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모는 같은 동네에 살던 야구부 1년 선배를 통해 야구에 입문했다. 평소 김종모가 동네에서 야구하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야구부 선배가 그에게 야구부 입단을 권유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야구부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수업을 빠지고 야구를 하려면 담임 선생님께 허락을 구해야 하는데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선배가 대신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린 덕분에 다행히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당장 야구부에 나오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또다시 망설여졌다. 부모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걱정돼 야구부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입단 테스트라는 단 한 번의 경험이 야구에 대한 그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테스트를 받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야구가 갑자기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테스트를 통해 야구에 대한 내적 동기가 생겨난 것이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난 뒤, 그 경험을 반복하고자 하는 욕구는 동기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김종모가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또 있다. 다들 어렵게 살았던 그 시절, 학교에서는 급식 시간에 학생들에게 카스텔라 빵을 나눠 줬다. 당시 한 반이 60명이었는데 카스텔라 빵은 30개 정도밖에 없어서 격번제로 먹었다. 김종모는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다가 남은 빵을 배낭 가득 집어넣고 있는 야구 선수들을 발견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것이 야구를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카스텔라 빵은 김종모의 야구에 대한 동기 수준을 높이는 기제가 된 셈이다.
결정적인 것은 뭐였냐 하면, 그때는 다들 정말 힘들게 살았기 때문에, 카스텔라 빵이 나왔었다고, 급식 빵. 그거를 이렇게 인제 전교생이 다 분배가 되고, 남은 거는 전부 야구부가 가지고 갔었다고. 그때는 배낭을 메고 다니면서 그거를 전부 담는 거야. 주머니에도 넣고 이렇게… 그 빵이 또 어떻게 웃기냐 하면, 그게 옥수수 빵인데, 이게 굽다 보니까 바깥에만 맛있고 안에는 맛이 없거든. 그런데 선수들은 바깥만 먹고 버리는 거야. 이야! 그걸 보고는 인제, 촉이 온 거지. 야구를 하면 저걸 먹을 수 있겠구나!
그러나 보수적인 그의 부모님은 야구하는 아이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야구는 동네에서 좀 노는 불량한 아이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부모님은 아들의 야구부 입단을 반대했다. 김종모는 야구에 대한 동기가 상승한 시점에서 맞닥뜨린 부모님의 반대를 야구 인생의 첫 번째 슬럼프로 꼽았다.
하늘이 그의 야구 인생을 도왔는지, 우연치 않게 모든 일들이 그가 야구를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주산을 배우라며 학원비를 내주신 것이 시작이었다. 주산 학원의 수업 시간은 방과 후 야구 연습 시간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종모는 주산 학원 대신 야구부로 갔다. 위험을 감수한 결정을 단행한 것이다.
가족들 몰래 야구를 시작한 지 보름째, 아들이 주산 학원만 다녀오면 피곤에 지쳐 뻗어 버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부모님이 이유를 캐물었다. 결국 그는 야구부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김종모는 3남 3녀 중 다섯째, 둘째 아들이었는데 세 명의 누나들까지 “얘는 공부를 시켜야 한다”며 야구를 반대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야구에 푹 빠진 상태였다. 온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의 그가 일말의 고민 없이 위험 감수 행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야구를 좋아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어떻게 발각이 됐냐 하면 주산 학원 갔다 온단 놈이 학원 갔다 오면 뻗어 자는 거야. 근 한 보름 정도 숨겼는데, 그런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얘기했지, 야구했다. 그랬더니 우리가 3남 3녀인데, 누나들이 나는 무조건 공부를 시켜야 된다는 거야. 내가 남자로는 둘째이고 전체로는 다섯째인데, 누나들 쭉 있고… 나는 공부를 시켜야 된다는 거지. 그런데 나는 인제 이미 이쪽에 빠져부렀어. 몸이 완전히 담가진 거야. 야구에.
