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Manuel Castells)에 따르면, 지구적 규모의 정보 기술 혁신과 컴퓨팅의 도입에 따른 정보주의(informationalism)는 자본, 노동 및 생산 환경, 사회 시스템, 권력 등 기존 사회의 물적 토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데, 그 핵심은 고용과 일자리 구조의 패러다임 전환에 있다. 특히 네트 노동자(networker), 실업(jobless), 유연 시간 노동(flex-timers)의 증대가 두드러지며, 기존 자본주의 작업장의 노동과정이 기술과 관계 맺는 방식 자체를 전면적으로 변화시켜 사회 전체의 재조직화로 이어진다.[5] 노동과정, 노동 형태와 내용뿐 아니라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적 회로도가 크게 변하는 것이다. 물리적인 자동화 기계류가 집적된 공장에 노동자를 대량으로 고용하는 시대에서, 비물리적인 자동화 기계류로 디지털적 자연을 만들어 놓고, 자율적으로 경작하는 작업자들로부터 세금을 받는 시대로 진입했다. 이제 외주, 하청, 프리랜스가 이 시대의 기본적인 인간 노동의 조건이다.
플랫폼-알고리즘은 여기에 접속된 사람들의 일상을 재조직해 하나의 수행성을 만들어 내며, 인간 삶 활동은 데이터의 교환이나 알고리즘의 기능, 앱과 스크린에 표시되는 위치와 경로, 역할 등으로 환원된다.[6] 상징적이고 수행적인 인간 능력들은 이제 신호나 기계 작동 등으로 흡수되는데, 이 프로세스는 철저히 초과 이익을 발생시키는 노동 행위성으로 짜인다. ‘좋아요’와 ‘구독’을 위해 만들어진 제스처와 발화, 리액션을 유발하기 위한 이모티콘과 후원금, 더 빠른 배달을 위해 혹은 페널티를 부과받지 않기 위해 신호를 무시하는 배달 라이더, 높은 평점을 위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식업자와 서비스를 위해 평점을 매기는 이용자 등이 이런 행위성의 자장 안에 포섭된다.
임금 노동이 기존의 기계류와 공장 시스템 가치의 출발점이었다면, 플랫폼-알고리즘은 외주화되고 탈숙련화된 ‘비임금’ 노동, 즉 불안정 노동을 가치의 재료로 삼는다. 배달 노동자, 물류 노동자, 돌봄 노동자, 일용 서비스 노동자, 자영업자 모두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태스크 플랫폼과 이커머스 플랫폼은 이들과 이용자를 초과 연결하고, 새로운 물류 관리· 유통·결제 시스템을 도입해 평판 관리와 서비스 평가 등 기존의 기업에서 수행되던 관리 영역을 ‘소비 패턴’, ‘소비 문화’와 결부해 규모의 경제를 만든다. 플랫폼과 빅테크는 건마다 매칭 수수료를 뜯어가는 방식으로 수익을 챙긴다.
주목할 것은 그 과정에서 엄연히 노동인 활동을 ‘긱’, ‘과업’, ‘승차’, ‘부업’, ‘인간 지능 작업’, ‘호의’ 같은 용어로 포장하는 데 있다.[7] 그로써 우리는 노동하는 주체가 아니라 ‘공유’, ‘협력’, ‘호의’ 등을 제공하는 개인 사업자나 파트너 등으로 변형된다. 노동의 대가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책임을 지는 존재로 교묘히 호명되는 것이다.
