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챙김 운동의 핵심 메시지는 불만과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머릿속에 있다는 것이다. 매 순간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길을 잃는다. 그리고 불행해진다. 현대 마음 챙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카바트-진은 이것을 ‘생각하는 질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집중하는 법을 배우면 순환적인 사고에 덜 빠질 수 있다고 말한다. 카바트-진은 우리 ‘사회 전체가 오랫동안 주의력 결핍 장애(ADD)를 앓고 있다’고 진단한다. 문화적 불안의 다른 원인은 논의하지 않는다. 그의 저서 《우리의 감각에 임함: 마음 챙김을 통해 우리 자신과 세계를 치유하기(Coming to Our Senses: Healing Ourselves and the World Through Mindfulness)》에서 ‘capitalist(자본주의자)’라는 단어는 “우리는 모두 일종의 ADD에 고통받고 있다”고 말하는 스트레스 많은 투자자의 일화에서 한 번 언급될 뿐이다.
마음 챙김의 지지자들은 무의식적으로 현상 유지를 돕고 있다.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애플 같은 기업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어떻게 다루고 화폐처럼 쓰는지 논의하는 대신, 우리 마음속에서 위기를 찾아낸다. 여기서 자본주의 체제의 특성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불안정한 경제 상황에서 개인이 주의력과 회복력을 잃는 것이 문제다. 이런 주장을 한 다음, 사람들에게 삶에 만족하면서 주의 깊은 자본가가 되는 방법을 판매한다.
마음 챙김을 연습하면 타락한 외부의 영향에 방해받지 않고, ‘순수한 인식’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찾을 수 있다. 해야 할 일은 그저 눈을 감고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혁명의 핵심이다. 한 명씩 마음 챙김을 하면서 세상은 천천히 바뀐다. 이 정치 철학은 이상하게도 조지 W. 부시(George W. Bush)의 ‘자비로운 보수주의’를 연상시킨다. 사적인 영역으로 후퇴한 마음 챙김은 자아의 종교가 된다. 공공 영역에 대한 관념은 침식되고, 연민의 낙수 효과는 우연에 의해서 발생한다. 그 결과는 정치 이론가 웬디 브라운(Wendy Brown)의 지적과 같다. ‘정치 주체는 주체가 되기를 거부한다. 주체가 되기보다는 개별적인 기업가와 소비자 집단이 되었다.’
긍정 심리학, 행복 산업처럼 마음 챙김은 스트레스를 탈정치화했다. 실업으로 건강 보험을 잃거나, 자녀들이 학자금 대출로 큰 빚을 지게 되는 것을 보면서 불행하다면, 마음을 더욱 주의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카바트-진은 ‘행복은 내면의 일’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순간에 판단을 개입시키지 말고, 단순하게 의도적으로, 마음 깊이 집중하라고 요구한다. 명상 실천을 이야기하는 신경 과학자 리처드 데이비슨(Richard Davidson)은 명상이 체육관에서 이두근을 단련하듯이 훈련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주장한다. 소위 마음 챙김 혁명은 시장의 지시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개인의 정신적, 정서적 회복 탄력성을 높이는 치료적 윤리의 지도하에 신자유주의적인 가설을 지지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반응을 선택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관리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를 돌봄으로써 ‘번영’할 수 있다는 가설 말이다. 상품을 이런 식으로 꾸며 내면서 대부분의 마음 챙김 교사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 및 경제 구조 속 고통의 원인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커리큘럼을 배제한다.
마음 챙김은 너무 많이 팔리는 상품이 되면서 도구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기술로 전락했다.