가족들의 반대가 계속되던 중, 어머니가 풍으로 쓰러지면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야구에 빠진 그도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야구는 하고 싶고, 또 야구를 잘하기도 했지만 가족들이 반대하고 어머니도 편찮으신 상황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야구를 계속해도 되는 것인지 딜레마에 빠졌다. 그는 가족들이 처음부터 야구를 반대한 이유가 사실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병환으로 가정 형편이 나빠지자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돌아갔다. 야구를 하는 것이 오히려 학비와 같은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 주는 상황이 되었고 가족들은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다. 김종모는 그렇게 야구를 시작했다. 중학교에 진학할 때 가족들이 다시 공부를 할 것을 종용하면서, 입학 후 1년 동안은 야구를 접고 공부를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야구부에서는 집요하게 러브콜을 보냈고, 그의 마음속에도 이미 야구가 너무 커져 버려 도저히 접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배트를 집어 들었다. 집안의 반대, 어머니의 병환, 어려워진 가정 형편, 그리고 더욱 거세진 반대. 이처럼 계속된 악재에도 불구하고 그가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의외로 단순한 이유, 야구가 너무나 좋다는 것이었다. 돈, 물질, 지위와 같은 외부적인 요소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이나 흥미에 의해 어떤 행동을 할 때, 이러한 행동을 이끌어 내는 힘을 내재 동기라고 한다.[1] 내적으로 동기화된 행동은 어떠한 보상이나 외부의 압력, 정신적 압박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집안의 반대를 이겨 냈지만, 이번에는 키가 문제였다. 야구 인생의 두 번째 슬럼프로 그는 작은 키를 언급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 김종모의 키는 겨우 158센티미터였다. 경기력을 방해하는 신체적 약점이었다.
그때는 야구했던 선수들이 1년씩 꿇고 그랬으니까. 그런데 나는 기존 애들(동급생)보다도 작았는데, 걔네들은 1년 쉬고 왔으니까 정말 훨씬 크지. 그런데 중학교를 졸업하는데 결정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하면 ○○상고, 지금은 ○○고등학교 그 학교로 이렇게 같이 올라간다고… 같은 재단이니까. 기본적으로 받아 주게 되어 있어. 그런데 내가 얼마나 작고 그랬던지 실력은 되는 것 같은데 너무 작으니까 내를 안 받으려고 한 거야.
중학교 때까지는 키가 작았어도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야구부는 달랐다. 스스로도 ‘이 키로 야구를 계속할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겨울, 여전한 고민을 안고 고등학교 야구부에 합류했다. 합숙 훈련을 시작한 지 3일 째, 갑자기 맹장 수술을 하게 됐다. 이번에는 수술비가 문제였다. 퇴원을 해야 하는데 집에서 병원비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에 답답해하던 중, 어머니로부터 야구부에서 수술비를 내주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종모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순간, 결정적인 도움을 준 야구부에 감사했다. 고등학교에서 야구부를 나가는 조건으로 수술비를 대주기로 한 것이었으며 자신이 야구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그 정도로 김종모의 작은 키는 큰 문제였다.
김종모는 수술 후 몸이 회복되면 당연히 다시 야구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집에서 쉬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수술 후 쉬는 동안, 한 달 반 사이에 키가 18센티미터나 자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야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1년 동안 그는 선배들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했다. 1학년이라는 이유만으로 선배들의 구타에 시달렸다. 중학교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환경에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야구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야구 인생의 세 번째 슬럼프였다. 그러나 그가 당시의 상황을 슬럼프로 지각한 것은 구타와 뒤치다꺼리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의 모습 때문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발전 없이 정체된 자신을 발견하면서, 그는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에게 있다고 여겼다. 스스로 야구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자신의 모습 자체가 그에게는 곧 슬럼프였던 것이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지. 1학년들은 전부 다 고생했어. 선배들이 다 빨랫감을 던져 놓는 거야. 그때는 다 여인숙이야 여인숙… 여관도 아니고. 빨래하고, 치우고, 밥 먹을 시간도 없고. 선배들이 콜라 같은 거 사와서 먹고 나면 빈 병 그거 팔아다 아이스크림 바꿔 먹고. 그렇게 1년을 허무하게 보내고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갈 시기가 되었는데… 하! 이건 정말 안 되겠더라고.