영국의 영화감독 켄 로치의 사회적 리얼리즘 영화 〈미안해요, 리키〉는 이를 두고 매우 정확한 용어를 제공한다. 플랫폼 사업자들은 노동자들을 고용(employ)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노동자들이 사업 공동체이며, 노동자들은 여기에 승차한다(on board)라고 표현한다. 택배 플랫폼에 ‘승차한’ 주인공 리키는 물류, 운송, 배달까지 엄청난 강도의 노동을 수행하지만, 그는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라 ‘승차했기’ 때문에 모든 리스크를 혼자 감당한다, 운송 차량은 비싼 돈을 주고 직접 준비해야 하며, 다쳤을 때 보험을 제공받지 못하고, 업무용 기기를 파손하는 바람에 엄청난 손해 배상까지 문다. ‘승차’란 결국 노동자들에게는 비싼 티켓값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플랫폼 입장에서는 무임승차다. 노동과정에서 동반되는 육체적·정신적 위험, 각종 사고나 재해 등은 플랫폼 책임이 아니다. 플랫폼은 이처럼 교묘한 수사학을 동원해 ‘노동하는 주체라는 환각’을 심어 주고 장막 뒤에서는 온갖 방식으로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긴다.
이러한 환각은 콘텐츠 플랫폼, 생산성 플랫폼,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에서는 특별히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태스크· 이커머스 플랫폼이 과업(task)과 제어(control)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콘텐츠·생산성·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의 핵심적인 기능은 문화의 창조(creation)와 영향력(influence)의 행사이다. 플랫폼-알고리즘의 그물망은 사실 후자에 훨씬 광범위하게, 촘촘히 퍼져 있다. 태스크·이커머스 플랫폼이 야기하는 사회적 문제는 비록 그 영향력이 막강하고 문제가 전혀 개선되고 있진 않더라도 미디어를 통해 어느 정도 널리 알려져 있다. 매일같이 물류 노동자들의 과로사와 배달 라이더의 사고사가 보도되고 있어 이들 서비스직 노동자들을 경계로 내몰고 사회 안전망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도록 만드는 방식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형성된 상태다. 관련된 연구도 비교적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문화 창조 및 영향에 관한 플랫폼-알고리즘의 착취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방송·영화·만화·음악 등 문화 산업 영역에서 행해지던 창의 노동을 포함해, ‘크리에이터’ 또는 ‘인플루언서’ 등 전에 없이 새롭게 대두된 노동 영역도 플랫폼과 알고리즘에 엄청난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수행되는 노동과정에 대한 이해는 극도로 부족한 상태다. 우리가 주로 접하는 것은 100만 유튜버의 성공 신화, 넷플릭스 진출에 성공한 웹툰 등 현실을 애써 긍정하는 소식들뿐이기 때문이다.
영상 클립을 제작·편집하거나, 1인 방송을 운영하거나,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거나 음식을 먹고 명품 옷과 셀피를 제작하는 활동은 이윤 추구 활동으로는 인식되더라도 그 과정이 노동으로 인식되지는 않는다. 노동의 결과물이 문화 창조 또는 예술의 생산, 미적 재현 등 창의성과 연결되는 경우, 그 자아실현적이고 심미적인 성격 때문에 ‘좋은 노동’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다반사다.[8] 이는 자연스럽게 열정 페이 및 자기 착취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이어진다. 창의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노동과정을 통제하는 자율적인 주체라고 여기지만, 사실상 여기에는 노동 소외와 노동 지배의 현실이 숨어 있다.[9] 현실적으로는 창의적인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 중 극소수만 자율성과 소유권을 누리며, 대부분이 임금 노동자들보다 더 나쁜 조건에서 생활하면서도 이를 자기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착취를 내면화한다. 이는 OTT나 음원 등 새로운 플랫폼 기반 문화 콘텐츠 서비스 국면에서 더욱 강화되며, 각국의 문화 산업을 지구적인 네트워크 환경 규모에서 재편한다.
