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는 슬럼프로 만들어진다
4화

박정태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박정태는 초등학교 때부터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두 평도 안 되는 집에서 살았는데, 그마저도 월세를 제대로 못 내는 바람에 이사를 자주 다녔다. 이사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주소 이전 기록이 너무 많아 주민등록등본을 떼면 서류 한 뭉치가 될 정도였다. 솔직히 말하면,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으로 가득했다고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초등학교 때, 그때부터 어머니하고 둘이서 살아오는 그 환경들이 저는 너무 힘들었어요. 우리 가족들이 좀 많이 있는데, 저만 어머니하고 둘이 살았거든요. 그게 어린 저로서는 견디기 어려웠어요. 삶의 역경이 어렸을 때부터… 집안 형편이 그랬다는 거… 물론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되기도 했겠지만, 어릴 때의 어려웠던 시절들이 저는 제일 힘들었어요.
 
박정태는 동네에서 야구를 하다가 정식으로 선수가 됐다. 그러나 마음 편히 야구에만 전념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와 둘이 살면서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생활이 힘들었다. 어린 시절의 박정태에게 슬럼프는, 지독한 가난이었다. 힘들다고 투정하는 것조차 사치였다. 아들을 위해서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시는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다. 어린 박정태의 눈에 비친 어머니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 마음속에, 온몸에 깊이 새겨져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고통스러웠지만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는 스스로 힘들여 노력해야 운동을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현실에 맞섰다.
 
그때는 성공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단지 ‘야구를 잘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성공하는 건 그 후의 문제이고, 내가 열심히 해서 좀 더 잘해서, 회비를 못 내고 그런 것 때문에 어머님이 고통을 많이 받으시니까… 내가 잘해서 우리 어머니 기쁘게 해드려야겠다, 오로지 그 생각으로 야구했어요. 힘들다는 감정은… 어찌 보면 저한테는 사치였어요. 그때는 제가 뭐 이겨 내야겠다, 힘들다, 그런 건 오히려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현실이니까… 힘들게 해야만 더 잘할 수 있으니까… 노력을 많이 하고 준비를 했던 거죠.
 
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정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미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슬럼프에 빠져 있던 그였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를 더 깊은 늪으로 밀어 넣었다. 야구부 회비조차 내기 어려웠다.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은 점점 말랐고 급기야 빈혈이 왔다. 힘들어하는 것도 사치라고 생각하며 견뎠지만 몸은 버텨 내질 못했다. 가난으로 인한 물질적 결핍은 곧 육체적 고통이었다. 극도의 육체적 고통은 사춘기 중학생에게 사는 것 자체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다른 친구들은 미래를 고민하고 꿈을 키워 나가고 있는데, 박정태는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자문해야 했다. 누구라도 그런 시절을 떠올린다면, 원망 서린 목소리로 한껏 분을 토해 냈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태는 의외로 담담했다.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인터뷰 도중 몇 번의 정적과 짧은 한숨만이 어린 박정태가 느꼈을 고통의 깊이를 짐작케 했다.
 
사실 어릴 때는… 형편도 안 좋아서 그렇기도 했지만, 잘 못 먹어서 빈혈이 굉장히 심했어요. 너무 말랐고… 사춘기 때는 사는 의미가 좀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나의 미래? 나의 꿈? 아니, 그럴 여유가 내게는 없었어요. 내가 왜… 그냥 이렇게 살아야 되나, 이런 생각을 많이 했죠. 참 어려우니까, 휴….
 
사춘기 소년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큰 빈자리였다. 박정태는 중학교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초라했던 때’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잘 해주셨다고 해도,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어디 상의할 곳도 없고 의지할 데도 없었죠. 그래도 어머니가 계셨으니까… 결국은 내가 올바른 길로 가고 했었지만, 사실 중학교 1, 2학년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초라하고… 가장 힘들 때였어요.
 
그러나 박정태는 “아버지가 많이 그리웠을 것 같다”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호한 목소리로 “그렇지 않다”고 했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그는 그리움보다는 원망을 느꼈다. 자신이 슬럼프에 빠진 원인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신의 삶을 힘들게 만든 아버지를 강하게 원망했다.
 