‘맥마인드풀니스(McMindfulness)’는 불교 교사이자 심리 치료사인 마일스 닐(Miles Neale)이 만든 용어다. 그는 이 용어의 뜻을 ‘즉각적인 효과가 있지만 장기간 유지는 불가능한 영적 수행의 광란’이라고 설명했다. 현대의 마음 챙김 유행은 기업으로 치면 맥도날드와 같다. 맥도날드 설립자인 레이 크록(Ray Kroc)은 패스트푸드 산업을 창안했다. 밀크셰이크 기계를 판매할 때, 크록은 캘리포니아주 샌 버나디노(San Bernadino)에 있는 레스토랑 체인을 보고 프랜차이즈화할 만한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했고, 맥도날드 형제의 사업에 프랜차이즈 에이전트 역할을 하기로 계약했다. 얼마 후 그는 맥도날드를 인수했고, 글로벌 제국으로 키웠다. 한편 헌신적인 명상가인 카바트-진은 수행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 불교의 가르침과 수련법을 도입해 병원의 환자들이 물리적 고통, 스트레스, 불안에 대응하도록 한 것이다. 마음 챙김을 세속적인 영성으로 브랜딩한 것은 절묘한 선택이었다.
크록은 자동화와 표준화, 규율을 통해 바쁜 미국인에게 음식을 빠르게 제공하는 데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카바트-진은 표준화된 커리큘럼을 개발해 스트레스 받는 미국인에게 8주 코스의 스트레스 감소 마음 챙김 교육을 제공하고, MBSR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서 가능성을 찾았다. MBSR 교사들은 매사추세츠주 우스터(Worcester)에 있는 카바트-진의 마음 챙김 센터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인증을 받는다. 그는 기업, 학교, 정부, 군대 등 새로운 시장을 발견하고, ‘마음 챙김 기반 개입(MBIs·mindfulness-based interventions)’의 다른 형태를 승인하면서 MBSR의 범위를 계속 확장했다.
크록과 카바트-진 두 사람 모두 전국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제품의 품질이나 내용이 달라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맥도날드 햄버거와 감자튀김은 두바이에서 먹든 아이오와주 더뷰크(Dubuque)에서 먹든 동일하다. 마찬가지로 전 세계적으로 MBSR 과정의 내용과 구성, 커리큘럼에는 차이가 거의 없다.
마음 챙김은 너무 많이 팔리는 상품이 되면서 도구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기술로 전락했다. 도심에 사는 아이들이 조용한 진정의 시간을 갖도록 하거나, 헤지 펀드 거래자들에게 정신적인 우위를 제공하거나, 군사 무인기 조종사들의 스트레스를 줄여 주는 기술 말이다. 마음 챙김의 상품화는 시장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도덕적인 잣대나 윤리적인 책무를 결여한 채로, 사회적인 공익의 시각에서도 벗어난 채로 말이다.
이런 현상은 지지자들이 마음 챙김을 비정치적이라고 믿고 있는 데다 마음 챙김 자체가 도덕적 탐구, 사회적 선에 대한 고려를 회피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했다. 마음 챙김은 수련을 통해서, 선생님의 부드러운 말과 친절함을 습득함으로써, 혹은 우연한 자기 발견을 통해 ‘자연스럽게’ 윤리적인 행동이 나온다고 쉽게 가정한다. 하지만 ‘판단하지 않고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면’ 중요한 윤리적 변화가 따라올 것이라는 주장에는 분명히 결함이 있다. ‘판단하지 않는 인식’을 강조하는 것은 도덕적 지능을 쉽게 무력화할 수 있다.