그는 자신의 진로와 미래에 대해 고민했다. 더 이상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내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바로 실천에 옮겼다. 그는 현재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고 받아들이면서 야구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삼았다. 이렇듯 인생이 하강 곡선을 그리다 상승으로 전환되는 시점, 심리적 고통에서 회복(bounce back)으로 가는 전환은 자신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판단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김종모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동기를 부여하고 즉각적인 행동으로 이를 실천함으로써 슬럼프가 주는 심리적 고통의 강도와 지속 기간을 줄일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있어서는 도저히 비전도 없고. 아마 그때 머리가 좀 커졌던 것 같애.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앞으로의 내 진로와 미래,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이 들더라고. 그래서 ‘아! 그래! 지금부터 진짜 해보자’ 바로 어머니께 가서 말했지. 쌀을 좀 주라고. 쌀하고 김치만 좀 줘. 그렇게 결심하자마자 숙소로 들어갔어. 거기서 먹고 자면서 한번 해보자.
김종모는 야구 인생에 승부를 걸어 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고통스러운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야구가 재미있어서 가족의 반대나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그는, 이번에는 절박함을 통해 스스로 동기를 부여했다. 그에게 있어 자신과의 싸움은 고통스럽고 처절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조차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고 했다. 이러한 연습 과정이 자신의 야구 인생을 위해 충분히 유용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지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고통을 감내하기로 했다.
곤로, 그 조그만 거 있지. 거기에다 밥도 해먹고 그러면서 낮에는 다 같이 연습하고, 밤에 다 집에 가면 혼자 나가서 스윙을 하는데, 다른 생각 정말 하나도 없었어. 나는 투수가 아니라 야수이기 때문에 방망이를 돌리자, 우선 방망이를 돌려 보자, 일단 방망이를 돌려야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누가 얘기해 주는 것도 아니었지. 자세, 뭐 이런 거 필요 없이 무조건 돌려 보자. 한 번에 50개씩 돌렸지. 그렇게 하다 보니까, 힘은 좀 들지만 다음 날 운동장에 나가면 타구가 조금씩 빨라지더라고.
연습을 하면 할수록 배움에 대한 갈증은 점점 더 커졌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자기만의 고독한 시간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연습 과정이 때로는 막막하기도 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혼자 머리를 굴려 가면서 고민하고 연구하고, 잠 안 자고 시간을 쪼개 가면서 겨울 내내 연습을 계속했다. 혼자서 하는 연습은 심리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육체적으로도 큰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연습량이 늘어남에 따라 배가되는 신체적 고통을 견뎌 내는 방법도 스스로 터득해 나갔다. 그렇게 점점 더 강해졌다.
방망이를 50개 돌리니까, 손을 이렇게 잡고 있다가 돌리다가 손을 풀면 아파요. 중간에 손 풀지 말고, 따아아악~ 그대로 잡고 끝까지 50개를 하고, 그다음에 풀어야 돼. 그런데 푸는 과정도 어떻게 풀어야 되냐, 그냥 풀면 절대 안 풀어져. 손가락을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천천히 조심스럽게 푸는 거야. 마찬가지, 감고, 시작하면, 잡고 그대로 돌리고. 그러면 이제 나중에는 물집이 생겨서 굳고 터지고 그러는데. 이 손을 가지고 또 연습을 하려니, 어제 터져서 물러졌는데 바로 다시 할 수는 없으니까. 그때 선배들이 뭘 가르쳐 줬냐 하면, 지금 이런 얘기하면 선수들은 미쳤다고 해. 뭐냐면, 여기(물집 잡힌 곳)에 물집이 터지면 물을 탁 털어. 그러고 나면 그 부분은 아주 부드러운 살이지. 그럼 성냥 황 있잖아, 그것만 삭삭 갈아. 그럼 요만큼 되잖아. 그걸 물집 터진 부분에 얹어. 그리고 불을 탁 붙이고 꾹 참는 거야. 그럼 탈이 날 것 같지? 아니 안 그래. 소독이 되지. 소독이 되면서 이게 굳은살이 되는 거야. 그냥 굳어지는 거야. 만약에 황이 너무 많으면 살이 다 타버릴 텐데, 이걸 정말 조금만 올리기 때문에 그게 한 번에 확 타면서 안에 있는 물기만 탁 없애 주면서 바로 굳어 버리는 거지. 이걸 매일 저녁마다 했어. 그렇게 한 다음 스윙을 하면 그다음 날 괜찮아. 괜찮은 거야. 아파서 병원 안 가도. 돈 안 들이고도 그렇게 하고 스윙을 하면 괜찮아. 그럼 또 400개, 500개, 600개, 700개 스윙을 하거든. 그 자리가 또… 그럼 거기 물을 빼주고 또 하는 거야.