그리움? 그런 거는 전혀 몰랐어요. 왜냐하면 내가 아버지를 불러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그냥 느낌으로만 알았지, 일단 우선적으로 내 삶이… 도대체 뭐냐! 도대체 내 삶이 왜 이렇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연속적으로 닥친 슬럼프에 박정태는 아버지를, 자신의 삶을 원망했지만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방황할 수도 야구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아무 말 없이 늘 그 자리에서 묵묵히 아들을 지켜봐 주시는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다. 당시 박정태의 어머니는 재래시장에서 행상을 하면서, 아들의 학교 체육부실 식당에서도 일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힘들게 아들을 뒷바라지했다. 박정태는 자기가 다니는 학교 식당에서 설거지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중학교 1, 2학년 때는 조금 방황도 했었죠. 그때는 ‘내가 이걸 계속해야 되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죽고 싶어도… 어머니가 계시니까… 어머니가 저를 위해서 정말 묵묵히 살아 주시니까… 열심히… 정말 열심히… 학교에서 어머니를 보고 충격을 받고 그 뒤로는 정말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라는 울타리를 경험하지 못했던 그에게 삶에서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박정태가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늘 곁에서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여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야구를 하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어머니를 도와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밤을 새워 가며 연습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경기에서 지면 어머니가 불행해진다는 생각으로 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건강이 좋지 않아 잠시 야구를 떠나기도 했고 방황도 했지만, 그는 언제나 야구로 돌아왔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가난을 견뎌 내고 성공을 다짐할 수 있었다. 박정태에게 어머니는 삶의 절반 이상, 아니 거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존재가 마음의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부담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오로지 ‘내가 좀 더 열심히 하고 야구를 잘해서 어머니를 챙겨 드려야겠다. 반드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연습에 매진했다. 그에게 어머니는 슬럼프로 인한 고통을 견디도록 도와주는 사회적 지지 대상이자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는 도구였다. 어머니를 통해 어려운 상황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 내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는 강요나 상황 논리 같은 외적 동기를 스스로의 의지로 내재화함으로써 전략적으로 역경 상황에 대처할 수 있었다.

박정태는 슬럼프를 극복하면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야구가 아닌 다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슬럼프를 극복함으로써 심리적으로도 한 걸음 성장했다. 슬럼프에 빠진 사람들이 자칫 놓치기 쉬운 슬럼프의 긍정적 효과를 발견한 것이다. 슬럼프를 통해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인생에서 중요한 자산이 된다. 슬럼프는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산을 가졌다는 것은 어떠한 위기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울타리를 자신의 안팎으로 쌓아 놓고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저 같은 경우는, 이겨 냈으니까 모든 일들을 어렵게 보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생기든 또 어떤 어려운 일이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고통은 더하겠지만, 결국 내가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을 했으니까… 그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힘은 들겠지만 안 된다는 생각은 절대 안 합니다. 제가 어떤 일을 하든, 공부를 했었어도 성공을 했을 것이고, 저는 지금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지만,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아니까. 몸이 좀 고달픈 것밖에 없지, 이겨 낼 수 있다, 그 방법을 안다는 거죠.
 
박정태는 동래고와 경성대를 거쳐 1991년 롯데에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데뷔 첫해 122경기에 출장해 타율 2할8푼5리, 안타 132개, 홈런 14개를 기록했다. ‘2년 차 징크스’도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두 번째 시즌에서도 그는 3할3푼5리의 타율을 기록하며, 149개의 안타, 14개의 홈런을 날렸다. 뿐만 아니라 단일 시즌 최다 2루타 기록(43개)을 세우는 눈부신 활약으로 그해 팀의 우승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러나 데뷔 3년 차였던 1993년 5월 23일, 사직에서 열린 태평양 돌핀스와의 경기에서 2루로 슬라이딩을 하던 중 발목뼈가 산산조각 나는 큰 부상을 당했다. 야구 인생의 두 번째 슬럼프였다. 선수 생활은 고사하고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했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다. 주변에서도 그의 복귀를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진단을 받은 대학 병원 다섯 곳 모두 은퇴하는 것이 좋겠다는 소견을 내놨다.

재활 불가의 부상은 오로지 야구만을 바라보고 한길을 걸어온 선수에게는 사형 선고와도 같다. 그러나 그는 부상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팀이 어려울 때 부상당해서 면목이 없다. 개인적으로 성적도 좋고 감도 좋았는데, 욕심이 앞서서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더 집중하고 신중했어야 하는데 부주의했다.” 선수 생활의 기로에서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자신이 아니라 팀이었고 책임감이었다. 그는 자책하며 고개 숙였다.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웠다고 했다. 시즌 시작 전 겨울에 준비를 정말 많이 했고, 그만큼 초반 성적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스스로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고 느끼고 있었던 상황에서 일어난 치명적 부상이었다. 절망이 밀려오는 순간, 병상에 누운 그는 반드시 재기하겠다며 투지를 불태웠다.