《영성 판매: 조용한 종교 탈취(Selling Spirituality: The Silent Takeover of Religion)》에서 제레미 카렛(Jeremy Carrette)과 리처드 킹(Richard King)은 18세기 이후 아시아의 지혜가 식민화되고 상품화되면서 지배적인 문화의 가치를 완벽히 수용해, 생활 방식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영성이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그런 개인주의적인 영성은 사유화라는 신자유주의 의제와 분명히 관련되어 있다. 특히 마음 챙김에서 사용되는 애매모호한 언어로 가려질 때는 더 그렇다. 시장 세력은 이미 마음 챙김 운동의 추진력을 이용하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개인적인 영역을 확장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마음 챙김은 ‘고통을 초래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불평등에 도전하기보다는 개인 수준에서의 불안과 동요를 단순히 진정시키는 것’으로 쉽게 선택되고 축소된다고 카렛과 킹은 썼다. 그러나 이런 개인화되고 심리화된 마음 챙김에 헌신하는 일은 정치적이다. 치료를 통해 개인을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주의 깊고 탄력성 있는 사람들로 최적화시켜서 시스템 내에서 계속 제 기능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는 혁명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오히려 가장 조용한 항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마음 챙김은 자본주의의 나쁜 영향에 대처할 수 있는 힘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마음 챙김의 가르침은 시장에 쉽게 동화된다. 원래 존재하던 사회적, 정치적 변혁의 잠재력은 무력해진다. 마음 챙김 운동의 지도자는 자본주의와 영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원인을 깊고 광범위하게 들여다볼 필요 없이 개인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말로 혁명적인 마음 챙김이라면 윤리적 행위와 상관없는 서구적인 행복의 조건에 도전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 챙김 프로그램은 경영진에게 그들의 경영상 결정과 기업 정책이 어떻게 탐욕과 나쁜 의지, 망상을 제도화했는지 살펴보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일주일에 80시간씩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줄이고 생산성과 집중을 향상시키고, 잘 회복하는 방법으로서의 마음 챙김 연습이 임원들에게 판매되고 있다. 그들은 분명 ‘명상’을 하겠지만, 이는 두통을 치료하려고 아스피린을 복용하는 것과 같다. 고통이 사라지면, 평소처럼 일할 것이다. 각 개인이 더 좋은 사람들이 되더라도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기업의 의제는 변하지 않는다.
애초에 마음 챙김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나쁜 조건에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더 높은 목표를 세울 수도 있다. 마음 챙김이라는 왜곡이 스스로를 자동적으로 착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까?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마음 챙김 연습을 위한 집중을 내면화하는 것은 기업의 요구나 사회의 지배 구조를 내면화하는 것으로까지 이어진다. 최악의 경우, 이런 순종적인 입장이 자유로 포장되기도 한다. 실제로 마음 챙김은 자유에 대해 모호한 말을 하는 데 능하다. 시민으로서의 책임이나 협력적이고 정의로운 사회에서 진짜 자유를 찾기 위해 집단적인 마음가짐을 함양하는 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자기중심적인 ‘자유’를 찬양하곤 한다.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고 개인의 행복과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은 불공정과 불평등, 환경 파괴에 대한 심각한 질문보다 훨씬 판매하기 쉽다. 후자는 사회 질서에 대한 도전을 수반하지만, 전자는 사람들의 집중을 돕고, 일과 시험에서 더 나은 성과를 내게 하며, 심지어는 성생활을 개선하는 등 마음 챙김의 우선순위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 마음 챙김은 새로운 심리 치료 기술로 포장되었고, 자기 관리(self-help)라는 말로 판매되고 있다. 이런 브랜딩은 영적 수행이 개인의 사적인 관심사라는 생각을 강화한다. 그리고 일단 사적인 것이 되고 나면, 영적 수행은 쉽게 사회·경제·정치적 통제 목적으로 이용된다.
마음 챙김은 개인과 조직이 욕심과 악감정, 망상의 뿌리를 자각하게 만들기보다는, 그 뿌리를 오히려 강화할 수 있는 진부하고 치료적인 자기 관리 기법으로 모양새를 바꿨다.
자제력, 탄력성, 행복이라는 수식어는 개인의 안녕이 단순히 기술 개발에 달려 있다고 가정한다. 행복과 자유, 복지는 개인의 노력의 산물이 되었다.
마음 챙김은 40억 달러(4조 7600억 원) 규모의 산업이라고 한다. 아마존에서는 제목에 ‘마음 챙김’이 들어간 책이 6만 권 이상 판매되고 있다. 몇 가지만 이름을 나열해 보면, 마음 챙김 양육, 마음 챙김 식사, 마음 챙김 교육, 마음 챙김 치료, 마음 챙김 리더십, 마음 챙김 금융, 마음 챙김 국가, 그리고 강아지 주인을 위한 마음 챙김 등의 장점을 설명하는 책들이다. 마음 챙김 컬러링 북은 그 자체로 베스트셀러 장르다. 책뿐만 아니라 워크숍, 온라인 강의, 고급 잡지, 다큐멘터리 영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종, 쿠션, 팔찌, 뷰티 상품이나 다른 용품들도 있다. 수익성이 좋고 급성장하고 있는 콘퍼런스 순회강연도 당연히 있다. 마음 챙김 프로그램은 학교, 월스트리트와 실리콘밸리의 기업, 로펌, 미군을 포함한 정부 기관에 진출했다.
