 데이터 분석……. 이 무한 반복 속에서 플랫폼은 독점 지대의 성격을 더 강화하고, 자본은 마치 소작농로부터 공물을 받는 지주 혹은 세입자 월세를 받아 생활하는 건물주인 현대의 로캉탱으로 전화한다.

로캉탱은 구토라도 하며 무위도식하는 삶의 공허를 토로했지만, 구글, 네이버, 아마존 같은 기업들의 탐욕스러운 위장에서 역류해서 나오는 것들은 존재의 토사물이 아니라 타인의 삶과 노동을 더 교묘하게 수탈하는 알고리즘들이다. 플랫폼-알고리즘의 신경망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토대가 되어, 산 노동이 아닌 죽은 노동을 통해 사회를 바꾼다. 이전의 자본주의는 노동이 곧 임금·일자리와 연결돼 있었으므로, 죽은 노동의 비중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공황을 야기하곤 했다. 1929년의 대공황, 1972년의 오일 쇼크, 2008년 서브프라임과 2010년 유럽발 금융 위기 등은 죽은 노동의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보여 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임금·일자리의 양가성을 깨달은 자본주의는, 플랫폼과 알고리즘을 도입해 상쇄 요인을 만들어 낸다. 죽은 노동의 사회가 된 플랫폼-알고리즘은 무엇보다 노동을 둘러싼 현상학적 실존과 물질적 실존을 소거해 버렸다. “오 플랫폼, 나의 알고리즘이여! 나는 자유롭게 강탈하기 위해 플랫폼에 왔다. 삶의 데이터를 들이마시고 싶다. 노동이 아닌 것을 모두 떨치고, 알고리즘이 아닌 길은 가지 않겠다!”
[1]
장 폴 사르트르(왕사영譯),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청아출판사, 1989, 96-97쪽.
[2]
카를 마르크스(김문현譯), 《경제학·철학 초고/자본론/공산당선언/철학의 빈곤》, 동서문화사, 2008, 67쪽.
[3]
카를 마르크스(강신준譯), 《자본 1-1》, 길, 2008, 332쪽.
[4]
모리츠 알텐리츠(권오성·오민규譯), 《디지털 팩토리》, 숨쉬는 책공장, 2023, 23쪽.
[5]
마누엘 카스텔(김묵한·박행웅·오은주譯),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 한울아카데미, 2014, 216쪽.
[6]
김상민, 〈플랫폼 위에 놓인 자본주의 이후의 삶〉, 《문화/과학》, 87, 2016, 137쪽.
[7]
제레미아스 아담스-프라슬(이영주譯), 《플랫폼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숨쉬는 책공장, 2020, 92쪽.
[8]
데이비드 헤스몬달프·사라 베이커(안채린譯), 《창의노동과 미디어산업》,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1.
[9]
데이비드 헤스몬달프, 사라 베이커(안채린譯), 《창의노동과 미디어산업》,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1, 133쪽.
[10]
김예란, 〈플랫폼 생산자의 일상성: 일상 브이로거의 삶과 노동〉, 《한국언론정보학보》, 101호, 2020, 153-199쪽.
[11]
이항우, 〈구글의 정동 경제: 사용자 정동의 동원과 전용〉, 《경제와 사회》, 102, 2014, 208-236쪽.
[12]
강남훈, 〈정보혁명과 자본주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7(2), 2010, 55-57쪽.
[13]
카를 마르크스(강신준譯), 《자본 III-2》, 길, 2010, 879쪽.
[14]
카를 마르크스(강신준譯), 《자본 III-2》, 길, 2010, 8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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