특히 유튜브, 소셜 미디어 등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에서 이윤 활동을 하는 크리에이터·인플루언서·프리랜서들은 더 큰 구속에 직면한다. 먼저 이들은 자신의 노동 결과물을 경제적 이익으로 연결하기 위해 영상 및 이미지 편집·디자인·문서·클라우드·운영 체계 등 생산성 플랫폼을 사용하면서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정동·친밀성을 자본화하면서도 스스로를 ‘생산자’로 위치시킴으로써[10] 주체라는 환각 효과를 더욱 강하게 내면화한다. 이런 의미에서 플랫폼과 알고리즘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는 ‘정동 경제’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11]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의 경우 알고리즘에 의해 창의 노동, 자아실현, 자율성, 그리고 정동에 이르기까지 다중 사이의 가장 복잡하고 내밀한 영역까지 노동으로 전화시키고, 초연결을 이룬다는 점에서 다른 플랫폼들과 차별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지대 : 디지털 지주와 소작농, 혹은 건물주와 세입자
플랫폼의 다섯 왕국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형식과 노동의 내용은 제각각이지만, 그 비즈니스 모델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모든 플랫폼이 지대 형식으로 부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태스크 플랫폼과 이커머스 플랫폼의 경우 매칭 수수료를 기반으로, 그리고 콘텐츠 플랫폼과 생산성 플랫폼은 구독료를 기반으로 부가 집적된다. 광고는 이들 네 플랫폼에서 부수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요소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우리 삶에 가장 광범위하게 침투해 있는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으로, 그 매출은 절대적으로 광고 수수료에 의존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을 지배하는 경제 논리는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다. 사르트르가 강조했던 주체의 타자를 향하는 시선, 대타 존재의 현시는 여기서 가장 경제적인 것으로 바뀐다. 물화된 주목, 그 안을 흐르는 광고 기반 수익의 비대칭성은 타자에게 건네는 대화와 응시를 상품 교환의 로직으로 용도 변경한다.
그렇다면 왜 지대(rent)일까? 지대는 사르트르의 작품 《구토》에 등장하는 주인공, 로캉탱이 자기 존재의 무상함을 깨닫고 타인을 마주할 때마다 구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른 살에 불과하지만 이자 생활을 하며 놀고먹는 로캉탱은 노동하지도 않고, 근면이나 인생의 목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삶에 억류된 인간이다. 타자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며, 모험과 갈등이 사라진 인간, 로캉탱은 구토증으로부터 공허와 자기혐오를 느끼지만 자진해서 노동이 있는 삶으로 걸어 들어가지는 않는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모두가 로캉탱이 되기를 염원하고, 그 삶이 가져오게 될 존재의 무에 대해서는 일말의 울렁증도 느끼지 않는 사회이다. 다들 건물주나 주식 부자가 되어 빨리 현실의 노동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21세기의 지대는 실존에 관한 물음이 아니라 임금과 노동의 한계를 넘어선 생존이 가능하냐에 관한 즉물적인 질문이 돼버렸다.
재벌가에서 태어나거나 투기로 대박이 나지 않는 이상 이런 꿈을 실현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빅테크가 운영하는 플랫폼은 대중들이 창조한 사회적 생산력을 무상으로 활용해 검색 엔진·알고리즘을 만들고, 독점적인 서비스를 운용하며 광고 수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12] 21세기 디지털 지주나 건물주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초연결 기술은 네트워크에 더 많은 대중이 몰려들도록 만들고, 그에 따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사회적 생산력을 사적으로 점유해 수수료로 돈을 번다. 임금을 주고 노동력을 착취해 잉여를 만들어 내는 자본주의와 달리, 강탈(dispossession)을 통해 축적을 하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이는 더 이상 값싸고 많은 자원·노동력을 대량으로 동원할 수 없게 된 자본이, 고용도 상품 생산도 없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다중의 삶 활동에 올라타(on board)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는 국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설명하듯이, 지대와 이윤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지대는 자연력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데서 나오는 초과 수익인 반면, 이윤은 노동력과 생산 수단을 통해 만들어진 상품과 그 판매로로부터 나온 초과 수익으로 이뤄진다. 이윤은 노동력을 착취해서 잉여가치를 뽑아내지만, 지대는 자연력에 의해 고유하게 주어진 희소가치를 독점한 결과 얻어지는 불로 소득이다. 토지와 건물 등의 소유는 소유주에게 독점력을 안겨 주는데, 시장에서는 같은 상품을 두고 다른 생산자들이 경쟁할 수 있는 반면, 토지나 건물은 배타적인 점유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은 터빈이나 동력 기술을 도입해 수력을 더 뽑아낼 수는 있겠지만 수력 그 자체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따라서 수력의 이용으로부터 발생하는 초과 수익은 자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력을 자본이 독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나오며, 이 초과 수익은 지대로 전화한다.[13] 마르크스가 정확히 봤듯이, 지대는 실질적으로 아무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대상화된 노동이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 자연력 자체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지만, 자연력의 가격을 상품 가격에 멋대로 포함하는 것[14]이 지대의 독특한 성격이다.