마음 챙김은 시장 친화적인 일시적 처방으로서 제공된다. 마음 챙김이 대중문화에서 환영받는 이유다. 마음 챙김은 일터에서의 마음가짐에 딱 들어맞는다. 마음 챙김이 가져오는 유일한 변화는 무한 경쟁 속에 더 능숙한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공감대는 권력과 부를 누리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줘서 더 많은 것을 축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 논리를 수용한 마음 챙김의 판매자들이 다보스 포럼의 CEO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다보스 포럼에서 카바트-진은 명상 수련을 경쟁 우위의 복음으로 전파하는 데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신자유주의는 보수주의라는 뿌리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크게 성장했다. 대중적인 담론을 장악해 자칭 진보주의자인 카바트-진 같은 사람들도 신자유주의적인 용어로 생각을 표현할 정도다. 시장 가치는 인간 삶의 모든 면을 침범했고,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살아야 하는지도 정의하고 강요해 왔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정의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것이다. 그는 신자유주의를 ‘순수한 시장 논리를 방해할 수 있는 집합 구조를 파괴하는 계획’이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시장에 기반한 사회가 우리에게 ‘인적 자본’과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준다고 생각하도록 길들여졌다. 이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와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내적 자원을 잘 관리해서 자신의 복지와 자유, 행복을 극대화해야만 한다.
경쟁이 핵심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사회가 어떻게 운영될지에 관한 결정은 시장의 작동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로 경쟁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국가, 자발적 결사체 같은 다른 사회적 행위자는 시장 논리가 원활하게 운영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의 행위자에게 마음 챙김은 길러야 할 기술이자 사용해야 하는 자원이다. 마음 챙김을 마스터하면 자본주의 바다의 까다로운 해류를 항해하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경쟁에서 오는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와 불안에 대응하기 위해 ‘현재에 집중하고 판단하지 않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마음 챙김은 개인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모든 것들은 더 편안하게 잠드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심각한 결과가 잠재되어 있다. 슬로베니아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이런 경향을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마음 챙김은 사람들이 온전한 정신 건강을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적 역동성에 완벽히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세계 자본주의의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고 있다.
마음 챙김은 자본주의 문화의 사회 구조와 물질적 조건에 대한 관심을 쉽게 다른 곳으로 돌린다. 셀러브리티나 롤모델은 마음 챙김을 신성히 여기고 지지한다.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애플, 징가 같은 캘리포니아 기업들은 이를 일종의 보조 브랜드로 받아들였다. 구글의 사내 마음 챙김 전문가였던 차드-멩 탄(Chade-Meng Tan)은 실제로 ‘참 좋은 친구(Jolly Good Fellow)’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다. “당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세요.” 그는 동료와 독자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기업의 문화가 아니라, 마음속에 문제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자제력’, ‘탄력성’, ‘행복’이라는 수식어는 개인의 안녕이 단순히 기술 개발에 달려 있다고 가정한다. 마음 챙김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근육을 단련하는 것처럼 뇌를 단련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비유를 특히 좋아한다. 행복과 자유, 복지는 개인의 노력의 산물이 되었다. 외부적인 요인이나 관계, 사회적 조건에 관계없이 소위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 이러한 치료적인 담론하에서, 마음 챙김은 개인이 겪는 문제를 선택의 결과로 교묘하게 재구성한다. 개인적인 문제는 정치적이나 사회 경제적인 조건의 탓이 아니며, 완전히 심리적인 것이고, 병리학적으로 진단할 수 있는 문제다. 따라서 사회에는 급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치료가 필요하다. 마음 챙김 운동이 정부 정책 입안자들에게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이유다. 불평등, 인종 차별주의, 빈곤, 중독과 정신 건강 악화에 기인한 사회적 문제는 개인 심리학 측면에서 재구성되면서 치료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다. 심지어 마음 챙김은 이런 치료를 개인 스스로 제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집중하라고 요구받고 있다. 더 주의 깊게, 판단을 피하며, 상황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면서 말이다.