당시 박정태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빨리 야구장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라운드 복귀에 강한 열망을 보인 그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상에서 훈련을 쉬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태의 열망과 노력은 전혀 바라지 않았던 결과로 나타났다. 골수염 진단을 받은 것이다. 수술 후 혈액 순환을 위해 수술 부위인 다리를 항상 위로 올려놓아야 하는데, 빨리 일어나고픈 마음에 다리를 밑으로 내려놓고 앉아서 기구 운동을 했던 탓이다. 처절한 재활을 통해 발목 부상을 극복해 나가고 있던 박정태에게 골수염 진단은 또 하나의 슬럼프로 다가왔다. 그는 다리뼈의 3분의 1을 깎아 내고 그 자리에 골반 뼈를 이식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렇게 또 한 시즌이 날아가 버렸다. 그는 자신의 몸이 다친 것보다,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이 아쉬웠다고 했다. 다치고 안 다치고를 떠나서 동계 훈련에서 다음 시즌을 위해 노력했던 모든 것들이 너무나 아까웠다. 수술 후 의사가 운동은 안 된다고 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야구를 더 이상 하지 못하는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박정태는 다시 재활에 몰두했다. 그는 재활에 대해 “실력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고통이 어느 정도 선에 다다르면 그 선을 넘어서기가 정말 힘들지만 그것만 넘으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부상 후 8개월이 지나서야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2년 2개월 동안 총 6번의 수술을 받았다. 의사도 언론도 예전 상태로는 돌아가기 어려운 부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재활에만 몰두했다. 물론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꼈고, 심리적, 신체적 고통도 경험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그는 무기력해지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바탕으로 고통을 딛고 그 선을 넘어서고자 했다. 예상치 못한 슬럼프에 압도되지 않고 자신감을 갖고 환경을 조절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완전히 몰입시켜 에너지를 쏟는 힘, 이것이 바로 강인성이다.[1]
 
고통도 실력도 그 어느 정도까지, 90퍼센트 올라갔을 때 떨어지면 그건 실력이 느는 게 아니니까, 수술하고 나서 회복하는데, 내 다리도 어느 정도 선에 오니까 아프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뛰어넘기가 굉장히 불안했어요. 왜냐하면 다시 안 좋아지는 게 아닌가, 그런데 마지막에 가다가, 가다가, 또 쉬다가, 그 시점을 넘기가 굉장히 고통스럽더라고요. 하지만 성공 못하면 포기, 둘 중 하나니까,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이를 악문 거죠. 그리했던 게, 그런 제 모습이, 성공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1995년 5월 16일, 박정태는 2년 2개월 만에 그라운드에 복귀했다. 그해 그는 50경기 출장, 3할3푼7리의 타율, 60개의 안타로 수행의 회복을 보여 주며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다. 그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음에도 다시 그라운드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노력 덕분이라고 했다. 노력을 하게 되면 불안하기보다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준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연습을 통해 구체화된다. 그는 자신의 연습량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자신보다 연습을 더 많이 한 선수는 프로 야구 리그에 없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였다. 재활 당시 주변에서는 다들 연습 좀 그만하라고 했지만, 그는 무조건 연습밖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박정태가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노력’이었다. 그는 노력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과정이 탄탄하면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후회는 없으며, 실패하더라도 좌절하기보다는 지금 상황에서 뭘 해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박정태는 노력을 많이 하면 겸손해지지만 노력 없이 성공을 거둔 사람은 오만해진다고 했다. 자신이 비록 레전드라고 불리지만 그는 거기에 대한 자부심은 전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자신을 설명할 때 가장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기울인 노력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레전드라 불리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또한 노력 덕분이었다. 슬럼프 상황에서 고통에 빠져 힘들어하기보다는 빠르게 생각을 전환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력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연습을 통해 실천해 온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슬럼프 극복이 가능했던 것이다.
[1]
Kobasa, S. C., Maddi, S. R., & Kahn, S., 〈Hardiness and health: A prospective study〉,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42, 168-177.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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