그런데 유튜브·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 커뮤니케이션 플랫폼뿐 아니라 넷플릭스·디즈니 플러스·애플TV 등 콘텐츠 플랫폼, MS와 애플의 생산성 애플리케이션, 구독료, 검색 엔진, 심지어는 광고를 매칭시켜 주는 알고리즘까지 빅테크 자본은 ‘희소가치를 가진 디지털 자연’을 스스로 창조해 냈다. 플랫폼-알고리즘은 우리가 살아 있음 자체가 곧 데이터와 정보가 되는 인터넷에 숨어들어 삶 자체를 교환 가치로 만들고 그것들을 배타적으로 소유해 지대로 부를 긁어모은다. 우리가 사회적 삶을 살기 위해 페이스북과 유튜브의 사용을 피할 수 있을까? 그것들 사이에 촘촘히 자리 잡은 광고들을 피해 다닐 수 있을까? 플랫폼-알고리즘은 이제 하나의 거대한 지대의 신경망이 되었다.
구글이 직접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21년 구글은 한화로 약 348조 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중 순이익만 102조 원에 달한다. 페이스북-메타는 2021년 매출 159조 원, 순이익 53조 원을 기록했다. 닉 서르닉이 주장하듯 주요 플랫폼 기업들의 수익의 9할은 광고 수익에 의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광고 기반의 플랫폼 환경은 네트워크 효과를 스스로 생산하도록 필연적으로 자동화 알고리즘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 데이터는 저수익 상품을 고수익 서비스로 전환하고, 데이터 분석은 그 자체로 데이터 생산을 촉진하며 서로는 서로를 더욱 강화한다. 플랫폼 서비스 → 이용자 삶 활동 데이터 분석 → 알고리즘 개선 및 데이터 상품화 → 향상된 플랫폼 서비스 → 이용자 삶 활동 데이터 분석……. 이 무한 반복 속에서 플랫폼은 독점 지대의 성격을 더 강화하고, 자본은 마치 소작농로부터 공물을 받는 지주 혹은 세입자 월세를 받아 생활하는 건물주인 현대의 로캉탱으로 전화한다.
로캉탱은 구토라도 하며 무위도식하는 삶의 공허를 토로했지만, 구글, 네이버, 아마존 같은 기업들의 탐욕스러운 위장에서 역류해서 나오는 것들은 존재의 토사물이 아니라 타인의 삶과 노동을 더 교묘하게 수탈하는 알고리즘들이다. 플랫폼-알고리즘의 신경망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토대가 되어, 산 노동이 아닌 죽은 노동을 통해 사회를 바꾼다. 이전의 자본주의는 노동이 곧 임금·일자리와 연결돼 있었으므로, 죽은 노동의 비중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공황을 야기하곤 했다. 1929년의 대공황, 1972년의 오일 쇼크, 2008년 서브프라임과 2010년 유럽발 금융 위기 등은 죽은 노동의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보여 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임금·일자리의 양가성을 깨달은 자본주의는, 플랫폼과 알고리즘을 도입해 상쇄 요인을 만들어 낸다. 죽은 노동의 사회가 된 플랫폼-알고리즘은 무엇보다 노동을 둘러싼 현상학적 실존과 물질적 실존을 소거해 버렸다. “오 플랫폼, 나의 알고리즘이여! 나는 자유롭게 강탈하기 위해 플랫폼에 왔다. 삶의 데이터를 들이마시고 싶다. 노동이 아닌 것을 모두 떨치고, 알고리즘이 아닌 길은 가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