신자유주의는 세계를 승자와 패자로 나눈다. 모든 사회 현상을 개별화하는 핵심적인 이념을 통해서다.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이 사회의 주요 초점이기 때문에, 사회적 변화는 정치적 저항이나 조직화된 집단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유 시장과 개인들의 원자화된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집단적인 조직을 통해 이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신자유주의 질서에 골칫거리이기 때문에 제지당한다.
재활용 실천은 이를 분명히 보여 주는 사례다. 진짜 문제는 기업의 플라스틱 대량 생산과 소매 기업들의 과다 사용이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개인적인 낭비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믿게 된다. 습관을 바꾸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말이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최근 기사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 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것은 무너지는 고층 빌딩을 막기 위해 못을 박는 것과 같다’고 지적한다. 그런데도 신자유주의의 개인 책임 원칙은 우리를 진짜 범인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교묘한 속임수를 구사한다. 이것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1950년대, ‘미국을 아름답게(Keep America Beautiful)’ 캠페인은 개인의 쓰레기 줍기 운동을 독려했다. 코카콜라, 앤호이저-부시, 필립 모리스 같은 회사가 후원하고 공익 광고 제작사인 광고 협의회(Ad Council)가 제작한 프로젝트였다. 이 캠페인은 범법자들이 수치심을 느끼도록 ‘쓰레기 투기꾼(litterbug)’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20년이 지난 뒤, 잘 알려진 TV 광고에는 미국 원주민이 쓰레기를 버리는 자동차 운전자를 보고 우는 장면이 등장한다. 슬로건은 ‘오염을 시작한 것은 사람입니다. 막을 수 있는 것도 사람입니다’였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기사는 이런 속임수를 꿰뚫어 보고 있다.
재활용을 독려하는 캠페인은 겉으로는 자애로워 보이지만, 진짜 문제를 모호하게 만든다. 플라스틱 문제에 기업이 얼마나 큰 원인을 제공하는지는 보이지 않게 된다.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헤더 로저스(Heather Rogers)는 이처럼 영리하게 오판을 일으킨 ‘미국을 아름답게’ 캠페인이 최초의 기업 그린워싱(greenwashing) 사례라고 말한다. 대중의 관심을 소비자의 재활용 운동으로 유인하면서, 폐기물 관리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규정한 입법을 저지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메시지는 반복적으로 팔려 나간다. 개인의 행동만이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그렇기 때문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다. 우리는 교육학자 헨리 지루(Henry Giroux)가 ‘상상력을 없애는 기계’라고 불렀던 신자유주의적 최면에 빠져 있다. 이 최면은 우리의 비판적이고 급진적인 사고를 억압한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관리할 것을 권고한다. 상상력을 억압해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해체하거나 과잉된 자본주의에 제동을 가할 방법을 찾는 대신, 자본주의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시장에서 효율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자신에게 더 집중하라고 요구받고 있다. 더 주의를 기울이면서, 판단을 피하고, 상황은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겪는 문제의 원인을 머릿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마음 챙김의 근본 교리다. 스트레스의 병리화와 의학화, 마음 챙김이라는 형태의 치료와 전문적인 처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그 믿음을 강화했다. 고통을 유발하는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상황에 대한 반응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이념적인 메시지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는 이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을 바꾸기 위한 모든 노력을 포기하는 것은 과도하다. 마음 챙김은 부당하거나, 문화적으로 부적절하거나, 환경 파괴적일 수 있는 것에 대한 비판과 토론을 허용하지 않는다. ‘판단을 내리지 않고, 현재 순간을 인식’하는 연습을 하면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마음 챙김의 명령은 사회적 마취제로 작용해 현상을 유지한다.
