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재를 남용해 공급망을 옥죄는 것은 미국에도 문제가 될 것 같은데.
과거 미국은 에너지 안보를 위해서라도 중동 문제에 개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셰일 혁명으로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많은 원유를 생산하고, 천연가스는 너무 많이 나와서 불태우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미국은 나 홀로 있어도 부족하지 않은 국가가 됐다. 여기에 AI와 바이오 등에서 후발 주자와의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제재와 수출 통제는 미국 입장에서 최상의 선택이다. 미국의 수출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5퍼센트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고부가 가치 상품이 대부분이라 제재 대상 국가로 직접 수출되는 경우는 적다. 또한 미국은 세계 최대의 수입국이라 세계 각국의 기업들이 미국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와 권위주의 진영이 충돌하고 있다. 전 세계가 미국과 서방, 중국과 러시아로 쪼개지며 블록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제재와 수출 통제만으로 국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나?
미국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달러’다. 세계 무역에서 달러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40~50퍼센트에 달한다. 나머지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유로화 결제도 미국 금융망을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결국 미국이 가운데서 돈줄을 잡고 있으면 누구도 마음대로 거래할 수 없다. 미국은 자기 피를 흘리지 않고도 상대를 말려 죽이는 전법을 쓸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텐데.
서방이 전방위 압박을 가하자 중국과 러시아는 물물 교환 방식의 무역도 검토하고 있다. 금융 기관을 이용하면서 미국과 서방의 제재를 피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국경에서의 물물 교환을 통한 물자 공급으로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전략이다. 2021년에는 한 중국 기업이 200만 달러 상당의 자동차 전기 부품을 이란에 수출하고 그 대가로 피스타치오를 받기도 했다. 또한 중국 역시 제재를 외교 정책 수단으로 활용한다. 반외국제재법을 제정해 중국을 제재하는 국가에 보복할 수 있다는 점을 법적으로 명확히 했다. 러시아는 금융 거래가 막히니까 달러와 유로 현금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또 법까지 만들어 암호화폐를 장려하고 있다.
책에서 제재 전쟁에 유럽까지 참전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1기부터 본격화한 제재 전쟁에서 유럽은 한 발 떨어져 지켜보는 쪽이었다. 유럽의 최대 수출 시장인 중국과 날을 세워서 좋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 구도를 180도 바꿔 놓았다. 이제 유럽은 미국보다 적극적으로 제재 위반을 단속하고 있고, 러시아에 물품 대부분을 공급하는 중국과도 확실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동안 경제적 이익 뒤에 숨겨져 있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와 권위주의 체제 사이에 갈등이 격화하면서 경제를 넘어선 가치의 싸움으로 확장된 것이다. 유럽 27개국에서 2022년 2월 이후부터 현재까지 제재 관련 수사가 3800건이 이뤄졌다. 이 수치는 언론에 보도된 사건만 집계한 것이라 실제 수사 건수는 훨씬 많을 수 있다.
‘글로벌 제재 전쟁’ 속에서도 한국에서는 아직 제재 관련 논의가 활발하지 않다.
한국이 조용한 것은 제재 위반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 제대로 이슈가 되지 않고 있어서다. 제재 대상과의 거래로 계좌가 동결되거나 물품 대금을 못 받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외교관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제재를 받을 뻔한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동맹’을 고려해 미국이 ‘봐준’ 경우도 많았다. 한국 정부와 여론은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한국이 줄타기를 통해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러한 줄타기를 통한 이익 극대화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아닌 척’, ‘모르는 척’, ‘순진한 척’하는 전략이 언제까지 작동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방금 얘기한 대로 한국은 미국의 동맹이기 때문에 계속 ‘봐줄’ 수도 있지 않나?
미국은 의혹이 있어도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압류와 제재 카드를 꺼내는 전략을 구사한다. 제재 위반 공소 시효를 5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한 이유도 시간을 미국의 편으로 두고 기업과 외국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서다. 한 미국 관료는 나에게 “제재 리스트는 언제나 우리 손에 있다. 이걸 언제 어떻게 쓰느냐는 정치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자국의 글로벌 전략에 따라 동맹국에도 제재라는 채찍을 들 수 있다. 만약 한미 관계가 껄끄러워지는 상황이 생기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한국 기업에 돌아올 수밖에 없다.
한국 기업이 실제로 제재를 받은 사례가 있나?
올해 2월에 미국 상무부가 경남 김해의 대성국제무역을 제재한다고 발표했다. 이 업체는 2023년부터 2024년까지 군사용 무기 제조에 쓰일 수 있는 ‘금속 가공 CNC 밀링 머신’을 조립되지 않은 상태로 5차례에 걸쳐 러시아로 수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업체가 제재당한 것은 한국에 대한 경고로 읽어야 한다. 미국은 제재하기 전에 대성국제무역 측에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본인들의 정보만을 가지고 전격적으로 제재한 것이다.
한국의 줄타기에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 신호로 읽힌다.
국제 정세나 미국과 유럽의 정서가 한국을 계속 봐줄 수는 없게 만들고 있다.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은 지난 10월에 텍사스주에 있는 퍼스트콜 인터내셔널(First Call International)에 44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수출 문서를 허위로 기재하고, 군용 부품을 허가 없이 한국과 말레이시아에 수출한 혐의다. 퍼스트콜은 2019년 7월에 한국 내 헬리콥터 정비 시설에 한국 해군의 헬리콥터 부품인 1603달러짜리 브라켓 1개를 발송했다. 미국은 우방국인 한국에 200만 원짜리 헬리콥터 부품을 하나 보냈다고 자국 기업을 제재한 것이다. 이를 공개적으로 발표한 것도 한국에 수출 통제와 관련한 경고를 보내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미 관계가 틀어지면 언제든 제재의 칼날이 한국을 겨냥할 수 있다.
한국 정부와 기업이 제재 전쟁에 충분히 대비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제재 전쟁》을 집필한 이유다. 미국의 규정은 점점 더 빡빡해지고 보이지 않는 무역 장벽은 높아지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반도체 수출이 잘되느냐 마느냐, 자동차 수출이 역대 최고를 기록하느냐 마느냐 숫자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워싱턴 특파원을 할 때부터 7년간 틈틈이 모은 제재 관련 자료를 정리하니 2000페이지가 넘었다. 미 백악관과 법무부, 재무부 등의 자료와 제재와 컴플라이언스 관련한 전문 매체 정보도 긁어모았다. 책을 쓰기 위해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밥 먹는 시간만 빼고 몇 달을 매달렸다. 이 책에 있는 사례들은 반도체와 중국 부분을 제외하곤 한국에 거의 보도되지 않은 사례들이다.
이 책을 어떤 독자에게 추천하나?
기업인만큼이나 공무원들이 많이 읽어 주면 좋겠다. ‘제재 전쟁’ 시대엔 협상력 있고 뛰어난 공무원들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 전문 지식으로 무장한 엘리트 공무원들이 미국, 중국과 치열하게 밀고 당긴 협상의 ‘한 줄’이 국내 산업을 살리고 죽이는 결정적인 장면이 될 것이다. 공무원들이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국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제재 전쟁 시대에 살아남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글
이연대 에디터
* 2024년 11월 19일에 이메일로 전해 드린 ‘북저널리즘 톡스’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메일함에서 바로 받아 보시려면 뉴스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뉴스레터 구독하기