고등학교 2학년 가을, 광주 시내 학교들이 참가하는 추계 대회가 열렸다. 3학년들은 참가하지 않는 이 대회에서 드디어 김종모에게 대타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 전까지는 실전에 나가면 어떻게 했는지도 모른 채 계속 삼진만 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혹독한 연습 이후 처음으로 들어선 타석에서 그는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다. 연습 과정에서 체득한 기술 향상을 경기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 이 대회는 김종모에게 단순한 출전 그 이상의 것을 가져다주었다. 실전에서 눈에 띄게 향상된 경기력을 확인했고, 대회 타격상을 수상하면서 주변의 인정도 받았다.
타석에 들어가니까 그렇게 자신감이 있을 수가 없어! 그 연습이라는 게 정말 중요해. 볼이 오는데도, 우리가 말하는 그런 얘기 있잖아, 볼이 선다고. 내 눈 앞에서 볼이 서더라고. 볼이 정말 깨끗하게 보이는 거야. 선명하게. 하! 그래서 이제 내가 타이밍을 잘 맞추다 보면, 이 볼이 나한테 점으로 보이는 거지. 그걸 치면, 바로 좋은 타자가 그걸 치는 거야. 타이밍을 잘 맞추니까, 탁! 볼이 앞에서 멈추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나도 보이는 거야! 막! 그래서 휘두른 거지! 그렇게 대회가 끝나고 보니… 6할2푼 몇 리로… 내가 타격상을 탔더라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많은 실업팀이 김종모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그러나 당시 야구계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그는 영남대에 진학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라도 밖에서 야구를 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것이 다 새롭고 낯설었다고 했다. 말하자면 야구 환경의 전환기를 맞이한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시간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입학한 영남대 야구부는 창단 4년밖에 안된 신생팀이었기 때문에 훈련의 강도가 엄청났다. 강도 높은 훈련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했다. 그는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보따리를 싸서 집에 오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감독의 부름을 받고 다시 야구부로 돌아갔다.
시행착오를 거쳐 점차 적응해 나갈 즈음, 사건이 터졌다. 태어나서 처음 가본 수영장에서 예상치 못한 부상을 당한 것이다. 수영장에 뛰어들 때까지만 해도 그는 수심이 그렇게까지 얕을 줄 몰랐다. 신이 나서 아무 생각 없이 무릎부터 수직으로 물에 뛰어들었고 수영장 바닥에 무릎을 부딪쳤다. 곧바로 무릎이 엄청나게 부풀어 오르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아아! 이거 봐라? 이거 심각하다! 사실은 물속에서는 원래 충격이 안 크거든. 그런데 느낌이 심상치 않은 거야. 무릎을 전혀 못 펴겠더라고. 그래서 내가 막 도와 달라고 소리쳤어. 그때 축구 선수들이랑 내 동기들이 옆에 있었거든. 걔네들이 나를 들어서 올리는데, 올리는 순간 무릎을 보는데, 눈으로 보여! 여기가 퍽퍽퍽! 막 부어오르는 게.
돈이 없어서 바로 병원에 가지도 못했다. 일단 숙소로 가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이 되자마자 감독에게 말했다. 물론 놀다가 다쳤다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었다. 주장이 일러 준 대로 ‘밤에 러닝하다가 다쳤다’고 했다. 정밀 검사 결과, 연골이 파열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그때의 무릎 부상 이후 지금까지도 슬라이딩을 잘 못한다고 했다. 그의 대학 시절, 야구계에는 체계적인 재활이란 것이 없었다. 그 역시 부상 이후 잠깐 쉬었던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1학년을 부상으로 고생하고, 그냥 그렇게 별다른 활약 없이 2학년이 되었고, 또 1년을 보냈다.
3학년에 올라가기 직전 겨울, 그는 타성에 젖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김종모는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순간 그 자체가 슬럼프였다고 했다. 보통 야구 선수가 자각의 순간을 슬럼프로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한다는 것은 부상이나 경제적 어려움, 지도자와의 갈등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종모는 슬럼프 상황뿐 아니라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늘 자기 성찰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현재 상황에서 내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날카롭게 비판할 수 있었다.