마음 챙김 운동의 ‘인간 번영’에 대한 약속은 사회 변화의 비전을 정의하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비전은 개별화된 채로 남아 있고, 자신에 집중하는 개인의 선택에 의존한다. 물론 마음 챙김을 실제로 하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와 매우 다른 정치적 의제를 갖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위험한 것은 마음 챙김이 사람들을 사적 세계와 특정한 정체성으로 물러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확히 신자유주의 권력 구조가 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마음 챙김 관행은 제니퍼 실바(Jennifer Silva)가 지적한 ‘기분(mood) 경제’에 뿌리내리고 있다. 《커밍 업 쇼트: 불확실성 시대의 노동 계급 성인기(Coming Up Short: Working-Class Adulthood in an Age of Uncertainty)》에서 실바는 기분 경제가 위험의 민영화처럼 ‘정서적 운명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개인’을 만든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감정의 정치 경제학 속에서, 감정은 개인의 ‘정서 자본’을 향상시키는 수단으로 규율된다. 구글의 마음 챙김 프로그램 ‘당신 안을 탐색하라(Search Inside Yourself)’의 커리큘럼은 감성 지능(EI)을 중요하게 다룬다. 이 프로그램은 구글 엔지니어들의 직업적인 성공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마음 챙김 수련에 참여하고 감정을 관리하면 경제적 잉여 가치가 창출된다. 이는 자본을 획득하는 것과 같다. 기분 경제는 좌절에서 회복하는 능력도 요구한다. 불안정한 경제적 맥락 속에서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긍정 심리학과 마찬가지로 마음 챙김 운동은 ‘행복의 과학’과 합쳐졌다. 이런 식으로 포장되고 나면, 마음 챙김은 개인의 삶에 도움이 되는 최적화 기술로서 판매될 수 있다. 개인을 사회 세계에서 떨어뜨려 놓으면서 말이다.
마음 챙김의 약속들은 시카고 대학의 문화 이론가 로렌 버란트(Lauren Berlant)가 신자유주의의 특성으로 정의하는 ‘잔인한 낙관론’과 공명한다. 환상과 마찬가지인 것에 감정적으로 투자하는 일은 잔인하다. 마음 챙김은 우리에게 명상을 연습하고 개인의 삶을 정돈하면 행복하고 안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안정적인 고용, 주택 소유, 사회적 이동성, 경력 성공과 평등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리라는 것도 암시한다. 마음 챙김은 자제력을 갖고 마음과 감정을 통제하면 예측 불허의 자본주의 속에서도 성공하고 번영할 수 있다고 우리에게 약속한다. 《마음 챙김 계산(Mindful Calculations)》의 저자 조슈아 아이젠(Joshua Eisen)은 이렇게 지적한다. ‘케일, 아사이 베리, 체육관 회원권, 비타민 워터, 새해 다짐처럼, 마음 챙김은 변화에 대한 엄청난 열망의 지표이지만 결국 자기 관리와 자율성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환상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침묵 속에 앉아 기다려야 할 뿐이다. ‘좋은 삶’에 대한 규범적인 환상이 신자유주의하에서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환상을 심어 주는 일은 훨씬 더 잔인하다. 우리가 개별적으로 각자의 감정에 집중하면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된다. 모두가 공유하는 취약함과 사람들 사이의 상호 의존성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집단적인 방법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환상을 키우는 것은 공허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그 환상에 계속해서 매달리게 된다.
마음 챙김 자체는 잔혹하지 않다. 물신화되고, 부풀린 약속을 할 때만 잔혹하다. 버란트가 지적했듯, 우리가 ‘애착을 갖게 된 수단은 애초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을 강하게 방해한다.’ 변혁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현상 유지를 돕는 데에 마음 챙김의 잔혹함이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마음 챙김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본주의의 황폐함을 마음 깊이 인내하도록 유도한다. 인류의 번영에 대한 개인주의적인 시각을 조장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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