힘들 때마다 내가 한 번 더 생각한 게 뭐냐면 ‘내가 이걸 지금 왜 하지? 내가 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 이거야. 이렇게 나하고 대화를 했다고. 거울을 보면서. 그러면서 (배트를) 돌리고, 이렇게 연습을 하고 땀에 흠뻑 젖은 내 모습을 보면, 나는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 또 해보자! 되겠지! 될 거야! 이런 믿음, 이런 확신이 들더라고.
그는 다시 한 번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고등학교 때보다 상황이 좋았다. 그때보다는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한층 성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은 있었지만 혼란은 덜했다. 선배나 코치, 감독의 도움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이제는 스스로 타격 요령을 깨우쳐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훈련을 통해 스스로 터득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는 호기심과 놀라움, 기쁨과 만족을 경험했다. 이는 내적으로 동기화된 학습의 전형이자 자기 결정성[2]이라는 개인적 자원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3]
그때부터 또 시작했지. 앞에 있는 거울도 보고. 고등학교 시절보다는 먹는 것도 좀 나았으니 훨씬 견딜 만했어. 스윙을 하고 나면, 어렸을 때는 그래도 날은 안 새봤는데 이때는… 진짜 미친 듯이 스윙하고 나면 날이 새 있더라고. 내가 그때 생각한 게 뭐냐 하면, 캬~ 내가 힘이 좋긴 좋구나. 그런 생각이 든 게, 돌리면서 내가 쾌감을 느끼는 거야. 내가 돌리는 그 스윙 소리에, 소리가 안 나면 내가 양이 안 차니까, 더 소리를 더 내려고 크게 막 돌리는 거야. 그러면서 뭔가 요령이 생기더라고. ‘힘을 이렇게 쓰니까 소리가 덜 나고, 아무리 힘을 써도 안 날 수도 있구나’ 배트를 돌리면서 이런 걸 느끼는 거야. 강약 조절이 되는 거지.
3학년이 끝나갈 무렵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고려대와의 경기에서 갑작스럽게 기회가 찾아왔다. 2대 1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선배 대신 대타로 출전하게 된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회였다.
이제 기회가 왔다… 다른 거 없다, 딱 바깥쪽만 봤어. 그때 (투수가) 바깥쪽을 많이 던지더라고. 그래서 여기만 보고 나는 보이면 친다, 그렇게 생각했지. 그때 볼카운트가 원 스트라이크 원 볼이었는데. 변화구를 노려야 되나, 직구를 노려야 되나… 그런데 딱 정확히 오더라고! 그래서 그냥 때렸는데, 때리고는 처음에는 무조건 말렸다는 생각밖에 없었어. 그래서 뛰자, 무조건 뛰었지. 1루 돌아서 2루 갔는데… 뭐가 조용한 거야. 그래서 보니까, 이렇게 심판이 돌리고 있더라고. 그래서 돌아서 들어왔는데. 정신없지. 그러고 나서 물어봤더니… 너무 잘 맞았대. 그게 내 첫 홈런이었어. 그리고 승리를 알리는 첫 신호… 그렇게 뒤집어서 이겼지.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러나 누구나 그 기회를 잡는 것은 아니다. 기회를 잡느냐 잡지 못하느냐 차이를 가르는 기준은 바로 연습이었다. 현재 자신의 상황에 안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연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은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 연습은 반드시 좋은 결과로 보답한다는 믿음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레전드들은 죽도록 연습을 하고 경기에 나갔을 때, 분명히 무언가 달라지고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학습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슬럼프 속에서도 연습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고 결국 기회를 잡음으로써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사실 연습을 하면서도 갈등이 생기지. 과연 될까? 그런데 그 다음에 나가서 해보면, 뭔가가 분명히 달랐으니까. 분명히 내가 스윙을 100개하면 시간이 얼마 걸리고, 스윙을 1000개 하면 얼마 걸리고. 안 해본 사람은 모르지. 하지만 우리는 알아. 손바닥만 대충 봐도 알지.
대학 졸업 후 김종모는 친구들 전부를 데리고 제일은행에 입단했다. 그리고 1년 후인 1982년 프로 야구가 출범하면서 해태에 입단했다. 프로 2년 차가 되던 해, 새로운 감독이 부임했다. 선수들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던 감독은 몇몇 기존 선수들을 트레이드했다. 남아 있던 그 역시 감독의 눈에 차지 않았다. 전년도 타율은 2할9푼1리였다. 3할에 육박하는 성적을 올렸지만 그는 늘 후보였다. 심지어 전지훈련 중에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예상치도 못했고 이유조차 알 수 없었던 지도자와의 갈등은 슬럼프로 이어졌다.
아무래도 기대치가 높으시니 막 대표선수들 그런 사람들만 눈에 들어오고 그랬던 거지. 심지어는 일본 캠프에서 훈련을 받는데, 파울 볼을 주우라고 하더니 “너 그거 하고 가.” 그러더라고. 나는 이유를 전혀 몰라. 그런데 매니저는 그러더라고. “야 가지 마, 그냥 있어. 그냥 하는 소리야.” 그래서 참고 있었지. 그런데 다음 달에 시합에 안 내보내 주는 거야. 연습 게임조차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주변 사람들도 모두 조금만 참고 그냥 있으라고 했다. 그러나 전지훈련 내내 감독은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전지훈련이 끝난 후에도 이러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감독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당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딱 두 가지 뿐이었다. 인내하는 것, 그리고 미친 듯이 연습하는 것.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고통스러워하기보다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집중했다. 그리고 언젠가, 한 번쯤, 반드시,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고 그 ‘단 한 번’을 위해 연습에 매진했다.
시범 경기가 시작되었다. 주전들이 제대로 결과를 내지 못하면서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감독이 갑자기 부르더니 경기에 나가라고 했다.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힘들게 잡은 기회를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타석에 선 그는 좌중간으로 안타를 날리며 감독 앞에서 제대로 실력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OB하고의 경기였어. 나간 애들이 또 죽어라 못 치는 거야. 그때 감독이 딱 부르더니만 하는 말이 “너 자신 있어?” 그래서 자신 있다 했지. 그랬더니 감독이 “너 이번에 못 치면 영원히 후보야!” 으름장을 놓더라고. 그래서 “네” 하고 대답하고 딱! 때려 버렸지! 좌중간으로다가! 그러고 난 다음부터 수비, 그 자리는 계속 내 꺼였어. 그 일이 있은 후로 (내) 야구가 말하자면 날개를 단 거지.
김종모는 내적 동기가 슬럼프를 극복하는 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고 있다. 어린 시절의 그가 가족들의 반대, 야구를 하기에는 너무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야구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탐색이 이루어지는 고교 시절, 그는 겉으로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나 경기력을 키우는 데 만족하지 않고 늘 자신의 내면을 단단하게 다지고자 했다. 그리고 발전 없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꼈을 때, 타성에 젖어 생각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이를 경기력 저하보다 더 큰 문제라고 지각했다. 그는 슬럼프에 빠졌을 때도 주변의 평가에 신경 쓰고 상황을 의식하기보다는 ‘지금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야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자문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다시 한 번 떠올리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조절하기 위한 전략들을 점검했다.
이러한 자기 점검(self-monitoring)[4]을 하면서 그는 슬럼프라는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다그치며 충분히 고민했다. 따라서 그는 슬럼프라고 지각한 그 순간, 고통스러워하기보다 위험을 감수하는 다양한 연습과 훈련을 시도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그는 스스로 성장하는 걸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야, 김종모, 너 대단한 놈이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자긍심은 내재적 조절을 통해 동기화된 행동을 유발한다. 내적으로 동기화된 행동은 심리적 고통에 빠져 허우적대는 대신 슬럼프 극복 전략을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자기 결정적 행동을 이끌어 낸다. 내적으로 동기화된 행동의 보상은 활동 그 자체에서 오는 기쁨과 만족이다. 활동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호기심과 놀라움, 자긍심은 모두 내적으로 동기화된 학습이라고 할 수 있다.[5] 이처럼 김종모는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슬럼프의 해답을 찾아 나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가 경험한 긍정적인 감정들은 슬럼프를 극복해 나가는 데에 충분한 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